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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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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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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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7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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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멍자국

DUMMY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롬은 기절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지금까지 걸어온 수라장이 무색할 정도다. 폭발 휩쓸려도 살아남았고, 붙잡혀서 고문당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화재, 중독, 습격에서도 제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가.


그에 비하면 성깔 나쁜 여자들의 펀치쯤이야 맞을 법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건만.


“방해하지 마아아! 나쁜 새끼야!”


꽥하고 소리를 지른 엘리스가 무릎 꿇은 롬의 등을 밟고 타넘었다. 심지어 등에 발자국을 남기고서. 곁눈질로 보이는 풍경이란. 그대로 도약해서 엘리자에게 주먹을 꽂으려는 게 보였다.


‘미친...!’


엘리자도 보고 있지만 않았다. 떨어지는 동체에 대고 발을 차올리려하고 있었다. 순간 혼란을 딛고 사람들이 그것에 주목했다. 다시 싸움이 이어지려와중에 롬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을 뻗는다. 그리곤 뛰어오른 엘리스를 잡아다가 뒤로 당겼다.


“윽!?”


얄상한 허리는 참 잘도 잡혔다. 그걸 뒤로 패대기치니 엘리자가 지른 발이 날아왔다. 롬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쌓아온 감정의 서사는 뭐였는지. 결코 중간에 회수하지 못할 발차기가 적의 빈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애석하게도 롬이 있었다.


“꾸엑!?


키 차이로 인한 발차기는 복부에 닿았다. 성대하게 차인 롬은 신음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겨우 수초 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철퍽!


날씨 탓에 남아있던 물웅덩이에 엘리자도 미끄러졌다. 그러고 있으면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주먹을 내지르다 방해당한 엘리스나, 차다가 미끄러진 엘리자나.


그리고 얻어맞은 롬은 창백해져서 색색대는 숨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우엑.”


사람이 제대로 얻어맞으면 입에서 침이 나올 정도로 아프다. 지금이 그랬다. 앞으로 수그린 롬은 충혈 된 눈으로 공터를 훑었다. 거기에는 엉망이 된 자매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하아.. 하아..”


엘리스는 잠시 땅에다 대고 숨을 쉬었다. 엎어져있던 엘리스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손톱자국을 따라 땅이 긁혔다. 울분과 분노의 방향이 엉망진창으로 변한다. 원망과 표현 못할 서러움 같은 게 올라왔다.


그런데도 황당해서. 녀석이 누구를 지키려는 건지 모르게 되어버렸다.


“기가 찬 놈.”


목소리로 낸 건 엘리스가 아니었다. 대자로 드러누운 엘리자였다. 자매들은 비틀비틀 일어섰다. 지저분한 방해에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롬과 자매들을 제외한 좌중들이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저자는 왜 방해하는 거야?”

“일어서네.”

“아직도 할 셈인가.”


자매들이 일어서자 롬도 일어섰다. 몸에 격통이 따라붙는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릎이 펴졌다. 창백해진 그의 얼굴 위로 두려움과 분노가 동시에 드러났다. 그건 제 삼자가 보기엔 웃는 듯 화나는 표정처럼 보이기도 했다.


몇 번 얻어맞는 통에 일어선 롬은 스스로도 잘 모르게 됐다. 뭣 하러 나선건지. 도대체 이 개고생을 하는 이유가 뭔지.


‘아, 모르겠다.’


양쪽 다 모르거나. 한쪽을 아예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롬은 제 기분을 해치는 게 뭔지 알았다. 마냥 손 놓고 보기가 힘들었다.


거창한 이유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제 눈앞에서 한쪽이 죽어나가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아서. 그게 살벌한 주먹싸움이라고 해도.


“에리...!”


벙어리의 목소리에 자매들이 반응했다. 공교롭게도 그 이름으로 시작한 싸움이었다. 차마 누군가에는 말하지 못할 정도로 사소한 이유겠지만 그랬다. 그래서 거슬리거나 신경 쓰이거나.


그 이름을 불리면 그럴 거라 생각했다. 누구를 부른 거람. 그런데 롬이 하나하나 그녀들을 노려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이내 손을 까닥였다. 마치 들어와 보라는 듯. 순간 모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사람들의 표정이 전부 그렇게 번질 즘.


롬은 뚜벅거리는 걸음으로 중간에 들어왔다. 자매들 사이를 가르고 선 그는 제 망토를 끌었다. 그리고선 처음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뒤로 던져버렸다.


“큽?!”


근데 자매들처럼 멋있게는 안됐다. 한번 목에 걸린 끈이 괴롭다. 몇 번 콜록인 그는 신경질적으로 망토를 패대기쳤다. 그리고선 제 딴에 가장 강해보이는 포즈를 취했다.


“미친놈인가...”


누군가가 중얼거리면 동조했다. 맥이 빠진 건 비단 그들만이 아니었다. 엘리스는 헛웃음을 냈다. 그 꼴이 너무 볼품없어 그랬다. 그렇다고 화가 안 나는 건 아니었다. 방해받은 것. 자신의 증오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어버린 것, 그리고 제 마음에 멋대로 상처를 낸 것.


여러 이유 중에 마지막이 가장 거슬렸다. 엘리스는 주먹을 꽉 쥐었다. 노려보는 게 엘리자에서 롬으로 변했다. 순간 곱지 않은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롬은 오금이 저렸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게 돼서 더 그랬다.


