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자식인가(3)
황야에는 그림자가 져 있다.
시체의 그림자다.
그 그림자 위로 돋친 창날들이 있다.
죽은 몸뚱이를 꿰고 있는 그것들.
선혈이 뚝뚝 떨어지는 그것들은 어둠을 질료質料로 해서 만들어졌다.
평소라면 괴물들이 꼬여야 마땅할 짙은 혈향이 풍긴다.
그러나 아무도, 무엇도 없다.
핏방울마저 어둠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오직 곱사등이의 시체뿐.
핏기 없이 바싹 마른 몸과, 거기서 터져 나온 고름만 메마른 대지를 적신다.
이내 그것마저 게걸스런 어둠에 먹혀 사라졌다.
시체가 사라진 뒤에도 그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았다······.
* * *
콜테르는 초조한 낯으로 피부에서 묽은 타르를 뿜어냈다.
그는 인질들을 가두어 놓은 방 근처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것은 30분 전의 일이었다.
그와 대단히 친하게 지내던, 방사능으로 이어진 형제를 오랜만에 어머니의 집에서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그가 중상을 입어 제대로 능력을 쓰기도 힘든 상태라는 점만 빼면, 오랜만의 즐거운 재회였다.
전류를 다루는 강력한 능력을 지닌 녀석이었고, 그랬기에 파이로도 한동안 녀석을 패밀리로 영입하려고 시도하곤 했었다.
녀석의 성적 취향이 지나치게 확실한 탓에 결국은 포기했지만.
녀석은 드워프 성애자였다.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드워프들을 상대로만 성욕이 동하는 놈이었다. 평범한 인간들을 상대론 서질 않는단다.
자기를 패밀리로 들이고 싶다면 드워프 성노예를 매일 하나씩 지급해야 할 거라는 터무니없는 요구조건에 파이로는 물론이고 다른 패밀리 리더들도 다 학을 떼고 말았다.
드워프들은 전부 고급인력인 데다가, 가뜩이나 다들 지저로 내려가 버려 지상에서 찾기도 힘든 희소종족이다.
그런 드워프들을 하루에 하나씩 강간한 후 목 졸라 살해하는 비효율적인 성벽을 지닌 녀석을 쉽사리 가족으로 받아들일 패밀리가 있을 리 없다.
그래도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성적 취향에 관한 부분도 경제성이 너무 떨어져서 그렇지, 오히려 그 정도 성벽이면 지극히 정상적인 축에 속했다.
당장 콜테르 그 자신만 해도······.
'녀석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지.'
아무튼 역시 오랜만에 만나도 친구는 친구였고, 콜테르는 부상의 아픔을 참아가며 녀석과 오랜 해후를 나눴다.
어머니의 집 어딘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처음에는 또 어떤 놈들이 공공장소에서 노예들을 즐기는 몰상식한 행동을 하는 줄 알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아니었다.
쾌락에 신음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오직 지독한 공포 속에서 울부짖는 괴성만 들려왔다.
비명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점점 더 동시다발적으로 들려왔다.
누군가, 어떤 다수가 싸우는 듯한 무기 휘두르는 소음이 들렸고,
터지고 날아가는 소리가 났다.
뭔가가 잘못되었다.
팔다리가 다 뜯긴 채 누군가가 기어오며 ‘괴물이 나타났다!'고 소리치다 죽었다.
죽어가는 이들의 단말마가 들려왔다.
개 중에는 그가 아는 목소리들도 많았다.
각자의 휴식을 즐기던 방사능의 자식들이 전부 패닉에 빠져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집 지킴이는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등등의 절규를 소리치고 있을 때였다.
녀석이 나섰다.
트레이드마크나 다름없는 샛노란 전류를 번쩍이며, 여기 있는 형제들만 십수 명인데 무슨 걱정이냐며 당당하게 말한다.
다 같이 가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해결하고 돌아오자는 패기에 다들 감화되어 겁을 잊고 우르르 따라나섰다.
콜테르는 중상자인지라 도움도 되지 못할 게 뻔했고, 결국 뒤편에 남았다.
