153-1
“어서들 오시오. 준비는 잘하고 오셨소? 응? 근데, 챔피언들이 안보이시는 구려?
무슨 탈이라도 나셨나? 응? 왜 그렇게 째려보는 것이오?”
왜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다 네놈 짓이잖아?
나는 내가 무기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내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합장을 노려보았다.
틀림없이 저 자식 짓이다. 다만 증거가 없을 뿐이지.
순조롭다고 생각했던 재판에 먹구름이 낀 것은 오전에 당도한 결투 장소에서 시작되었다. 지정된 결투장소는 조합 측 마을 입구.
그곳에는 나름 상당히 넓은 공터에 미리 가설된 무대가 있었고, 그 주위를 둘러싸고 상당한 관객들이 볼 수 있는 관객석도 있었다.
그리고 그 결투장에는 이미 조합 측에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리 측도 사람은 적지 않았다. 결투 재판의 특성 상 그리고 입회인은 많을수록 유리하다.
그래서, 나는 미리 최대한 많은 공동체 여인들에게 같이 참관할 것을 에스텔에게 미리 부탁해 두었다. 사실 설득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속세와 거리를 두고 금남의 구역에서 수도복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온 그녀들.
성녀의 인도하에 겨우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던 그녀들을 데리고 거친 광부들이 대결을 기다리는 그곳으로 부르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의 중요성을 이해했는지, 아니면 에스텔의 설득이 영향력을 미쳤는지, 생각보다 많은 여인들이 내려오는 하산길에 동행하였다.
그래서, 우리 측도 저쪽에 비하면 적은 수지만, 그래도 상당한 인원을 거느린 무리가 되어 결투 재판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측은 성녀님과 에스텔은 물론, 평소에는 두문불출할 공동체 여인들을 포함한 다수가 입회인이자 배심원으로 결투장으로 내려왔다.
그것만으로도, 단순한 토지 점유에 대한 결투재판이 아닌 상당히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모두가 이번 일을 자신들의 생활 공간과 미래가 걸린 중대한 일로 여겼고, 그래서 그 짊을 짊어지고 나선 챔피언들의 무게감은 막중했다.
그래서, 주전으로 나설 안드로니쿠스는 물론,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여 예비해둔 바실과 율리아도 나름 신중하게 몸을 풀고 준비를 하였다.
전부 무기가 없는 도수 격투는 생소한 듯하였지만, 그래도 다들 전쟁터와 뒷세계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경력자들이고, 내가 인정하는 최고의 전사들이다.
방심하지만 않는다면, 트란실바니아 시골에서 초빙한 상대편 대전사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준비에 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도착한 이후였다. 첫 시작은 율리아였다.
내려오면서 묘하게 복통의 증세가 있다는 호소를 한 것이다. 크게 대수롭지는 않게 생각했다. 어떻게 하면 녀석을 먹일까 적절한 멘트를 고민했을 정도니깐.
어차피, 안드로니쿠스만 멀쩡하면 다른 예비들이야 뭐 무슨 상관이랴. 그런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율리아에 이어서 바실, 그리고 조금 지나서 안드로니쿠스도 갑자기 표정이 묘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려오면서도 살짝 복통을 호소하던 우리 측 남정네들이, 갑자기 도착하자마자 격한 생리 활동에 고통받기 시작한 것이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제대로 걸음도 못하고 연신 쏟아내는 광경에 나는 확신할 수 밖에 없었다.
대결에 나갈 우리 측 챔피언들에게 장난질을 친 놈이 있다. 그리고 증거는 없지만, 범인은 너무나 명백했다. 바로 조합장.
이 자식이 제대로 붙으면 이길 자신이 없으니, 미리 선수를 쳐서 우리 측 대전사들을 죄다 저 지경으로 만든 것이다.
제기랄. 대체 무슨 수법을 쓴 거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도 없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변소 근처를 보고 탄식했다.
“응기이이잇!!! 나 죽어어어어어!!!!!!”
율리아의 야릇한 비명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 멀리 조합에서 들은 사람들이 뭔가 싶어서 훅하는 것이 보일 정도로.
그들은 뭔가 가슴이 설레는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환장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오, 이 싸구려 반쪽자리 년아. 좀 신음도 적당히 내지르라고. 어서 절정 오른 것처럼 내지르지 말고 말이야!!!
장담하건데, 지금 나 혼자서도 저 녀석들 네명이랑 동시에 붙어도 충분히 이긴다.
그렇게 생각하니, 살짝 해보고 싶네. 특히, 율리아. 평소에 쌓인 것들 담아서 배를 살포시 눌러주며 비명지르는 거 봐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으나 그만두었다.
지금 당장 내게 처한 상황이 더 끔찍했으니깐. 이를 대체 어쩌면 좋아? 그들을 간호하던 에스텔이 나에게 와서 말했다.
“도저히 무리에요. 결투에 나갈 상태들이 아니세요.”
“미치겠네요. 그럼 어쩌죠? 규정 상 누구든 결투에 내보내지 않고 기권하면 우리가 져요.”
그런데 그때였다. 저 너머 조합 측에서 환호성이 울려퍼졌다.
“우리의 챔피언이 나타났다!!! 호컴! 호컴! 호컴!!!”
“젠장할, 믿고 있다고 호컴! 트란실바니아에서 비할 사람이 없는 격투사의 자질을 제대로 보여주라고.”
“저 망할 산속의 계집들에게 본때를 보여줘!!! 너 밖에 없다!!!”
