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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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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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6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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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7쪽

갇혀버린 자들

DUMMY

미리암, 황금의 여인이 속삭였다.


[일어나. 잠꾸러기.]


그게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입모양과 손으로 하는 대화인가. 들은 건지 눈으로 본 건지도 모르겠다.


무음의 세계. 또, 묘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목소리의 말대로 이제 일어나야 할 때였다.


사막 같은 갈증에 눈을 떴다. 수분이란 수분은 모조리 온몸에서 빠져나간 듯했다. 피부로 물을 마실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롬은 이리저리 팔이나 다리를 뻗으려 애썼다. 그러면 팔다리가 흐느적하고 밍기적대며 움직인다.


마치 에레시아 사막의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 길게는 5년까지. 건기에 말라버린 강바닥에서 비나 웅덩이를 만나길 고대하며 끝까지 버텨내는 물고기처럼.


뭔가 액체 같은 게 있길 바라면서 롬은 몸을 비틀었다.


“으으...”


그러자 손끝에 뭔가 축축한 게 닿았다. 도자기 특유의 매끈함을 따라 맺힌 이슬. 롬은 그것을 움켜주고 바로 입으로 가져갔다.


꿀꺽!


따끔한 감촉이 얼굴을 스치지만 개의치 않았다. 목구멍을 넘어가는 물기가 해갈을 돕는다. 그제야 롬은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자신이 누워있고, 어떤 침대에서 깨어났다는 걸 말이다.


이불 위로 후둑 하는 감촉이 일었다. 마시다가 넘친 물이 가슴이나 다리를 적신 것이다. 그렇게 멍하니 정신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목소리가 치고 들어왔다.


“세상에나. 구정물도 좋다고 마실 기세로군.”


롬이 누워있던 말고도 침대가 여럿이다. 침대 하나를 건너뛰고 자리한 남자가 말했다. 롬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게 뭔지도 깨달았다.


“어?”


꽃병이었다. 이제 보니 허벅지나 침대 위로 꽃잎과 꽃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롬은 무심코 입을 쓸어냈다. 그러자 묘한 흙 맛이 입에 감도는 것 같기도 했다.


치익.


“살아있는 걸 축하한다고 해야 할까.”


목소리는 라이터의 불을 댕겼다. 마력으로 피어오른 불길이 연초를 태운다. 연기를 빨아들이고 숨을 내뱉는다. 달콤하고 씁쓸한 것이 폐부로 파고들었다.


“아니면 산송장이 걸어 다니는 걸 안타깝게 여겨야 할지.”


딸각.


록펠은 라이터를 여닫았다. 손에서 노니는 그 찰칵거림을 반복하면서 1기단장은 연초를 손가락 사이에 꼈다.


“뭐, 나도 남 말 할 처지는 아닌가.”


록펠은 얼굴에 난 흉터를 기이하게 꿈틀거렸다. 비웃듯이 미소 지은 그는 롬에게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그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손이. 붕대로 감겨있는 그 묘한 짧음을 보이면서 록펠이 이죽댔다.


“시체의 방에 어서 오라고.”


찌릿하는 기억과 통증. 롬은 제 머리나 목을 매만졌다. 아직 제대로 붙어있나 싶었다. 마지막 기억이 그렇게 만들었다. 소름끼치는 부리가면에게 붙잡힌 기억이었다.


“후우, 거기가 아니야. 귀 뒤를 만져봐.”


록펠은 누워있는 채로 오피엄의 연기를 내뿜었다. 그 말대로 귀 뒤에 손을 뻗었다. 순간 흠칫했다. 아물고 나면 생기는 묘한 살의 들뜸 같은 게 느껴졌다. 그것이 귀 뒤를 따라 경추 위쪽까지 이어져 있었다.


명백한 수술 흔적이었다.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솜씨가 대단하군. 그거 아나? 그런 수술을 받은 자들은 크게 두 종류라는 거.”