불안했지만 그래도 실력은 확실한 녀석이요, 방사능의 자식들이 몇인데 큰일 있겠느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능력이 약해지고 나니 덩달아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약이 미치도록 땅겼지만, 큰형한테 다 뺏기고 몰래 숨겨놓은 하나밖에 안 남아서 아껴야만 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노예 년과 함께 약으로 황홀경에 닿기 위해서는 꾹 참아야만 했다.
기다림 끝에 복이 오나니.
그는 형제들이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
그것이 불과 5분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여전히 비명소리와 사람 죽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심지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물어보고 싶지만, 물어볼 사람이 없다.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여전히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살롱밖에 없었다.
‘나이트 형은 꼭 이런 중요한 상황에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든든한 큰형 파이로마저 카멜라를 구하겠다며 휑 날아가 버렸다.
믿고 의지할 만한 패밀리가 전부 뿔뿔이 흩어지거나 전투불능이 되어버린 상태.
불길한 예감이 경종을 울렸다.
창칼을 눈앞에 두고 헐벗은 것만 같은 불안감이 뇌리에 엄습했다. 지금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취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찰바닥.
누군가 물 바닥을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하필이면 모퉁이에 가려져 보이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쓰러지는 듯한 소리와, 고함소리가 연달아 들려온다.
가까웠다. 몹시 가까웠다.
모퉁이 밖으로 나가면 바로 보일 지경이다.
찰바닥.
또다시 물 튀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콜테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폴루티드 포션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PP마약이 식도를 지나가자 그제야 떨림이 안정된다.
묽었던 타르가 다시 원상태의 시커먼 색으로 돌아왔다.
오염된 마력이 전신을 휘감으며 황홀한 기분과 함께 자신감과 괴력이 온몸에 차올랐다.
그는 지금 이 상태에서라면 어떤 괴물이 나타나든 다 부수어 버릴 수 있었다!
온전한 상태였을 때와는 비할 것이 못 되지만, 그래도 다시금 타르-거인으로 변신한 뒤 모퉁이를 돌아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던 차였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고통을 겪는 남자의 단말마가 울려 퍼진다.
타르로 만들어진 눈의 앞에 샛노란 번개가 공간을 강타했다. 고압 전류가 바닥과 벽, 천장을 타고 거미줄처럼 번뜩였다.
처음에는 그가 아는 그 녀석이 여기까지 밀린 채 싸우고 있는 줄로만 알고 어서 뛰어가 도와주려 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녀석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채, 피 흘리고 창백한 낯으로 죽어있다.
번개에 맞은 사람 특유의 리히텐베르크 무늬Lichtenberg Figure, 번개와 비슷한 모양의 붉은 흉터가 녀석의 전신을 가르고 있었다.
녀석은 그렇게 감전으로 죽었다.
눈 뒤집히고 코피 흐르는 꼴이 우스웠다.
그러나 웃을 수가 없었다.
방금 그 전류는 녀석이 쏜 게 아니었다.
녀석이 맞은 거였다.
번개를 다루는 녀석이 번개에 맞아 죽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웃지 못했다.
녀석을 죽인 자가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찰바닥.
물을 밟는 소리가 아니었다.
피 웅덩이를 지나치는 소리였다.
그 모든 방사능의 자식들이 전부 죽고 한 줌 핏물이 되었다. 그 핏물들이 한데 모여 바닥을 적셨다.
돌연변이들의 피가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순간 발에 닿는 굳은 핏물의 감촉에 타르-거인은 거대한 몸을 떨었다.
피와 고름, 공포에 떤 이들이 지린 오줌, 그 외 기타 등등······.
그 모든 것들이 달라붙어도 변하지 않는 검은색 사제복을 입은 자가 온다.
모든 돌연변이들의 악몽, 방사능의 변절자, 정화교단이 낳은 가장 끔찍한 괴물이 온다.
까마귀들의 왕King of Raven이 온다!
타르-거인은 푸른 장발과 하얀 눈썹, 그 모든 것이 새빨갛게 젖어 버린 악마의 모습을 보며 탄성을 내질렀다.
수십, 수백 돌연변이들의 시산혈해를 뚫고 오는 와중에도 여전한 하늘색 눈동자가 아니었다면 알아보지 못했을 얼굴이다.
