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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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부정
작품등록일 :
2013.10.10 18:50
최근연재일 :
2013.10.24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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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14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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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7화

DUMMY

수영은 핸드폰을 책상 위에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요즘 이상하게 순정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카톡에 표시된 숫자를 보니 확인조차 안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요 전부터 좀 이상하긴 했다. 힘없는 목소리. 무언가 고민이 있는 듯 멍하니 창밖만을 보고 있었다.


‘진짜 무슨 일이 있나?’


자신에게 힘든 일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늘 다른 사람을 챙기는 순정이었다. 이유 없이 연락이 되지 않을 리가 없다. 걱정이 된 그녀는 순정의 집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소주라도 몇 병 사가야겠어.’


근처의 마트에 들러 안주가 될 것 몇 가지와 소주를 세 병 샀다. 둘 다 술을 잘 못하기에 다 먹겠냐 싶었지만 일단 지르고 본 것이다.

봉투를 손에 달랑달랑 들고서는 순정이 살고 있는 옥탑으로 향했다. 단독주택에 위치한 그의 옥탑. 집을 찾아가는 것은 오랜만이라 그런지 묘하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뭐지? 내가 긴장 되서 이러나?’


낯선 두근거림에 어색한 마음이 든 수영은 애써 두 다리에 힘을 줘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씨. 계단. 진짜 운동 좀 해야지. 죽겠네.’


고작 3층을 올라가는데도 힘이 드는 것을 보면 운동이 필요하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동사무소까지 생각보다 가까운데 자전거로 출근할까. 비오는 날만 차를 타고.’


빠른 시일 내에 저렴한 국산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순정의 옥탑방 문을 두드렸다.


“순정아!”


그러나 대답이 없는 순정.


‘집에 없나?’


수정은 조심스럽게 창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불투명한 유리를 뚫고 나오는 아련한 불빛이 느껴진다. 방범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어 창문을 살짝 열어봤다. 섀시 틈으로 보이는 불빛을 보면 안에 순정이 있음이 분명했다.

다시 문 앞으로 돌아온 수영이 문을 세게 두드렸다.


“나야. 문 좀 열어봐!”


한참을 두드리자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보인다. 덜그럭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곳엔 부스스한 모습의 순정이 있었다. 수영을 본 순정의 눈엔 살짝 당황의 빛이 어렸다.


“웬일이야? 집까지.”

“네 놈이 전화를 하도 안 받으니까 이렇게 몸소 강림하셨지!”


순정의 대답도 듣지 않고 수영은 거침없이 집안으로 들어갔다. 순정도 별 말 없이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수영은 슬쩍 집안을 둘러봤다. 원룸 형식의 집. 작은 침대 하나. 장롱 역할을 할 조립식 행거가 하나. 책상위에 놓인 컴퓨터와 높이 쌓여있는 책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지 않은 냉장고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야. 저건 냉장고냐 탱크냐. 뭔 전쟁하는 소리가 들려.”

“오래되어서 그래.”

“저런데 밤에 잠은 와?”

“이제 익숙해져서.”


수영이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자 순정이 다가와 곁에 앉았다. 그제야 수영의 눈에 순정의 모습이 자세히 들어왔다.


‘진짜 무슨 일이 있었구나.’


가뜩이나 하얀 얼굴이 파랄 정도로 질려있었다. 작은 얼굴도 무척이나 야위어 있었다. 머리는 언제 잘랐는지 까만 머리카락이 더욱 까만 눈을 뒤덮고 있었다.

수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봉투를 들고 흔들어 보였다.


“소주나 한 잔 하자고. 예전처럼.”


수영의 말에 순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러자.”


냉장을 위해 나머지 소주병을 냉장고에 넣고 한 병의 마개를 땄다. 소주잔이 없었기에 머그컵에 소주를 대충 따라 부었다. 컵라면 두 개에 물을 붓고 나머지 안주들을 대충 펼쳐놓았다.


“진수성찬이네. 학교 다닐 땐 컵라면에 새우깡 하나로 연명했는데.”

“그러게. 족발이 우리에겐 고급 식품이었지.”

“맞아. 그래도 마음은 풍족했는데. 지금보단.”

“그래도 그 때는 소주잔은 있었던 것 같은데. 나이 먹고 글라스라니. 좀 빡세다.”

“원래 이 맛에 방안에서 소주 까는 거야. 먹고 죽는 거지.”


수영의 말에 순정이 웃었다.


“술도 잘 못 마시는 애가 허세는.”


무릎을 끌어안고 컵라면 용기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순정은 마치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수영은 말 대신 술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한 잔 하자.”

“빈속에?”

“원래 소주는 빈속을 소독시키고 시작하는 거야.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순정이 웃으며 컵을 들어 내민다.


“야. 네 말만 들으면 소주 한 다섯 병 까는 줄 알겠다.”

“크큭. 다섯 잔은 깐다.”

“많이도 깐다.”


수영의 농에 생기 없던 순정의 얼굴에 붉은 기가 살짝 돈다. 얼굴에 웃음도 살짝 살아난다.

잔에 든 술을 몇 모금 넘긴 수영이 인상을 쓰며 순정에게 말했다.


“나밖에 없지?”


수영의 물음에 순정이 힘없는, 하지만 고마움이 담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너 밖에 없네.”


말없이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컵라면은 모두 비워졌고, 과자도 반이 없어졌다. 반병이 조금 넘는 주량이 고작인 둘이 벌써 세 번째 소주병의 뚜껑을 땄다.

취기를 이기지 못한 수영은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고, 순정도 침대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 것 같아?”


