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게 도망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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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안새
그림/삽화
피안새
작품등록일 :
2021.03.24 00:00
최근연재일 :
2024.09.13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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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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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180
글자수 :
967,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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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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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하얀 거절

DUMMY

엘리자는 피를 쭉 내뱉었다. 풀린 무릎을 억지로 일으켜세웠다. 비와 피가 조그만 늪을 만드니 그 점성에 다시금 주저앉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롯이 섰다. 손에 검을 쥔다. 그녀는 엘리스의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내가 밉지 않니?”


복부를 짓누른 손에 피가 넘실거렸다. 엘리자는 희게 웃었다. 그 말에 엘리스의 눈이 좁아졌다. 잇새로 나오는 탁한 숨. 엘리스는 무어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있었다.


“에리 백작!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부르는 예의나 말투가 엉망진창이지만 롬은 소리쳤다. 무릎 꿇은 자세로 있던 그가 일어났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엘리자에 열불이 났지만,


지금 설득해야 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검은 쪽이었다.


엘리스의 눈이 돌아갔다. 피로와 울분이 섞인 눈이었다. 이 모든 혼란을 자신에게 전가하는 롬에 대한 분노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들을 수밖에 없었다.


벙어리의 목소리는 이미 그녀의 안에 남았다. 그걸 거부하고 무시할 수가 없다. 엘리스 바타니아는 우스울 정도로 외로운 사람이니까. 자신의 증오조차 움츠러들 정도로.


그리고 그만큼이나 외로운 사람이 있었다. 사랑에 목마른 사람이 있었다. 결코 가지지못할 것에 매달린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에도 보지 못한 멍청한 여자가 있었다.


“언니는 동생을 사랑하고 있다고. 그 검에 죽어도 좋을 만큼!”


좌중의 사람들이 그 말을 곱씹건 말건 롬은 열변했다. 그리고 엘리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지껄여댔다.


“밉잖아! 그러니까 저 여자가 원하는 대로 하게 두지 마!”


엘리스는 검을 움켜쥐었다. 그녀는 이를 갈았다. 엘리스의 안에서 검은 늑대가 종용했다. 모든 말들은 무의미하고, 증오는 가깝다. 그 피와 살로 목을 축이고 자신을 편하게 만들 수 있다.


무어라고 저 말을 듣는가. 뭐 때문에 그에 따라야 하는가?


그냥 해버리면 된다. 목을 물어뜯어 죽이면, 너는 편해질 수 있다.


“닥쳐... 닥쳐어어어!!”


결국 엘리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공기가 튀어나갈 듯했다. 비가 물러갈 것 같았다. 그 정도로 크게 울어댔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울링이 아니었다. 검은 늑대가 꼬리를 말았다. 제 주인의 분노가 맡아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롬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잇새로 숨을 흘렸다. 복잡한 머리. 생각. 그 모든 것을 손으로 완결 짓고 싶다. 머리가 고생하지 않게. 현혹되고 싶지 않아서.


그러니까 부숴버리면 되는 것이다. 저 뜻 모를 의지도 방해도. 전부 손안에 부서지면 의미가 없게 된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느끼고 싶지 않다. 그저, 그저... 편해지고 싶을 뿐.


까득


“오든가...! 내가 이기면 그 뿐이야.”


그렇다면 모든 방해도 의지도 꺾어버리고, 엘리자도 해결된다.


이성적인 사고라기 보단 폭력에 가까운 비약을 새긴다. 그게 편했다. 강한 자가 하늘 아래 승리할 뿐이니까.


엘리스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롬을 노려보았다. 그것으로 답이 되었다. 이미 한발 앞서서 그 결심을 들여다본 카룰 샤를롯, 승천자는 맥이 탁 풀렸다. 이 촌극을 자매 중 하나는 받아들일 생각이었나 보다.


하얀 거절마저 집어삼킬 정도로 검게 물든다.


겨우 벙어리 한명 때문에. 아니, 어떤 벌레 때문에 그랬다.


“...알아서 해.”


샤를롯은 불쾌한 듯 말했다. 그는 급작스레 피곤해졌다. 탈력감이 덮쳤다. 고고한 왕의 신영이 움직였다. 순간 그의 측근들이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의미인지 몰라서. 샤를롯은 곁눈질로 자매와 롬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결투든 뭐든 간에.”


