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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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부정
작품등록일 :
2013.10.10 18:50
최근연재일 :
2013.10.24 15:13
연재수 :
2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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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23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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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DUMMY

수연은 지친 표정으로 음식을 하고 있었다. 주말에 수정에게 먹일 음식을 미리 해두는 것이었다. 지난 밤 정신적인 피로가 컸기에 꼼짝도 하기 싫었지만 그래도 언니이기에 해야 할 일은 해야 했다.

천근같은 칼을 들고 칼질을 하는 수연은 자꾸만 나는 식은땀에 계속 자신의 이마를 손등으로 닦아야만 했다. 땀에 엉긴 머리칼은 이제 잘 떼어지지도 않았다.


“하아…….”


수연은 한숨을 쉬었다. 답답했기 때문이다. 잠시 몸을 펴 여유를 갖는다. 눈에 주방이 들어온다. 깔끔한 현대식 주방이다. 기름때가지지 않아 누렇기만 했던 옛 집이 아닌 것이다. 이제는 번듯하고 깨끗한 곳에서 살게 되었지만 수연은 그저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그녀에게 올해 여름은 너무나 큰 변화가 있었다. 좋게 바뀐 것은 이 집 하나. 나머지는 그녀에게 슬픔만을 가져다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이 집에도 정이 안 갔다. 차라리 모든 것을 과거로 돌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무뚝뚝하지만 자신을 많이 생각하는 동생. 가족밖에 모르는 답답하지만 다정한 어머니.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주는 그 사람. 소중하게 생각했던 그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곁에 없었다. 너무 어른이 되어버린 상처 많은 동생. 암에 걸린 어머니. 이제는 자신의 곁에 없는 그 사람. 수연은 지친 마음에 모든 것을 버리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랬기에 더 힘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익숙한 발소리. 수정이다.


“이제 들어왔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수정에게 수연은 인사를 건넸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 수연은 고개를 돌려 수정을 바라봤다. 잔뜩 풀이 죽어 굳은 얼굴로 힘없이 집으로 들어오는 수정의 모습이 보인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며 수연은 또 마음이 상한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밥은 먹었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댄 수정이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아니.”

“조금만 기다려. 차려줄게.”

“차리지 마. 별로 생각 없어.”


메고 있던 앞치마를 벗은 수연이 수정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앞에 마주 앉아 두 손을 따뜻이 잡아주었다.


“많이 힘드니?”


하지만 수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수연은 그런 수정이 밉지 않았다. 이해할 수 있다. 그녀도 결국 상처받은 사람일 뿐이라 생각했다.

생기가 없는 듯 빛이 다 죽어버린 수정의 눈을 안쓰럽게 바라보며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연락……. 했어?”

“어.”

“뭐래? 그 사람.”

“아무 말 없었어.”

“그렇구나…….”


더 이상 대꾸하려 하지 않는 수정을 두고 수연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더 말을 걸어봤자 서로 감정만 소모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서는 수연의 뒤로 수정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나 지금 아저씨 친구라는 사람 만나고 왔어.”


수정의 말에 수연은 화들짝 놀랐다.


“뭐라고?”

“이름이 수영이라고 했나?”


수영의 이름을 듣자마자 수연이 무섭게 수정의 앞으로 달려든다.


“지금 수영이라고 했어? 그 마르고 키 큰 사람? 맞아?”


갑자기 변한 수연의 기세에 수정은 살짝 겁을 먹었다.


“응.”

“뭐래? 뭐라고 하디?”

“이제 아저씨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고. 언니나 나나.”

“순정이는? 순정이도 안 대? 너랑 나랑 친자매인거?”

“몰라. 그건 못 물어봤어.”


수연은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미용에 관심이 생기고 나서 어렵게 고쳤던 버릇이 나온 것이다. 극도의 불안이 그녀가 평정심을 잃도록 했다.


‘어떻게 하지? 다 알게 되면 안 되는데. 더 이상 상처 주면 안 되는데.’


방 안을 서성이며 불안에 떨던 그녀가 결국 자제력을 잃고 자신의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언니! 어디 가게!”

“순정이에게.”


다급히 신발을 신는 수연을 수정이 붙잡고 말렸다.


“거기 가서 뭐 하려고! 지금 가 봤자 될 일도 안 돼.”

“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


수연이 수정을 무섭게 뿌리쳤다. 나동그라지는 수정을 돌아보지도 않고 수연은 그렇게 집을 뛰쳐나갔다.



----------



“아저씨 빨리 가주세요.”


수연은 거듭 택시기사를 재촉했다. 기사는 그녀의 재촉에 부응하듯 미끄러지듯 달렸다.

순정의 집 근처에 도착한 수연은 던지듯 돈을 내고 그가 살고 있는 건물로 뛰었다. 수연 자신도 왜 미친 사람처럼 이렇게 뛰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순정의 옥탑으로 날 듯 뛰어 올라간 수연.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관을 응시했다. 문틈으로 흰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면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한 발 내딛으며 현관으로 다가가려던 수연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막상 저 문을 열려고 생각하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두려왔다. 그가 자신에게 할 말들이.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의 눈빛이.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끼릭.


거친 마찰음과 함께 손잡이가 돌아간다. 잠그지 않았는지 문이 열린다.


“뭘 그렇게 도둑놈처럼 들어와?”


