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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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9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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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8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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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멍자국

DUMMY

엘리자의 캠프에서 멀리 떨어진 곳. 엘리스의 야영지에도 불빛이 아른거렸다. 횃불과 모닥불이 내는 빛들이 밤을 지속시킨다. 사주를 경계하는 병사들. 깨있는 기사들도 잠에 든 자들도 모두 장구를 입은 채다. 먼젓번의 사건으로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예의 방문자에게 말했다.


“지금 백작님께선 누구든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하시네요.”


양 옆에 기사들을 대동한 레이첼은 곤란하단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 롬은 불편한 기분으로 적어냈다. 필담에 랜턴을 가까이하는 손이 있었다. 기사단장은 어두운 밤에도 흐릿한 글자를 쫓았다.


[저도 그렇답니까?]

“예. 특히 롬은 더 그런 거 같네요.”


레이첼은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야영지로 돌아오자마자 레이첼은 언질을 받았다. 그놈이 오거든 돌려보내라고. 그녀는 제 주군의 표정을 떠올리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내심 기사단장은 과연 이래야 되는 게 맞나 싶었다.


“...여러분은 모두 자리로 돌아가세요. 따로 얘기할 게 있습니다.”

“네, 헌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청기사는 묘한 눈길로 롬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말 그대로 묘해보였다. 눈앞의 벙어리를 반가워해야할지 경계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특히나 오늘 같은 날이 있고서 더 그랬다.


‘도대체 누구 편이야? 서임을 받고도 백작님을 방해하다니? 엘리스 님의 기사야? 아니면 저쪽으로 넘어간 건가?’


롬도 그 뜨듯미지근한 시선에 불편하긴 마찬가지였다. 묘하게 경계 받는 느낌이 들었다. 레이첼은 그 컨택을 차단해버렸다. 그녀는 손을 휘젓고는 어서 물러가라 말했다.


“경들께선 눈앞의 사람에게 좀 더 예를 갖추길 바랍니다. 이 사람이 해준 일을 벌써 잊었나요?”

“네, 알겠습니다.”


속마음이 어쨌든 기사들은 상관의 주의에 바로 답했다. 기사들은 레이첼에게 고개를 한번 숙이고는 물러났다.


야영지 어귀에서 둘만 남았다. 레이첼은 주변에 귀가 없나 확인하고서 롬을 돌아보았다. 사실 그녀도 롬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일단 묻겠습니다만. 롬, 못 본 동안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


싸움판이 벌어진 공터, 엘리스가 롬을 노려보던 모습이 눈에 밟혔다. 그때도 그랬고, 아까도 그랬었다.


“백작님의 심기가 한층 불편해보이셨습니다. 굉장히 우울해보이시기도 했고요. 따로 편지나 안부를 묻지는 않은 건가요?”

“어... 음...”


짚이는 바가 없었다. 사실 전에 편지를 주고받긴 했다. 엘리자의 애마 케일에 관한 건으로 그랬다. 그 부분을 전하자 레이첼의 표정이 묘해졌다.


“...케일이란 말에 대해선 저도 들은바가 있었습니다만. 제가 타고 온 말에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녀는 턱을 괴었다. 감히 백작이 되었다고 상상해보면 조금 서운할 것 같기도 했다. 주고받은 편지 내용이 숙적이나 다름없는 자매의 사정이라니.


그런데도 그것만 있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레이첼이 짐작하는 바로는 마을회관에서 무언가 있었다는 것. 분명 제 자매와 뭔가 마찰이 있었겠지.


“...큼.”


그리고 그 이유가 왠지 롬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롬은 자신을 미심쩍게 바라보는 레이첼에 기가 죽었다. 왠지 모르게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저쪽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안 말해주던가요.”

“응.”

“그렇다면 내부적인 가족 간의 불화라... 보는 게 맞겠습니다만.”


기사단장은 신음했다. 도통 알 길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졌다. 사정이 이러하니 롬을 안으로 들이기도 뭐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를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백작님께서 하나 언질하신 게 있습니다.”


롬이 물음표를 얼굴에 띄었다. 엘리스가 돌아와서 뭔가 다른 말이라도 했던 건가? 레이첼은 조금 다르다고 말했다.