록펠은 연기를 쭉 빨아들였다. 몽롱한 기분이 덮쳐왔다. 입이 조금씩 나불거리게 두었다.


“첫 번째로는 승천자를 모시는 충직한 신하들과 기사들일 테고.”


담배연기가 풍기는 어지럽고 달콤한 냄새가 코에 받힌다. 롬은 그것을 손으로 흩어냈다. 외팔이 1기단장은 말을 이었다.


“나머지로는 사상범이나 반역자들. 극악무도한 자들 정도일까. 이 도시는 그런 것들조차 쓸모 있게 만들 셈인 모양이지. 족쇄를 채우고 도시를 굴릴 수 있게 만드니까. 크크, 그쪽은 어디쯤 속해있는 거 같나.”


롬을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뭐냐고. 록펠은 답을 요구하는 벙어리의 눈길에 피식댔다.


“말했잖아. 족쇄라고.”


록펠은 친절하게 부연 설명해주었다.


“네가 어딜 가고 누굴 만나든 흔적이 남는 거야. 저 하늘에서 모든 게 다 보이겠지.”


그건 신이 보는 풍경과 비슷하리라. 그는 롬이 볼 수 있는 창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부유섬이 보였다. 하늘을 수놓은 그것들을 보면서 그가 말했다.


“언제든 죽을 수 있고, 어떻게든 잡히겠지. 저항하고 도망쳐도.”


외팔이는 다 태운 연초를 움켜줘서 으스러뜨렸다. 그는 꺼져버린 불똥과 연초를 구석에 내던졌다.


“얼마나 발버둥 치든.”


사실 그 족쇄는 비단 롬의 족쇄만은 아닐 거다. 하나를 채움으로써 모두를 묶어낸다. 거기에는 사이 나쁜 자매들도 있었다.


벙어리는 혼란을 정리하려 들었다. 담배 연기가 아른거리는 병실에서 그리했다. 1기사단장은 그런 롬의 노력에 툭 내뱉었다.


“조금 늦은 감이 있군. 사흘 만에 깨어난 건 알고 있나?”


“엣?”


“이미 모든 게 많이 진행됐어. 로드의 고뇌도 케케묵은 싸움도 말이야.”


록펠은 새로운 연초를 꺼내 물었다. 이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의 처지만큼이나 그랬다. 미약한 몽롱함에 취하면서 외팔이가 말했다.


“그 마을. 짐승들. 로드들의 싸움을 막았다고 들었는데. 왜지?”


뜬금없이 록펠은 그런 걸 물었다. 두서없어 보이는 그 말에 벙어리는 고개를 돌렸다. 하티 때도 느꼈다. 역시나 록펠이란 기사는 정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를 오래 보지 못한 롬도 어딘가 파괴적인 일면을 엿보았다.


“불경한 연모인가? 그것도 아니면 알량한 정의감?”


록펠은 자기 손을 들여다보았다. 하나밖에 없는 손을 보면서 느끼길. 이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엉망인 자신에게 퍽 어울리는 모습이다 싶었다. 여기까지 오고 나서야 안심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망설임 없이 움직일 수 있는지. 넌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나? 크큭, 그래서 그렇게 용기가 있는 건가.”


“...?”


롬은 그런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하티에게 물린 록펠의 뇌나 정신에 병이 침투한 게 아닐까 싶었다. 기사, 전사, 용병이 결손(신체 일부분을 잃음)을 겪고나면 찾아오는 트라우마나 우울증, 정신적 외상 같은 것 말이다.


사실 그 추측이 맞긴 했다. 반 정도는 그랬다. 이미 오래 전부터 록펠은 정신적인 결손을 겪고 있었다. 그건 실수를 범한 자의 딱하고 사소한 사정 같은 것이었다.


록펠은 오피엄이 주는 편안함과 몽롱함에 늘어졌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만은 족쇄를 채운 듯 무거웠다. 그마저도 벗어던질 수 있으면 진정 자유로울 텐데.


