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풍운록(귀주 貴州 6)
안소전을 향해 날카로운 예기가 몰려들고 있었다. 검이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알 수 있는 것이다. 몸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그리고 상대가 검을 회수하기 전에 자신의 몸을 앞으로 붙여 가고 있었다.
무릎을 들었다. 이것으로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대의 몸이 옆으로 틀어지고 있었다. 섣부른 판단은 예상외의 결과를 불러왔다.
틈이 생겼다. 그런데 적의 틈이 아니었다. 자신의 공격을 상대가 회피함으로 인해 생긴 틈이었다. 머리가 쭈뼛 서는 순간인 것이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위기를 알려주고 있었다.
고수였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하릴없이 당하고 말았을 자신의 공격이었다. 헌데 그것을 몸을 틀어 피하고 있었다. 상대는 생각이상의 강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피한 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적은 자신의 공백을 내버려 두지 않았던 것이다.
상대에게로 회수되어지는 검이 그대로 옆구리를 베어 오고 있었다. 위기였다. 그대로 주저앉으며 다리를 벌렸다. 사타구니까지 바닥에 닿은 것이다. 그리고 허리를 앞으로 눕혔다.
“우우우웅! 휘익!”
검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가고 있었다. 목덜미에 땀방울이 솟아났다. 그만큼 절박한 위기였던 것이다. 소전의 중심은 바닥에 깔린 상태였다. 힘을 실어야만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었다.
굽힌 허리를 비틀어 억지로 회전을 실어보았다. 그리고 팔을 회전방향에 따라 뻗었다. 상대가 뒤로 반걸음 물러서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의 발끝이 손에 걸리고 있었다. 그러나 충분한 힘이 실리지 못한 까닭에 타격을 줄 순 없었다.
상대의 중심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몸을 앞으로 굴리며 일어서는 소전이었다. 그 와중에도 공격을 병행하고 있었다. 일어서는 탄력을 발에 실어 무릎을 노린 것이다. 상대의 실력으로 보아 걸려들지는 않겠지만, 만약에 피하지 않는다면 무릎이 박살 날 것이었다. 허나 상대는 역시 고수였다. 그다지 어렵지 않게 피한 것이다.
일어선 소전이 상대를 살피고 있었다. 흡족했다. 이것은 비무가 아닌 생사결 이었다. 운이 좋은 것이다. 이런 상대를 만난다는 것은.
어느새 주위는 비워져 있었다. 오직 하나의 상대만을 남겨놓고 다들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상대의 얼굴이 보였다. 대단한 기세를 보이고 있었다. 자세를 바로 하고 상대를 주시했다. 상대 역시 경시하지 못하고 검을 바로 하고 있었다.
상대의 검 끝이 자신의 미간을 향하고 있었다.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쉽지 않은 상대인 것이다.
동료들이 가을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낙엽처럼 속절없이 쓰러지는 상황임에도, 상대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리도 대단한 기운을 가진 자가 자신의 공격유형까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수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모처럼 묘한 흥분이 일고 있는 것이다.
안소전이 칼을 들었다. 그러나 쉽게 공격을 할 수가 없었다. 대치 상태가 길어지고 있었다. 상대를 주시한 채 미동도 없는 두 사람 이었다. 어느덧 서로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둘의 실력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치상태가 길어지는 까닭인 것이다. 그러던 둘이 동시에 한 발씩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곽우의 주변은 온통 적들의 시체로 뒤덮여 있었다. 그랬음에도 아직 적은 많았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유가 있다 보니 수하들을 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크게 몰리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수하 하나에 서너 명의 적들이 붙어있을 뿐이었다. 저 정도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의 눈에 안소전의 모습이 들어왔다. 제법 대단한 기세의 사내가 소전과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 주변엔 다른 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배려를 해준 것으로 보였다.
저들은 무인들이었다. 무인이기를 포기한 자들도 있었지만, 자신들로 인해 무인의 혼이 깨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안소전이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운남의 안소전이라 하오”
칼을 갈무리 하고는 포권을 하면서 신분을 밝히는 소전이었다. 정식으로 상대를 인정한 것이다.
“귀주 천인대를 맡고 있는 오탁이오.”
상대 역시도 일단 검을 내리고 마주 인사를 하고 있었다. 상대는 천인대주였다. 오탁이라면 들어보았던 이름이었다. 귀검(鬼劒)이라는 별호로 제법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안소전은 검을 사선으로 내리고 있었다. 선공보다는 받아치겠다는 것이다. 상대의 눈꼬리가 살짝 떨렸다. 소전의 자세는, 어지간한 빠르기를 가지고 있는 자가 아니라면 취하기 힘든 자세였기 때문이었다.
오탁은 미동도 않고 있었다.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소전이 천천히 중심을 옮기고 있었다.
