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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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9 21:54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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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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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0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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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시시한 비극과 공상

DUMMY

롬들은 숨어있던 수풀 어귀에서 나왔다. 숲 한가운데 만들어놓은 것 같은 공터가 있었다. 절벽을 등지고 커다란 나무를 쌓아 만든 원시적인 쉘터. 물어뜯고 부수어 만든 재료들로 얼기설기 엮은 초막(풀과 짚 따위로 엮은 집)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크기가 남달랐다.


전체적으로 낡았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으로서 관리하지 않은 티가 났다. 물과 햇빛을 머금기를 반복한 쉘터에는 이끼나 풀 같은 게 가득 자라나있었다.


엘리자는 코를 쓸어냈다. 비가 내림에도 공터에서 나는 짐승 냄새가 꽤 강렬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둘러봐도 알게 된다. 그들이 도착한 곳이 바로 하티의 보금자리였다.


쏴아.


비가 내려서 땅에는 크고 작은 물길이 생겨났다. 그 위에 피의 붉음이 섞여있다. 그 근원을 따라가면 그들이 찾던 것보다 한층 작은 형체가 있었다.


“정말로 저게?”


롬은 끄덕였다. 앞으로 다가갔다. 물 젖은 발소리에 하티가 반응했다.


철벅.


“..그으으-!”


위협으로 받아들일만한 소리였다. 절벽에 축 늘어져 기대있던 형체가 몸을 비틀었다. 역시나 그건 사람이라기엔 너무 변해버린 뭔가였다. 인체 비율이 무너지고, 숭숭 털이 난 신체는 이족보행을 하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마수에서 역으로 변이한 신체 덕에 골격이 뒤틀린 곳도 있는 것 같았다. 빠르게 그런 것들을 훑어낸 롬은 칼을 뽑아들었다.


그에 하티는 일어나려 애썼다. 그러다가 몸이 무너졌다. 철퍽거리는 땅에 얼굴을 박은 마수는 발버둥 쳤다. 사실 여기까지 오면서 롬은 그리 생각했다. 흘린 피와 전투로 하티의 상태는 만신창이였다. 묵기사들이 쌓아낸 상처들과 엘리자의 결정타가 그렇게 만들었다.


커다란 마수일지라도 한낱 짐승에 불과한 것이겠지.


아마도 하티와 마주치면 그 숨을 마무리하거나, 끊어져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앞에 전투 따위는 없었다. 그저 있다면 비에 씻겨나가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검을 뽑았지만 망설임이 들었다. 짐승은 편하다. 마수도 편하다. 말이란 게 없어도 그에게 주어진 소통을 쓰면 되니까.


교감하거나 위협하거나. 그리고 숨을 끊거나. 그런 방식으로 야생을 대하면 된다. 허나, 롬은 엘리자를 돌아보았다. 그녀가 뭔가를 말해주길 바랐다.


“마무리하지 않는 것이냐?”

“으응.”


롬은 손과 입을 이용해 뻥긋거렸다. 손가락으로 하티를 가리키곤 뭔가 말해달라는 신호였다. 그에 엘리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뭐, 좋겠지. 눈앞에 벌어진 이상한 일쯤이야 알아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다.


게다가 롬의 행동도 신경 쓰였다. 엘리자는 짐승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척 보기에도 숨이 간당간당해보였다. 그녀는 허리를 굽혔다. 조금 자세를 낮추자 하티의 흙 묻은 시선이 그녀에게로 돌아갔다.


“이름은?”

“그으으.”


으르렁거림에 엘리자는 롬을 돌아보았다. 이게 과연 말이란 게 필요한 건지. 잘 모르게 됐다. 그에 롬은 하티의 주의를 끌었다. 그는 자신을 가리키고 말했다.


“놈.”


그리고선 엘리자를 가리켜 말했다.


“에리.”


그녀는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롬은 마지막으로 하티를 가리켰다. 롬의 손가락이 하티의 자아를 가리키고 물었다.


“너?”


롬은 엘리자를 바라보았다. 그 대신 말해줄 입이 필요했다.


“이름이 있느냐?”

“...아.”


하티의 으르렁거림이 잠시 멎었다. 엘리자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우물우물. 입이라고 추정되는 부위에서 뭔가가 나왔다. 그건 누군가의 이름이었다.


“..아덴...”


말의 초점이 멀고멀다. 엘리자한테 말한 건지. 그도 아니라면 혼자 말한 건지. 어찌됐든 그게 짐승이 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으르렁거림도 목소리도 멎었다. 숨조차 얕아졌다.


