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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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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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4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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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1화_만인의 죄인

DUMMY

겨울의 숲은 모든 것이 얼어있었다.

하늘을 찌를듯이 자라는 나무들의 기상을 잠재우고, 시냇물의 역동적인 흐름도 멈춰버리는 냉혹한 추위가 도시연합과 월영시 북쪽 국경선 사이에 위치한 알덴 숲을 지배했다.

공기의 흐름마저 멈춰 버리는 듯한 그러한 겨울 풍경의 경계가 갑자기 일그러졌다.


눈으로 덮힌 지평선과 그 위로 곧게 자란 나무의 직선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소복이 쌓인 눈이 뒤엎어졌다. 그 경계를 무너뜨리고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여기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인간, 그것도 소녀였다.


하얀 눈과 어울리는 흰 털모자는 그러나 군데군데 때가 타서 누렇게 변해 있었고, 털모자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금색 머리카락, 그리고 그 토끼 가죽을 직접 기워서 만든 듯한 두터운 외투와 설상화를 신은 소녀는 무언가 쫓기듯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옅은 눈꺼풀을 수시로 깜박이며, 연 갈색 눈동자로는 이곳저곳을 쉴새 없이 둘러보고 있었고, 초승달 같이 얇은 입술 또한 바쁘게 무언가를 중얼 거리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해.. 반드시.. 죽으면 안돼..”

그렇게 중얼거리며 뛰어가던 소녀는 움푹 파인 눈에 빠져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볼품없이 넘어졌지만, 그녀는 넘어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몸을 굴려 일어섰다.


“살 수 있어.. 그래.. 살 수 있겠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살아남을 것을 주문같이 외우며 걸어가던 그 소녀 앞에 얼어붙은 개울이 나오자, 바삐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몸을 돌려 여태껏 자신이 왔던 길을 뒤돌아 보았다.


‘인형이다.’


그 생각과 동시에 그녀는 칼을 빼들었다. 그녀의 왜소한 체구와 걸맞는 무게감 없는 얇은 검이 둔한 빛을 뿜으며 그렇게 숲속 어딘가를 향해 방황했다.


“죽지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죽지말자.. 그리고 죽이지 말자.”

검을 쥔 채 눈을 감은 소녀의 입술에서는 모순된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 앞으로 다시금 겨울 풍경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무언가가 다가 오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커다란 눈이 열렸고, 연갈색 눈동자로 아무런 소리 없이 나타난 인형을 바라보았다.


“벨리안느 이얀.......”


그 인형이 소녀의 이름을 말했다.

말이 안되었지만, 어쨌든 인형의 입에서 완벽한 발음의 말이 흘러나왔다.

짧은 머리카락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그리고 인형의 나라, 유포레아스 공화국 소속임을 알려주는 제복을 입고 있는 그는 정말 사람을 닮아 있었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벨리안느 이얀. 5년여 동안 이름만 들어왔지 실제로 보는건 처음이군요. 저는 유포레아스 공화국의 의회 대리인, 엘제어 나쉽이라고 합니다.”


엘제어 나쉽이라고 밝힌 그 인형은 쾌활하게 자신을 소개했지만, 벨리안느는 분명 인형 3기의 마력을 느꼈기 때문에 단 한 기의 모습만이 드러내자 불안에 휩싸였다.


“3기,,, 였어... 나머지는?”


“3명이겠지요.”


엘제어 나쉽이라고 소개한 인형은 보기 좋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쾌할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3기야.”

하지만 벨리안느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좋을대로 하십시오. 중요한 것은 제가 지금 의회의 대리인으로서 대륙의 공적 앞에 서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벨리안느는 고개를 저었다.


“칼보다는 혀를 믿겠다는 의회의 뜻입니다. 수천의 군대를 보내어 당신을 사로잡기 보단 대화가 가능한 사람을 보내기로 했고, 그게 바로 접니다. 일종의 협상자라고 할까요?”


협상이라는 말에 벨리안느는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슨...?”


