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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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부정
작품등록일 :
2013.10.10 18:50
최근연재일 :
2013.10.24 15:13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12,680
추천수 :
260
글자수 :
99,381

작성
13.10.24 00:56
조회
293
추천
10
글자
8쪽

22화

DUMMY

“아이고, 죽겠다.”


숙소로 돌아온 수영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드러누웠다. 간만에 산에 올라서 그런지 퍼져버린 것이다.


“야. 누가 보면 걸어서 올라갔다 내려온 줄 알겠다.”


순정의 말에 수영이 대꾸도 하기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젓는다.


“나 네 옥탑 올라가는 것도 죽겠는 사람이거든?”

“자랑이다.”


가방을 내려놓은 순정이 수영을 일으켰다.


“눕더라도 씻고 누워.”

“왜. 씻은 거 보고 싶냐?”


장난기 가득한 수영의 말에 순정이 그녀의 머리에 살짝 꿀밤을 먹였다.


“이그. 이 사람이 못 하는 말이 없어.”

“뭐! 보고 싶을 수도 있지!”

“흰소리 하지 말고 씻고나 나오세요.”


순정의 말에도 수영은 그저 드러누울 뿐이다.


“너나 먼저 씻어. 난 조금 누워있어야겠다.”


옷가지를 챙겨 씻으러 들어가는 순정을 수영은 누운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기운이 좀 났을까? 마음에 여유는 생겼을까? 네가 편해지고, 여유가 생겨야 그 틈으로 내가 들어갈 수 있을 텐데.’


화장실 문을 바라보는 수영의 눈엔 안타까움이란 감정이 가득했다. 산에서 보여준 순정의 모습이 떠올라서였다.

그는 웃고 있었지만 슬퍼보였고, 홀가분해하면서도 답답해했다. 무언가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을 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은근히 그의 손을 잡고 다녔지만 그는 그것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아한 것이 아니라 신경을 쓸 여력이 없어보였다. 그 모습에 수영은 속이 상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서도 누군가를 떠올리고 마음 상해하는 순정이 야속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수영은 자신의 역할은 바로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들어가서 씻어.”


상념에 빠진 수영은 순정이 욕실에서 나오는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 어.”


터덜거리며 욕실에 들어가는 수영을 순정이 물끄러미 바라봤다.


‘많이 힘들었나보네.’


하산하는 길에 비선대 쪽에 잠시 들러 비빔밥과 전을 잔뜩 먹고 와서 그런지 배는 고프지 않았다. 입가심으로 먹은 막걸리에 취기가 살짝 있었지만 순정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술을 좋아하지 않아 따로 술을 찾는 그는 아니었지만 울적한 마음이 술을 부르는 것이었다.

결국 오는 길에 혹시 몰라 사갖고 온 맥주를 꺼내고, 마른 오징어를 구웠다. 과자도 큰 거 한 봉지 열었다.

술자리를 세팅하고 있으니 수영이 젖은 머리카락으로 나온다.


“이순정 요즘 술 엄청 마시네.”

“그러게.”


쓸쓸하게 웃는 순정의 옆에 수영이 와서 앉는다.


“몸은 좀 괜찮아? 많이 피곤해보이던데.”

“뭐 그렇지. 그래도 이 맛에 놀러오는 거지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수영은 발이 불편한지 발을 꼼지락거리며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래 걸어서 발바닥 쪽에 무리가 조금 간 것이었다.

그 행동을 가만히 보던 순정이 수영의 발에 손을 뻗었다.


“발 줘봐.”

“왜?”

“글쎄. 발 줘봐.”


순정이 수영의 발을 손으로 잡자 수영의 얼굴이 빨개졌다.


“하지 마. 부끄럽단 말이야.”


진심으로 부끄러워하는 수영의 의외의 모습에 순정은 낯선 설렘 같은 것을 느꼈다. 무언가 여성스럽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뭐 어때. 이리 내놔봐.”


애써 발을 주지 않으려는 수영의 다리를 순정이 힘으로 잡아 올렸다. 수영은 그의 행동에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씨. 발 안 예쁜데.’


키가 큰 수영은 자연히 발도 컸다. 그래서 평소 스스로의 발이 예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종의 콤플렉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순정이 발을 만지니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었다.

수영의 발을 두 손으로 꼭꼭 주무르던 순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이렇게 신경써줘서. 다 알아. 네가 왜 여기까지 날 끌고 온 것인지. 거기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래서 고마워.”

“알았으면 잘 해.”

“그래. 너 뿐이네.”