모든 게 젖고 차가운 세상에서, 피와 눈물만이 조금이나마 따듯하다. 그것보다는 조금 덜 차가운 건 말인가 보다. 백발과 푸른 눈이 죽음을 건넸듯.


하티. 아니, 마수였던 것의 숨이 멎었다.



비가 약해지고 하늘이 개일 쯤. 엘리자와 롬은 야영지로 돌아와 있었다. 엘리자는 부하들을 데리고 남은 일을 처리하러 갔다. 야영지에 남은 롬은 혼자 남아서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있었다.


아영지의 불가를 찾아 앉은 롬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오랫동안 비를 맞아서 그런지 몸이 차가웠다. 그러고 있으면 곁에 하인들이 다가와서 따듯한 차 같은 걸 건넸다. 롬만이 아니라 불가에 모여 있는 병사와 기사들도 있었다. 그렇듯 야영지는 나름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후우~”


롬은 잔에 든 온기를 매만지면서 뜨거움을 식혀냈다. 한 모금 머금으면 달콤함과 허브가 동시에 맡아졌다. 나름 사치품이 아닐까. 그냥 삼키기에 아까우서 찻물을 입에 머금고 우물거렸다.


예전에 엘리자가 그런 것처럼. 그러면 감춰져있거나 눌러져있던 맛이나 향이 올라왔다. 나름의 미식법인가. 잠시 그러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왔다.


“고맙습니다! 경!”


큰 목소리에 순간 깜짝 놀랐다. 롬이 동그란 눈으로 돌아보자 거기에는 예의 부단장이 있었다. 그러니까 포효 맞고 나가떨어진 부단장 말이다.


“기절한 동안 도와주셨다고요!”


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도대체 왜 이렇게 소리치는 거람. 갑작스레 목청이 커진 부단장이 의아했다. 마침 옆에서 부단장을 부축하던 묵기사가 소리쳤다.


“부단장! 아까부터 목소리가 크다니까요!”

“뭐!?”

“하이고.”


기사가 롬을 돌아보고는 말했다.


“부단장님께서 귀를 좀 다쳐서요.”


그럴 것 같았다. 하티의 물리적인 포효에 정통으로 얻어맞았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부단장은 제 할 말을 했다.


“숲에서 별일은 없었습니까!?”


그에 불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귀를 쫑긋했다. 하인, 기사, 병사 할 것 없이 그랬다. 롬은 이목이 모이는 걸 보고선 양손을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밀회라던데.”

“그걸 믿어?”

“안 믿을 건 뭔데?”


롬은 수군대는 소리에 진이 빠졌다. 엘리자쯤 되는 사람이 벌이는 행동에는 눈과 귀가 따른다. 거기에 말려들면 싫어도 분해당해야 한다. 롬이 이러쿵저러쿵 변명해봐야 말하는 사람 마음이다.


“어쨌든 감사합니다!”


부단장은 그리 말하고선 가버렸다. 롬은 자리에 남아서 찻잔을 매만졌다. 남은 정적이 불편해졌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기색들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성에서도 혼자 지내는 롬이었다. 궁전 내부에서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좀체 접촉이 뜸했다. 때문에 기사들이나 병사들은 소문의 이방인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가령 그런 소문이 있었다. 하루 만에 아미츠와 상아도시를 오가면서 폭파와 방화를 몰고 다닌다든가. 단신으로 아미츠에 침투한 첩보원들의 본거지를 턴 게 정말인지.


심지어 화재가 생긴 상아궁의 탑에 번쩍 나타난 게 본인인가 하는 의문도 있었다. 엘리자의 가신들이 쉬쉬하고 있었지만 이야기란 건 결국 새나가는 법이다.


그 외에도 소문 몇 개가 더 있었다. 사람을 홀리는 연주라든가. 배고픈 아이들을 음식으로 꾀어 잡아먹는다든가.


그들의 적이라 할 수 있는 엘리스 백작의 애인이란 소문도 파다했다.


정말로 웃기는 건 모두가 아주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니란 점이었다.


‘부, 불편해.’


롬은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선을 피해서 구석으로 가려는 몸짓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런 롬을 도와줄 파발이 찾아왔다. 엘리자의 언질을 받은 하인이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오더니 말했다.


“로드께서 찾으십니다. 준비되는 대로 어서 오시랍니다.”

“음.”


호출이 달갑진 않지만 여기 있어봐야 좋을 게 없을 것 같았다. 롬은 당장 따라나서려 그랬다. 마침 하인이 ‘앗’하는 소리를 냈다.


“씻고 오시랍니다.”

“...”