광산조합에서 부른 대전사가 결투장 위에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안드로니쿠스나 울프스턴에게 체격으로 뒤지지 않는 근육질의 거한이었다.
그는 자신의 근육을 뽐내며 한순간에 다 날려버리겠다는 듯 포효했다.
그리고 우리 측은··· 엉덩이로 격렬하게 포효하고 있었다. 마치 합창이라도 하듯이. 아, 씨 쪽팔려. 그리고 환장하겠네.
망했다. 완전히 망했다. 나는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저쪽 대전사의 등장에 바실이 그나마 엉거주춤 자기라도 나가려다가, 다시 엉덩이를 쥐고 달려가는 것을 보며 나는 체념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인정하자. 이건 완전히 당한 거야. 어찌되었건 경계를 소홀히 한 우리의 과실이다. 나는 에스텔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제 틀린 것 같아요.”
“네? 하지만··· 그래도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어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습니까? 보세요. 우리의 챔피언이 될 사람 중에 성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나의 절망어린 말에 에스텔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주님이 주관하실 재판에 불참을 할 수는 없어요. 챔피언이 못간다면, 관례대로 소송당사자가 나서는 수 밖에요.”
“소송당사자가 나서··· 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에스텔양이 나가시겠다는 거 에요? 지금 제 정신이세요?
저기 저 근육질 거인을 보세요. 저 자식이 곱게 대화로 상대할 녀석으로 보이세요?
설령 싸울 의사가 없으시다고 해도, 저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신에게 달려들어 끔찍한 짓을 저지를 거에요.”
“그렇다고, 나이가 많으신 성녀님이 나서실 수도 없잖아요? 제가 공동체를 대표해서 나가겠습니다.
설령, 그로 인해 끔찍한 일을 겪더라도 그 또한 주님이 내리신 시련이겠죠.”
뭐, 뭐라고?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야? 나는 경악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나의 절실함과는 무관하게 저 너머에서 상대편 진영에서 대전사를 부르는 외침이 있었다.
“조합 측의 챔피언은 이제 준비를 마쳤소! 공동체 측의 챔피언도 명예로운 결투장에 입장하시오.”
그리고, 그 소리를 듣자 에스텔은 발걸음을 계단으로 옮겼다. 그것을 본 나는 기겁하며 그녀의 팔을 붙들면서 말했다.
“뭐, 뭐라고요? 안돼요. 자, 잠시만요!!!”
하지만, 에스텔은 미소지으면서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마치 천사의 미소를 드리우며. 그녀가 말했다. 마치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부디 주님의 가호와 기적이 함께하시길···”
나는 경악하며 에스텔을 붙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뒤로 하고 입회자들을 지나쳐서 결투장의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등장을 본 조합의 사람들은 순간 할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다.
무리도 아니겠지. 저 무식한 대전사를 상대로 나선 사람이, 첫인상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성녀로 밖에 안보이는 가련한 처녀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녀를 본 조합 측의 챔피언도 비웃듯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잠시만, 지금 결투에 임할 챔피언은 어디가고 당신 같은 처자가 올라오는 거야? 저쪽은 기권인가?”
“그럴리가요? 주님의 판결에 임하신 재판장에 기권이란 없습니다. 제가 이번 재판의 대전사로서 이곳에 임했습니다.”
그녀의 말에 조합의 대전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봐,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이 생겨서 소송당사자인 당신이 결투장에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만 포기하고 내려가라고.
결투가 시작되면 나도 더 이상 봐줄 수가 없어.”
“아뇨. 주님이 판단하시는 신성한 법정에서 판결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제 의지로 임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결투장 중간에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조합의 대전사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조합장을 바라보았고, 조합장은 대충 손봐주고 끝내라는 식으로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나는 절망했다. 당장이라도 저 거한의 손에 그녀가 피를 쏟으며 땅바닥에 나뒹구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시합은 곧 시작하려고 하였고, 그때 내 곁으로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흐음? 에스텔이 나간건가? 저 아이가 결국···”
아가사 성녀였다. 나는 다급히 그녀를 붙잡고 말했다.
“성녀님. 지금이라도 멈춰야 합니다. 이대로 뒀다가는 큰일이 날 겁니다. 공동체는 어떻게든 저희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 테니, 지금은 일단 승복을···”
“공녀. 진정해요. 그리고 여기서 당신에게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주께서 이르시길,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면 네 왼뺨도 내어주거라, 라고 이르셨습니다. 그대에게 묻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라 생각하십니까?
아니, 좀더 단순하게 물어보죠. 왜 왼뺨을 내밀어야 할까요?”
“아니, 지금 그런 얘기를 하실 상황이 아니잖습니까? 지금이도 늦지 않았으니, 결투 개시의 종이 울리기 전에 멈춰야···”
그러나, 그 순간 안타깝게도 종이 울렸다. 맙소사. 늦었다. 그리고 그때 귓가에 스치는 성녀의 말이 들렸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그리고, 동시에 여라가지 일이 한꺼번에 벌어졌다.
호컴의 주먹이 기도하는 에스텔의 머리 위로 내려쳐졌다.
그리고 에스텔이 기도하던 손을 멈추고 팔을 벌렸다.
동시에 두르고 있던 웃옷이 날개가 펴지듯 양쪽으로 갈라져 흩어졌다.
순간 에스텔의 모습이 사라졌다.
뭐, 뭐야? 그렇게 내가 경악하는 순간, 성녀가 말했다. 듣고도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말을.
“그래야 왼뺨으로 오는 노크펀치 흘려내고, 오른뺨 갈긴 새끼 노가드에 카운터 날릴 수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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