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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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사가미프
작품등록일 :
2012.05.30 23:59
최근연재일 :
2012.05.30 23:59
연재수 :
5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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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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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07,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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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3.09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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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쪽

인면수심자(人面獸心者)-scene 4.

DUMMY

왜 스물여덟이나 돼서 깨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보다 빨리 깨지 않아서 유감이란 말처럼 들리기도 하고,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굳이 하나를 골라 보라고 한다면 후자를 고르겠지만.

나는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빌어먹을 꿈을 꾸지 말았어야 했다. 그런데 꿈을 꿔 버렸다. 왜 꿈을 꾼 걸까? 왜 깨어나 버린 걸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 없다는 말이 있다. 뿌리 없는 나무에는 꽃이 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말이다.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 손만 잡고 잤는데 아이가 태어나 버렸어! 같은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져도 이유가 있고, 해가 서쪽에서 뜨는 날에도 이유가 있다. UFO가 지나가다 날벼락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북한의 핵실험에 열 받은 지구가 서쪽으로 회전해버릴 수도 있는 일이다.


나 같은 인생을 살다 보면 -하루하루 판에 박은 듯한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은- 특별한 일을 겪었을 때,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간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두개골을 깨부수고 허여멀건 뇌에 칼로 죽죽 그어 새겨버린 것처럼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내 빌어먹을 꿈. 유월. 꿈은 유월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이 일월 초니 대충 일곱 달 전의 이야기다. 그때도 지금과 별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일 시간만 축내며 먹고, 자고, 놀고, 싸고의 무한 반복이었다. 그 무렵의 나는, 지금도 내 머릿속 구석에 키우고 있는 병이라는 놈에게, 정신 깊숙이 침입당해 조종을 받고 있었다.

정신의 병이라는 게 으레 그렇듯이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별다른 표시가 나지 않는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고, 설령 안다고 해도 자신의 병이 얼마나 심각한지 자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육체의 병은 대부분 자신만을 망가뜨리지만, 정신병이라는 놈은 타인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자신을 망가뜨릴 수도 있다. 내 병은 다행히도 나만 망가뜨리는 경우였다. 나는 남에게 해코지할 수 있을 만큼 독하지 못한 놈이라서, 내 병도 천성을 거스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새벽까지 게임을 하다가 잠이 오질 않아 웹서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주변인에 방관자 성향이 강해서, 글을 쓰거나 댓글을 남기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그날은 달랐다. 머잖아 다가올 장마 흉내를 내며 찔끔거리는 비 때문이었는지 모르겠고,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높아져 가는 기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사이트 채팅방에 들어가 신 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인터넷이라는 바다에는 익명성이라는 거대괴물이 살고 있다. 그 괴물을 잘만 이용하면 나 같은 찌질이, 백수도 멋쟁이 대학생이 될 수 있고, 판검사가 될 수도 있고, 대통령의 아버지가 될 수도 있다. 그놈의 힘을 빌려 채팅방에서 쿨한 척, 시크한 척 온갖 폼은 다 잡으며 놀았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열댓 명 정도였던 채팅방은 시간이 흘러 날이 밝을 시간이 가까워지자 대화명을 하나씩 지워가기 시작했고, 남은 건 나까지 해서 다섯이 전부였다. 에바, OmomQm, ZB어택, 세모의쿰, 나까지.


- 죽는다는 건 뭘까?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에바가 화두를 던졌다. OmomQm이 그 말을 받아 똑똑한 척했다. 나도 내가 가진 죽음에 대한 생각을 뱉어냈다. 죽으면 그냥 끝 아님? 이것이 시작이었다. 채팅방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죽음의 개념을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떠들다 지쳐버린 세모의쿰이 나가 버리고, 남은 건 넷뿐이었다.

채팅방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정예멤버들이 뿜어내는 암울한 분위기에 쉽사리 동화되지 못하고 나가버렸다.

좀비가 자신이 자살하려다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우린 또 자살에 대해 떠들어댔다. 방법론부터 시작해서 자살에 대한 세상의 인식, 자신의 생각, 경험담까지. 이번에도 에바였다.

- 자살하면 무섭다고 했잖아. 다른 사람이 죽여준다면 어떨까?