좌중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롬을 바라보았다. 롬은 하인을 불만스레 바라보았다.


‘그런 말은 좀 따로 하면 안 되나?’


의미모를 눈총을 받은 하인은 앞장섰다. 그 뒤를 따라가서 롬은 몸을 씻었다.


.

.

.


엘리자의 막사는 포근했다. 야외에 차렸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그랬다. 사실 궁전의 방을 하나 그대로 갖다놓은 거 같기도 했다.


“차를 좀 내렸느니라.”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녀는 익숙한 손길로 찻잔 하나를 세팅해 내밀었다. 롬은 컵받침에 올려 진 잔을 내려다보았다. 따듯한 김이 오르는 찻잔이 퍽 좋아보였다.


롬은 킁킁거렸다. 그러다가 익숙한 향과 냄새에 고개를 갸웃했다.


“후후, 알아보겠느냐?”


엘리자는 테이블 위에 주전자 하나를 올려놨다. 그에 롬은 탄식을 내뱉었다. 일전에 그가 잃어버렸던 마녀의 주전자였다. 물을 부으면 따듯한 찻물이 나오는 그 녀석 말이다.


‘아, 그렇지. 엘리자한테 있을 법해.’


그녀를 결투재판이라고 꼬드긴 숲에서 잊어버린 게 마지막이었다. 롬은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돌려주면 좋겠는데.’


희망사항을 떠올렸다. 롬한테는 몇 없는 귀중품이었다.


후릅.


방금 전, 불가에서 마신 것보다 쓰고 맛없다. 뭐, 불평할 정도의 맛은 아니었다. 편리함이 마법인 물건이다. 게다가 이게 롬의 평범함이었다. 예전에 그가 각설탕을 가진 것도 이 평범함에 맛에 첨가하기 위해서였다.


우물우물.


롬은 문득 생각이 나서 입안에서 찻물을 우물거렸다. 향이나 맛 같은 게 더 나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찻잔을 세팅하고 있던 엘리자가 그 모습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독 같은 건 없다만?”

“...?”


그게 무슨 말인지. 눈을 크게 뜬 롬은 꿀꺽하고 차를 삼켰다. 엘리자는 그 멍청한 표정에 깨달았다. 아하, 자신이 뭔가 착각을 한 모양이구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니라. 소녀랑 마시는 방법이 비슷하여 착각한 것이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롬은 그냥 넘길까하다가 손으로 글자를 적어냈다. 날이 개어 건조해진 분필이 잘 들었다.


[백작님 따라한 게 맞는데요?]

“글로 적든 말하든, 에리라고 부르거라. 아까도 그렇게 불렀잖느냐.”


롬은 고민하다가 끄덕였다. 갑작스레 퍽 줄어든 거리감이 영 아닌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상관없을 거 같았다.


“그래서 소녀를 따라하는 거라고?”

“네.”

“흐응, 혹시 그게 맛있게 먹는 방법인 줄 알았던 것이야?”


끄덕.


조심스레 롬은 끄덕였다. 그에 엘리자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걸 관찰한 게야? 예리한 건지, 둔한 건지. 네 눈썰미는 소녀를 놀라게 할 때가 있느니라.”


사실 하티 때도 그랬다. 엘리자는 그에 대해서 마을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고 온 참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보려고 애쓰는 게 있었다. 그게 괴물로 낙인찍힌 사람이든 간에.


“옛날부터 가져온 습관이니라. 소녀는 차를 마시는 게 취미이다 보니, 가끔 고약한 게 입으로 들어갈 때가 있곤 했지.”

[언제부터요?]

“글쎄.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잘 안 나는구나.”


그녀는 별거 아닌 투로 말했다. 롬은 그게 과연 별거 아닌가 싶었다. 롬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녀는 입으로 제 찻잔을 가져갔다.


입에 머금는다. 향을 코로 맡고, 입에 잠깐 굴리려다가도 편안한 맛에 그냥 넘어갔다. 아주 오랜만에 평범하게 먹은 것 같았다.


“소녀가 차 마시는 모습처럼 그 하티도. 아니, 그자도 관찰할 것이야?”


롬은 끄덕였다. 사실 어쩌다가 그런 거였다. 롬은 과거에 늙은 마꾼을 도와서 사냥을 도운 경험이 있었다. 마꾼은 묏자리라도 찾으려는 것처럼 공격적으로 마수들과 괴물들을 찾아다녔다. 그 시절도 롬에겐 꽤나 힘들 적이었다.


“어떤 점이 눈에 밟혀서?”


