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책상 앞에 앉아있던 수정은 계속해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보낼까? 말까?’
계속해서 문자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한다.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 저기요?’
투명한 터치스크린 위를 가는 손가락이 오간다. 한참을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만지던 그녀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내일 시간 되요?]
‘으아. 드디어 보냈다.’
문자를 보낸 것도 문제였다.
‘답장이 올까? 날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그 때 전화기가 울렸다.
[누구세요?]
문자 내용을 확인한 수정의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 놔 이 아저씨가.’
[아까 본 사람이요. 분식집에서.]
한편 문자를 받은 순정은 무척이나 가슴이 뛰고 있었다. 처음 문자가 왔을 때 은연중 분식집에서 본 그 학생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무척이나 긴장이 되었다.
‘왜?’
순정 또한 어떻게 해야하나하는 고민에 연신 핸드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낯선 사람에게서 수연의 그림자를 보았다. 그 그림자를 가진 학생이 자신을 만나자고 한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을 테지만 수연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남아있는 지금, 그는 그렇게라도 수연의 흔적을 느끼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처음 보는 사람일지라도.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일지라도.
[시간 괜찮아요.]
[그럼 점심때 영화 볼래요?]
[좋아요.]
시간과 장소까지 정하고 나자 수정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좋았어.’
수정이 밝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썰렁한 주말을 보내지 않아도 되어서 즐거운 기분이었다. 거기다 그녀는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챙겨주던 모습. 시선을 마주치던 그의 모습. 따뜻하고 아늑한 그의 분위기.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고, 바쁜 어머니와 언니 틈에 자라서 그런지 그녀는 항상 외롭게 보냈다. 언제나 혼자였다. 순정이 보여주는 그 따뜻함에 취해서 수정은 자신이 내일 만날 사람이 언니의 전 애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내일 뭘 입지?’
자신의 장롱을 연 수정의 인상이 구겨진다. 자신의 눈앞에 보인 옷들은 순 청바지와 별다른 무늬 없는 티셔츠뿐이었다.
‘뭐 언니 거 입으면 되겠지.’
수정은 쿨하게 언니 수연의 옷장을 열었다. 여느 자매와 같이 수연도 수정이 자신의 옷을 입는 걸 싫어했다. 생긴 것과는 다르게 은근히 덤벙거리는 수정이 옷만 빌려갔다 하면 자꾸 뭘 묻히기 때문이었다.
‘이게 괜찮을라나?’
장롱을 뒤적이던 수정이 마침내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냈다. 하얀 블라우스와 짧은 반바지. 성숙한 느낌의 옷차림.
‘괜히 교복 입은 걸 보여줬나 보네.’
옷을 꺼내 옷걸이에 걸어둔 수정은 콧노래를 부르며 신발장으로 갔다.
‘발 크기가 같다는 것 이럴 때 참 좋단 말이야.’
옷차림을 생각하며 구두를 코디해보는 수정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내일 있을 데이트 생각에.
---------
영화관 앞에 미리 나와 있던 순정은 복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왠지 나와서는 안 될 곳에 나와 있다는 생각과 한 번 더 보고 싶다는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한참을 서성이고 있는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고개를 돌린 순정은 자신을 부른 여성에게서 눈부신 광채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하얀 블라우스에 검은 반바지. 빨간 구두를 신고, 같은 톤의 클러치백을 들고 있는 수정이었다. 어제 봤을 때는 그저 학생 같았는데 눈앞에 있는 것은 어여쁜 숙녀였다. 더구나 그 차림은 자신이 좋아하는 수연의 모습 중 하나였다. 신발이 야하지 않느냐며 쑥스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던 수연과 달리 눈앞의 여성은 당당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우리 통성명도 안했죠? 저는 정수정이에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악수를 청하는 수정의 모습에 순정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름마저 비슷한 사람. 수연과 같은 차림을 하고 나타난 그녀.
“저는 이순정이에요.”
“이름 특이하네요. 잊을 수는 없겠어요.”