[너는······!]
불타는 시청에서 보았던 그 여사제.
괴물 검사와 함께 다녔던 그 정화교의 사제가 여기까지 와 있었다.
[네가 어떻게! 네, 네년도 방사능의 자식이었구나. 저 녀석을 감전사시킨 것을 보니, 전류를 다루는 거냐? 아니면 설마 한 가지 이상의 능력을 지닌 건가!]
타르-거인이 뒷걸음치며 괴성을 내뱉었다.
까마귀는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그저 다가올 뿐이다.
[그런 강력한 능력을 지녔으면서 왜 정화교로 들어갔는가! 그 힘을 준 어머니 방사능께 부끄럽지도 않더냐!]
타르-거인은 피로 흥건한 바닥에 양팔을 박아 넣었다. 흘러넘치는 타르가 파도가 되어 앞길에 놓인 모든 것들을 휩쓴다.
자연히 걸어오던 여사제 또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타르의 급류 속에 파묻혀 버렸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검은 진액의 분출이 끝나고, 마침내 타르 속에 굳어버린 화석만 남았다.
타르-거인은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꿀렁이는 타르의 늪 위로 보글보글 거품이 올라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어······어?]
수위水位가 점점 낮아진다.
배수구로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온통 타르로 뒤덮인 늪지대가 폭발했다.
시커먼 기름에 젖은 사제가 튀어나왔다.
검은 늪을 찢어발기며 다가오는 그 모습에 등골을 타고 전율이 흐른다.
타르-거인은 턱 끝까지 와 닿는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타르를 토해내며 아무렇게나 소리 지른다.
[세상은 방사능이 지배한다! 저 황야에도, 괴수들의 영역에도, 핵겨울의 도시들에도, 방사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방사능이야말로 우리 삶을 지배하는 어머니요, 만물이요, 힘이다! 바야흐로 방사능의 자식들이 이끄는 시대란 말이다!]
“헛소리.”
[우리가 바로 신인류다! 방사능의 자식들만큼 우월한 종족이 존재하는가? 엘프도, 드워프도, 인간도! 다 우리보다 열등하다.]
검은 여사제는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도리어 점점 더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거인은 살집 가득한 양팔을 휘두르며 저지하려 한다.
타르가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동체가 달려드는 것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
[네 힘 또한 방사능에서 나왔다. 너 또한 이 시대를 이끄는 방사능의 자식이다! 우리는 남매라고······가족이란 말이다!]
허공을 가르는 파공음과 함께 날아온 거대한 타르 덩어리의 주먹.
여사제는 그것을 가냘픈 손 하나로 가로막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난 방사능의 자식이 아니다.”
* * *
“에드워드의 능력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
유논이 물었다.
불길이 사방을 감싼 채로 옥죄여오는 것을 검으로 갈라 돌파하며, 그는 그리 물었다.
파이로가 대답한다.
[자유도시 시장 에드워드 갈란 말인가? 알다마다. 같은 방사능의 자식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우리와는 동일선상에 둘 수 없을 정도로 역겨운 능력을 지닌 자지.]
“말해봐.”
[음?]
보랏빛 화염이 또다시 장벽 위를 휩쓴다.
그러나 유논은 눈썹과 머리카락에 불이 붙은 채, 벗겨지는 피부와 녹아내리는 신발을 개의치 않고 말했다.
“말해보라고, 네가 아는 갈란 시장의 능력을.”
수차례 불길에 휩싸이고서도 검 한 자루로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다가오며 태연하게 말을 건다.
파이로는 그리 집요하게 물어대는 유논을 질린 낯으로 바라보았다.
저건 괴물이었다.
절대로 타죽지 않는 괴물 같은 검사.
아무리 화염을 쏟아 부어도, 어떻게 해서든지 돌파해내고 가까이 다가온다.
“말해. 갈란 시장의 능력이 뭐냐!”
불길조차 주춤하게 만드는 서릿발 같은 목소리다.
파이로는 자기도 모르게 대답했다.
[방사능 흡수.]
- 작가의말
오늘 밤에 한 편 더 올라갈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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