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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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9 21:5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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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7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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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21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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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어설픈 동행

DUMMY

과장보태서 그랬다.


롬은 음유시인보다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싶었다. 음유시인이 말했다. 헛소리를 부르짖었다. 무의미한 전쟁을 막고 자매들을 봉합시키자고. 실과 바늘이 되라고 지껄였다.


그런 시커먼 속을 보이면서 잡혀 들어간 놈이 있었다.


그렇게 그놈이 실패함으로써 모든 게 흐지부지 흩어진 줄 알았다. 아니었나보다.


그놈이 말했던 게 전부 자신의 안에 남아있었다. 그놈이 그랬던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정말로 열받지만 진짜 그랬다.


“미안해요. 기가 차서 손이 나가버렸네요.”


위니아는 머리를 때린 손을 매만졌다. 빨갛게 붓기 시작하는 부분이 저려왔다. 때린 쪽이 더 아프다는 걸까. 아니, 그녀가 유약한 탓이었다. 그녀는 손의 고통을 무시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입이 대신 열렸다.


“롬, 혹시나 해서 물어볼게요. 혹시 멜로스한테 최면술 비슷한 걸 당했어요?”


“...”


“그렇지 않고서야 방금 같은 대답이 나올 수 없을 것 같아서요. 둘 모두? 그딴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예요?”


“?”


순간 롬의 머릿속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최면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겠지.


이상한 함정에 빠지긴 했지만. 결투 재판인지 뭔지 신경 쓸게 뭔가. 결국 터져야할 일이 터진 거다. 자매들이 그토록 피터지게 싸워대던 탓에 벌어진 결과였다. 도중에 악독한 무리들이 끼어들어 고생하긴 했어도, 그 덕에 지금의 기회를 번거다.


그 기회 덕에 자매들은 적어도 살아남을 것이고. 전쟁은 멈출 거다. 샤를롯의 말이 옳다. 그 꺼림칙한 왕이 말한 게 맞았다.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말지어다. 증오는 증오가 있는 자들끼리 해결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롬이 나설 때라면 종극이 끝난 뒤, 남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있을 것이다.


그게 잘못된 건가?


아론은 모든 것을 잃는다고 말했다. 쌓아온 것을 잊어버린다고. 그게 나쁜 건가? 그것이 증오와 악순환의 고리라면 끊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모를 일은 나중으로 미루면 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도.


롬의 냉정한 머리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끼적끼적.


롬은 뭔가를 적어냈다. 그에 위니아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뭐가됐든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멀었나요?”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그가 필담을 내보이지 않았다. 위니아는 결국 롬이 뭘 적는지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얗게 변하게 된 아이는 왜 검은 아이에게 그 자리를 돌려주지 않았나. 이름도 모습도 바꿀 수 있는 마법이라면 풀 수 있었을 텐데.


-> 추측. 언니 쪽은 동생 쪽을 보호하고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음독 시도가 빈번했다고 함. -> 그렇다면 그 주축은 베아트리스인가? 아마도 가능성은 높다. 아직 모르지만. 몰라도 됨. -> 중요한 건 왜 엘리자는 그런 위협을 견뎌냈는가. 아마도 어머니와 동생을 둘 다 잃고 싶지...]


“뭐해요?”


위니아가 그를 흔들었다. 그제야 롬은 고개를 들었다. 벙어리의 눈 안에 뭔가 이글거리는 게 들어있었다.


롬은 손바닥으로 칠판에 적은 모든 가정과 생각을 흩어버렸다. 활자로 정리한 생각 같은 것들은 쓸모가 없었다. 그는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니아.”


갑작스레 이름을 불린 마법사는 불안해졌다. 마찬가지로 그를 바라보았다. 롬은 자신의 목 뒤를 가리켰다. 그리곤 가장 필요한 것만 요구하기로 했다.


[이 목 뒤에 있는 것만 제거할 방법을 알려줘.]