보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오랜 감금. 록펠은 갑갑함을 느꼈다. 그에 벗어나기로 했다. 그는 참지 않았다. 입이 멋대로 나불거렸다.


“이봐. 내가 비밀 하나 얘기해줄까?”


롬은 꺼림칙함을 느꼈다. 어둡고 어두운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베아트리스. 그 고귀한 탑의 부인은... 말이야.”


으직. 록펠의 안에서 족쇄가 부서졌다.


“내가 이 손으로 떨어뜨렸어. 지옥 같은 바닥으로 말이야. 크크큭.”


록펠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참지 않는다. 그건 간지러움이었다. 가려운 것 같기도 했다. 허파를 간질이듯, 지독하게 재미없는 이야기임에도 록펠은 웃음이 나왔다.


“이거. 이거랑 똑같은 걸로 말이야! 크크큭!”


그는 연초를 들어보였다. 자비의 꽃이 연기를 뿜어냈다. 자욱한 냄새. 영혼과 정신에 주는 안식. 그건 어떤 고통도 괴로움도 잊게 해준다. 그것이 설령 용서받지 못할 죄로 인한 고통일지라도. 차마 말로 하지 못할 구차함이라 해도. 자비는 그들에게 안식을 선사한다.


분명 상냥함의 꽃이리라. 추함마저 감싸 안는.


.

.

.


아주 잠깐만 옛날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옛날, 엘리자 바타니아는 숱한 독살시도를 견뎠다. 유년의 끝과 청소년기 전체를 통틀어서 그랬다.


메르아나 공작부인이 죽은 마차사건 이후 어느 날의 일이었다. 장녀인 엘리자 바타니아가 피를 토하면서 쓰러진 일이 있었다. 엘리자를 모시던 사람들은 경악했고 가문은 알게 모르게 떠들썩해졌다.


파헤쳐보니 엘리자는 오랜 중독에 시달려있었다고 한다. 그 수법과 용량이 치밀하기 짝이 없었다. 진상을 알게 된 사람들은 분노했다. 그리고 그 분노의 대상을 물색했다.


공작부인의 죽음으로 이미 조금씩 갈라지고 있었던 균열이 커지는 사건이었다. 사별과 건강 문제로 쇠약해진 공작도 분노를 드러냈다. 하지만, 일은 엄금에 부쳐졌다. 이 일은 공작가의 문턱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들었다. 허나, 늘 그렇듯 벌어지는 입이란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엘리자 바타니아. 그 가엾은 영애가 다시금 비극을 맞았다. 얼마나 슬프고 딱한 일이던가. 제 어머니의 죽음에 그치지 않고서 사악한 것이 소녀의 삶마저 빼앗으려고 하고 있었다.


여럿이 입을 모았다. 그러고 보면 가장 어둡고 사악한 것이 공작가에 드리웠더란다. 이미 지목한 마녀가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악녀가 있었다.


독기 어린 말들이 화살을 만들었다. 검은 귀부인 베아트리스를 향해 쏘아진 말들이었다.


베아트리스는 코웃음 쳤다. 그 화살을 맞으면서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는 듯. 악의적이고 진실 된 그 목소리들에 고고하게 받아쳤다. 있지도 않은 사실에 현혹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것이라 조소했다.


그 귀부인의 태도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이 의혹과 의심을 진실로 만들어줄 피해자였다.


엘리자 바타니아. 그 하얗고 푸른 아이에게 물었다. 당신이 원하신다면 거짓조차 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잃은 것에 대한 분노를 응당 쏟아내십시오.


엘리자 바타니아가 말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미혹은 불화를 키울 뿐.]


그 선언에 사람들은 입을 다물었다. 베아트리스는 그 말에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날이 이어졌다. 벌어지는 균열이 아물 듯 조용한 나날들이 이어진 것이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사건은 잊어졌다. 마찬가지로 엘리자가 중독증세를 보이면서 쓰러지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다시 처음으로. 그 소녀가 독살시도를 ‘견뎠다’고 했던가.


