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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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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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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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7,496

작성
12.03.14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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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쪽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5.

DUMMY

“힘을 더 빼놔야 한다고 말했잖아.”

남자의 목소리가 웅웅거린다.

“무슨 소리야. 멀리서 쏘기만 하면 되는 걸 괜히 달려들어서 얻어터지고는 엉뚱한 소리 하고 있어. 한 번 더 싸워보고 싶다고 한 게 누군데 그래?”

여자의 목소리도 울린다.

“그러니까 내가 알아서 갈 때까지 가만있었어야지. 네가 뒤에서 밀었잖아.”

“그럼, 이 자식아. 저 문이 얼마짜린데, 다 때려 부술 때까지 기다리라고? 네가 언제 돈 보태준 적 있어? 사무실도 내 돈으로 빌린 거잖아.”

“네가 보태라는 소리 한 적 있어?”

남자의 목소리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키티다. 여자의 목소리도 낯이 익다. 아마도 미미일 것이다. 그들은 격렬하게 토론하고 있다. 잠시 동안들은 바를 종합해 보자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라는 주제로 제법 오랜 시간 준비를 해 온 말들을 쏟아내고 있는 듯하다. 눈을 뜨지 않는다. 눈을 뜨면 저들의 입에 물고 있는 총부리가 곧바로 나에게로 방향을 돌릴 것 같은 불안감도 있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를 떠올리자니 부끄러운 마음도 들기에.

“대체 얼마나 쏜 거야? 안 일어나잖아. 전에는 벌떡벌떡 일어나더니.”

키티 씨. 저 이미 일어나 있어요.

“곰이라며? 곰만큼 썼지.”

새로운 목소리가 들린다. 남자다.

“이게 곰으로 보여? 사람이잖아. 사람한테다 곰한테 쓰는 만큼 쓰면 어쩌라고.”

“그래도 전에 너구리한테는 먹혔는데.”

“너구리는 작잖아.”

“그런가?”

“똑똑한 척하고 있네. 괜히 엉뚱한 사람한테 시비야.”

“뭐, 내가 뭘?”

졸음이 엄습해온다. 눈도 뜨지 못하고 이렇게 있을 바에야 그냥 자 버리는 게 좋겠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감고 있는 눈꺼풀 위로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다. 얼마간 눈을 뜨지 않고 기다린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없다. 슬며시 실눈을 떠본다.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잠시 어둠에 눈이 적응하기를 기다린다. 눈이 적응한 것 같긴 한데, 보이는 것은 없다. 순간 소름이 돋아 등 줄기를 치닫는다.

맙소사, 눈이 멀어 버렸나? 심 봉사처럼? 그럼 공양미는 누가 내주고, 인당수에는 누가 빠져준단 말인가.

급하게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머니를 더듬는다.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누른다. 빌어먹을 놈의 배터리가 없나 보다. 아니면 내가 진짜 눈이 멀어 버렸던지.

“아아. 아아아아.”

다행스럽게도 목청은 멀쩡한 것 같다.

대체 왜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데? 내가 뭔가를 맞았다고 했나? 곰한테 쓰는걸? 그래서 보이지 않는 건가? 총을 맞았나? 그래서 시신경에 손상을 입었나? 시신경이 어디 붙어있는 거지? 등에 붙어있나?

머리를 감싸 쥐고 멍하니 앉아 있다 보니, 주위를 떠다니는 공기 속에서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다. 그제야 여기가 어디인지 알아챈다. 지하실. 키티가 본부라고 칭했던 그곳인 듯하다. 누워 있던 곳을 더듬어본다. 부드러운 인조가죽이 만져진다. 이것은 소파다. 지하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여러 개의 소파를 떠올린다. 바닥에 다리를 내딛는다. 일어선다. 온몸을 찢어버릴 듯한 고통이 몰려온다. 배가 아프다.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다. 그래도 아프다. 손을 배에 대고 창자 위를 문지른다. 배가 너무 고파서 아픈 것 같다. 허리를 굽힌 채 두리번거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형광등! 그래, 형광등을 찾아야 한다. 스위치는 어디 있을까. 보통 출입구 근처에 있지 않나? 어느 쪽이 출입구일까?

다시 둘러봐도 비상구 표시는 보이지 않는다.

빌어먹을 건축법. 비상구가 있는지 없는지 단속 좀 해야 할 것 아닌가.

왼손으로는 배를 문지르고 오른손으로는 허공을 더듬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간다. 지겨울 정도로 느리다. 뱃속에서는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들고, 물이 멎는 순간 내장을 쥐어짜는 통증이 덮쳐온다. 목덜미가 서늘해져 온다.

얼마나 걸었을까. 손끝에 딱딱한 게 닿는다. 그것에 손바닥을 대 본다. 차갑다. 평평하다. 손바닥으로 쓸어본다. 끝이 없다. 차갑고 끝없이 평평하다. 벽이다. 벽에 두 손을 대고 뻐근한 허리를 편다. 허리를 손으로 받치고 몸을 뒤로 젖힌다. 우두둑 소리가 난다.

