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장 : 천피의 비밀 (1)
서원이라고 하는 곳은 지식의 전수보다도 인격의 수양에 더욱 힘을 쏟는 곳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서원들이 명승지에 그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도 했다.
물론 숭양서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초봄이라고는 하지만 겨울의 찬바람은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어서 바깥 날씨는 손이 곱을 정도로 찼다.
서원의 외곽에 위치한 음향정(吟香亭)같이 사방이 터진 정자에는 대낮에도 사람이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추웠다. 서원의 유생들이 눈을 쓸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서원 본관 주변이고 서원 전체를 다 쓴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 음향정의 주위는 그야말로 은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송백(松白)에 핀 눈꽃이 그러하고 음향정을 하얗게 덮은 흰 지붕이 그러했다.
그 음향정에 육능풍은 단정히 앉아 있었다.
약간은 상기된 표정이었으나, 백의난삼(栢衣襴衫)을 걸친 그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는다.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눈빛과 같은 흰 화선지 위에서는 한 포기, 두 포기 난(蘭)이 피어나고 있었다.
사두(蛇頭)*에서 시작해서 휘영청 휘어지는 당랑복(蟷螂腹)** 무엇이라도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휘어져 달아나는 서미(鼠尾)***…….
그 날카로움 속에 다시 한줄기의 난이 겹쳐지고 겹쳐진 난은 봉안(鳳眼)을 이룬다. 그 봉안을 깨뜨리며 다시 그려지는 난잎이 이름하여 파봉안(破鳳眼)이니, 그렇게 십여 포기의 난이 좌우로 피어난 후에야 비로소 한 폭의 난도(蘭圖)는 완성되었다.
“차아압!”
한데 그가 그 난을 완성하는 마지막 화심(花心)을 찍는 순간에 농축된 무엇이 퍽, 하고 터지는 듯한 기합 소리가 바로 음향정의 옆에서 들려왔다.
그 기합소리는 순간적으로 막 화심을 찍고 있던 육서헌의 손길을 멈칫하게 만들어 화심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이런……!”
육능풍은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들어 음향정의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건장한 체격의 청년 한 사람이 웃통을 벗어붙인 채 양손을 풍차와 같이 휘두르고 있었다.
건강한 체격에다가 눈 속에서도 전신에서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방금의 기합 소리는 바로 그가 내지른 것인 듯했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대단한 기세를 동반하고 있어서 휙휙 바람 소리가 세차게 일고 있었으며,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위 송백 위에 피어 있던 눈꽃들은 그의 움직임과 기합 때마다 맥을 못 추고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육능풍이 보는 순간에 그 청년은 다시 날벼락 같은 기합을 지르며 곁에 있던 아름드리 소나무를 후려갈겼다.
그러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그 청년의 손은 놀랍게도 소나무를 으스러뜨리며 한 치나 되는 손자국을 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흔들거렸다.
눈송이가 소낙비처럼 마구 흩날리며 쏟아져 내렸다.
세찬 눈보라가 강습한 것만 같았다.
그것을 본 육능풍은 미간을 접은 채 낮게 외쳤다.
“이봐, 거정(巨靜)! 왜 하필이면 여기에서 그 난리인가?”
거정이라 불린 웃통을 벗은 청년은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거두어 들이다가 육능풍의 외침에 그를 돌아보았다.
전신에 땀방울이 돋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먹과 같이 짙은 눈썹 아래 자리한 강렬한 눈을 가진 그의 얼굴은 조용하여 숨결조차 거칠어 보이지 않았다.
청년은 육능풍을 보며 씩, 웃고는 그에게 다가왔다.
“왜? 뭐 잘못된 것이 있나? 이곳이야 원래 서원 사람들이 다 아는 내 연무장이 아닌가?”
성큼 음향정의 난간에 걸터앉은 그는 육능풍의 앞에 놓여 있는 그림을 보고는 고개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는 육능풍을 올려다보았다.
“잘 그리다가 마지막에 가서 화심이 저게 뭔가? 완벽하게 잡념이 들어가 보이는걸?”
육능풍은 기가 막힌 듯 그를 보았다.
“아니, 저게 누구 때문에 저렇게 된 건데 딴소리야?”
“딴소리라니?”