“뭘 하게요?”


[몰라. 그냥 마음에 안 들어.]


주어가 명확하지 않았다. 사실 어디에 갖다 붙여도 될 만큼 모두 마음에 안 들었다. 붙잡혀있는 것도, 자매들의 목줄이 된 것도. 그리고 모든 상황이 그랬다. 이렇게는 아니다. 자매들이 서로를 비극으로 이끌지라도 이런 식으론 아니었다.


“뭔가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라면 돕지 않을 거예요. 전 당신만 빼내면 그걸로 족한...”


[어쩔? 내가 그쪽의 기회라면서.]


칠판에 말이 가로막힌다.


“하아...”


위니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롬과 조우하고 냈던 한숨보다 깊은 한숨이었다. 그녀는 이마를 매만졌다. 변이마법으로 만들어낸 피부 안쪽이 화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롬이 낸 화상자국이 욱신댔다.


한번 데여본 그녀는 알게 됐다. 이 남자는 뭔가 터무니없는 걸 시도하려하고 있었다.


“잠깐 정리할게요. 지금 당신이 원하는 건 그런 건가요. 결투 재판. 그러니까 왕이 마련한 판을 뒤엎고 싶은 거예요? 자매 둘을 구한답시고?”


구한다? 그렇게 거창한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아닐 거다. 하지만, 얼추 내용은 비슷했다.


그는 끄덕였다. 위니아는 반발심이 치솟았다.


빠져나갈 수 없는 병에 갇힌 벌레 주제에.


“어떻게? 당신이? 무슨 수로?”


롬이 물어보던 반쪽짜리 육하원칙의 질문. 마법사는 그걸 입에 담았다. 그에 벙어리가 답했다.


[몰라. 잘하는 걸 할 거야. 아마도 난 뭔가 망치는 데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까.]


“하핫.”


위니아는 헛웃음을 냈다. 대책도 논리도 없는 말이었다. 돌아버린 남자가 뭔가를 지껄이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놈을 봤더라. 아하, 그래.


‘이제 보니 음유시인이랑 똑같이 돌아버린 놈이었잖아?’


낌새는 진즉에 있었다. 위니아는 여러 번 롬과 부딪히면서 체감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미친놈 선언을 할 줄은 몰랐다.


“세상에나. 왜 이렇게 쉬운 일이 없는 거야.”


우울함이 닥쳐왔다. 이제껏 생존을 위해서 온몸을 바쳤건만, 그걸 위협하는 게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원래라면 질려서 도망쳐야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건 위니아의 기회이기도 했다. 무의식과 침묵의 여인에게서 도망칠 방법이기도 했다.


위니아는 앉아있는 벤치에서 멍하니 뭔가를 눈으로 쫓았다. 초점 잃은 눈이 헤엄친다. 사람들이나 분수 같은 걸 보았다.


그렇게 고뇌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1분? 5분? 벤치에 앉아있는 남녀 사이에는 어떤 말도 없었다. 조금도.


그러다가 결국 눈은 롬에게로 향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그 짓에 어울려줄게요. 하지만, 다는 아니에요.”


“...응”


롬은 손을 내밀었다. 위니아는 그 손을 내려다봤다. 맥이 빠져서 그걸 바라보았다. 잡고 싶지 않았다.


그걸 무시하려고 들었다. 하지만, 롬은 손을 뻗어서 그녀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그래야 마치 약속이 성사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위니아는 손을 빼내고 싶었다. 하지만, 굳게 잡힌 손에 팔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고마..”


어설프고 어눌한 발음이 말했다. 위니아는 혀를 찼다.


“쯧.”


그렇게 손이 포개진다. 벌레 무리에 온 걸 환영이라도 하듯이.


“얘기 잘 들었습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있던 남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살며시 숨어있던 다른 존재였다.


