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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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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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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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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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19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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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갇혀버린 자들에게

DUMMY


아론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굵직굵직한 일들이 있었어도 들어야하는 게 있었다.


“왕궁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


[왕 만나고, 이상한 여자한테 붙잡혀서 수술 당했어.]


“그 부분을 자세히 말하라고.”


자초지종을 얘기하자 아론의 표정은 심각해졌다. 이전부터 심각했지만. 어쨌든 예의 수술에 대한 건은 알고 있었다. 다만, 롬이 붙잡혀서 뭘 심어졌는지가 관건이었다.


“들은 내용은 없어? 네 머리에 자살폭탄 같은 걸 심었다든가.”


롬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에 아론은 신음했다. 사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다. 아론도 부하들을 시켜서 정보를 수소문했다. 그 덕에 패치와 에든이 뛰어다니면서 찾아낸 정보도 몇 개 있었다.


“승천자를 알현할 때 이상한 점이 있었지?”


‘이상한 점...’


그런 게 한두 개가 아니었다. 사람과 대화하는 방법도, 사람들을 부리는 법도 묘했다.


[왕이 이상한 말을 하자마자 로열가드들이 물러났어.]


“이상한 말?”


[무슨 마법 같았어. 로열가드한테 내가 제지당했었거든. 그때 샤를롯이 입을 열었어. 가라고. 그러자 사람들이 몸을 비틀더라고.]


그건 묘한 광경이었다. 롬은 그게 정신에 간섭하는 마법이 아닐까 추측했다. 롬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사람을 홀리는 괴물이나 유령은 있어도,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조종하는 능력이라.


“...그것도 이상하다만. 승천자한테는 다른 묘한 능력이 또 있는 모양이다.”


“?”


아론은 설명했다. 사람들이 말하길. 승천자 앞에서는 어떤 비밀도 음모도 소용없다더라. 그 어떤 어둠도, 혼란도 용납하는 법 없이 승천자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해왔더란다. 십년 전의 사건이었다.


“왕실에는 몇 번 소란이 있었지. 왕위를 다투고 자식들이 암투를 벌여댔거든. 그리고 카룰 샤를롯은 왕세자가 되기 전까지 적이 많았어. 사실 샤를롯은 꽤 하위권에 위치해있었거든. 본래라면 가장 먼저 제거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이었지. 암투나 그런 정치적인 걸 포함해도 꽤 많은 시도가 있었다고 해.”


그런 얘기보다는 결론으로 직행하고 싶었다. 롬이 그런 기색을 비치자 아론은 바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시도들은 사전에 차단당했어. 승천자는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을 노리는 계획을 모두 물거품을 만들었지. 그에 그치지 않고서 모두 재기불능으로 만들어버렸어.”


심지어 그 과정에서 죽은 사람도 있었다. 아론은 잠시 머리를 짚고 말했다.


“미래라도 읽는 것처럼 그랬어. 모든 비밀과 어둠은 탄로 났지.”


실로 기묘했다. 아론은 롬에게 물었다.


“승천자가 너랑 대화를 나눴다고?”


롬은 끄덕였다. 그에 아론이 턱을 짚고 말했다.


“그게 신기한 점이거든. 본래 승천자는 대화가 될 사람이 아니야. 무슨 말을 하러왔는지 다 안다는 듯 행동하거든. 그렇게 명령하거나 고하거나. 무슨 일이 필요한지만 말하는 사람이지.”


아론은 로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라더라. 뭔가 거대한 것이 운을 가로막고 있다고 했던가? 아론은 아마 그것이 샤를롯이 아닌가 싶었다. 아내의 묘한 직감이었다. 아론은 그걸 허투루 듣거나 하지 않았다.


“승천자 이야기나 지금 네 상태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상황이 개 같아. 이 결투재판은 정상적인 게 아니야. 걸린 게 너무 많아. 엘리자 님과 엘리스 백작. 누가 이겨도 승리가 아니야.”


롬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게 됐다. 샤를롯이 말했다. 증오의 연쇄는 두 명의 손으로 끝내라고. 막말로 전쟁이 끝날 수 있는 방법 같기도 했다. 조심스레 샤를롯과 했던 이야기를 반복했다. 그러자 아론의 눈이 어두워졌다.


“허울 좋은 이야기야. 롬, 이건 보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야. 나라고 전쟁이 좋은 건 아니지만, 이건 모든 것을 잃는 싸움이야.”