다시 그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든지 진심으로 죽음을 갈구했던 건지 모르겠지만, 남아 있는 넷 모두에 바의 말에 찬동했고, 우리는 만날 장소와 시간, 각자의 준비물을 정하고 헤어졌다.


토요일 오후. 우리는 서울역 귀퉁이에서 만났다. 딱히 수상쩍게 보이는 사람도 없었고, 한 곳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몇 없어 금세 서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학생처럼 보이는 에바와 ZB어택, 나보다 약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정장차림의 OmomQm, 그리고 나.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네 남자는 식사를 한 후 택시를 타고 남산으로 향했다. 그때까진 무섭다거나 긴장되진 않았다. 이미 게임을 통해 낯선 이들과 만난 경험이 두 번쯤 있어 그런 것도 있었고,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죽게 된다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는지도.

첫 만남이라는 것은 어색하다. 그 어색함을 무마하자면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라는 것은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이고,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는 공통된 관심사가 필요하고, 사교성이라는 놈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 중 한 명을 죽이기 위해 모인 녀석들이 무슨 대화를 할까. 아무도 말이 없었다. 각자의 머릿속에서는 뭐라 떠들어대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아스팔트가 깔린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갔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근처의 공기가 제법 시원해졌을 때, 에바가 길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서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OmomQm이 준비해온 주사위를 꺼냈다. 좀비가 허리띠를 꺼냈다. 나는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며 입을 열었다.

“일단 한 모금씩 하고 주사위 던지기로 하죠.”

에바가 주변을 훑어보더니 나에게 눈을 돌렸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이기는 사람? 지는 사람?”

“음, 이기는 사람으로 할까요? 지는 사람으로 하면 괜히 잘못 던져서 죽는 거 같으니까. 그러면 벌칙 같지 않아요?”

“그러죠. 제일 높은 사람이 죽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은 죽여주기로.”

OmomQm이 내 말에 동의하고 나섰다.

“오케이.”

ZB어택도 동의했다.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 한 컵씩 마시고 주사위를 던지기 시작했다.

에바는 5, OmomQm은 3, ZB어택도 3.

에바의 입술이 푸들푸들 떨렸다. 내가 걸렸으면 싶기도 하고, 내가 아니었으면 싶기도 하고, 여전히 내 마음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될 대로 돼라지.

주사위를 던졌다. 5가 나왔다.

에바와 난 주사위를 다시 던졌다. 에바는 2. 나는 4.

내가 걸렸다. 웃음이 나왔다. 기쁨에 겨운 웃음이었는지, 허탈한 웃음이었는지, 공포를 억지로 감추려는 웃음이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자, 하세요.”

눈을 감았다. 목에 감겨오는 허리띠의 매끈하면서 뻣뻣한 감촉이 느껴지고,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혀왔다. 발버둥을 치지 않으려 했지만, 신음을 흘리지 않으려 했지만, 본능이란 건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새소리가 들리고 한기가 느껴졌다. 눈을 떴다. 해가 동쪽에 떠있었다. 아침이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힘겹게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갔다. 두 번 다시 그들을 만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들의 휴대폰으로 문자를, 전화를 해봤지만, 응답은 없었다.

며칠 후부터 꿈은 시작되었다.


작가의말

고쳐 썼습니다. 고쳐 쓰고 나니 채팅 내용이 전혀 필요가 없었는데, 왜 썼던 건지 모르겠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4

  • 작성자
    Personacon Gellita
    작성일
    12.03.09 18:53
    No. 1

    ...엉? 뭐죠 저건?!
    저때까지 안 깨어나다 생명의 위협을 받고 눈을 뜬 건가요!?
    그 세 명도 죽어버린 건가... 오오, 뭔가 개연성이...!! 역시 재밌어요 ㅠ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스사가미프
    작성일
    12.03.10 00:09
    No. 2

    재밌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채팅했던 내용을 적을까 말까 무척이나 망설였습니다. 이게 이상하게 적으려니 너무 산만해보이기도 해서 그냥 설명으로 대신할까 하다가 적어본거라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비추(秘錐)
    작성일
    12.03.14 01:41
    No. 3

    채팅내용 빼는 것이 좋아보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 스사가미프
    작성일
    12.03.14 22:17
    No. 4

    역시 그랬군요. 일단 생각해 놓은 다음에 고쳐쓰는 것으로 해보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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