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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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9 21:54
연재수 :
163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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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8,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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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14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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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시시한 비극

DUMMY

문제가 생긴 마을은 옛 공작령 영역의 바깥에 있었다. 관리하는 자가 다르니, 조공을 받을 의무도, 보호를 제공할 책임도 없지만. 귀족의 생리란 건 그렇게 돌아가는 모양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도 마찬가지고.


“손을 빌려 달라 청했으니 내어주어야겠지.”


무릎 꿇은 마을 사람들에게 엘리자는 간단하게 말했다. 왕도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 사이에 미담 하나 쌓는 셈 치자. 엘리자는 그런 의도를 내비쳤다. 수행단의 사기도 나쁘진 않았다. 갑작스레 생긴 일에 우려나 의심을 표하는 무리들이 있긴 했어도 그랬다. 그들의 주군이 명하니 곧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후두둑.


풀밭이 내는 작은 북소리가 이젠 파도 소리로 변했다. 비가 장대비로 변한 탓이다. 그리고 빗속에서 롬은 서있었다. 축축함과 부르르 몸을 떨자. 빗방울이 어깨나 목 아래로 후둑 떨어졌다. 머리 위까지 올려 쓴 망토가 젖어 무거웠다.


“퉤.”


같이 있던 일행들 중에서 흉터기사가 담배를 뱉어냈다. 롬을 비롯한 몇몇은 나무 아래에서 굵어진 비를 피하고 있었다.


흉터 기사, 그러니까 1기사단장은 자신을 록펠이라고 말했다. 성이나 출신성분 같은 건 대지 않았다. 롬의 면전에 대고 자주 볼 사이는 아니라고 말할 정도로 직설적인 사람이었다.


“쯧, 날씨 한번...”


1기사단장, 록펠은 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언젠가 롤랑이 썼던 라이터보다 최근 모델이었다. 그는 품에서 반쯤 젖은 연초를 꺼내더니 불을 당기려들었다. 롬은 잠시 고민하다가 앞으로 나섰다.


물이 젖어 잘 붙지 않는 라이터가 짤각거렸다. 거기에 대고 계속 마력을 주입하던 록펠이 고개를 들었다.


“뭐지?”


까칠하게 말하는 록펠에게 롬은 손가락으로 담배를 가리켰다. 록펠은 제 담배를 보고선 문제가 있냐고 말했다. 그에 롬은 반쯤 젖은 분필로 글자를 적어냈다.


[오피엄 냄새는 짐승병자들한테 꽤 자극이 될 겁니다.]


비 때문에 칠판의 하얀 글자가 눈물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뚝뚝 흘렀다. 록펠은 그 내용을 보곤 툭 내뱉었다.


“이 날씨에는 냄새도 묻힐 텐데 무슨 상관이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비 오는 날에는 냄새의 확산이 멀어지니까. 비가 땅을 두드리는 탓에 다양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하지만, 그래서다. 오피엄 냄새는 다양한 냄새 중에서도 짐승들이 잘 맡는 것 중에 하나였다.


롬은 예전에 어떤 상처 입은 늑대가 자비의 꽃을 씹어 고통을 덜어낸 걸 본적이 있었다. 오래 전, 늙은 마꾼이 사냥을 도우러 나선 롬을 진흙탕에 처박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뭐라 하든 난 이게 필요해. 신경 쓰지 말고 본인 일이나 신경 쓰시지.”


칙!


불이 붙었다. 록펠은 숨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심신이 진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롬은 싱겁게 물러났다. 그래, 본인이 알아서 하겠지 뭐. 롬은 나무 그늘에서도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비 오는 풍경으로 저 멀리 마을 어귀가 보였다.


신호가 나오는 대로 롬과 기사들은 마을 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봐야했다.


싱겁게 롬이 물러나자 묵기사들도 관심을 껐다. 예의 벙어리가 뭔가 아는 척 하고 싶었나보다. 마수들에 관해선 나름의 전문가라 들은 바가 있었다. 하물며 롬은 마수들을 끌어 모아 묵기사들을 따돌린 전적이 있었다.


“이봐. 너무 신경 쓰지 마. 1단장은 원래 저런 느낌이거든.”


같이 비를 피하고 있던 사람 중에는 패치도 있었다. 그러니까 아론의 측근 중에서도 투덜이 기사. 롬은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몇 번 마주치니 익숙해진 인상이었다. 샌님 쪽은 없는 모양이었다. 듀오가 떨어져있는 모습을 보니 의외다 싶었다.


패치는 제 품에서 육포를 꺼내 입에 물었다. 몇 번 질겅거리더니, 한쪽을 롬에게 내밀었다.


“흠, 그쪽도 먹을래?”