롬은 설명했다. 그가 보고 느낀 이상한 점이랄 건 별게 아니었다. 사실 일전의 늑대 토벌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늑대는 사람이 사는 마을을 직접적으로 습격하지 않는다. 그 습성을 따르는 하티도 마찬가지다. 짐승병을 퍼뜨리는 능력 탓에 본격적으로 배척당하면서 사람들에게 잘 나타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하티가 어째서 마을까지 내려왔을까? 롬은 하티가 발을 적극적으로 쓰던 모습을 기억해냈다. 기사들을 밀치고, 쳐내고. 그건 마치 손을 쓰는 것 같았다.


“...마을사람들에게 아덴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물어봤느니라.”


그리고 가끔이지만. 사람이나 낳는 아이 중에 하티 같은 것들이 나올 때도 있었다. 처음의 생김새는 본래 수인들과는 다를 바 없다. 사람에게 귀나 꼬리가 나는 정도일까. 개중에는 사람의 말을 하고, 사람처럼 배워서 사회화가 잘 된 경우도 더러 있었다.


“7년 전에 죽은 농부라고 하더구나.”


엘리자는 평탄하게 말했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쿠키 하나를 들어보였다. 공교롭게도 반쪽 난 쿠키였다.


‘그 하티의 이름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어째서 하티는 오래 전에 죽은 농부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은 걸까.


“그 아덴이라는 농부에게는 동생이 있었던 모양이다만.”


그녀는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삼켰다. 씁쓸한 느낌의 과자였다.


“태어나고 마을에서 자라다가 실종됐다고 하더구나.”


엘리자는 마을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물어봤다. 그녀의 권위와 예기에 마을사람은 결국 그 이상을 말했다.


“그 마을은 예로부터 수인에 대한 취급이 꽤나 가혹하더구나. 수인을 돌보는 일가족과 사람들에게 꽤나 심한 짓을 했느니라. 그리고 그 아덴이라는 농부는 압력에 못 이겨, 동생을 숲에 버린 모양이었고.”


그러면 마을이 초토화한 것도 납득이 됐다. 증오인가 복수인가. 롬은 이야기에 집중했다. 아직 엘리자는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자신을 버린 형제에 대한 복수인지. 아니면 마을에 대한 복수인지는 모르겠다만...”


엘리자는 일축했다.


“시시한 비극이로다.”


.

.

.


롬은 엘리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상한 여자다. 또 비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못된 여자였다. 비극을 받아들이는 법도 말하는 법도 제각각이다. 시시하다라. 듣기에는 그냥 평범한 말이었다. 다만 엘리자란 사람을 조금 알게 되니 다르게 들렸다.


그녀의 평범함이란 건 다른 사람보다 어긋나있을 거다. 롬은 그녀의 말에 끄덕였다. 그리고선 필담으로 주의를 끌었다.


잠시 롬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엘리자는 참을성 있게도 기다려줬다. 사실 그녀에게는 그 기다림도 썩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시시한 비극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고 무슨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니까요.]

“그래서?”

[그래서 멋대로 상상이나 해볼까 합니다. 이전에 백작님께서 그러신 것처럼.]


엘리자는 그 말에 흥미를 느꼈다.


아, 그때의 대담(마주보고 말함) 말인가. 날개와 목소리 없는 천사의 이야기. 엘리자가 분위기에 휩쓸려 낸 이야기였다. 그리고 다과에 이야기만큼 어울리는 것도 없다.


가십, 스캔들, 사는 이야기. 하소연. 뭐가 됐든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기꺼이 듣기로 했다.


하지만, 그 전에 벙어리가 정정해야할 게 있었다.


“에리라고 부르기로 하지 않았느냐.”


강경하게 엘리자는 롬에게 호칭을 고집했다. 잠시 곤란해진 그는 끄덕였다. 잠시 뒤 그의 필담을 가장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사실 그 농부는 사람들이 말하던 것처럼 동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냥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숲에다 하티를 데려다 놓을 즘, 그 농부는 어릴 적을 떠올렸습니다.]


롬은 엘리자가 지루하지 않게 그림 같은 걸 끼워 넣었다. 필담을 기다리는 작은 보답이랄까. 꼬마 같은 것들이 집을 배경으로 뛰노는 모습 같은 게 보였다.


[사람들이 뭐라고 한들 어울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서로가 달랐지만 인지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잠을 자고. 그런 사소한 것들을 같이 했습니다. 형제가 놀던 흔적들은 집이나 마을 곳곳에 미약하게나마 남았습니다. 망설임과 의문은 농부에게로 돌아옵니다. 그것들은 결심했음에도 그를 어지럽게 했습니다.]


