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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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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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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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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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글자수 :
207,496

작성
12.02.27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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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1.

DUMMY

방으로 가서 컴퓨터를 켠다. 반복되는 일상의 시작을 알리는, 컴퓨터의 팬이 돌아가는 낮은 소음을 들으며 어젯밤의 꿈을 필사적으로 잊으려 한다.

하지만 잊으려 할수록 내 손에 희생된 동물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이번에는 돼지였다.

아무 쓸모 없는 생각이지만, 돼지의 머리를 뽑았던 기억은 있는데 그 머리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시장통으로 가서 정육점 앞에 던져놓기라도 했으면 정육점 주인에게 고맙단 소리라도 들을 텐데. 정말로 미쳐가나 보다.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를 뱉어내던 모니터가 새파란 바탕화면으로 바뀐다. 스피커는 켜지 않았지만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마우스를 잡고 무심결에 이 아이콘 저 아이콘을 클릭하다 인터넷 아이콘을 더블클릭한다. 검색엔진이 뜬다. 곧바로 스포츠란을 누른다.

잠깐. 뭘 본 것 같은데.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신문의 헤드라인을 살핀다. 셀 수 없이 많은 기사를 헤집다 내 눈길을 끌었던 기사를 발견한다.

도심 속의 참극.

기사의 제목을 클릭한다. 25일 새벽 4시경. 강남구에 있는 모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졌던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다.

어제? 아니 오늘이구나.

나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스포츠 기사를 읽을 때에도, 게임을 할 때에도, 그 기사의 내용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돈다.

목격자들이 말한 바로는 범인은 추운 날씨에도 반팔 티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으며, 약 180 정도의 키에 장발에 수염을 기른 남자라고 했단다.

꿈속의 옷차림은 기억 속에 없다. 기억날 리가 있나. 온몸이 털로 뒤덮여 있었는데. 옷을 입고 있었다면 분명히 기억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내키는 183이다. 언제 깎았는지 기억조차 희미한 긴 머리카락. 두어 달쯤 팽개쳐둔 수염. 빌어먹을.

머릿속에서는 절대 나일 리가 없다고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그게 바로 나라고 말한다. 목격자들이 지목한 용의자는 나라고 말한다.

게임에 집중할 수가 없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컴퓨터를 끄고 일어난다. 왼편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연필꽂이에서 가위를 꺼내 욕실로 간다. 가위로 긴 수염을 대충 잘라내고 깨끗하게 면도를 하고 난 후 샤워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간다.


싸늘한 바람을 쐬자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는 설마라는 글자가 굼실거리며 물음표로 모습을 바꾼다.

내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랬을 리가 없다. 난 돼지꿈을 꾼 것이다. 꿈속에서 한 마리의 돼지를 죽였을 뿐이다. 돼지꿈은 길몽이라는데 돼지를 죽여버렸으니 길몽은 못되더라도, 그게 흉몽일지라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불안감은 커져만 간다.

미용실에 들러 짧게 잘라 주세요, 라고 말한다.

“이렇게 많이 기르셨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손님 정도면 여기 앞머리는 이만큼만 하셔도…….”

미용사는 거울 저편에 있는 나를 보며 나불나불 떠들어댄다.

꼭 몇 마디 더 붙여야 장사를 잘하는 줄로 착각하는 인간이 있다. 몇 마디가 꼭 필요한 사람이 있고, 그 몇 마디를 들어주느라 미쳐버릴 것 같은 사람이 있는데도, 그런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미용사는 그냥 짧게 깎아 달란 내 말을 듣고 앞머리를 큼지막한 빗으로 쓸어내리며 몇 마디 더 중얼거린다. 닥치고 깎아, 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내 대답은 별거 없다.

“네, 그냥 다 잘라 주세요.”