되묻는 순정의 눈동자가 이상하게 촉촉해 보인다. 커다란 눈의 눈꼬리가 아래로 쳐져 있었다. 그 끝에 보일 듯 말 듯 맺힌 이슬이 수영의 마음을 흔들었다.

심지가 강한 아이. 솔직하지만 힘든 내색은 하지 않는 그런 순정이 저렇게 까지 약해보이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없을 터였다.


“너 혹시 헤어졌어?”

“응. 그렇게 되었어.”


순정의 말에 수영은 당황했다. 자신은 겪어보지 못한 이별의 상처. 어떻게 위로해야할지 몰랐다.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도.


“괜찮아?”

“괜찮긴…….”

“너 그 사람 많이 사랑했잖아.”

“지금도 그래.”

“왜 헤어지자고 하는 거래?”

“몰라.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그게 아니라면 쉽게 그런 말 할 사람 아니니까.”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순정의 말에 수영은 그런 그가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물어나 보지.”

“의미 없는 물음일 테니까.”

“그래도 잡아볼 생각 못 했어?”


수영의 물음에 순정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리곤 힘없이 늘어진 팔을 들어 주변을 가리킨다.


“둘러봐. 서른이 다 되도록 갖고 있는 건 코딱지만 한 월세 옥탑에 통장에 든 푼돈 몇 푼. 그리 팔리지 않은 소설 몇 질뿐인 것이 나야. 더 어렸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 난 그녀를 잡을 수 없어. 오히려 그녀의 인생에 짐이 될 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잘 만나왔는데 무슨 짐이라고 그래.”

“아니. 이제야 안 거지. 내가 짐이었다는 걸. 돌아보니 내가 준 것 보다 받은 것이 더 많더라고. 수연이도 챙겨야 할 가족이 있어. 난 그녀를 감싸주고 지켜줄 사람이 아니라 챙겨야 할 또 다른 사람이었을 거야.”

“그렇지 않아.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것이 사랑이잖아.”

“그 말도 맞지. 맞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는 듯 순정의 고개가 점점 떨어진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돈다.


“4년이야. 우리가 만난 것이. 그녀가 한창 때 나를 만나서 벌써 스물하고도 아홉이 되었어. 가장 예쁠 시간. 그 젊음을 나랑 보낸 거야. 나는 그녀의 세월을 훔친 사람이야. 나란 사람을 만나서 그걸 그녀는 잃어버린 거야. 나란 사람을 잘못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말을 끝으로 순정은 바닥에 쓰러졌다. 수영은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취기가 돌아 무거워진 몸을 끌어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잠이 들었는지 순정은 고른 숨을 쉬고 있었다. 마음이 괴로웠기 때문일까? 인상을 살짝 쓰고 있어 미간이 찌푸려져 있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수영은 손을 뻗어 그의 눈썹을 손가락으로 쓸어주었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도 침대에 눕혀야겠지?’


수영이 순정을 일으켜 세웠다. 술기운 때문인지, 잠기운 때문인지 순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지만 수영이 계속 재촉을 하자 웅얼거리며 기듯이 침대위로 올라갔다.

대충 그를 구석으로 몰아넣은 수영도 술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옆에 눕게 되었다. 빙글거리며 도는 머리 때문에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수영의 눈에 눈을 꼭 감고 자고 있는 순정의 얼굴이 들어온다. 살짝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남자답지 않게 고운 피부가 손끝에 느껴진다. 붉은 입술이 묘하게 눈에 들어온다.


“으음.”


순정은 잠결에 옆에 누운 수영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익숙하게 팔을 뻗어 수영의 머리를 받쳐준다. 팔베개를 한 것이다.

졸지에 순정의 품에 얼굴을 묻게 된 수영은 놀라 벗어나려고 했지만 순정이 강하게 잡고 있어 몸을 뺄 수 없었다.

순정의 체취가 느껴졌다. 알코올 향기가 섞여있었지만 이상하게 나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뭐, 뭐야.’


수영의 얼굴이 새빨개지기 시작했다. 순정의 팔을 벤 채 품에 안겨있다는 자각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전신으로 퍼진다. 그래서 그런지 술이 확 깨는 느낌이다. 물론 학창 시절 그의 옆에서 잠이 든 적은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그 땐 우정 이상의 관계는 아니었기에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렇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창피하고, 부끄럽고, 설렜다.


‘내가 왜?’


고개를 들어 살짝 올려다보니 순정의 입술이 다시 눈에 들어온다. 붉은 입술.


‘한 번 맞춰볼까?’


조심스럽게 순정의 입술에 입술을 가져가던 수영이 화들짝 놀랐다.


‘내가 미쳤지.’


수영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키는 것 같았다. 한참 생각을 정리하던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맙소사. 이게 사랑이라는 거구나!’


그렇다. 수영은 순정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아니 그 전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단지 갑작스레 그녀가 깨달았을 뿐이다.


‘아니야. 아닐 거야. 얘랑 나랑은 9년이나 된 친구라고. 그리고 얘는 가슴에 너무나 큰 사람이 자리 잡고 있어. 내가 만약 얘를 좋아하게 되면 친구라는 관계가 파탄 날 거야. 더구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있는 남자 좋아해봐야 나만 마음고생이지.’


수영은 애써 마음을 부정해본다. 하지만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린다. 순정의 입술에 눈길이 간다. 자신을 안고 있는 그의 품이 따뜻하고 좋다. 벗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계속 도리질 쳐 보지만 그에 대한 변한 자신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는다.


‘이제 어떡하지?’


고민을 거듭하는 수영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아침 해가 뜰 때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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