“그런가요? 그래서 어렸을 때는 싫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요.”
“어렸을 때는 싫었다고요?”
“왜 그맘때는 이름으로 놀리고 하잖아요.”
“하긴. 저 어렸을 때 별명이 정수기였어요.”
뚱한 표정으로 정수기를 언급하는 수정의 모습에 순정은 슬며시 웃었다. 성숙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학생은 학생이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영화 뭐 볼래요?”
순정의 물음에 수정이 건물에 걸린 영화상영표를 훑어보았다.
“이거 어때요?”
“이거요? 정말 괜찮겠어요?”
수정이 가리킨 것은 한 태국 공포영화였다. 무섭다고 소문이 난 영화였다.
순정은 수정이 가리킨 공포영화에서 수연의 모습을 또 보았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던 그녀. 이런 것은 극장에서 봐야한다며 새로운 공포영화가 나올 때마다 자신을 데려갔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요. 저거 봐요.”
매표소에서 영화표를 구매한 순정이 수정에게 물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점심이라도 간단하게 먹을래요?”
“그래요. 요 밑에 햄버거 가게 있던데 거기 가요.”
햄버거 가게로 향하는 수정의 눈에 문득 순정의 손이 들어왔다. 여자처럼 희고 가는 손가락.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순정의 새끼손가락을 손에 꼭 쥐었다. 어렴풋이 아빠와 어딘가를 갈 때면 항상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고 다녔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새끼손가락을 잡힌 순정은 놀라 수정을 바라봤다. 그 때문에 수정은 자신이 순정의 손을 잡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민망해진 수정은 오히려 대차게 나갔다.
“왜요? 잡으면 안 돼요?”
너무나 당당하게 말했기에 순정은 차마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아, 아니에요.”
“앞장이나 서요.”
얼굴이 빨개진 순정은 애써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수정과 함께 지하의 햄버거 가게로 갔다. 치킨버거 두 개를 시킨 둘은 자리에 앉아 먹기 시작했다.
‘나쁘지 않네.’
원래 햄버거 같은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수정이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같이 있으면 따뜻함이 느껴지는 누군가와 이렇게 식사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여기 묻었어요.”
순정이 휴지를 내밀어 수정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었다. 순정은 소스를 닦아주면서도 수연이 생각났다.
‘그녀도 꼭 왼쪽 입가에만 묻히고 그랬는데.’
수정도 왼쪽 입가에 소스가 묻어있던 것이다.
민망해진 수정이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하며 콜라를 마셨다. 빨대를 씹으며 뚱한 표정으로 순정을 바라보던 수정이 이내 툭 던지듯 말을 했다.
“원래 여자들한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줘요?”
수정의 말에 놀란 순정은 사례가 들려 콜라를 뱉을 뻔 했다.
“아, 아니에요.”
“흠…….”
수정은 아닌 것 같다는 눈빛으로 순정을 바라봤다. 순정은 슬쩍 수정의 눈을 피했다.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지 마요.”
“네?”
“그러지 말라고요.”
순정이 뭐라 대꾸하려하자 수정이 자리에서 휙 일어났다.
“시간 다 되지 않았어요?”
“아, 네.”
“뭐해요. 빨리 일어나요.”
순정이 어리바리한 표정으로 식탁을 정리하자 수정이 다가와 다시 손가락을 잡았다.
“가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앞장서는 순정의 모습을 바라보던 수정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손안에 느껴지는 손가락의 온기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오랜만에 느껴지는 따스함에 마음이 훈훈해지는 것을 느꼈다.
- 작가의말
여성심리를 쓰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남자들 중에서도 제법 감수성이 예민해 남자보다는 여자답다는 말을 듣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남자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극중 여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 때 그것의 근거를 찾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좀 더 즉흥적이고 원초적인 남자들과는 다르게 무언가 미묘한 작동원리가 따로 있어서이지요.
개연성을 항상 찾습니다만 역시 어렵네요.
Comment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