아론이 추측하기론 그랬다.


“이 결투재판으로 통합령이 되었다고 해도 그걸 사람들이 받아들일까? 군주를 모시던 신하들은? 싸우던 사람들은? 증오했던 자들은? 그리고 뭔가를 잃은 사람들은? 그조차 시간이 해결해주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통합령이라. 난 지금보다 더 약해질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1+1은 2가 되는 게 아니다. 그 1을 이끄는 자매들이 중요했다. 누군가는 무너진다. 아니, 둘이 무너지는 건가? 어찌됐든 결국 통합령은 약화된다.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아론도 몰랐다.


그 상황을 피하고 싶을 뿐.


아론은 이 생각을 엘리자에게 전했다. 하지만, 드물게도 백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하고 생각해보겠다고만 했을 뿐이다.


순간 아론은 숨이 막혔다. 벽에 들이받은 느낌이 들었다. 엘리자 바타니아에게 늘 상 싫은 소리만 하던 충신은 알았다.


엘리자 바타니아는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베아트리스의 실종은 그걸 부추겼다.


‘으음...’


롬은 제 목 뒤를 매만졌다. 수술자국이 희미하게 만져졌다. 그러고 보면 자신은 도대체 왜 수술을 당한 걸까.


[난 왜 이런 걸 당한 거야?]


“인질이지. 너 말이다... 백작님들이 널 꽤나 아낀다는 걸 모르는 거냐?”


“아..니.”


롬은 생각보다 또렷하게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랬다. 아론은 그 변화를 눈치챘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은 다른 걸로 복잡했다.


“로드께서는 모르겠다만. 엘리스 백작은 아마 너 때문에 결투에 응한 걸 거야. 내가 보기에도... 저쪽은 꽤 널 아끼는 것 같거든.”


“하아.”


벙어리는 신음을 흘렸다. 잠시 둘 밖에 없는 공간에 침묵이 흘렀다. 밖으로는 걸어 다니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소리가 들렸다. 어째 그들의 발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러고 있으면 롬이 먼저 목소리를 냈다.


“론.”


“왜?”


[이제 어쩔 거야? 무슨 방법이라도 없어?]


롬이 얼핏 듣기론 결투재판은 토너먼트의 마지막 날에 열린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날은 나흘 뒤다. 그 사이에 뭔가 방법 같은 건 없냐고 묻는 거였다.


그에 아론이 말했다.


“몰라.”


“?”


“모른다고. 나도 머리가 새하얘.”


아론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고개 숙인 아론의 얼굴과 눈에 음영이 졌다. 그와 함께 마음에도 음영이 졌다.


“뭔가를 해보기도 전에 승천자의 귀로 들어갈 거야. 그렇다고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


잠시 말을 쉬고 그가 말했다.


“우린 여기에 갇힌 거야.”


그들의 의지처럼 그랬다.


.

.

.


~♩

평소보다 구슬픈 톤으로 휘파람을 불렀다. 어스름의 저녁에서 멜은 감옥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어스름이라. 사실 빛조차 들지 않는 감옥에서 그런 게 보일 리도 만무했다. 바깥으로 내리는 어둠이나 발밑으로 차오르는 절망도 마찬가지다.


...♪


그럼에도 입은 쉬지 않는다. 높고 낮아지는 음율, 적당히 어긋나는 박자. 마른 입으로 내는 연주를 쉬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뭔가 바뀔 것 같았다. 그건 끝없이 이어지는 음악이다. 마침표를 찍기를 갈망하며 방황하는 음악이었다.


절망과 어둠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그건 어찌 보면 바람의 노래와 같았다. 바람이 멈추는 곳이 있을까. 바람이 멈춘다는 건 결국 그 자체로 소멸해버리는 건 아닌 건지.


그런 의미 없는 상념을 하고 있을 때였다.


덜컥.




지하 감옥의 정체된 공기가 흔들린다. 잠깐이나마 공간이 열렸다가 닫힌다. 자유로웠다가 이곳에 다시 갇히고 만다. 음유시인은 휘파람을 다른 악장으로 연주했다.


-♩


뚜벅. 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일정한 리듬. 그것이 멜의 앞에서 멈췄다. 멜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저 멈추지 않고 소리를 냈다.


“음유시인 멜로스. 이 노인네를 도와주겠소?”


휘파람이 멎는다.