문을 열던 수연의 몸이 다시 굳었다. 그녀를 맞이한 것이 순정이 아닌 수영이었기 때문이다. 수연은 순정의 방을 차지하고 앉아있는 수영의 존재가 기분이 나쁘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지금 심정으로 순정을 바로 보기엔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방에 앉아있던 수영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기에 농담 던지듯 한 말이었는데 순정이 아닌 수연이 갑자기 들어왔기 때문이다.

멍하니 수연을 바라보던 수영이 표정을 굳히고 수연에게 톡 쏘듯 말했다.


“여긴 왜 왔어요?”


수연은 대답할 수 없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말을 정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잠깐 나가죠. 곧 순정이 돌아올 때 되었으니까.”


수영의 말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는 그렇고 저기 공원 벤치로 가죠.”


앞장 선 수영의 뒤를 수연이 따라갔다. 수영이 데리고 간 공원은 수연도 잘 아는 곳이었다. 수돗가처럼 생긴 약수터가 있는 곳. 가운데엔 공터가 있어서 가끔 순정과 배드민턴을 치곤했다.

자리에 앉은 수영이 수연에게 말했다.


“왜 오셨어요? 이제 오시면 안 되지 않아요? 그 쪽 동생한테도 말했는데요. 이제 다시 순정이 근처에 나타나지 말라고.”

“들었어요. 오늘 만났다고.”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니에요? 왜 또 다시 나타나신 거예요. 그 쪽이 그럴수록 순정이만 힘든 거 몰라요? 어차피 다시 순정이한테 돌아올 것도 아니잖아요.”


수연은 고개를 숙이고 대답하지 못했다. 수영의 말 대로였으니까. 스스로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던 결국 순정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로 수연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걱정되었어요. 순정이가 다 알게 되었을까봐.”

“뭐. 둘이 자매인 거요?”

“네……. 몰랐어요. 동생이 순정이를 만나고 있을 줄.”


수연의 말에 수영이 빈정거리듯 대답했다.


“그러게요. 정말 상상도 못했네요.”

“동생을 말린 것도 저예요. 순정이에게 더 상처를 줄 순 없었으니까요. 지금이라도 멈추는 것이 맞다 생각했어요.”


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잘 하셨어요.”


수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순정이에게 말 했나요?”

“제가 그랬을 것 같아요?”


가만히 수영을 바라보던 수연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와서 보니 수영씨가 순정이에게 다 말했을 리가 없었어요. 순정이가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요.”

“맞아요. 말 안 했어요. 이제 됐죠? 그러니까 돌아가세요.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세요. 그게 최소한의 예의에요. 당신이 할 수 있는.”


차갑게 말한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자리를 떠나며 던지듯 말한다.


“앞으로는 걱정도 하지 마세요.”


완고하게 나오는 수영의 태도에 수연은 기분이 상했다. 그랬기에 가시 돛인 말투로 수영에게 물었다.


“왜요?”

“이제부터는 제가 순정이 곁에서 있을 거니까요. 걱정하고, 돌보는 것은 제 몫이에요.”

“수영씨가 무슨 자격으로요?”

“이제는 제가 사랑할 거예요. 내가 순정이를 사랑할 거라고요. 그러니 다시는 이런 식으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이젠 내 사람이에요.”


수영의 선언에 수연의 얼굴이 굳었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애써 부정하고 있었던. 이제는 그녀의 입에서 선포된 말. 하지만 수연은 대꾸할 수 없다. 그저 눈물을 흘릴 뿐이다. 수연은 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았다. 공원의 나무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덮어준다. 수연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어둠이 자신의 슬픔을 가려주었으니까.

수연을 두고 걸어가는 수영의 발걸음이 당당하다. 노란 가로등이 그녀의 얼굴을 비춘다. 그녀의 눈엔 가로등보다 밝은 빛이 자리 잡고 있다.

수영은 오늘 결심했다. 한 발 더 앞으로 내딛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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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Lv.61 강훈(姜勳)
    작성일
    13.10.23 14:08
    No. 1

    그래, 한 걸음 더 나가는 것이 중요하단다, 수영아. 사랑뿐만 아니라 인생의 매 순간을 그렇게...
    잘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0 부정
    작성일
    13.10.23 14:14
    No. 2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이설理雪
    작성일
    13.10.23 19:56
    No. 3

    자격이라...수연아, 네가 자격을 논할 수준은 아닌 거 같다. 그말은 수영에게 나와야 할 말이지 싶은데. 수영에겐 자격이 충분하지 여태 순정에게 친구로서 붙어있었으니까.

    아오~ 쓰면서 이름 참 헷갈려요!!!! 그리고 1타 빼앗겼지만 기분 좋아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0 부정
    작성일
    13.10.23 21:42
    No. 4

    이게 로맨스 소설이지만 괄호치고 팬픽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이미지를 따다보니 우연치 않게 이름이 다 비슷해졌어요. 별 생각 없이 썼었는데 나중엔 저도 이름이 헷갈리더라고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4 엘드캐논
    작성일
    13.11.03 23:13
    No. 5

    사견으로는, 저 대목에선 "제가 사랑할 거예요" 보다는 "내가 사랑 할거예요" 라고 좀더 강하게 어필하는 게 더 분위기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0 부정
    작성일
    13.11.04 22:54
    No. 6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저도 내가가 더 마음에 드네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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