순간 엘리스의 안쪽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표출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홀린 듯 그녀가 걸어왔다. 걸음에서 뜀걸음, 이내 뛰어와서 하는 말이란.


“나쁜새끼야아아!”


말에 한 대 얻어맞고 그 다음은 물리적 충격이었다. 순간 진심을 담은 로우킥이 롬에게 작렬했다. 바짝 긴장하고 있던 롬은 피하지도 못하고 얻어맞았다. 아니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크악!?”


롬은 오금과 무릎이 동시에 꺾이는 아픔을 맛봤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반 바퀴를 굴러 바닥에 엎어졌다.


다리를 부여잡고 앓는 롬을 내려다본 엘리스의 눈에 분노가 서렸다. 그리고 가까이에서만 볼 수 있는 눈시울의 뜨거움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엘리스는 이마의 피를 닦아내는 척 그것을 훔쳐냈다.


“...아영지로 돌아간다.”


엘리스가 불현 듯 말했다. 그에 바로 반응한 건 레이첼이었다. 그녀는 롬이 난입했을 때부터 기회를 보고 있었다.


“예, 백작님.”


엘리스는 롬을 한번 내려다보고는 엘리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에는 냉기가 서렸다. 뜨겁게 끓어올랐던 심정이 한차례 가라앉았다. 하지만 언제고 터질 것이다. 지금이 아니더라도.


엘리스가 청기사들 사이로 걸어가자 사람들이 갈라졌다. 이대로 그냥 보내도 되는 건가? 반대편에 있던 묵기사들은 어찌해야할지 몰라서 제 주군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로드?”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녀는 손에 묻은 피를 내려다보았다. 열기가 빠져나가자 아픔이 조금씩 엄습했다. 관절 마디마디. 그리고 얻어맞은 곳. 피 흘린 곳이 아려왔다.


가장 피를 많이 흘린 곳은 어디더라.


자기상태를 체크하고 있으면 이내 깨닫는다. 그곳은 손이 닿지 않고, 약으로도 치료할 수 없는 곳이었다.


“아으으...”


사람들이 남은 공터. 거기에는 당분간 롬이 앓는 신음만이 감돌았다.


.

.

.


붕대나 반창고를 입술과 뺨에 붙인 얼굴이 말했다.


“잠시 저쪽 야영지에 갔다 와도 좋으니라.”

“어음...”


푸른 멍자국이 얼핏 붕대 너머로 보였다. 말하는 상대의 상태가 썩 좋아보이진 않았다. 마찬가지로 롬은 턱과 뒤통수로 한 바퀴 두른 붕대를 긁적였다. 치료사의 말로는 함부로 입을 크게 벌리지 말라나.


어찌됐든 엘리자의 말에 롬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정쩡하게 시선을 피해서 바닥으로 내리깔았다. 그러면 엘리자의 개인막사에 깔아둔 가죽 깔개 같은 게 보였다.


“왜 말이 없느냐?”

“좀...”


당장 보기가 좀 그렇단 말이었다. 사람이란 건 때를 기다려야하는 법이다. 화가 났다면 가라앉길 기다리는 거고, 우울하다면 사람이 필요할 때 찾아가면 되는 것이다. 대충 그런 느낌이다.


엘리자는 턱을 괴었다. 손가락에 스치는 타박상이 아파서 금방 내려놓았지만. 그녀는 제 뺨을 살살 쓰다듬었다. 맞은 자리가 아렸다.


“그 아이는 제 생각에 갇히기 쉽고, 성격도 급한 편이지. 사람을 대하는 법도, 자신을 헤아리는 것도 그렇지.”


엘리자는 자신이 말해놓고 스스로 확인했다. 정말로 그런 아이였나. 떨어진 시간이 너무 오래돼서 바뀐 게 아닐까. 그리고 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하나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녀는 잘 모르게 되었다.


사실 엘리자조차 스스로를 모르게 됐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저 답답함일 수도 있겠다. 마음이란 건 고름이나 다름없다. 제대로 짜내지 않으면 썩어 들어가니까. 이 늦은 밤에 롬을 불러다가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거부권 같은 건 없느니라. 방금 전에 나섰던 기개는 어디 갔느냐?”


롬은 끄덕였다. 그래, 한번 가보기나 해야겠지. 그 허락을 끝으로 롬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가 방을 나서기 전에 엘리자에게 말을 건넸다.


[백작님께선 괜찮으십니까?]


필담이 눈에 익는다. 문득 입안에 맴도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건만. 그녀는 그조차 삼켜버렸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정 그랬다.


“흔한 자매 싸움이니라.”


늘 상 있는 일이었다. 전쟁도 증오도 폭력도. 피 흘리는 건 익숙했다. 롬은 잠시 엘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리고선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하.”


혼자 남은 엘리자는 초점 없는 시선을 여기저기 흩뿌렸다. 어디에도 눈을 둘 곳이 없어서 방황하는 시야가 이내 감긴다.


곧 안에 있는 자신에게로 눈을 돌렸다.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집중해서 듣지 않으면 모를 작은 아우성, 그것이 커진다. 이내 귓가에 닿을 정도로 그랬다.


“괜찮다마다. 안 괜찮을 리가 없잖아.”


응당 자신이 감내해야할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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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7 1 12쪽
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130 나쁜 계획 24.07.24 13 1 14쪽
129 별석의 제거자 24.07.24 11 1 12쪽
128 어설픈 동행 24.07.21 13 1 11쪽
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2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4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0 1 19쪽
» 멍자국 24.06.27 14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3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3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5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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