“롬한테 말을 한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타고 온 케일이란 백마요. 저를 따로 불러다가 이 마을에 닿기 전에 말씀하셨지요.”

“에?”


레이첼은 자꾸만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러니까 엘리스가 시시각각 표정을 변화시키면서 그녀에게 그리하라고 시켰다. 그건 정말로 말로 설명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냥 그렇게만 알고 있어. 질문은 하지 말고!]


그렇게 말씀하신 건, 단순히 심기가 불편한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보니 그 찌푸림은 근심이었고, 혀 차는 소리와 앙다문 입술은 분노와 염려였다. 복잡한 감정이 한데 섞여 싸워 그러신 거다.


“말씀으로는... 롬한테 옷이나 검, 갑옷은 줬는데 말을 내리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라고...”

“아...”


롬은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 여자가? 순간 레이첼의 너머를 바라보았다. 야영지의 모습이 멀다. 그리고 멀리서 엘리스의 막사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죽기보다 엘리자를 싫어하는 것 같던데... 그런데 그 애마를 나한테 맡긴다고?’


레이첼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제 삼자인 그녀가 보기에도 의도야 짐작할만했다. 롬이 요청해서 그리 해준 것일 테다. 정말로 갈등하고 죽을 만큼 싫어도. 아마, 롬이 해코지 당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내어준 것일 테지.


“롬, 돌아가세요. 아마도지만 오늘 백작님께서는 마음을 충분히 쓰신 것 같습니다.”

“나, 나...”


어눌한 말이 나오려들었다.


“말을 몰고 오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돌아가세요. 레이첼은 간곡하게 말했다. 그 요청에 롬은 혀를 입안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뒤에 그녀는 케일을 데리고 돌아왔다. 고삐와 안장을 올린 말이 롬을 알아보았다. 푸릉 하고 울었다. 그 크고 하얀 콧잔등을 롬의 멍청한 얼굴에 툭툭 갖다 댔다.


반갑다는 건지. 아니면 왜 그런 멍청한 표정이냐고 묻는 건지. 롬은 그 자신도 모르게 됐다.


“저희는 내일 아침에 떠납니다. 다음은 왕도에서 뵙겠습니다.”


레이첼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때는 부디.”


백작님을 부탁드립니다.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레이첼은 고개를 숙여보였다.


롬은 마주 고개 숙였다. 생각에 잠겼다. 어쩔 수 없나. 그는 조금 우울한 기분이 되어서 고삐를 끌었다. 레이첼은 야영지에서 멀어지는 그 등을 바라보았다.


.

.

.


바텔은 퇴짜를 맞은 음식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니까 기분이 상하신 백작님께 올린 음식이었다.


시중들던 하인에게 물으니 입맛이 없으신 거 같다고 전했다.


“으음, 역시 입안이 상하셨어도 술을 같이 올렸어야 하나.”


바텔, 그러니까 아미츠 성의 부주방장은 신음했다. 드물게 성의 안에서 밖으로 나와 있는 그는 머리를 매만졌다. 요리재료의 발주나 특별한 일 말고는 성 안에서 성심성의껏 일하는 그였다. 주로 엘리스에 대한 충성심으로 그리했다.


때문에 그가 수행단의 요리사를 자처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아미츠 성의 주방에서 차출된 인원이 있었다. 그중에서 바텔은 엘리스의 끼니를 제대로 챙겨야겠다는 생각에 자원한 것이다.


“쯧,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하는 건데.”


바텔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싸움 구경을 놓쳐서 아쉬운 게 아니었다. 엘리스 님께 얻어터졌다고 하는 제 자매를 눈에 담았어야 하는데. 그랬다면 바텔은 소심하게 야유를 보낼 자신이 있었다.


“참, 그 사람도 못됐다. 백작님께서 해주신 게 얼만데. 저쪽에 홀랑 넘어가?”


부주방장은 누군가를 욕했다. 그 대상은 언젠가 봤던 스튜 요리사였다. 그러니까 벙어리 롬.


듣기로는 저쪽 백작한테 홀려서 편을 바꾸었다나 뭐라나. 떠들기 좋아하는 하인들의 대화를 엿들은 바텔이었다.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원래 자리에 없는 사람이 입방아에 오르는 건 당연했다. 그리고 그들 야영지에는 롬이 없었다. 저쪽에서 주는 음식을 먹고 잠을 자고 있으니. 누군가가 말해도 어쩔 수 없었다.


