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상흔의 잔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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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대화
작품등록일 :
2020.05.11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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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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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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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3.끝)

DUMMY

“공격해!”


타하란의 몸이 먼저, 이어 명령이 뒤따랐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엘제어 또한 검을 뽑아들고 달려들었다.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엘제어와 타하란은 벨리안느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만!!!!!”


벨리안느의 외침과 동시에 작은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엘제어와 타하란은 그대로 십여 미터를 날아가 버렸다. 그 둘의 비행을 바라볼 틈도 없이 벨리안느는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칼부림 소리가 들려오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재빨리 고개를 돌려 그 소리가 들려온 곳을 보았을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인형과 월영군 간의 압도적이지만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만...”


그 소리에 맞춰서 누군가의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목에서 피가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비명소리는 벨리안느의 목을 움켜쥐었고, 하얀 눈에 흩뿌려지는 붉은 선혈은 벨리안느의 꽉 깨문 입술에서도 나왔다.


“안돼..더 이상은..”


팔이 잘려 나간 인형이 그 팔을 쥐고서는 몽둥이처럼 휘둘렀다. 그 어이없는 무기에 월영군은 코가 부서지고, 비명을 지르며 주춤거리다 옆에서 날아온 칼에 그 비명 소리를 멈추었다.


그렇게 그들의 죽음이, 그들의 비명이, 그들의 붉은 피가 벨리안느를 저 깊은 악몽 속으로, 지옥 속으로 잡아끌고 내려갔다. 아니, 지옥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방법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 방법이 떠오르자 벨리안느는 제멋대로 입 밖으로 나온 외마디와 함께 마법을 일으켰다. 땅속에서 무언가가 튀어오르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깊은 눈 속의 빈 공간을 팽창시켜 거대한 눈 폭발을 일으키는 마법이자, 모든 죽음을 잠시나마 종결시키는 방법이 전투지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모든 곳에서 눈이 솟구쳐 올라왔다. 하얀 증기를 꼬리에 단채 하늘로 솟구친 눈덩이들은 각기의 의지를 가진 듯, 전투를 벌이는 월영군 병사들과 인형들을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땅 밑에서 돌덩이처럼 단단해진 눈덩이는 묵직한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고, 몇 몇의 병사, 혹은 몇 기의 인형을 맞추었다.

그렇게 몇 분 동안 계속해서 연차적으로 다른 곳의 눈들도 폭발하며 올라가 불우한 병사들과 인형들을 덮쳤고, 수 백 년에 걸쳐서 완성된 눈의 평원이 단 한순간에 적나라하게 바닥까지 들어났다.


그리고 평화가 찾아왔다.


칼부림 소리도, 비명소리도, 눈에 그려졌던 피의 그림도 모두 하얀 눈으로 지워졌다.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하얀 설원에는 벨리안느 혼자만이 남아있었다.


벨리안느는 자신의 머리위에 수북히 싸인 눈들을 털었다. 그리고 그녀의 허리까지 찬 눈들을 헤치며, 힘겹게 한 걸음 한걸음 걸어갔다. 벨리안느가 몇 발자국 걷다가, 멈춰서 하늘을 올려보며 생각했다.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잠시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벨리안느는 곧 자신의 할 일을 떠올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었다고..’


그러나 결국 몇 걸음 가지 못한 채 벨리안느는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흐느끼는 것도 잠시 벨리안느는 어디선가 들려온 소리를 따라 고개를 재빠르게 돌렸다. 그리고는 전투지에서 가까운 나무 아래에 누군가 쓰러진 채로 거칠게 기침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사람이라도 구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벨리안느는 뛰기 시작했다.

눈을 헤치며 힘겹게 어느정도 다가가자 벨리안느는 그 쓰러진 자가 사빈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서는 가슴이 철렁했다.


“......”


가까이 다가가서 본 사빈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오른쪽 무릎 아래 부분이 문질러져서 다리가 아무렇게 돌아가 있었고, 복부에는 관통상이 두 군데나 있었다. 벨리안느는 자신의 지식상으로, 경험상으로 이미 사빈은 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두려움에 빠졌다. 이대로 모른척 돌아갈까라는 생각까지 하였지만, 같은 인간이기에 벨리안느는 사빈을 일으켜 세웠다.


“으윽...”


사빈은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지 작은 신음소리를 내며 벨리안느의 부축을 받아 바른 자세로 앉혀졌다. 그렇게해서 바라본 것이 벨리안느의 얼굴이었고, 사빈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웃음을 지었다.


“살아남았구나.”


벨리안느는 그 말에 울컥했다. 도저히 사빈의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숙인채, 어떻게든 지혈을 해보려 하였다.


“글렀어. 내버려둬. 월영군인 이상 죽음 따윈 두렵진 않다..하지만..”

사빈이 고통이 심한 듯 잠시 인상을 쓰며 말을 끊었다.


“하지만... 타게테스가 홀로 자라날게 미안하군.”

딸의 이름을 듣자 벨리안느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입술을 꽉 깨물고 흐느끼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더욱 숙이며, 벨리안느는 그의 마지막 말을 들었다.


“살아남아라.. 이름 모를 소녀여.. 내 몫까지 살아라.”