필담은 숫제 동화처럼 이어졌다. 그녀는 피식했다. 동화를 볼 나이는 진작 지났다. 그리고 오래토록 잊고 있었다. 아, 그랬지. 누군가가 침대 맡에서 이야기를 들려준 게 언제였더라.


[그런 고민 속에서 농부는 숲에 동생을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버려진 아이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말하지 않게 되었지요. 그리고 어느 날을 기점으로 그는 숲을 가끔 찾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남들은 이해 못할 산책을 하고, 깊은 곳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가끔 흘리듯이 음식을 두고 가거나. 겉옷 같은 걸 잊고 와도요. 그건 농부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롬은 손을 멈췄다. 그 다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멋대로 상상하고 추측해낸 것들은 이래서 쓸모가 없다. 엔딩을 어떻게 마무리해야할지 모르게 됐기 때문이다.


그의 손이 멈춘 것처럼 엘리자도 잠시 말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버려진 아이는 생각했느니라. 외롭고 추운 숲속은 너무나 괴롭다고. 자신을 보호해주던 울타리도 벽도 없는 이곳은 너무나 무섭다고. 아이는 펑펑 울었느니라. 흘린 눈물마저 금방 식어버릴 정도로 숲은 험하더구나. 그런데도 딱 하나 계속 따듯한 것이 있었느니라. 그건 아이가 버려질 적부터 조금씩 키우고 있었던 불꽃이었느니라.”


롬이 하던 이야기를 가로챈다. 엘리자는 말을 쉬었다. 그러자 공상이란 뱀이 곧 그녀의 머리에서 꿈틀댔다.


“살고 싶었기에 아이는 더 이상 울지 않았느니라. 괴롭고 싶지 않았기에 괴로움을 없애려고 했느니라. 추위에 떨고 싶지 않았기에 아이는 제 가슴속의 불꽃을 키웠느니라.”


이야기가 변한다. 멋대로 이야기를 짓기 시작한 건 엘리자의 독선이었다. 롬은 잠시 듣고만 있었다. 그러고 있으면 엘리자가 끝을 향해 달려갔다.


“증오이니라. 애증이니라. 미움이니라. 그걸 토해내고픈 상대가 있었느니라.”


엘리자는 냉소했다. 자신에게 대한 냉소였다. 자조였다.


“그 대상이 누구든 응당 받아내야 할 불꽃이겠지.”


엘리자의 막사 안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그 안에 갇힌 남녀는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엘리자는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오늘은 피곤하구나. 쉬고 싶구나. 그런 느낌으로 말을 내려고 했다.


롬은 마지막으로 적어냈다.


[엘리스 사랑하시죠?]


기어코 그 말을 보자마자 엘리자는 헛웃음을 내버렸다. 그건 간지러움의 시작이었다. 허파와 목울대를 간질여서. 어쩔 수 없이 새는 그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말했다.


“당연하지. 물론 사랑하고 있어.”


그녀는 웃음을 거두어들였다. 말투조차 무너진다. 맥이 빠져서 그랬다.


“그 아이가 나를 증오하는 것만큼이나.”


엘리자는 재차 말했다.


“아니, 그 이상으로.”


그럴 것 같았다. 롬은 벌집을 들쑤신 심정으로 앉아있었다. 불편함 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이 다음에 뭔가 더 말해야할까.


“...”

“넌... 역시 소녀를 어지럽게 만드는 재주가 있느니라.”


엘리자는 안타까운 듯 롬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정말로 자제하고 있었다. 건드리고 싶어도 만지지 않으며, 감추려 했음에도 말하고 싶었다. 아주 조금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쯤 더 실수해보는 것도 말이다. 엘리자의 그 눈빛은 조금 유약해보였다. 그 눈빛이 썩 불편했다.


난처한 고민이 들었다. 먼젓번과 마찬가지로 뭔가를 말해야할까 하는 고민. 불편해진 분위기를 어떻게 타파할까 싶었다.


다행히 우연이란 게 그를 도왔나보다. 그보다는 새로운 고민을 그에게 건네주는 전령이 다가왔다.


엘리자의 막사 밖으로 소리가 들렸다. 찾아온 발소리가 그들에 대고서 말했다.


“로드! 휴식 중에 송구하오나 척후로부터의 소식입니다!”


드물게 엘리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 시간이 방해받은 것에 묘한 거슬림이 생겼다. 그녀는 밖에다 대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바타니아 백작의 문장입니다! 멀리서부터 부대 행렬이 보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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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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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2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4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0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4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3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4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5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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