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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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3 21:24
연재수 :
161 회
조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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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0
글자수 :
967,977

작성
24.08.26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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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이어지는 길

DUMMY

그건 그렇게 간단히 부서질 사슬이 아니었다. 부유섬과 다리섬들이 날아가거나 뒤집히지 않도록 하는 사슬이기 때문이다. 헤르미아라는 도시의 안전을 보장하는 장치기도 했다. 공학과 마도의 정점으로 설계된 최선이자 최후의 안전장치란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게 있다면 시대가 낳은 챔피언이란 괴물일 테다.


-끼기긱-


다만 그 때문만은 아닐 거다. 아무리 빛나는 문명과 하늘까지 뻗은 구조물이 찬란하다 할지라도. 공간과 시간에 조금씩 무너지고 허물어지듯.


오늘이란 날에 닿아 헤르미아에 재앙이 찾아온 걸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것들은 모이고 모여 헤르미아로 기어들어왔다. 그중에 최악이란 것이 날개를 펼쳤다. 그건 혼돈으로 비상하는 날갯짓이다.


-끼기긱!-


그건 우연이나 불행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편의주의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필연적인 파괴다. 승천의 도시가 추락이란 통증을 겪기 위한.


-끼기기기긱!-


쇠 찢어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흡사 천지를 울리는 것 같았다. 싸움을 멀찍이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도, 사태를 관망하던 로열가드들도 그 불길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코마드도 그랬다. 전쟁망치를 울리는 저릿한 손길, 손의 살갗이 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그 모든 걸 무시할 정도로 눈에 들어오는 정보는 꽤 당황스러웠다.


“어..어?”


코마드는 눈을 크게 떴다. 사슬이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그쯤 부유섬과 다리 섬에는 작은 변화가 일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극장, 진지. 각종 시설에서 책상 위에 놓아둔 필기구나 기자재들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끔 바람이 강하게 불거나 날씨가 궂을 때는 섬이 움직이기도 한다. 바다에서 출렁이는 물결에 부표가 서로 잡아당기고 밀어내듯, 그런 조그만 진동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느낀 건, 끊어지기 시작한 사슬에 매달린 섬이었다. 그건 경기장에서 가까운 부유섬이었다.


조금씩 기울어진다. 상공에서.


“과, 광장의 사슬이 끊어진다!”


“서, 섬은!?”


“으아아악! 모두 피해에!”


인파가 경악했다. 섬을 올려다보면서 멀어지려는 자들도 있었다.


뭐든 간에. 코마드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미, 미친!”


남자 하나가 팔로 안아도 모자랄 정도로 두꺼운 사슬에 달려들었다. 코마드는 체내의 모든 마력 섬유를 끌어올렸다. 결코 전부를 쓰는 법이 없었던 마체술이 그의 안에서 달렸다.


그의 전신에 푸른 기운이 돌았다. 체내에 마력이 넘실거렸다.


손상된 고리 위에 붙은 다른 부속에 전쟁망치의 자루를 끼워 넣는다. 챔피언은 자루를 양손으로 잡곤 끌어당겼다. 그리곤 다리로는 땅에 붙은 앵커의 사슬을 붙잡았다.


“후아아압!”


-까가각!-


기합과 함께 코마드는 팔을 당겼다. 그러자 사슬이 벌어지길 멈췄다. 그 무자비한 파괴가 멈춘다.


“끄아읍!”


코마드의 얼굴이 빨개진다. 순간 구경꾼들이 탄성을 내질렀다. 범인들은 챔피언의 위대함에 전율하고 있었다.


찰박.


그건 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는 다른 방향으로 그 힘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롬의 동체가 바닥에서 일어섰다. 비틀비틀. 몰골이 엉망이 된 롬은 입 꼬리가 움찔움찔거렸다.


“크크큭.”


모두가 챔피언에 눈이 팔려 있을 때 흑기사가 일어섰다.


그는 바닥에 내팽개친 검을 주워들었다. 움푹 파인 칼날과 휘어버린 칼은 둔기에 가깝게 변했다.


쏴아아.


역시나 빗소리. 롬은 그 아래에서 우뚝 섰다.


“야.”


코마드는 부들거리는 눈으로 흑기사를 바라보았다. 롬은 투구 아래로 음산하게 웃었다.


“죽거나 살거나 뭐?”


“이걸... 노린 거냐!”


챔피언이 사납게 말했다. 그에 롬은 헛웃음을 냈다.


“모르겠는데?”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그런 생각이었다. 사실 롬은 자신이 이걸 노렸는지도 모르게 됐다. 그건 너무한 참사 아닌가. 그가 바타니아 숲에 불을 놓은 건 고의였다. 그리고 이건... 사고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롬은 그렇게 자신을 합리화했다.