앞으로 내민 오른발로 중심을 잡고 있었던 몸이 왼발로 체중을 옮겨가고 있었다. 오탁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공격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제든지 반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면, 함부로 중심을 이동 할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움직이는 소전이 아니라고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완전히 중심을 이동시킨 소전의 자세가 변해 있었다. 그의 칼이 어느새 오탁의 검 끝을 겨누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은 움직임을 멈췄다. 호흡도 은밀해야만 했다. 혹여 상대에게 호흡을 읽혀 버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공격을 당하게 되는 까닭이었다. 그것은 승부를 가를 만큼 치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도 상대도, 서로가 숨을 쉬고 있기는 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느리고 은밀한 호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루한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끈끈한 공기가 그들의 몸을 덧씌우고 있었다. 공평하게도 양쪽 모두 그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었다.
소전의 칼이 오탁의 검 끝을 살짝 스치며 한 치 정도 들어갔다. 오탁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또 다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그들의 승부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소전의 칼끝이 살짝 내려오더니 반대편으로 옮겨졌다. 손목을 이용한 순간적인 움직임이었다. 오탁이 움찔했다. 상대의 심리를 파악하던 소전에게 그것이 느껴졌다. 그의 도발에 오탁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흔든다면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었다.
소전의 왼쪽어깨가 살짝 내려갔다. 그에 따라 그의 칼이 약간 비스듬하게 눕혀지게 되었다.
오탁이 그대로 한 발 물러서고 있었다. 소전의 도발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기회였다. 상대는 그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그가 공격을 한다면, 경직된 상대의 몸은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지 못할 것이었다.
이미 중심은 왼발에 있던 상태였다. 상대적으로 오른발은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소전의 왼발이 지면을 박차고 있었다. 칼은 대치상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한 채였다. 팔꿈치가 아직도 굽혀져 있는 것이다. 그것이 펼쳐지게 되는 순간, 칼의 상태로 보아 상대는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옆구리까지 길게 베이고 말 것이었다.
그러나 오탁도 녹록치 않았다. 검을 거두어 오른쪽 가슴위에 세운 것이다. 소전의 칼이 향하는 곳이었다. 이대로 간다면 다시 지루한 싸움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탁은 모르고 있었다. 무한전투로 다져진 소전의 감각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소전의 오른발은 크게 내딛어 지고 있는 중이었다. 바닥에 닿기 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가는 비문의 사람들 외에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오탁이 방어를 위해 검을 거두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칼을 밀어봐야 소용없다는 것은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소전이 내딛던 발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기술이었다.
오탁의 사타구니가 발끝에 살짝 걸리고 있었다. 제대로 된 타격은 아니었지만, 약간이나마 충격은 받을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족한 것이다.
이미 승부는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오탁의 몸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중심이 옮겨진 소전의 몸은 바닥으로 내려앉으며 왼발을 돌리고 있었다. 있는 대로 탄력을 받은 왼발의 회전에 오탁의 발목이 걸려들었다.
“퍽, 쩌적!”
소전이 한 바퀴 더 돌면서 그 탄력으로 몸을 세웠다. 발목이 부러진 오탁은 이미 전의를 잃고 있는 것이다.
당사자들은 손에 땀을 쥐며 승부를 벌였지만 곽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소전의 칼이 오탁에게 향하는 순간 곽우의 외침이 들리고 있었다. 둘의 승부에 관심을 가지고 달려오던 곽우였다. 하지만 그가 둘에게 다가오기도 전에 벌써 승부가 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만!”
칼끝이 오탁의 심장에 닿은 채 멈춰 있었다.
오탁은 수치스러웠다. 그런 감정을 어찌해야 할 지 막막했다. 지금까지 겪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상대는 강했다. 하지만 지금의 결과가 나오게 된 것은 상대의 강함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나태함이 불러온 패배인 것이었다. 그것이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분노가 솟구치고 있었다.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처음 곽우의 말이 연무장에 울렸을 때 내심 자괴감을 가지게 되었던 오탁이었다. 부끄러웠다. 정말로 쥐구멍이라도 있었다면 들어가고 싶었을 만큼 얼굴을 들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발뺌 할 생각은 없었다. 과오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상대의 칼끝이 심장에 닿아 있었다.
‘거기서 그런 발길이 나올 수 있었다니... 하루 이틀 반복해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동작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자가 아닌가? 허어, 면목이 서질 않는구나. 홀로 잘났다고 거들먹거리며 단련을 게을리 한 결과로다.’
자책하는 와중에도 소전의 공격을 되새겨 보는 오탁인 것이다. 소전의 칼이 심장에 닿아 있었지만 이미 관심 밖이었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이 강호였다. 자신은 무인인 것이다
‘다시 붙는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책은... 없다.’
곽우가 다급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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