벽을 더듬으며 조심스럽게 왼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더듬거리다 한 발짝 걷고, 다시 더듬거리다 한 발짝 걷고. 발끝에 뭔가 닿는다. 잽싸게 발을 뒤로 뺀다. 쪼그리고 앉아서 그곳으로 손을 뻗는다. 바닥에서 조금 솟아오른 곳에 딱딱한 것이 만져진다. 계속해서 그것을 더듬는다. 둥그렇다. 평평한 원반 같은 물체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는 기둥이 있다. 두 손으로 그 기둥을 만지며 천천히 일어선다. 뭔가가 이마 끝을 스친다. 딱딱하다. 손으로 이마 앞을 탐색한다. 툭 튀어나온 막대기 끝이 만져진다. 굴곡이 져 있고 끝 부분이 뭉툭하다. 가만히 서서 생각한다. 소파, 책상, 그리고 옷걸이. 그것이 이 지하실에서 본 전부였다. 내 앞의 이것은 당연히 책상이나 소파가 아니다. 그렇다면 옷걸이다. 옷걸이의 가지처럼 뻗어나온 부분을 민다. 옷걸이가 넘어지다가 벽에 부딪히며 쇳소리가 난다. 발치를 더듬어 아랫부분을 잡아든다. 생각보다 가볍다. 이곳에 옷걸이가 이쪽에 있단 소리는 출구는 반대편에 있단 소리다. 옷걸이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앞으로 쭉 내민다. 걸리는 것은 없다. 전진한다. 옷걸이가 옆벽을 드르륵 긁는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지면을 스치는 발소리, 가느다란 숨소리, 침 삼키는 소리. 그리고 요란한 전화벨 소리. 전화벨 소리에 놀라 심장이 멎을뻔한다. 잠시 고민한다. 그리고 결정한다. 일단 불을 켜고 나서 받든지 말든지. 신경을 긁어대는 기계음으로 구성된 하바네라의 한 소절이 무한히 반복되는 암흑 속에서, 커다란 옷걸이를 창처럼 쥐고 앞으로 내밀어 가며 천천히 움직이다 보면 아주 돌아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음악 같지 않은 음악이 나를 재촉해댄다. 머릿속에 숨어 있는 메트로놈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점차 빨라지고, 덩달아 전화벨 소리도 빨라지고, 내 심장박동마저 그들에 휩쓸려 아득한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다.

잠깐. 전화기가 울리면 램프가 깜빡이지 않나?

벨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맙소사. 정말 눈이 멀어 버렸나 보다.

내 침통함에 호응하듯 갑작스럽게 정적이 흐른다. 누군가 응답 없는 전화기를 포기해 버린 듯하다. 혀로 입술을 핥고 다시 전진한다.

젠장. 또 전화가 울리기 시작한다. 이젠 신경질이 난다.

첫 번째 전화를 안 받았는데, 두 번째 전화는 받겠지라고 생각하는 건가?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십 분이나 이십 분 뒤 아니면 한 시간 뒤 다시 전화해볼 생각은 못하는 건가? 자신이 거는 전화는 꼭 누군가 받을 거라는 대책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건가? 그냥 신호음 소리 듣기를 즐기는 변태인가?

옷걸이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간다. 힘차게 앞으로 쭉 뻗는다. 아무것도 없다. 옷걸이가 허공을 가로지른 만큼 움직인다. 반복한다. 보이지 않는 전화기로 힘차게 고함을 내지른다. 벨 소리가 멎는다. 후련한 마음은 십 초도 못 가 깨진다. 다시 벨이 울린다. 무작정 앞으로 옷걸이를 내지르며 그 뒤를 따른다. 어서 빨리 전화를 받아 욕이라도 퍼부어주고 싶다.

하바네라. 미친 하바네라. 작곡가는 누구일까. 하바네라라는 제목은 내가 어떻게 알고 있지?

얼마나 지났을까. 지척에서 덜컹 소리가 들린다. 끼익 소리도 들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온다. 나는 그 빛을 홀린 듯 바라본다.

해냈다. 나는 눈이 멀지 않았다.

벅찬 환희를 억누르며 있는 힘을 다해 옷걸이를 앞으로 찌른다. 옷걸이 끝에 뭔가 걸린다. 벽처럼 단단하지는 않다.

스위치를 찾아내 형광등을 켠다. 눈이 시리다. 잠시 눈을 깜빡인다. 발치에 누군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쓰러져 있다. 여전히 전화벨은 울린다. 웅크린 사람과 전화기를 번갈아 본다. 전화기로 걸어간다.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미미는?”

“네?”

“미미는?”

“글쎄요.”

전화가 끊긴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웅크린 사람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에게 다가간다.

“저기요.”

그의 등을 찔러 본다. 반응이 없다. 그의 어깨를 잡고 흔들어본다. 옆으로 발라당 쓰러진다.

어디선가 본 얼굴인데.

곧 그가 문지기였단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코끝에 손가락을 대 본다. 숨은 쉰다. 숨 쉬지 않았더라도 인공 호흡할 생각은 없었다. 그를 몇 번 더 흔들어본다. 많이 피곤했는지 눈을 뜨지 않는다. 그의 뒤에 떨어져 있는 비닐봉지를 본다. 삼각 김밥, 컵라면.

나와 식성이 비슷한가 보다.

두 개의 삼각 김밥이 비닐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중이다. 덩달아 나무젓가락까지 머리를 내밀고 있다. 비닐 속에 그것들을 담고 소파 위에 가져다 둔다.

이것을 먹어버릴 염치는 없다.

밖으로 나간다. 배가 고프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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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4

  • 작성자
    Lv.82 파인더
    작성일
    12.03.14 04:37
    No. 1

    아 다음편좀요 ㅋㅋ 현기증나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2.03.14 19:00
    No. 2

    응...? 뭐죠 이건? 지금 제정신으로 돌아오긴 했는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건가요? 거 참... 묘하네요... 꿈 꿀 때 충격을 받으면 거기 그대로 기절하는 건가봐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스사가미프
    작성일
    12.03.14 22:19
    No. 3

    꿈에 곰으로 변해서 날뛰다가 마취당해서 그냥 자버렸던 겁니다... 왜 실제 짐승도 마취총을 맞으면 자버리지 않습니까...이게 만족스런 대답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2.03.14 23:38
    No. 4

    아... 그런 거였군요 ㅋㅋㅋ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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