그 말을 한 뒤 사빈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벨리안느는 본능적으로 그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의 죽음인 마냥 두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사빈은 마지막까지 벨리안느를 바라보며 웃음을 지으려 애썼다.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고통에 찬 얼굴에 미소를 띄우려는 괴기한 표정이 멈추었다. 그리고 사빈의 호흡도 멈추었고, 벨리안느의 울음도 멈추었다. 천천히 벨리안느는 사빈의 죽음을 맞이했다. 자신이 간접적으로 죽인 사람의 시신 앞에서 벨리안느는 잠시 동안 넋이 나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사빈의 죽음..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벨리안느는 대륙의 공적. 무혼반란의 원인. 80만 대륙민을 간접적으로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로 치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벨리안느는 그러지 못했다. 대륙의 공적이기 이전에 너무나 소녀다운 소녀였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자신의 고통이었고, 짐이었고, 원죄였다.


벨리안느는 사빈이 들고 있는 칼을 물끄럼히 바라보다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쥐었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눈에다 박고서는 칼날이 자신의 목을 향하게 했다.

누군가 뒤에서 밀면 그대로 칼날이 목을 꿰뚫어버릴 자세로 벨리안느는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살아남아라.. 이름 모를 소녀여.’


사빈이 남긴 말이 계속해서 벨리안느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나 벨리안느는 허리를 좀더 숙인채 칼날이 자신의 목에 더 가까이 닿도록 했다. 그렇게 벨리안느는 차가운 겨울을 품은 칼날 끝으로 자신의 맥박을 한참 동안이나 느끼고 있을 때였다.


‘살아남아. 그리고 증명해 보여. 그 때 결정해도 늦지 않아.’


4년 전, 월영시에 갇혀 처형이 이루어지길 기다릴 때 들었던 그 말.. 자신을 구원해준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그 말이 벨리안느 머릿속에 번쩍 떠올랐다.


“벨로나..”

벨리안느는 잠시 고개를 들어 마치 자신의 앞에 벨로나가 있는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의 모든 것이 궁금합니다. 비록 달라지는 것이 없을지는 몰라도, 제 스스로 당신을 판단하고 싶습니다.’


자신의 기억속의 벨로나의 말이 울려 퍼졌다.


벨리안느가 다시금 새로운 인생을 되찾은 그 날. 포기할 때로 포기해버려 자신이 어떻게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을 그 때 만난 자신의 이야기를 유일하게 들어준 사람.. 그 사람의 말 한마디로 시작된 사형수와 사형집행인의 대담.


사형수는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출생, 삶 그리고 인형의 반란을 도운 이유.


사형집행인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월영군에 입대한 계기, 가족, 그리고 죽은 동생.


그것으로 사형수는 새 삶을 얻었고, 사형집행인은 자신의 몰랐던 치명적인 재능의 여부를 알게 되었다.


‘작은 것에서 세상은 바뀝니다. 하지만 당신은 존재자체로 역사를 바꾸는 사람. 벨리안느.. 부디 살아남아 증명하십시요. 세상에게 당신의 죄와 능력 모두를 보여준 다음, 죽음을 맞이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뒤로 벨리안느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런 벨리안느의 맥박이 칼 끝에 닿아있었다.


벨리안느는 조심스럽게 숨을 들여 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느린 속도로 칼끝에서 멀어졌다. 그리고는 이미 싸늘하게 식은 사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저는 죽어요, 사빈.. 하지만...아직 저는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위해 살아남는 그런 파렴치한은 아니에요. 저도 곧 따라갈게요. 제 사명을 다하면 그렇게 할게요...”


벨리안느가 울먹거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일어나서 발걸음을 돌렸다.


‘살아남자.’


벨리안느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맑은 눈물이 떨어져 수북이 쌓인 눈을 따라 눈물 발자국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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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4장 - 개벽(開闢)_1화_ 선고 (1) 20.06.05 68 4 10쪽
34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2) +2 20.06.04 69 4 12쪽
33 3장 - 효시(嚆矢)_5화_전조_(1) 20.06.03 65 3 12쪽
32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2) 20.06.02 60 3 7쪽
31 3장 - 효시(嚆矢)_4화_구금소 (1) 20.06.02 64 3 9쪽
»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3.끝) +2 20.06.01 63 3 9쪽
29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2) 20.06.01 64 3 11쪽
28 3장 - 효시(嚆矢)_3화_만인의 적이 지나가는 길(1) +2 20.05.31 67 4 8쪽
27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2) +1 20.05.29 73 4 12쪽
26 3장 - 효시(嚆矢)_2화_하늘층 회의(1) 20.05.29 75 4 7쪽
25 3장 - 효시(嚆矢)_1화_무언 마법사의 조우 20.05.28 79 4 10쪽
2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끝) 20.05.28 83 3 11쪽
2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4) +1 20.05.25 90 5 10쪽
2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3) 20.05.25 88 4 9쪽
2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2) +2 20.05.22 91 6 7쪽
20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8화_일체일념(1) 20.05.22 99 5 8쪽
19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2) 20.05.21 111 5 10쪽
18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7화_ 별빛과 망루(1) +1 20.05.21 106 7 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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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5화_담소 (談笑) +1 20.05.18 134 6 10쪽
15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4화_월몰 기도식 20.05.18 123 6 9쪽
14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2) 20.05.16 133 5 10쪽
13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3화_스승과 제자 20.05.15 178 8 9쪽
12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2화_흠결 20.05.15 178 6 7쪽
11 2장 - 일체일념(一體一念) _1화_만인의 죄인 20.05.14 283 7 12쪽
10 1장 - 악몽(9) 20.05.14 249 6 12쪽
9 1장 - 악몽(8) 20.05.13 261 6 11쪽
8 1장 - 악몽(7) 20.05.13 291 7 8쪽
7 1장 - 악몽(6) 20.05.12 301 7 7쪽
6 1장 - 악몽(5) +2 20.05.12 403 10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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