“막 화심을 찍는데 자네가 고함을 지르는 통에 놀라 화심이 저렇게 경기를 일으켰단 말이야!”
그 말에 눈썹이 짙은 청년은 멈칫 하더니 이내 껄껄 웃어댔다.
그는 난간에 걸쳐 두었던 자신의 옷을 집어들어 가슴팍의 땀을 쓱쓱 문지르더니 옷을 걸치며 말했다.
“누가 내가 기합을 토할 때 화심을 치래? 그리고 이런 날씨에 이 추운 음향정에 나와서 난을 친다고 주책을 떨고 있는 자네가 잘못이지. 이 날씨에 한데 나와서 난을 치는 게 가당키나 한가?”
그는 육능풍이 어이가 없어 뭐라고 입을 열려고 하자 냉큼 다시 말을 이었다.
“뿐인가? 무식하게 정기신(精氣神)*이 일치되어 토해진 기합을 일컬어 고함이 무언가? 잘 들어두게. 난을 칠 때는 무아삼매(無我三昧)에서 주의를 의식하지 않고 쳐야 그 품격(品格)이 살아나는 법이야! 기합에 놀라 그림이 흐트러졌다면 그거야 정신집중이 잘못된 탓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나? 모름지기 제대로 그림을 그리려면 내가 옆에서 기합을 지르면 그 기합의 기(氣)를 그림에 그대로 옮겨 담을 수 있어야 진정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이지. 안 그래?”
거정이라 불리는 청년은 일장연설을 늘어 놓은 후에 웃는 낯으로 육능풍을 쳐다보았다.
거정이라는 것은 그의 자(字)이며, 그의 이름은 사공신(司空愼)인데 그는 숭양서원에서도 손꼽히는 특별한 존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는 학문에 몰두하고 있는 일반 학생들과 달리 무술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학문을 게을리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의 존재는 더욱 특별하고 그의 출신에 대해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 또한 특별했다.
사공신의 말은 궤변인 듯도 했지만 이치를 따지자면 기실 흠을 잡을 곳은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육능풍은 할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말솜씨가 점점 더 늘어만 가는군……. 오히려 내 잘못이란 말이지?”
그는 웃음기 어린 얼굴로 방금 전 사공신이 때린 소나무를 슬쩍 쳐다보고는 사공신을 돌아보았다.
뚜렷한 손자국이 새겨진 나무등걸.
그처럼 딱딱한 나무껍질이 으스러지듯 이지러져서 손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자네의 무공은 시간이 갈수록 대단해지는 것 같군. 그렇게 무공에 몰두해 있으면서 뭣 때문에 여기에 와서 공부를 하는 건가? 차라리 무예의 명사(名師)를 찾아 사사(師事) 받는 것이 나을 텐데?”
육능풍의 말에 사공신은 빙긋 웃었다.
“무공만 아는 무식한 무부(武夫)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지. 나는 양쪽을 다 아는, 문무겸전의 사람이 되고자 여기에 온 것이네. 무공만 말한다면 나는 명사를 찾아 다닐 필요도 없는 사람이야.”
그는 뭔가 말할 듯하다가 갑자기 말끝을 흐리면서 말머리를 돌렸다.
“좀 전에 들으니 자네는 내일 이곳을 떠난다면서?”
“그렇게 되었어. 아버님께서 돌아오도록 명을 내리셔서…….”
육능풍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도 공부할 것이 많이 있는데……. 이곳을 떠나려니 섭섭해서 동주를 뵙고는 날씨 불구하고 여기에 나와 난을 치고 있었지.”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공신은 문득 담담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고 보면 우린 정말 인연이 있군. 사실은 나도 내일 이곳을 떠난다네.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떠나려고 했었는데 자네를 이곳에서 보게 되니 그냥 갈 수가 없군. 이렇게 헤어지면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가 없을 텐데 말이야…….”
“다시는 만날 수가 없다니? 설마 벼슬에 뜻이 없다는 말인가? 벼슬에 뜻이 없다 하더라도 자네와 같은 재사(才士)는 나라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육능풍은 사공신이 가볍게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는 말끝을 흐려야 했다.
“송의 무과는 바람직하지 못하다네. 남아가 가기에는……. 모든 실권은 문관이 쥐고 있어 무장이 나아갈 수 있는 영역이 뻔히 보이는데 남아로 태어나서 무엇 때문에 그런 예속된 길을 가겠는가? 나는 원래부터 그 따위 과거 같은 것을 보기 위해 여기에서 학문을 닦은 것이 아니라네.”