어둠과 절망에서 늘 빛을 찾는 목소리가 있다. 희망을 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다. 멜은 그 빛을 싫어하지 않았다. 멜이 가진 병신 같은 눈으로 쫓아도 썩 나쁘진 않은 빛이기 때문이다.


“그냥 노인네로 온 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롤랑.”


음유시인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창살너머로 연로한 얼굴이 보였다. 분명 늙은이의 얼굴이었다. 주름과 흰머리. 세월과 삶이 그에게서 젊을 앗아갔다. 관절은 어긋나고, 근육은 점차 말라간다. 그렇게 빛을 잃고 생기를 잃는다.


하지만, 그 눈빛만큼은 아니었나보다. 아직 빼앗기지 않았나보다.


아직 일전에 겪은 중독을 다 딛지도 않았건만 늙은이는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소싯적의 갑옷을 입고서 그랬다.


“흑기사로서 온 것 아닙니까?”


흑기사가 창살 너머에 있었다. 그는 단단한 눈빛으로 음유시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심과 분노가 섞인 눈빛이었다. 타오르고 타오른다. 이내 꺼질 것처럼 그랬다.


생채기 가득한 검은 갑옷이 철그럭거렸다. 롤랑은 창살을 붙잡고 말했다.


“...베아트리스 님이 실종됐다네. 아니, 납치당했지. 이코. 그 옛 마녀가 말한 것처럼 그리 됐어.”


“그래서 어찌 하시려고요?”


“...이 노인네는 실수를 하려고 한다네. 모시는 아가씨가 상처 입을지도 모르는 그런 실수.”


흑기사는 멜을 바라보았다. 입으로 도와 달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는 결심하고 온 참이었다. 패서라도 끌고 가겠다. 그리고 입을 열게 만들겠노라고.


“그 실수라 함은 설마 귀부인을 구하러 가겠다는 결심입니까?”


“그렇지. 허나, 실수라도 실패할 수는 없다네. 자네라면 베아트리스 님께서 계신 곳에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네.”


“흠, 그 실수를 누가 알고 있습니까? 엘리스의 기사들은요? 이 성의 병사들은?”


“아무도 없다네. 이 일에 아미츠를 말려들게 할 수는 없어.”


실수하는 자는 자신으로 족했다. 롤랑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엘리스가 아른거렸다. 허나, 그만큼 지켜야할 여인이 있었다. 맹세를 딛고서 지켜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음유시인이 씨익 웃었다. 그리고선 롤랑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각오한 자의 눈빛이었다. 죽음조차 불사하겠다는 눈빛이었다.


멜은 순수하게 기뻤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이렇게나 멍청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런 멍청이들에 자신이 어울릴 수 있다는 게 썩 반가웠다.


“저야 좋습니다. 그런 바보짓에 어울리는 거 정말 좋아하거든요.”


“...그렇게 간단히?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가?”


“그 얘기 참 많이 들었습니다만.”


음유시인은 재차 말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그게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미소 짓는 음유시인은 정말로 멍청해보였다. 롤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콰장창!


창살을 쥐고 있던 손이 어느새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섬광이 번뜩인다. 창살이 봉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멜은 그 기예에 감탄했다. 가히 공작령의 옛 영웅이라 불린 남자였다.


“그냥 열쇠로 여시면 되는 거 아니에요?”


“...노인네의 독단이란 걸 보여줄 흔적이 필요했네만.”


흑기사는 멋쩍게 말했다. 그에 음유시인은 으쓱였다. 일어나서 갈라진 창살을 넘었다. 그에 흑기사는 자신의 투구를 눌러썼다. 시야가 좁아진다. 안전해지고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검은 갑옷 안에 갇힌 자가 말했다.


“그래서 어디로 가야하지?”


“글쎄요.”


멜이 턱을 괴었다. 감옥생활을 했음에도 솜털조차 안 난 턱이 만져졌다. 조금 야위었을 뿐. 생각에 잠겨있던 멜이 씨익 웃었다.


“일단 동료들을 구하러 갑시다.”


“동료?”


“예. 흑기사의 옛 동료들이지요.”


원래 싸움 구경 중에서도 늙은이들이 싸우는 게 재밌는 법이다. 멜은 상큼하게 말했다.


“흑기사 전우회 총출동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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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7 1 12쪽
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130 나쁜 계획 24.07.24 13 1 14쪽
129 별석의 제거자 24.07.24 10 1 12쪽
128 어설픈 동행 24.07.21 12 1 11쪽
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2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4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0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3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3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3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4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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