엘제어 나쉽은 잠시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기 위해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마침내 앞에 있는 그녀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단어들이 머리속에 완성되자 입을 열었다.


“무슨 협상이냐구요? 물론 당신의 귀환입니다. 귀환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하지만, 어쨌건 저희 측의 입장에서는 귀환이라고 밖에 표현을 못 하겠네요. 공화국을 세우는데 큰 공을 하신 분이니까요.”


벨리안느는 그 말에 커다란 혐오감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과오가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인형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더 큰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인형의 말을 곧이 곧대로 따를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소녀는 칼을 움켜잡고, 공격 자세를 취하는 것으로 충분한 대답을 했다.


“아마.. 거절의 의미겠군요... 글쎄, 벨리안느.. 당신은 일생을 쫓겨다니며 살았습니다. 인생의 최후까지 그러고 싶습니까? 어느날 누군가의 칼에 맞아 피가 꾸역꾸역 올라오는 것을 양손으로 막으며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습니까?

더 할 나위 없는 협상 조건입니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며, 언젠가 당신이 경험했던 실험 대상이 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다만 당신을 우리 공화국으로 안내하는 것뿐이죠.”


하지만 그녀는 오래전에 마음을 굳힌지 오래였다. 인형에게 다시는 절대로 당하지 않겠다는 그 맹세로 지금까지 버텨왔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칼을 더욱 단단히 쥐면서 그 인형에게 겨누었다.


그리고 그 행동을 본 엘제어 나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잠시동안 그냥 내버려두어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한 소녀를 유포레아스 공화국이 나서서 잡으려 하는 이유를 생각 해보았다.


전혀 무용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제어 나쉽은 의회의 대변인이었고, 따라서 의회의 결정을 실현시키는 것이 그의 의무이자 일이었다. 물론 의회에서도 이런 골치 아픈 일이 생길까봐 그에게 내린 또 다른 결정도 있었다.


거부할시 무력을 써서 생포하거나 죽여라.


엘제어 나쉽은 자신에게 중무장한 부대가 있다면 가능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진 병력은 고작 2명의 호위병이 다였고,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 두 명은 저 소녀를 붙잡기에 턱 없이 부족한 숫자였다. 여러모로 복잡해진 그는 차라리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이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말로는 안 될 것 같군요. 저희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개국공신의 지위를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긴 당신은 그저 우리들에게 놀아난 것뿐이지만.”


벨리안느에게 참을 수 없는 독설이 계속 쏟아졌다.


“한때는 당신 또한 대륙 최고의 마법사라 칭송 받던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지금은 만인의 적.... 그냥 죽어 주십시요. 당신은 우리의 비밀을 위해서라도, 무혼 반란 때 죽은 인간들의 원한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죽어야 됩니다.”


하지만 자신은 죽어서는 안되었다. 더 큰 증오를 낳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죽어서는 안되었다.


“싫어.”

벨리안느의 말은 엘제어에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끔 하였다.


“그럼... 즐거운 하루 되시길..”

엘제어 나쉽은 그 말을 하고 뒤로 빠져 앙상한 겨울 숲을 내달렸다. 그리고 그것을 본 벨리안느는 재빨리 신체향상 마법을 자신에게 건뒤 동시에 인형이 나올 곳을 감지했다. 예상대로 저 먼발치에 숨어 있던 인형 2기가 그녀를 향해 돌진 해오기 시작했다.


벨리안느는 예측했다. 머리 위 보단 아래쪽을 공격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그리고 그 예측은 정확했다. 벨리안느의 머리를 치려던 인형은 목표물이 갑자기 앞으로 뛰쳐나가자, 착지점을 바꿀 수 밖에 없었고, 눈 밭을 헤치며 달려들던 인형은 예상치 못한 벨리안느의 돌격에 방어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 짧은 순간, 벨리안느는 앞에 있던 인형을 향해 눈덩이를 걷어찼고, 흩뿌려지는 눈 사이로 검을 내찔렀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인간을 닮았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인형인 점.