롬과 위니아의 이어진 손. 그리고 그런 둘의 손 위로 손 하나가 더 올라섰다. 작고 조막만하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다가온 손이었다. 위니아와 롬은 화들짝 놀라서 그 손의 진원지를 따라갔다.


“이 로나! 그 결심에 감복했어요! 어둡고 길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불의를 용납지 않는 그 순진함! 경께서는 정말로 아론의 친구답네요!”


핑크 머리에 핑크 눈알을 가진 요정이 찾아왔다. 그녀는 벤치 반대편에서 등받이에 겨드랑이를 끼고 매달려있었다. 그리곤 까치발로 그들의 결속에 손을 뻗고 있었다.


“저도 돕겠습니다!”


폴짝. 폴짝.


로오나 로나. 기사단장 아론의 부인. 바타니아의 아마도 요정일 요정. 그녀가 찾아왔다. 정말로 뜬금없이.


“로로?”


너무 놀라서 즉석에서 이름이 나와 버렸다. 그에 로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살풋 미소 지었다. 귀여운 별명에 그녀가 말했다.


“어머나. 그거 참 귀여운 별명이네요. 롬은 이름 짓는데도 센스가 있나 봐요.”


롬은 뭔가를 적어내려고 했다. 그런데 세 명의 손이 얽혀있어서 상황이 묘해졌다. 롬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참에 위니아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녀는 롬과 로나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말했다.


“일행이 있었습니까?”


“아...”


뭔가 롬이 말을 짜내려고 했다. 다만 될 리가 없었다. 그의 입은 걷지도 못하는 신생아나 다름없었다.


“아닙니다! 제가 롬과 당신을 미행한 거지요. 에헴, 이래봬도 저는 잠입이나 미행에 꽤나 경력이 있답니다. 남편과 결혼하기 위해 생긴 부산물이라고 할까요.”


로나는 자랑스럽게 스토킹 경력을 떠벌리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모두를 제압하는 말솜씨에 차츰 위니아도 말을 잃어갔다.


그에 저항해서 위니아가 뭔가를 더 말하려고 할 즘이었다.


휙!


마법사가 갑자기 시선을 돌렸다. 광장의 한구석. 묘한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로열가드!”


위니아는 화들짝 놀랐다. 그녀가 이 주변에 미리 흩뿌려놓은 간섭결계가 희미해진 모양이었다. 너무 시간이 끌렸다. 쓸데없는 대화가 너무 많아서 그랬다.


그녀는 얽힌 손을 빼내려들었다. 그러다가 어정쩡하게 모인 손이 같이 따라 일어섰다. 의아하게 보는 시선이 둘 있었다. 거인과 소인. 그 순진한 시선에 위니아가 빽 소리쳤다.


“좀 놔요! 모두!”


위니아는 손을 빼냈다. 그리고는 롬의 손목을 붙잡았다.


“따라와요!”


마법사가 일어섰다. 그에 롬은 깜짝 놀라서 그 손길에 이끌렸다. 걸음에서 뜀박질로. 앞서 달리기 시작한 위니아가 롬을 인도했다.


롬은 갑작스런 상황에도 로나를 챙기려 돌아보았다. 그리고 아니나다를까. 요정은 진즉에 롬의 목에 팔을 걸었다. 나무에 붙은 매미 꼴로 그녀는 어부바를 감행했다.


“별다른 감정 없습니다! 유부녀니까 오해마시길!”


로나가 상큼하게 말했다.


벙어리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앞에서 당기는 팔과 뒤에서 매달린 팔이 목에 조여들었다. 롬은 이 혼란에서 소리치고 싶었다.


‘뭔데! 무슨 상환인데!? 이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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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7 1 12쪽
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130 나쁜 계획 24.07.24 13 1 14쪽
129 별석의 제거자 24.07.24 11 1 12쪽
» 어설픈 동행 24.07.21 13 1 11쪽
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2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4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0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3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3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3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4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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