그 말대로 그런 나날이 이어졌다. 중독 이후에도 그녀는 그런 시도를 숱하게 받았다. 그런데도 소녀는 평범하게 생활했고, 위정자로서 성장했다. 그 성장과 위세가 경이로울 정도로 그랬다. 그렇기에 점점 사람들은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그 경이로움에, 강함에, 아름다움에, 고고함에 그리했다.


엘리자 바타니아는 초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배움 이상으로 알고, 할 수 없는 것을 하며,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뎠다.


실제로 그랬다. 그녀는 계속된 음독을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음식을 입에 머금고는 혀를 굴리거나, 천천히 씹는 버릇이 생긴 그때부터였다.


소녀는 견뎌냈다. 그 모든 것을 그랬다. 하지만, 늘 그렇듯 모두가 그런 것을 견딜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런 모습을 그냥 흘려 넘길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분노할 줄 아는 자가 있었다. 치밀하게 복수할 줄 아는 자가 있었다. 불의를 불의로 맞받아칠 수 있는 자가 있었다.


그건 엘리자 바타니아에게 매료된 기사였다.


기사는 충성했다. 진실로 그리했다. 때문에 소녀를 위협하는 자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때부터 기사는 칙칙한 진실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검은 바닥으로 귀부인을 떨어뜨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그 행위는 실로 옳았다. 엘리자를 향한 음습한 수작은 시들었다. 베아트리스가 점점 미쳐감에 따라 그랬다.


그리고 끝내 베아트리스는 덜미가 잡혔다. 증거들과 증언들이 모였다. 그녀는 미쳐감에 따라 냉정함과 철두철미함을 잃은 모양이었다. 최후에는 엘리자를 향한 적개심을 대놓고 표출해댈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마녀는 탑에 갇히게 된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


그래, 끝이었음에 분명했다.


.

.

.


“파하. 그렇게 끝났으면 좋았을 걸. 몰랐으면 좋았을 걸. 자세한 속사정 따위는 몰랐어도 좋았을 거란 말이야. 크큭.”


연초를 다 태운 록펠이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롬은 고개를 들었다. 매료된 기사가 보였다. 비틀린 자가 보였다. 균열의 기사가 보였다. 록펠은 피우는 걸로 부족했는지, 잘근잘근 마른 잎을 씹어댔다.


“엘리자와 엘리스. 엘리스와 엘리자. 왜 이름도 그렇게 비슷하게 지은 거람. 헷갈리잖아. 생김새도 이름도. 정말로 다른 배에서 나온 게 맞는 건가 싶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이 생겼지? 사람 헷갈리게.”


언젠가 롬이 겪었던 일이었다. 검은 것과 하얀 것. 바뀌어버린 정체성. 뒤바뀐 자리. 그걸 계속해서 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비극. 비극이지. 제 딸을 죽이려는 어미와 그걸 견디려는 아이. 세상에나! 미쳐버린 코미디구만. 끅끅.”


록펠은 웃다가 말았다. 웃음을 멈춘 그의 얼굴은 하나도 재밌어 보이지 않았다. 아리송한 듯 롬을 보고선 말했다.


“어차피 달라진 건 없어. 그 마녀의 증오는 진짜였다. 죽은 공작부인도 로드를 독살하려고 했던 것도. 난, 난... 잘못 된 건가?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균열의 기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의심이 병처럼 번진다. 암귀가 미혹처럼 증식한다. 아무것도 모르게 된 남자는 그에 저항하지 못했다.


록펠은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서성였다. 그러다가 자신이 있는 공간에 누군가 침범한 것을 보았다. 고개를 퍼뜩 든다.


롬, 롬이었다.


외팔이는 벙어리에게 물었다. 병신이 병신에게 물었다.


“싸움은 멈출 수 없어. 전쟁도 마찬가지야. 모두... 모두 그 여자가 시작한 거다. 로드께서 그 여자를 지키려할수록 벌어지는 거야. 피 흘리는 건 당연해. 그런데도... 그런데도 말이야. 너 말이야. 벙어리. 그래 넌 어떻게 할 거지?”