“내가 너랑 안 싸운다고 했지! 돼지새끼!”


그는 참지도 않고서 속에 있는 말을 게워내고 있었다. 롬은 안간힘을 쓰는 챔피언을 보고는 바닥에서 진흙을 한손 가득 퍼올렸다. 그에 코마드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연스레 입에서 욕지거리가 치솟았다.


“개, 개자식이! 하지 마!”


“받아들여. 편해. 크크큭!”


롬은 쌓인 원한을 풀기로 했다. 머리 한편으로 이런 짓을 할 때가 아니란 걸 알았지만 참을 수 없었다.


아주 잠깐이다.


이럴 때가 아니고서야 언제 이 미친놈에게 우위를 점할 수 있겠는가! 코마드의 팔에 수많은 인명피해와 및 재산이 걸려 있었다. 그는 필연적으로 사슬을 놓지 못한다. 심지어 이건 사고에 불과하다. 결코 롬이 잘못한 게 아니다.


아무튼 그랬다.


촤악!


롬은 풀스윙으로 진흙 덩어리를 던졌다. 코마드가 고개를 틀어 피하려고 했지만, 땅과 하늘에 구속된 몸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리고 모든 좌중이 경악했다.


퍼억!


결국 끈적한 점성이 코마드의 얼굴에 맞아 흘러내렸다. 그에 롬은 참지도 않고 웃었다. 도파민이 충만해진 그의 머리가 엉망진창이 됐다.


“크하핳! 간다! 나는 줘 패러!”


타닥!


롬은 구부러진 검을 억지로 칼집에 밀어 넣고는 달렸다. 빗속에서 멀어지는 뒷모습이 경박하다. 뒤에 남게 된 코마드의 얼굴에서 진흙이 결국 다 흘러내렸다.


“...”


흙을 쳐 맞은 코마드의 눈이 감겨있다 천천히 뜨였다. 그 눈은 참으로 고요했다. 차분하기까지 했다. 다만,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영양 부족인 듯, 황금의 챔피언은 금안을 깜박였다. 그리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평정심, 진정. 이성이란 게 아우성댔다.


“후우...”


달군 쇠를 삼킨 것 같은 분노도 투지도 모두 숨으로 내뱉으라고.


“파하.”


내뱉는 숨이 뜨겁다. 감았다가 뜬 눈. 곧 그의 눈 안에 불길이 돌았다.


좆 까.


뚜욱.


그리고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헤르미아 궁의 대기실에서 벙어리와 아론이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이 친구는 일대일 승부 같은 거 안 합니다. 이 친구는 주먹구구, 임기응변식으로 싸우는 난전에 강한 타입입니다. 성향상 위기에 몰리면 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 말대로지만.


“푸웁...”


[그러니까 싸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코마드 님께서도 그런 시시한 싸움은 맥이 빠지시지 않습니까?]


이건 전혀 시시하지 않은 싸움이다.


“푸하핫!”


분노가 웃음으로 승화된다. 아주 재밌게 됐다. 머리가 돌아버릴 정도로.


“개새끼가아앗!”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천지를 울려댔다. 순간 그 자리에 있던 구경꾼들은 오금이 저리다 못해 아랫도리가 느슨해졌다. 그 분노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 어어!?”


“챔피언께서 무슨...?”


-꽈아앙!-


코마드는 붙잡은 사슬 놓아버렸다. 동시에 사슬이 터졌다. 섬에 매달려있던 사슬이 홰치기 시작했다.


“모, 모두 도망쳐!”


“채, 챔피언이 미쳤어!”


콰가강!


사슬이 건물들의 벽과 도로를 헤집어댔다. 이어지는 파괴. 그리고 부유섬이 기울어진다.


-구구궁-


그리고 추락하는 것들이 있었다. 하늘 높이에서 그랬다. 부유섬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것들. 돌, 흙, 나무. 가구들 같은 것. 개중에는 건물이 흘러내린 것도 있었다. 기울어진 땅을 붙잡지 못한 온갖 것들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쿠웅! 퍽!


일대의 지붕과 광장, 공터, 도로를 가리지 않고 추락물들이 떨어졌다.


섬들을 잇는 사슬들도 팽팽해진다. 날아가지 말라고. 버티라고.


하지만, 그 의지가 무색하게 상공의 사슬들도 몇 개가 터져나갔다. 아마도 추후에 책임을 물어야 할 시공자들이 혼절할 모습이었다.