미용실을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멈춰 선다. 기다린다. 허전한 이마에 손을 올려보고는 머리를 너무 많이 자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눈에 더 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난다. 집으로 돌아가 버릴까 하는 찰나 버스가 온다.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버스 이마에 적힌 글자를 본다. 이 버스가 아니다. 금방 다른 버스가 온다. 신문에서 본 동네의 이름이 버젓이 적혀 있다. 버스를 탄다.

얼마만의 외출인가. 아니, 그보다 얼마 만에 타보는 버스인가. 적어도 삼 년은 지났다.

그녀가 떠나간 지, 집에 틀어박힌 지, 삼 년이 지났다.

버스는 예전과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딱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결 산뜻해진 느낌이라 해야 할까.

한낮인데도 생각만큼 한산하지 않다. 뒤쪽으로 들어가서 손잡이를 움켜쥐고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본다. 2007/11/25 (일)

일요일이었구나.

날짜와 요일은 그녀와 같이 나를 떠난 후 아주 가끔 나에게로 찾아온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하기라도 한가보다. 지금이 바로 그런 때다.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고 나니 시선 둘 데를 모르겠다. 이리로 고개를 돌려도, 저리로 고개를 돌려도 온통 사람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뭐라고 그들이 나를 보겠는가.), 내가 그들을 보기가 싫다. 그들을 보면 뒤쳐진 내가 떠오르고, 그녀가 떠오르고, 부모님이 떠오르기에.

천장모서리에 붙어있는 버스노선도를 별 의미 없이 들여다보며 몇 번이고 내가 내려야할 곳을 확인한다.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짓이라도 하지않으면 아까 보았던 기사가 자꾸 떠올라 견딜 수가 없다.

내 불안한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버스는 강남으로 들어선다. 머지않아 사건 현장이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온몸의 피가 머리로 몰려드는 것 같다. 주먹을 쥐고 있는 손에서 땀이 진득하게 배여 나온다.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고 가야겠단 생각을 한다.

목적지의 한 정거장 전에 내린다. 하지만 진정은 개뿔. 미심쩍은 생각만 더 든다.

주위의 높고 낮은 빌딩들. 갖가지 상호가 적힌 간판들. 낯설기만 한 것들이지만 모두 내 기억 속에 있다.

이 빌딩과 간판들은 내가 마지막으로 와 봤던 삼 년 전에도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무의식이 이 장면들을 간직하고 있다가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빌어먹을 무의식. 또 무의식무의식무의식.

몇몇 다른 간판이 있더라도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건지도. 인터넷에서 무심코 넘긴 사진들 속에 이곳 거리의 풍경을 간직했던 사진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 난 이곳을 삼 년 만에 처음 와보는 것이다.

작위적으로 위로를 해보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최근에 이곳에 와본 적이 있다. 비록 깜깜한 밤이었지만.

내 몸 아주 깊은 곳에서 나지막이 비웃고 있는 뭔가를 느낄 수 있다.

가만, 내가 한 짓이었다면, 정말로 내가 꿈속의 짐승과도 같이 그 사람을 물어뜯고 죽였다면 피는? 피는 숨길 수 없었을 텐데.

꿈에서 벌어졌던 일들은 대부분 기억한다. 아니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고 믿는다.

짐승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다 표적을 정하고 달려가 죽이는, 그 모든 광경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렇다면 분수처럼 치솟았던 피는 어떻게 된 걸까. 정말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 피가 내 몸에 단 한 방울도 묻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나? 나는 그를 죽이고 나서 어떻게 행동했었나. 그의 머리를 뽑아들고 그다음에는? 다음 장면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집에 있었고 멀쩡한, 아무런 이상이 없는 옷을 입고 있었다. 몸이나 머리카락 그 어느 곳에서도 핏자국 따윈 없었다.

꿈의 뒷이야기가 더 있단 말인가. 더 있다면 나는 살인을 저지르고 난 뒤 집으로 돌아갔단 소리가 된다. 집에 도착하고 난 후, 혹은 집으로 가는 도중 핏자국들을 남김 없이 지운 후 잠이 들었단 말인가? 말도 안 된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악질 몽유병이라고 할지라도 이럴 순 없으리라. 차라리 유체 이탈을 했다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모르겠다. 어떻게 된 일인지. 답답하다.