그에 롬은 손을 저었다. 패치는 끄덕이다가 고개를 퍼뜩 향하고선 물었다.


“육포 냄새는 짐승병자들한테 잘 맡아지나?”


조금 불안해 보이는 패치의 말에 롬은 고개를 저었다. 오피엄 냄새보다는 아니었다. 그에 투덜이 기사는 안심하고 허기를 채웠다. 옆에서 오물거리는 패치를 보고는 롬은 생각에 잠겼다. 이들의 사령탑, 그러니까 엘리자는 롬을 끼고서 척후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그 다음으로는 후속으로 진입할 부대들을 편성했다.


작전의 궤는 며칠 전의 해수 토벌과 같았다. 그러니까 늑대 토벌 때. 척후가 미끼가 되고, 마을에 후발로 진입하는 궁사들과 전사들이 짐승병자들을 처리하거나 진압한다.


다른 점이라면 변이한 짐승병자들의 인명을 개인의 판단에 맡긴다는 거다. 죽이든 살리든. 짐승병자들은 시간을 들여 훈련과 약물치료를 반복하면, 예전만큼 삶을 회복할 수도 있다. 다만, 그들에게 주어지는 삶이란 건 꽤나 고통스러운 종류의 것이다. 그 선택지를 제공하는 건 기사들의 재량인 셈이다.


척후대는 고지대에 자리했다. 롬은 저 멀리 있는 마을을 살폈다. 주먹만 하게 보이는 마을에 뭔가가 어슬렁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롬은 뒷목을 문질렀다.


짐승병이란 건 말 그대로 수인이 되는 병이다. 그 정도에 따라 병의 진행정도를 알 수 있다. 인간의 형태에서 조금 변한 사람, 아예 짐승처럼 변해버린 사람. 뒤로 갈수록 말기에 이른다. 그래서 병이란 것이다. 변하고 난 뒤에는 완전치료는 어렵지만, 약을 먹으면 억제할 수 있었다.


“큼.”


원래 짐승병은 드물지만 일어나곤 한다.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감기 증상을 보이다가 앓아눕고 난 뒤에 변이하거나. 평범한 사람이 수인을 낳는 경우도 있으니까.


흔히, 마을에서 수인 아이가 태어나면 짐승병의 전조로 여기곤 한다. 그때부터는 교회가 파견되고, 역병의사들이 마을을 돌기 시작한다. 철저한 검사와 조사를 통해 경로를 파악해내고 병을 막는다.


그리고 태어난 수인에 대한 처우가 결정되곤 한다. 전쟁 이후로 설립된 수인의 공동체들로 보내버리거나, 그대로 마을에서 기르거나.


배척하는 법도, 받아들이는 법도 나라마다 다르다. 마을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태어난 아이에게는 쉽지 않은 삶이 주어질 테다.


이렇듯 조용히 짐승병이 퍼지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경우도 있다. 그건 짐승병을 직접적으로 창궐시킬 수 있는 마수가 나타나는 경우다.


이름도 생태도 다양한 그들은 사람을 단숨에 짐승병자들로 변이시킨다. 그리고 급성 변이자들은 곧잘 새로이 자리를 튼 본능에 사로잡힌다. 공격성, 폭력성, 그리고 사냥 본능 같은 것.


“진입하란 명령이다.”


담배를 다 태운 1단장이 입을 열었다. 그에 묵기사들이 움직였다. 그 대열에 끼어서 롬도 움직였다. 옆에는 투덜이 패치가 따라붙었다.


“대장 명령으로 난 그쪽한테 꼭 붙어있어야 해.”


패치가 덧붙였다.


“사고치지 말라는데?”


어제 말하지 않았나. 서로 씨가 될 말은 하지 않기로. 롬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서 사릴 거다. 그런 결심이었다.


--아우우!--


그리고 그런 결심은 마을의 어귀에 닿자마자 흔들렸다. 비 내린 땅과 젖은 하늘에 대고 울리는 하울링 소리.


척후대는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수십 가구 정도 되는 마을 앞에서 갑옷으로 무장한 묵기사들이 저마다의 병기를 손에 감아쥐었다.


단 하나의 개체가 이리도 크게 울 수 있다. 커다란 동굴이 우는 것처럼, 깊고 소름끼쳤다. 달에 삼켜지는 늑대 하티였다. 마을사람들이 언급했던 마수는 생각보다 커다란 적인 듯했다.


그리고 하울링에 따라 짐승병자들이 모여들었다. 가사와 가계를 꾸린 아낙이나 여성들, 밭을 일구던 장정들. 혹은 일상을 살던 사람들이 털과 이빨, 손톱으로 엮은 짐승이 되었다. 주둥이가 늑대처럼 튀어나와, 살에서 피를 흘리는 사람부터, 털만 난 사람. 아직 그 정도가 덜한 사람들도 있었다. 말기에 이른 자들은 아예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습이었다.