그렇게 부유섬 하나가 기울었다. 그렇게 승천의 도시에 드리운 하늘의 그물에 구멍이 하나 나버렸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던가. 이건, 하늘에 구멍이 나버린 상황이었다.


“이제껏 겪었던 것 중에 최고다! 나랑 맞서 싸워라! 롬!”


챔피언이 광분해서 날뛰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노를 뛰어넘어 희열마저 섞여 있었다. 전쟁망치를 바닥에 끌면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 자체로 파괴인 괴물이 내달렸다.


그리고 도망가던 롬은 그 상황을 돌아보고 외쳤다.


“씨, 씨발!?”


도시 복판이 참상이 되고 있었다.


.

.

.


“어, 어어...?”


한편 로나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빗속을 헤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낌새를 눈치 채고 레이첼에게 지원을 요청하러 가던 중이었다.


“세, 세상에.”


그리고 부유섬이 기우는 장면은 그녀가 있는 곳에서도 보였다. 헤르미아의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하늘에 난 구멍을 목격하고 있었다.


“...안 보인다. 안 보인다.”


로나는 고개를 돌리고선 앞으로 걸었다. 필요한 과정이라고 자신을 설득하면서 그랬다. 천문학적인 피해를 경신하고 있는 롬의 악운이 정말로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


“레이첼 경! 어디에 있나요!”


여기사를 부르면서 로나는 달렸다. 그렇게 그녀는 길을 서둘렀다. 로나가 역주하고 있는 도로는 레이첼이 오기로 했던 대로였다.


목이 쉬어라 불렀다.


“레이첼 경!”


행인에 부딪치거나, 치맛자락이나 신발이 물에 흥건하게 젖었다. 로나는 숨이 가빠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이 아프다. 그녀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고 하나, 그녀의 체력은 범인의 것이었다.


“레이첼 경...! 읏!?”


철퍽!


로나는 달리다가 넘어졌다. 돌부리에 걸렸는지. 철푸덕하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행인들은 분홍빛 유녀가 넘어진 데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하늘에 난 구멍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로나가 아파하면서 일어서려고 할쯤에 누군가가 그녀의 앞에 섰다.


“괜찮소? 아가씨?”


검은 각반. 그리고 연로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나는 고개를 들었다. 비와 흙탕물에 젖은 그녀에게 조심스레 일으키는 손길이 있었다. 찰나에 로나는 운명을 느꼈다. 그러나, 그건 로맨틱하거나 소녀 틱한 운명 같은 게 아니다.


그녀는 눌려있던 모든 이들의 운이 날개를 펴는 걸 느꼈다. 홀로 외로이 짖어대던 롬의 악운과 함께 그랬다. 로나의 능력이 그걸 맡아냈다.


“경께서는 분명 흑기사로군요!”


“...날 아시오?”


낡고, 상처 난 흑갑을 입은 노기사가 물었다. 그에 로나가 활짝 웃고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노인장의 손은 단단한 데가 있었다.


“그럼요! 롤랑 경이시잖아요!”


그에 롤랑은 헛웃음 내보였다. 레이첼이라고 외던 소녀, 아는 이름에 이끌려온 노기사는 피로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두 눈에는 의지가 살아있었다.


귀부인과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땅을 접어달린 흑기사가 헤르미아에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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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막간 24.09.09 11 1 9쪽
157 우는 소리 24.09.06 10 1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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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우는 소리 24.09.04 11 1 16쪽
154 방문자들 24.09.02 10 1 17쪽
153 하얀 거절 24.08.30 12 1 17쪽
152 하얀 거절 24.08.29 10 1 10쪽
151 하얀 거절 24.08.28 14 1 16쪽
150 검고 하얀 그대들에게 24.08.26 12 1 11쪽
149 날개 없는 자 24.08.26 10 1 11쪽
148 날개 없는 24.08.26 6 1 14쪽
147 이어지는 길 24.08.26 6 1 14쪽
» 이어지는 길 24.08.26 6 1 11쪽
145 죽거나 살거나 24.08.21 7 1 14쪽
144 죽거나 살거나 24.08.21 7 1 14쪽
143 입으로 내는 것 24.08.16 9 1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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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벌레들의 합창 24.08.16 8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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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벌레가 우는 아침 24.08.12 9 1 14쪽
138 벌레의 다리 24.08.09 12 1 12쪽
137 어스름 24.08.09 12 2 12쪽
136 하울링 24.08.02 12 2 10쪽
135 저항과 혼란 24.08.02 14 1 14쪽
134 도망치고 전진하는 자들. 24.08.02 12 1 15쪽
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132 밤을 타넘는 자들 24.07.26 16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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