“에휴, 배은망덕한 벙어리 새끼. 역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면 안 된... 아차, 이건 아니지. 백작님도 나도 검은 계열인데. 끄응, 백작님만 안 되셨지.”


바텔은 야영지의 구석에 마련된 주방 막사에서 툴툴댔다. 주변에는 하인들이나 사람들은 없었다. 그가 마지막까지 남아 엘리스의 늦은 식사를 챙기려 했기 때문이다.


투두둑.


그는 음식들을 정리했다. 애써 만든 음식이 다른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건 좀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그릇을 나누고, 접시에 덜고. 초병을 서는 병사들한테 나눠주면 좋아하겠지.


그렇게 있었다. 때문에 뒤에서 스르륵 접근한 존재에 대해 눈치 채지 못했다.


“음?”


순간 바텔은 작업하던 테이블에 생긴 그림자에 고개를 갸웃했다. 랜턴과 횃불에 의지한 주방 막사는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순간 바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대한 덩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었다. 입고 있는 옷도, 망토도, 그리고 머리카락도.


그를 내려다보는 눈도 그랬다. 그 눈이 부릅떠졌다. 내려다보는 눈에 바텔은 조건반사적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히..히이이--읍!?”


그 입이 틀어 막힌다. 커다란 손이 바텔의 입가를 움켜쥐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게 그랬다. 지그시 바텔의 입을 틀어막은 자가 입가에 검지를 세웠다.


“쉬이잇.”


그런 소리를 낸 건 다름 아닌 벙어리였다. 그러니까 방금 전까지 바텔이 욕하고 있던 그 벙어리 말이다.


부주방장의 눈이 미친 듯이 떨렸다. 다리와 팔이 벌벌 떨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텔의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쳤다.


‘치, 침입자? 아, 암살인가!? 나? 아니 백작님!? 아, 알려야!’


그런데도 겁이 나는 게 사람이다. 특히나 비전투원인 바텔은 더 그러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롬은 준비했던 칠판을 내밀었다. 이전에 봤던 이 부주방장이라면 글이라도 읽을 수 있겠지.


[좀 도와주십쇼.]


또박또박 적힌 글자는 바텔을 혼란스럽게 하기 충분했다.


.

.

.


엘리스의 막사 주변에서 초병을 서고 있던 청기사가 멈칫했다. 슬슬 굴러오는 커다란 수레에 고개를 갸웃했다.


“...부주방장 아닙니까? 뭡니까 이 야밤에 그 수레는?”

“그, 그것이 버릴 음식이 생겨서요.”

“버릴 음식이라고?”


청기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버릴 음식이 어디 있단 말인가. 수행단의 보급품은 귀중하다. 넉넉하게 가져왔다하더라도 허투루 버리는 건 안 된다. 야채 꼬다리를 버리더라도 허기진 뱃속에 버려야겠지.


“마침 배고픈데 잘 됐네. 조금 먹을 게 있나 봐도 됩니까?”


기사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순간 바텔이 화들짝 놀라 말했다.


“그, 그게 안 됩니다! 어, 아! 그, 짐승병자 입을 댄 것도 모르고 도축한 돼지가 있어서요.”

“짐승병자?”


순간 기사의 발이 멈칫했다. 꺼림칙함이 돌았다. 천을 덮어놓은 수레로 다가가려는 발걸음이 멎었다.


“...그래서 그게 물어 죽인 돼지라는 겁니까?”

“네, 네. 맞습니다.”

“...? 왜 그렇게 땀을 흘리십니까?”


청기사는 바텔이 조금 수상하다고 여겼다. 그러고 있으면 부주방장이 애써 말을 짜냈다.


“그게... 저도 짐승병 같은 게 옮지는 않을까 싶어서 어서 처리하고 싶은지라...”

“아... 그렇군요.”


이해가 갔다. 그래도 청기사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기사단장 레이첼이 경계를 강화하라고 이른 게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절차인지라 좀 확인하겠습니다.”

“아, 그게... 아, 네.”