그것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그륵그륵. 짐승이 된 자들은 척후대에게 달려들었다.


.

.

.


변이한 짐승병자들이 과격한 공격성이나 사람보다 월등해진 신체조건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병기로서 단련된 기사들은 녹록치 않은 상대다.


퍽!


오체에 뻗은 마력 섬유가 근력을 보강하고. 갈고 닦은 전투 센스는 본능조차 제압해버린다. 록펠이 내려친 메이스에 짐승병자 하나가 고꾸라졌다. 머리가 짓이겨진 시체에서 피가 뻗어 나왔다. 물이 고인 바닥에 피가 흘렀다.


그는 넘어진 시체 옆에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냈다.


“퉷.”


좀 떨어진 곳.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롬은 달려들던 짐승병자 한명을 넘어뜨려 제압했다. 손과 팔을 물려는 얼굴을 잡아채고 진흙탕 위로 짓누른다. 머리를 크게 쳐서 기절시킬 때까지 할퀴는 손길에 피가 났다.


“후욱.”


롬은 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있으면 록펠이 그 모습을 흘겼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뭐 하러 살려두지? 변한 이상 죽여 두는 게 더 좋을 텐데. 마을이나 이들한테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수도 없었고. 롬은 진흙에 범벅이 된 땅에서 일어섰다. 입고 온 옷과 망토가 더러워졌다. 아미츠에서 엘리스가 선물로 건넨 여행복이었다. 튼튼해서 제 쓰임을 다하고 있었다.


칙. 칙!


록펠은 새로운 담배를 꺼내서 불을 붙이려고 애썼다. 그런 1단장의 주변으로 묵기사들이 제 할 일을 묵묵히 해내고 있었다. 죽이거나 살리거나. 각자의 재량에 따라 그랬다. 패치는 롬의 옆에서 짐승병자들을 둔기로 패서 뼈를 부러뜨리고 있었다. 죽지는 않으나 죽을 만큼 아파서 몸을 비트는 병자들이 있었다.


“아휴. 장난 아니네.”


패치는 조금 지쳐버렸다. 끝없이 몰아치는 짐승병자들을 상대하자니 진이 빠졌다. 그건 다른 묵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을 중심부로 향하던 전진을 좀 멈추자. 그렇게 마음먹고 누군가가 의견을 내려고 할 즘이었다.


칙. 칙!


“제길.”


록펠은 불이 붙지 않는 라이터에 성질을 부렸다. 말아서 입에 문 담배가 꾸직 하고 이빨 사이에서 으스러졌다.


쿠구궁.


공교롭게도 으스러진 그것처럼. 록펠의 위로 거대한 이빨이 떨어져 내렸다. 으직 하고 록펠의 갑옷이 동강났다. 쿵하고 지축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왔다.


동체가 사뿐하게 내려앉은 것치곤 물보라가 몰아쳤다. 롬은 튕겨져 나갔다. 옆에 있던 패치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서 낙법으로 일어선 패치가 일어난 상황에 소리를 냈다.


“어?”


집채 만한 늑대. 하티. 전승처럼 달을 삼키기에는 조금 무리일 것 같은 크기지만. 사람을 꿀떡 삼키기에는 충분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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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부글거림 24.07.19 11 1 14쪽
125 갇혀버린 자들에게 24.07.19 11 1 12쪽
124 갇혀버린 자들 24.07.16 12 1 17쪽
123 선택의 제한 24.07.12 13 1 14쪽
122 선택의 제한 24.07.11 12 1 10쪽
121 샤를롯 24.07.10 14 1 12쪽
120 승천자 24.07.09 11 1 10쪽
119 왕도 헤르미아 24.07.09 11 1 12쪽
118 왕도 헤르미아 24.07.06 11 1 9쪽
117 쿠키에 담은 것 24.07.06 12 1 13쪽
116 멍자국을 딛고 24.07.06 10 1 13쪽
115 멍자국 24.07.06 11 1 10쪽
114 멍자국 24.06.28 10 1 19쪽
113 멍자국 24.06.27 13 1 10쪽
112 자매란 것 24.06.27 13 1 13쪽
111 자매란 것 24.06.25 12 1 8쪽
110 자매들 24.06.22 11 1 9쪽
109 시시한 비극과 공상 24.06.20 13 1 20쪽
108 시시한 비극 24.06.20 12 1 8쪽
107 시시한 비극 24.06.20 11 1 12쪽
» 시시한 비극 24.06.14 15 1 11쪽
105 달 아래 24.06.14 11 1 10쪽
104 달 아래 24.06.12 11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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