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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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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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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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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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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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2쪽

샤를롯

DUMMY

샤를로트 아센덴 카룰 드 그란데 디센던.


승천자 카룰의 위대한 자손 샤를롯. 대충 긴긴 이름을 풀이하자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겠다.


그 외에도 그에게 주어지는 이름이 몇 개 있다. 국교 그리시아에서 왕에게 허락한 신의 사도의 이름이라든가. 왕세자 시절, 이룬 위업과 과업에 대해 칭송하는 민중의 이름이라든가.


대충 그런 게 있었다. 하지만, 본인은 자신의 이름을 샤를롯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긴긴 이름에 붙는 의미란 결국 가문이라는 테두리. 그리고 역사와 뿌리인지라.


홀로 고고하며 만능해야할 샤를롯에게는 퍽 와 닿지 않았다.


그에 왕은 입을 열었다.


“샤를롯.”

“...?”

“내 이름.”


롬은 그 말에 깊게 고개를 조아렸다. 사실 양쪽 무릎은 이미 땅에 대고 있었다. 들어오기 전부터 받았던 예식에 대한 교육은 뿌리박혀 있었다.


정원 곳곳에 자리한 로열가드들의 압박도 있었다. 그들은 왕과 조금 거리를 두고서 롬을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를 올린 테이블이나 쿠션이 들어간 편안한 의자 같은 건 없다.


정원에서 샤를롯은 나무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고 나른하게 앉아있었다. 팔을 뒤로하고 있던 시선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사실 그보다는 해를 맞고 있었다.


가끔은 볕을 쬐야 한다. 몸의 균형을 유지하려면 그래야했다.


햇빛이 머리에 닿아 금색으로 부서졌다. 샤를롯의 단발이 빛을 뿜어내는 것 같았다. 그 아래에 있는 나른한 눈에 기다림이 감돌았다.


“...”

“...?”

“?”


짹짹.


정원에 새소리가 감돌았다. 그런 게 돋보일 정도로 침묵이 길었다. 한편에서는 정원의 곁을 지키고 있던 로열가드가 저 무지렁이 같은 자를 재촉해야하나 싶었다. 샤를롯은 입을 열었다.


“이름 말했는데...”

“로, 롬!”


고개 드는 법 없이 벙어리가 답했다. 그에 로열가드들의 기세가 불편해졌다. 그들이 모시는 왕에게 말이 짧은 불경은 썩 보기 좋은 게 아니었다. 그게 벙어리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롬도 그걸 알았다. 고깝게 보인다는 것쯤이야. 그는 조심스레 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로열가드 하나가 반응해서 성큼성큼 다가왔다.


“윽.”


팔이 붙잡혀 짓눌린다. 그에 손에 걸린 칠판과 분필이 바닥을 굴렀다. 그걸 내려다 본 로열가드는 변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승천자의 앞에서는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그리고 굳이 적어낼 필요도 없다. 다 알고 계시니.”

“-네엡.”


잘 모르겠지만 롬은 끄덕였다. 가만히 그걸 보고 있던 샤를롯은 자세를 앞으로 했다. 정원에 롬이 처음 발을 들였을 때처럼 그의 표정은 묘하게 변했다.


“이상하네.”

“승천자시여?”

“놔줘.”


샤를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로열가드가 물러나고는 롬의 옆에 자리 잡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뒤통수로 느껴졌다. 롬은 아픈 어깨를 슬며시 돌렸다. 그러면 그 위로 샤를롯의 말이 내려앉았다.


“얼굴.”


롬은 얼른 알아들었다. 머리를 들었지만 감히 샤를롯의 얼굴을 쳐다보진 않았다. 앉아있는 샤를롯의 상체나 입술을 보려고 애썼다.


“흐음.”


샤를롯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로열가드의 당황이 느껴졌다. 그들의 왕은 예상보다 더 가깝게 롬의 앞으로 다가섰다. 무릎 꿇고 있는 벙어리의 지척에서 쪼그려 앉았다. 마치 개미를 자세히 보려는 것처럼.


“너 벌레 같다.”


갸웃하는 시선이 무릎위에서 그리 평했다.


“...?”


사람한테 갑자기 벌레 같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해야할까.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당사자는 도대체 무슨 맥락이란 말인가. 롬은 심히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눈앞의 왕이란 분께선 사실 사람 목숨을 벌레처럼 짓밟는 폭군이나 암군이 아닐까 싶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전혀 모르겠네.”


평소 도끼처럼 내뱉는 화법이 길어질 정도다. 샤를롯은 오랜만에 느끼는 기분에 생소했다. 왕은 손을 뻗어서 바닥의 칠판 분필을 주워들었다.