외형은 인간의 그것과 닮았지만, 인형의 내부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 물론 인간의 장기를 본떠 만들어진 것들도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사치품으로 파괴 되더라도 움직이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결국 인형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는 움직임의 원동력인 마법진이었고, 대부분의 인형들의 마법진은 뒷목 부분에 마법진이 존재했다. 따라서 마법진이 아닌 나머지 부분, 예를 들어 검이 어깨를 관통하더라도 전혀 문제 될게 없었다.


“날카로운...”

분명히 아까전과는 다른 대화 방식의 인형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보다는 목을 찔러들어간 자신의 공격이 실패했다는 것에 낙담했고, 그럼에도 일말의 희망을 담아 검을 비틀어 뺐다.

쇄골 절반을 갈아버리며 검이 빠져 나왔지만, 희망과는 다르게 인형의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뼈와 칼이 마찰되는 끔찍한 느낌에 벨리안느가 주춤하는 순간, 인형은 왼손으로 검을 다시 쥐며 반격을 했고, 그 사이 다른 인형도 뒤에서 공격 해왔다.


잠시뒤 두개의 칼날이 벨리안느 주위에서 춤을 췄고, 검을 받아치던 그녀의 오른팔 소매가 찢어지고 선혈이 터져 나왔다.


“큿···”

외마디 비명과 함께 벨리안느는 검을 놓쳐 버렸다. 대신, 몸을 옆으로 내던져 곧바로 목이 떨어지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 뿐이었다.


검을 놓친 이상 더 이상 위협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 인형들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벨리안느를 포위하며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토록 연약한 소녀가 어떻게 5년 동안이나 유포레아스 공화국의 추격을 물리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진 채 그녀를 마무리 지으려했다.


“죽지말자... 죽이지 말자..”

인형들이 다가오고 있었음에도 벨리안느는 눈을 감은채 그 주문이 자신을 지켜줄 듯 계속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죽지말자... 죽이지 말자..”


“죽지말자... 죽이지 말자.... 아니.”

그녀가 짧은 숨을 들여쉬었다. 그리고는 무겁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지말자...그거면 충분해.”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질끈 감은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인형들은 이제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동시에 검을 들어올렸다.


엘제어 나쉽은 자신이 싸움터에서 내뺀 것이 잘한 것인가를 따질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재앙으로부터 벗어나려는듯 있는 힘껏 뛰는데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음속 한편으로는 호위병들이 그녀를 처리했을 수도 있다는 실낱 같은 희망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생각되자 작은 바위 위로 올라간 그는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 동시에 한가로울 머리를 위해 검술이 뛰어났다면 자신도 과연 호위병과 같이 싸웠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모든 유포레아스 시민들처럼 엘제어 또한 신체 향상은 가능했기에 뛰어난 검술이 없이도 일반 인간 병사보단 강할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상대가 대륙의 공적이라는 것에 있었다. 결국 대륙 최강의 검사라 일컫는 벨로나 세라트너의 검술 실력이 아닌 이상 호위병 곁에 있어봐야 피해만 늘렸을 거라 생각하며 질문의 결론을 지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이 뛰어왔던 길을 유심히 살피던 엘제어는 예상했던 참상이 생각보다 늦어진다 생각했다. 그래서 어떤 우연으로, 자신에게 굉장한 행운이 발현 되어 대륙의 공적이 처리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마력이 응집되는 것을 느낌과 동시에 굉음이 들려왔고, 이어서 불어온 바람에 엘제어는 바위 밑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거대한 압력을 받던 무언가가 기어코 터지고만 듯한 소리였고, 그 소리에 고개를 힐끔 내밀어 바위 넘어를 본 엘제어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현실인지 의심했다.


엄청난 양의 눈들이 거친 파도처럼 자신에게 밀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살아남았군요. 벨리안느 이얀.”

그렇게 눈 파도가 주위의 모든 나무들을 부수며, 바위를 뚫을 기세로 엘제어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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