가을의 끝자락. 차가운 늦가을바람에 수북이 쌓인 은행나뭇잎들이 거리를 잔뜩 어지럽히고 있는 계절이지만, 이마에선 땀이 배어 나온다.

점점 사건 현장이 가까워지고 있다. 근처의 행인들이, 상점의 주인들이 당장에라도 달려와 나를 범인으로 지목할 것만 같다. 이성은 곧 죽어도 절대 내가 아니라고 반박하지만, 감성은 이미 내가 저질러놓은 일이라고 인정하는 듯하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투명한 햇빛을 받아 진한 회색빛을 내보이는 쓸쓸한 거리의 풍경들이, 색색의 불빛을 받아 휘청거리는 퇴폐적인 거리의 풍경과 겹친다. 이곳은 그곳이다.

한 마리의 검붉은 짐승이 내 앞을 달려나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 짐승을 따라 속도를 높여 걷는다. 짐승의 으르렁거림이 귓가를 맴돈다. 가슴 깊은 곳에서 그와 같은 소리가 끓어오른다. 급하게 숨을 멈추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억누른다.

짐승은 정말 나였단 말인가.

지쳐가는 나를 느낀다. 바로 앞에 있는 모퉁이를 돌면 멀리서나마 신문에 나왔던 나이트클럽이 보인다. 근처까진 가지 말자. 그냥 멀찌감치에서 보고 돌아서는 게 좋겠다.

멈춰 서서 심호흡하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짐승을 따라 걸어간다. 모퉁이를 돌아들어 가자마자 저멀리 근무복을 입고 있는 경찰 두 명이 보인다.

저기다. 저들이 있는 곳 바로 뒤편의 건물. 그 건물 로비에서 난 돼지를 때렸다. 죽였다. 머리통을 뽑았다.

진득한 땀은 연신 쏟아져 나온다. 걸음을 멈춘다. 앞서 달려가던 짐승이 멈춰 서서 뒤돌아본다. 움직이지 않는다. 짐승은 계속해서 날 보고 있다. 숨이 가빠온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은 현장에 다시 나타난다. 어디선가 본 문구다. 내가 범인이라면, 다시 나타난 것이다.

심장이 펄떡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이곳에서 뒤돌아선다면 더 이상하게 보이지는 않을까. 곧장 집으로 돌아가 이 모든 일을 기억 속 어딘가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빌어먹을 놈에게 팽개쳐 버리고 게임이나 할까.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 난 정말로 살인자가 되어버릴지도 모르는데.

발이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집을 나오기 전, 면도를 하다 긁혀 피딱지가 앉은 곳을 엄지로 긁는다. 그냥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나치면 된다. 그 누구도 내가 범인이라는 것을 모른다. 수염과 머리를 깎았다. 무엇보다 난 꿈속의 짐승이 아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짙은 갈색 트렌치코트의 여자가 짐승을 뚫고 지나간다. 저 짐승은 내가 다가갈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려나 보다.

짐승이 기다리는 곳으로 걸어간다. 천천히 태연함을 가장하며 경찰들을 향해 다가간다. 그들 옆을 지나며 건물을 힐끔 바라본다. 노란 폴리스 라인이 출입구를 막고 있다.

꿈속의 광경이 그대로 떠오른다. 저곳은 분명히 꿈속의 그곳이다. 저기가 바로 돼지를 찢어발겼던 곳이다.

“이봐.”

누군가 내 등을 툭툭 건드린다. 뒷목이 뻣뻣해지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누구지, 누구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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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2.03.02 17:08
    No. 1

    ...어라, 꿈이 아니예요?
    완전 재밌어요... 혹시 건드린 사람이 꿈과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그냥 경찰?! 절단신공이 너무 절묘하잖아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0 belovers
    작성일
    12.04.09 22:57
    No. 2

    재밌네요. 잘 보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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