“그럼?”
“…….”
사공신은 잠시 아무 말을 하지 않고 하늘을 쳐다보고 있더니 이윽고 시선을 돌려 육능풍을 바라보았다.
“자네에게만 말을 하지. 어차피 내일 헤어지면 서로가 만날 기약이 없을 테니까……. 원래부터 우리는 갈길이 다르다네. 자네는 명망 높은 관문(官門)의 장손이지만 나는 관문의 사람이 아니라 무림(武林)의 사람이야.”
“무림?”
육능풍이 의외라는 빛을 눈에 담고 사공신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 유협(遊俠)한다는 무인들의 세계 말인가?”
“맞아, 자네가 그렇게 알고 있는 그 무림의 사람이지. 선비들의 세계를 유림(儒林)이라 하듯이 무인들에게는 무림이라고 하는 세계가 따로 있어. 그곳이야말로 남아대장부가 뜻을 펼쳐볼 수 있는 무한한 세계이지. 남의 눈치를 볼 것도 없고……. 남의 간섭도 받지 않으면서 오로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써 모든 것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그곳이 바로 무림이라네.”
육능풍은 사공신의 눈에서 무엇인지 모를 야망(野望)이 활화산과 같이 타오르고 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이제보니 그는 일개 서원의 특별한 존재 정도가 아니었다.
육능풍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대송은 아까운 인재를 초야(草野)에 빼앗기는 것 같군…….”
육능풍이 중얼거리자 사공신은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서헌, 자네가 있지 않은가! 자네가 조정에 남아 있다면 서하의 이원호가 아무리 웅지(雄志)를 가지고 있다 해도 어쩔 수가 없을 거야. 게다가 자네의 친구들……, 저기 오는 저 친구들만 있어도 나라는 반석 위에 올라 앉을 수 있을 걸세.”
그는 육능풍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일어났다.
저 멀리 눈을 밟으며 일단의 청년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선두에 선 왕안석과 이한령 등 그들은 육능풍을 추종하는 인재들로서 육능풍이 돌아간다는 말에 일과가 끝나면서 그를 향해 몰려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육능풍은 일어나는 사공신을 만류했다.
“내일이면 자네도 이곳을 떠난다니, 개보 등이 오면 같이 어울려 석별의 정이라도 나누는 것이 어떠한가?”
사공신은 육능풍을 보며 씩 웃었다.
“나는 원래가 자왈(子曰) 어쩌고 하는 친구들과는 어울리기를 싫어해서 말이지, 그 바람에 지난 삼 년여의 시간을 외톨이가 되다시피 지내왔지만……, 후회는 않네. 자네와 같은 친구 하나를 만난 것도 하나의 기쁨이었으니까. 내가 떠난다는 것은 저 친구들에게는 말하지 말게. 처음부터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왔을 때처럼 떠나고 싶었으니까. 잘 있게, 친구! 이자정회(離者定會)라 하니 어쩌면 언젠가 만날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보중하게.”
사공신은 육능풍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육능풍은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어 그 손을 굳게 잡았다.
두 사람의 손에서는 젊음이 뛰놀고 있었다.
육능풍의 손에서는 침착함이, 사공신의 손에는 강렬한 힘이 서로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두 사람이 이후 어떤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영영 만나지 않게 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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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많이 바빴습니다.
매일 올리기로 했는데 펑크가 났습니다.
바빴던 결과물에 대한 공지가 아마 오늘이나 내일쯤 연담을 통해서 발표가 될 듯 합니다.
요즘 들어서 이상하게 태클거는 분들이 생기네요.
무슨 창작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들은 많이 이상스럽게들립니다. 왜냐하면 이 글은 제가 쓴 창작품입니다.
표절을 하고 있는 게 아니지요.
제 창작능력이 감퇴되었는지 게을러졌는지는 그 분들이 판단할 문제가 아니고 할 수도 없을겁니다.
다만, 한가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제가 준비하고 있는 몇가지들이 발표될 때에도 그런 소리를 할지 두고 봐야겠다. 라고 속으로 웃고 있는 중입니다.
모르지요.
그땐 또 다른 소리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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