바텔의 등 뒤로 식은땀이 한방울 흘렀다. 순간 청기사의 손이 천에 닿았다.


펄럭!


순간 청기사는 눈을 찌푸렸다. 저도 모르게 손 끝에 힘이 들어갔다.


“어후. 뭡니까? 부속이 좀 많네요?”


수레에는 돼지의 사체 말고도 크게 쌓인 짐승 부속들이 쌓여있었다. 창자라든가. 못 먹는 부위라든가. 사실 잡스러운 게 몇 개 껴있긴 했다. 청기사는 코를 휘저었다. 다행히 저녁에 도축해서 신선해서 그런지 크게 파리가 꼬이지는 않았다.


“아, 예... 저녁을 만들면서 내장 같은 게 많이 남아서요.

“음... 이게 다 못 먹는 거라고요? 이렇게 보니 좀 아깝기도 하고. 소시지 같은 건 못 만듭니까?”

“아, 그게 저...”


요리사로서 대답이 궁해지는 질문이었다. 사실 여기에 버리지 안을 재료들도 많았다. 청기사는 바텔의 침묵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천을 휙 덮어버리고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아닙니다. 가십시오. 그런데 바텔 님도 참 부지런하십니다. 이런 건 아래에 있는 사람들한테 시키셔도 될 텐데.”

“이, 이런 것도 제 일이니까요.”

“음... 저도 도와드리고 싶긴 한데 자리를 벗어날 수 없어서요.”

“아, 아닙니다. 수고하십시오.”


바텔은 후다닥 지나갔다. 그에 청기사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문득 청기사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를 버리는 구덩이가 이쪽에 있던가? 문득 그런 생각이 스치긴 했다. 하지만, 이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

.

.


엘리스는 우울한 기분에 잠들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 앙다문 눈 속에 어둠이 침범했다. 그런데도 잠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간이식 침대에서 뒤척거렸다. 그러자 맞고 쓸린 부위가 아릿했다.


“후우...”


푹 한숨이 나왔다. 그건 말로 못할 불면증이었다.


‘뭔가 우울해...’


침대가 늪이라면 거기에 침전하고 있는 산송장이 자신이었다. 피 흘리고 상처입어서 재기불능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허하고 괴로웠다. 그 원인은 뭔지 알면서도 제대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역시 그랬던 거야. 그래, 나한테 그런 좋은 일이 생길 리 없잖아...’


한순간의 꿈이란 생각이 들었다. 보낸 시간들, 쌓아온 유대나 감상들. 거짓말 같이 잘 풀린 일이라든가. 닿았던 입술이라든가. 이내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온 열기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게 한순간의 신기루 같아서 허망한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말로 못할 공허함이었다. 다시금 가지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그토록 좋아했다는 건, 이토록 괴로울 수 있다는 반증이었나 보다.


‘정말로 녀석이 그랬을까? 내가 그 놈한테 준 이름이었는데. 내가 받은 이름이었는데.’


생각하지 말자. 스스로 우스울 뿐이다. 엘리스는 이마로 손을 끌어올렸다. 유리 조각에 베인 상처가 만져졌다. 흉이 지면 안 된다고 바른 연고가 미끌거렸다.


거기서 다시금 피가 배어나온다고 생각했다. 얼굴에 뭔가 뜨거운 게 스치는 것 같아서.


‘...물어봤어야 하나. 그놈이 왔다고 했을 때...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심장이 한번 멈췄다가 흐르는 것 같았다. 울컥하는 느낌이 저렸다. 그리고 느끼는 심정이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섭다고? 뭐가 무서워?’


뒤척임이 심해졌다. 숨이 답답하다. 이불이 족쇄처럼 느껴졌다. 그것을 차내자 어느새 그녀는 허리를 세우고 있었다.


무릎과 손에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만져졌다. 검고 검었다. 이것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어라.”


문득 만져지는 머리카락 사이로 축축함이 느껴졌다. 상처가 아렸다. 그래, 아무래도 피가 샌 모양이지. 그건 이마에서 뺨에서, 그리고 찢어진 곳에서 나는 피임에 틀림이 없었다. 그것을 닦아냈다. 멎기를 기다린다. 언제고 피는 멈춘다. 지혈하면 된다. 그도 아니라면 흘릴 피가 없게 되거나.