그걸 롬의 눈앞에 내밀었다.


“적을래.”

“예에.”


롬은 홀린 것처럼 대답했다. 샤를롯은 쉴 틈 없이 바로 질문을 뱉었다.


“어디서 왔어?”

[에레시아 너머의 첸 국입니다.]


샤를롯은 손을 뻗어 칠판을 가로막고 말했다. 중성적인 목소리가 다른 언어를 읊었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첸 국의 말에 흠칫했다.


“-지족불욕이면 지지불태라(知足不辱 知止不殆)- 이게 무슨 말인 거 같아?”


[만족하면 욕보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정확해. 저기 아래에 있는 자매들도 알았으면 하는 말이지.”


가만히 샤를롯은 눈을 깜박였다. 이내 자신의 눈에 아무것도 비치지 않자 말했다.


“거기서 태어난 건 아닌가봐?”


롬은 멈칫했다. 고개를 끄덕인다. 샤를롯은 구체적으로 물었다.


“가장 처음 배운 언어는?”


그에 롬은 얻어맞은 듯 생각했다. 그리고 눈앞의 승천자라는 자신을 더 깊게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르겠습니다.]

“흠, 조금 더 시간을 들일까.”


샤를롯은 쪼그렸던 무릎을 폈다. 원래 앉아있던 벤치로 가서 엉덩이를 붙였다. 그리곤 로열가드들더러 좀 더 물러나라고 말했다.


“좀 떨어져 있어.”


“승천자시여...”


“잘 안 들려. 옆에 있으니 방해야.”


승천자가 입을 열었다.


[가.]


삐그덕.


로열가드들이 몸을 비틀었다. 롬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것은 언제고 마녀에게 들었던 목소리가 같았다. 귀나 머리에 울리는 것처럼 불편하고 거북한 소리였다.


이내 알았다. 그건 불편한 게 아니라 두려운 소리였다.


비틀비틀 로열가드들이 물러났다. 그 몸짓이 퍽 예사롭지 않았다. 롬은 식은땀을 흘렸다. 여리여리한 신체. 색소가 부족한 피부. 크리스탈처럼 반짝이는 눈도 비현실적이다. 이 왕이란 불리는 자에게는 보이는 것과 달리 뭔가가 더 있는 모양이었다.


“멀어. 이쪽.”


샤를롯은 벤치 옆의 자리를 가리켰다. 주춤주춤 다가서자 샤를롯이 말했다.


“키 크네. 앉아.”


롬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원래 한 나라의 우두머리쯤 되는 자가 이렇게 털털한 건가? 아니, 그렇다보단 정말로 그를 벌레취급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롬은 자리에 앉았다. 손에서 놀고 있는 분필이나 칠판이 땀에 젖었다.


“‘목소리’란 단어를 여러 언어로 말할 게. 아는 건 브리타니아 소리로 적어.”


끄덕.


그리고 알 수 없는 나열이 시작됐다. 잠시 샤를롯은 숨을 들이마시곤 천천히 내뱉었다. 알고 있는 모든 언어를 내뱉으려는 듯.


“---. --. ---. -----. ---. ---.”


롬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자에게선 모든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 하나하나의 발음이나 뜻이 정확했다. 반 정도 못 알아듣고, 모르는 것들을 제쳐두고서라도 그랬다.


벙어리가 시간을 들여서 체득한 언어들이 줄줄이 그의 입안에서 무너졌다. 경악은 경외로 번진다.


샤를롯은 잠시 숨을 골랐다.


“힘들다.”


뚝하고 목소리가 멎는다. 샤를롯은 롬에게 손을 내밀었다. 롬은 얼른 건넸다. 샤를롯은 받아들고 읽어 내려갔다. 그러자 누더기처럼 적은 소리들이 눈에 띄었다. 브리타니아 공용어로 적힌 음독이 가득했다. 개중에는 뭉개진 것들도 많았다.


샤를롯은 더 모르게 된 표정으로 말했다.


“많이 떠돌아다녔네.”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신 승천자는 찡그린 표정으로 덧붙였다.


“너 싫다. 모르겠어.”


고작 말 한마디다. 내뱉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받아들이기엔 극과 극이다. 롬은 식은땀을 흘렸다.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에게 밉보이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죄, 죄ㅅ...”

“언어장애 때문인가?”


어눌한 그의 입을 보고선 샤를롯이 생각했다. 언어와 사고의 상관관계. 사고가 먼저인지. 언어가 먼저인지. 옛 마녀 이코나 고민할 법한 논제였다.


그러다가 이내 귀찮아졌다. 모르는 건 통제할 수 없다. 그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만큼의 반동으로 알기가 싫어졌다.