록펠이 다가왔다. 침대 위에서 롬은 몸을 긴장시켰다. 손에 쥐고 있던 꽃병을 고쳐 잡는다. 여차하면 집어던질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기사는 가까워지는 법 없이 멈춰 섰다. 그는 롬에게 입을 열었다.


“알게 되면 알거야. 결국 그런 거잖아? 알량한 마음으로 나설 수 없어. 그 마을에서처럼...!”


록펠은 기함을 토했다. 그러다가 끈이 뚝 떨어진 듯 방황했다. 아무것도 모르게 된 그 끝에 롬이 있었다. 기사가 말했다.


“결투재판이 있다. 토너먼트의 마지막 날. 자매들은 거기서 결착을 지을 거다.”


롬은 움찔했다. 돌아버린 눈길이 자신에게로 향했다. 마치 그 눈이 어떻게 할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롬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어떤 말도 써내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는 벙어리였다. 본래 이게 그의 자리였으니까.


상대방에게 전하지 못하는 아우성이었다. 닿지 못할 소리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어떤 생각도 나지 않았다. 모든 게 갑작스러웠고 정리되지 않았다. 새하얀 백지상태에서의 침묵이 일었다.


록펠은 눈을 깜박였다. 잠시 롬을 바라본다. 비틀린 기사는 방을 가로질렀다. 병실의 바깥으로 향하는 곳에 섰다. 그는 문을 밀고는 밖으로 나갔다.


끼릭!


그 직전에 말이 울렸다.


“엘리자 바타니아에게 영광을.”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 록펠의 모습은 헤르미아 어디에도 없었다.


.

.

.


거칠게 적어낸 이야기에 분필이 반으로 부서졌다. 그에 개의치 않고 모든 걸 적어냈다.


[---!]


“...그거 참 충격적인 이야기인데.”


헤르미아 외곽지역. 임시로 마련한 본부에서 아론이 퀭한 눈으로 롬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에 롬은 무언가를 더 적어내려고 애썼다. 목소리가 넘치려 들었다. 정리하고픈 이야기가 엄청나게 쌓여 있었다. 그에 아론이 손을 들어보였다.


말을 가로막고는 아론이 제 입을 열었다.


“예의 그 귀부인, 베아트리스 님 말이다. 지금 실종중이다.”


“머?”


멍청한 소리가 나왔다. 그에 아론은 더 복잡해지는 생각을 정리하려 애썼다. 지금 아론의 머리는 터질 것 같았다. 그런 와중에 1기단장 록펠의 행방도 묘연해졌다는 게 더 힘들게 만들었다.


“알현 다음, 헤르미아 궁에서 널 뱉어내고 다음 날에 받은 소식이야. 실종이라니... 아니, 실종이라고 하기엔... 시기도 상황도 너무 불온해서 이건 납치라고 봐야겠지.”


“!”


롬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 있으면 아론이 입을 열었다.


“...하루 전에 로드와 엘리스 백작의 결투 재판이 성사됐다.”


실종된 베아트리스. 그리고 수술 당한 롬. 이건 딱 보기에도 외통수였다. 볼모를 잡은 결투였다. 아론은 머리를 짚었다. 그는 롬을 가리키고 말했다.


“아무래도 된통 당한 것 같다. 우린 헤르미아에 오면 안됐어.”


기사단장은 얼굴을 어둡게 했다.


선택. 그래, 선택이었다. 지독할 정도로 엿 같은 선택지만 남겨둔 선택이었다. 이 모든 게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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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7 1 12쪽
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130 나쁜 계획 24.07.24 13 1 14쪽
129 별석의 제거자 24.07.24 11 1 12쪽
128 어설픈 동행 24.07.21 13 1 11쪽
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 갇혀버린 자들 24.07.16 14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5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1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4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4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4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5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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