그래,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다.


“에리--”

“아.”


순간 뭔가가 들렸다.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있는 천막 너머로 그림자 같은 게 아른거렸다.


“에리--?”


제대로 들렸다. 엘리스의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자기가 뭘 두려워하는지. 그리고 알게 됐다.


자신이 흘리고 있는 피가 뭔지 말이다.


“자?”


천막 너머로 속삭이는 목소리가 물었다. 엘리스는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선 이불을 다시 뒤집어썼다.


아무것도 못들은 것처럼. 그러면 가버릴까 싶었다. 머릿속이 새하얗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자신은 방에 틀어박혀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렇게 자신의 성채에 틀어박혔다. 감당 못할 사건에 나약해질 때였다. 저항치 못할 무력함이었다. 슬픔, 분노, 비관, 절망. 그런 것들로 쌓은 성벽을 넘어서 들어온 침략자가 있었다.


그건 소리 없는 공성추였다.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툭툭 머리를 두드렸다. 무너지고 쌓고, 다시금 무너지고 쌓아올린 견고한 성벽을 무너뜨리려 들었다. 그리고 결코 내보내지 않으리라 여겼던 내용물이 흘러나왔다.


그건 나약함이었다. 그건 무너짐이었다.


그녀가 남에게 다시금 내보이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어느새 울기를 그만뒀다.


살기 위해 울지 않았다. 괴롭고 싶지 않았기에 괴로움을 없애려 했다. 그리고 외롭고 싶지 않았기에.


이불 속에서 엘리스는 숨을 얕게 뱉었다. 그러자 뭔가가 천막 안으로 들어온 게 느껴졌다. 기척이 느껴졌다. 이불 안임에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발가락을 오므리자 피가 빠지는 듯하다.


친애이니라. 상애이니라. 아울러 애증이니라. 그리고 마음이다. 그걸 토해내고픈 상대가 있었다.


“에휴...”


체념한 듯 작은 한숨과 함께 손이 뻗었다. 둔덕처럼 솟은 이불을 보곤 고민하는 몸짓이었다. 이내 손길이 닿았다. 엘리스는 숨을 참고 눈을 질끈 감았다.


토닥. 토닥.


정확하게 머리에 닿은 손길이 멀어졌다. 참았던 숨이 쉬어진다. 순간 그녀는 아연해졌다.


‘왜, 왜 온 거야? 어떻게? 아니, 녀석이 맞긴 하나?’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이대로 가는 건가? 찰나의 고민. 그리고 이내 참지 못하고 엘리스는 이불 밖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곧 손에 뭔가가 잡혔다.


축축.


느낌처럼 아주 젖어버린 뭔가다. 화들짝 엘리스는 불쾌한 느낌에 손을 놓을 뻔했다.


“엇.”


얼빠진 신음은 역시나 그놈이었다. 엘리스는 이불을 헤쳤다. 그리고 눈앞에 무단 침입한 남자를 보고 할 말을 잃어버렸다. 손에 잡힌 게 뭔가가 잔뜩 묻은 망토라는 것도 깨달았다.


“내, 내...”


순간 말이 나오려했다. 그건 조건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냄새! 우에엑!?”


순간 구역질 치솟은 그녀가 내뱉었다. 그에 롬의 표정도 같이 구겨졌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그녀가 놀랍기도 했지만, 헛구역질을 앞에서 보니 저도 모르게 반응했다.


“오엑!”


어쩔 수가 있나. 장기나 살점에서 나온 것들이 으레 그렇다. 점액질이고 비린내 나고. 여하튼 롬의 몸에는 그런 냄새나는 게 잔뜩 묻어있었다. 그리고 구토도 전염되는 법이랬다.


“우엑!?”

“웨엑...!”


간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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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7 1 12쪽
131 결투와 충성의 대상 24.07.26 16 1 11쪽
130 나쁜 계획 24.07.24 13 1 14쪽
129 별석의 제거자 24.07.24 11 1 12쪽
128 어설픈 동행 24.07.21 13 1 11쪽
127 부글거림 24.07.19 10 1 10쪽
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3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5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 멍자국 24.06.28 11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4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4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4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106 시시한 비극 24.06.14 15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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