사실 알기 위해서 부른 거였다. 눈앞의 이방인이 뭔지. 어디서 왔는지. 혹여나 목적이 있었는지. 바타니아 공작의 안배였는지. 누군가의 사주였지. 아니면, 아니면...


샤를롯은 사고를 접었다. 그는 칠판을 옆에 내려놓았다. 적어낸 글자들을 무의미하게 만들면 그뿐이다.


“이것만 말하고 끝내자.”

“?”

“말 많이 해서 피곤해.”


승천자는 같은 배에서 나온 쌍둥이들에게 그랬듯. 롬에게 고민해볼 법한 질문을 던져주기로 했다.


“자매들을 좋아하니?”


롬은 갑작스런 그 말에 뭔가를 적어내는 법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갯짓도 하지 못했다. 두서없이 치고 들어온 질문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하지만, 승천자는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원래 시시하게 끝났어야 할 이야기의 장애물.


바로 그것을 치워버리기로 했다.


“많이 아프고 힘들었을 텐데도. 왜 그렇게 버티는 건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못 본 척하고, 알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아플 만큼 자매들을 좋아하는 거야?”


자매들의 빛에서 승천자는 그런 것을 읽어냈다. 이야기와 이야기. 안타깝고 딱한 발버둥. 그건 처절하기도하고 고고하기도 했다.


빛과 빛 사이에 끼어든 어둠. 그것은 스멀스멀 주변을 좀먹는다. 결국 이 모든 일을 끌고 온 사람은 눈앞의 사내였다. 이 귀찮은 혼돈의 주역이었다. 샤를롯은 그에게 힘으로 누르기보다는 은근한 제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눈 감으렴. 그러면 편해질 거야. 자매들의 고통도, 사람들의 증오도, 전쟁의 아픔도. 그리고 너의 고뇌도. 이 모든 건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잖아.”


샤를롯은 꿰뚫어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왕이며 이해자다. 그리고 이해의 무시자기도 했다. 지배란 그런 것이다. 통제란 그런 거다. 알면서도 마음을 짓밟고, 때로는 그 마음을 키워주기도 하고. 큰 고통을 덜어내려 작은 고통을 흩뿌리고.


샤를롯은 알고 있었다. 딱히 이 이야기에 악당 같은 건 없다. 그럴 법한 일들이 일어난 거다. 선왕의 케케묵은 과업이 완성되는 것도, 자매들의 은원이 청산되는 방향도.


“자매들에게 안식이 있다면 네가 되겠지. 널 만나서, 알게 되어서 다들 기쁨이란 걸 깨닫고 있단다. 지금도 그렇게 되고 있어.”


샤를롯은 양발을 벤치 위로 끌어올렸다. 양반다리로 앉은 발끝이 까닥였다. 그 작은 동작에 왕관이 또 흘러내렸다. 그걸 밀어 올리면서 말했다.


“피 흘린 상처를 딛고 나면 모두가 편해질 거야. 키워온 증오도, 그걸 견뎌내는 고통도. 그 한순간이 지나면 말이야. 그러니까 누가 됐든 위로해주렴. 쓰러진 사람이든, 서있는 사람이든. 거기서부터는 네가 관여할 일이겠지.”


이야기를 따라가지 못하겠다. 사실 샤를롯의 안 좋은 버릇이었다. 들여다보는 만큼 앞서서 뱉는다. 롬은 끝내 그런 걸 물어보았다. 감히 불경하게도 왕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자매들을 어떻게 하시려고요?]

“자매들한테도 전했지만. 싸우게 둘 거야. 그들이 원했던 대로.”


샤를롯은 손가락을 들여다보았다. 그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는 감촉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 같은 전쟁은 안 돼. 사람들이 고통 받잖아.”


왕은 분명 사람들을 굽어 살피심이라. 더 이상 자매들 때문에 피 흘리는 사람이 없음이라.


샤를롯이 말했다.


“둘이서 마무리하면 되겠지.”


롬은 그제야 샤를롯의 얼굴을 제대로 들여다보았다. 왕의 얼굴에는 어떤 희로애락도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것 마냥.


샤를롯도 벙어리를 바라보았다. 이마고 아니미(Imago animi). ‘모든 것을 보는 눈’에 복잡한 표정이 비친다.


“신성한 결투 아래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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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7 1 12쪽
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130 나쁜 계획 24.07.24 13 1 14쪽
129 별석의 제거자 24.07.24 11 1 12쪽
128 어설픈 동행 24.07.21 13 1 11쪽
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3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 샤를롯 24.07.10 15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0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4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4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4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5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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