엷게 웃는 순정을 보며 수영은 입술을 살짝 깨문다. 그가 하는 말이 ‘여자’ 최수영이 아닌, ‘친구’ 최수영에게 하는 말이란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확실히 가을이라 그런지 해가 많이 짧아진 것이다. 산 근처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자기 전에 한 잔 하자.”


순정은 콘도에 있는 컵을 꺼내 맥주를 따랐다. 수영은 순정이 건네는 잔을 받고선 가만히 하얀 거품을 바라본다.

아무런 말없이 잔을 주고받던 순정이 무겁게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저께였을 거야. 컴퓨터 앞에서 글을 쓰다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 뭐 요즘 그게 내 습관이 되었긴 하지만.”


자조적으로 웃는 순정의 입매가 슬퍼 보인다.


“그렇게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아, 나도 이제 어른이구나.”


순정의 말에 수영이 별 소리를 다 한다는 듯 순정을 나무랐다.


“야. 그런 네가 애냐? 어른 된지 벌써 몇 년은 되었거든요?”

“나이나 법 같은 거 말고.”


고개를 젓는 순정의 어깨가 무척이나 무거워 보인다.


“내가 벌써 스물하고도 아홉이더라. 결혼이라는 단어가 꿈꾸던 장면이 아닌 해야 할 현실이 되어버렸더라고. 이번에 헤어지면서 느낀 건데 결혼은 그저 좋아하는 마음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더라고. 다른 것도 필요하더란 말이지. 특히 돈 같은 거…….”


취기가 오르는 지 순정은 슬쩍 몸을 식탁에 기댔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냐. 당연한 거지. 경제력도 그 사람을 나타내는 지표중 하나니까. 그래도 뭐랄까……. 좀 더 내 본질만을 사랑해줄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서글프다고 할까? 그래서 그렇게 말 한 거야. 그런 걸 깨달았으니 이제 어른이 된 거라고.”


순정은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뜨면 보이는 현실에 숨이 막힐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애써 눈을 꼭 감으며 잊으려 해본다. 하니 피하려 한다. 하지만 잊을 수 없다. 피할 수도 없다. 그의 마음속에 단단히 박혔으므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된 나이. 누군가는 세상의 때가 묻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철이 들었다고 말하는 시점. 꿈은 저 높이 고개를 들어야만 볼 수 있는 곳에 있지만 두 발을 받치고 있는 것은 현실이란 것을 깨닫게 된 순간. 바로 그것이 바로 어른.

그 상태로 잠이 든 순정을 수영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모습으로 식탁위에 널브러진 그를 보며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밟지 않은 눈밭 같던 그의 순수에 발자국이 찍힌 것 같아서였다.

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순정을 일으켜 세웠다. 다행히 정신이 조금은 남아있는지 수영의 부축에 순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향했다. 그리곤 구석에 쓰러지듯 누웠다.

수영은 꺾여있는 순정의 팔을 잘 펴서 정돈해준 후 그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자신을 향해 웅크리고 누워 있는 순정을 향해서 수영도 몸을 모로 뉘였다.

긴 속눈썹이 보인다. 고른 숨을 쉬고 있다. 어느 새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비를 맞은 새처럼 몸을 살짝 떨고 있었다.

수영이 이불을 정돈에 순정과 같이 덮었다. 그리곤 그의 손을 잡아당겨 가만히 끌어안았다.

수영의 온기가 전해졌는지 순정의 떨림이 멈춘다.


‘눈앞에 있잖아. 바보야. 너만을 온전히 사랑해 줄 사람. 너라는 사람만을 바라볼 사람. 계절에 굴하지 않고 너의 곁에 있을 나무 같은 사람. 바로 네 앞에 있잖아.’


수영은 깊은 밤만큼이나 긴 한숨을 내쉬며 밤을 그렇게 지새웠다.


작가의말

이제 제 컴퓨터 상으로는 한 편만 더 쓰면 되네요.

가방 만들려고 가죽 받아왔는데 말입니다. 빨리 써야겠어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이설理雪
    작성일
    13.10.24 16:15
    No. 1

    ...멀리 와서, 콘도에 와서, 남녀 둘인데, 술까지 마셨는데, 아무일도 없었어요? ㅇㅁㅇ? 이게 말이 돼!?


    오타 있습니다! 생겼을 까? -생겼을까?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90 부정
    작성일
    13.10.24 18:15
    No. 2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저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제 친구중에 극중 인물과 비슷한 관계가 있거든요. 14년지기 친구인데 똑같은 상황에서 아무일 없이 돌다만 왔습니다. 완전 우정.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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