다 집어치우라는 건지, 그도 아니라면 허락인지. 승천자의 뜻음 헤아리던 자들이 깊이 고개 숙였다.


그건 결투를 허한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샤를롯은 로열박스를 나가버렸다. 토너먼트 건물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그 발길에 측근들이 급히 따라갔다.


황금의 챔피언은 자리에 남아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런 날도 있구나 싶다. 저 만능할 것 같은 왕께서도 물러나는 일이 생길 줄이야.


“왕이시여. 전 잠시 뒤에 남아 지켜보겠습니다.”


“...”


샤를롯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뒤를 따라가야겠지만, 코마드는 이쪽에 더 볼일이 있었다.


순간 롬이 어정쩡하게 서있는 모습이 앞에 보였다. 엉망이 된 흑갑이 주춤거리는 게 보였다. 갑작스레 나가버리는 샤를롯을 보고선 어떻게 할지 몰라서.


갑작스러운 왕의 퇴장에 이곳에는 너덜너덜한 당사자들만이 남았다.


황금의 챔피언은 롬에게 입을 열었다.


“내려가. 네가 얻어낸 기회다. 망치든 말든 맘대로 해봐.”


결투는 성사되었다.


코마드의 말에 롬은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치고 박고 싸우던 괴물의 말이 든든해지다니. 롬은 자신이 미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뭐든 간에 롬은 로열박스에서 뛰어내렸다. 꽤 높지만, 하늘에서 떨어진 적도 있었다. 이정도야 가볍다.


콱!


다만 무릎이 삐걱거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진흙이 사방에 튀었다. 롬은 거기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전율이 감돌았다. 이게 될 거라고 그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된다고 생각했어도 의심이 계속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안에 끓는 감정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믿길 잘했다. 자신을 던지길 잘했다. 그런 마음이 입 밖으로 나왔다.


“하아... 나 진짜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진흙의 길. 노면 위로 한 칸 올린 결투장의 주변에는 기사들이 있었다. 그들이 갈라졌다. 흑과 백 양쪽으로.


그리고 반가운 얼굴도 있었다. 롤랑, 레이첼, 아론. 다들 몸과 마음이 적당히 너덜너덜해져서 서있었다.


그들의 눈길을 받으면서 지나쳤다. 결투장 위를 올려다보면 자매들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비는 내렸다. 그것을 맞으니 문득 숨이 답답해졌다. 시원한 비가 맞고 싶었다. 자신을 가두고 지켜주던 투구를 손으로 긁어댔다. 어떻게든 찌그러진 이음새를 벗어내기 위해서 애썼다.


우직.


그러고 있으면 롬의 뒤로 누군가가 다가와 도와주었다. 롤랑, 노기사는 억센 손길로 롬의 투구를 벗겨버렸다.


그러자 시원한 비가 얼굴과 머리카락에 내렸다. 롬은 잠시 그걸 맞았다. 드러난 얼굴이 꽤나 엉망이었다. 퉁퉁 붓고, 약기운이 빠지기 시작해서 창백해진 얼굴까지.


그 모습을 보고선 누군가가 피식거렸다.


롤랑의 얼굴은 착잡해졌다. 노기사도 죽을 만큼 고생한 주제에 남 걱정하고 있다니. 롬은 어금니가 빠진 자리를 혀를 밀어보았다. 그러자 헛웃음이 나왔다. 롬은 그 심정을 자글자글한 얼굴에 대고 말했다.


“전 비 오는 게 좋아요. 쟤들은 싫겠지만.”


“아가씨들은 비를 싫어하시지요. 아픈 기억만 떠올리게 할 뿐이니까.”


롤랑은 덧붙였다.


“거기에 좋은 기억을 쌓아주십시오.”


“미안해요. 롤랑. 전 지금 거짓말 못합니다.”


생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롤랑이 벗긴 투구를 받아들고 말했다.


“줘 팰 겁니다.”


롤랑의 복잡미묘 한 미소를 보곤, 롬은 결투장으로 올라가는 짧은 계단을 밟았다. 거기에는 기다리는 엘리스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내장이 순대가 된 엘리자까지. 그들의 거리는 미묘했다. 서로 협력할 사이도 아니거니와, 각자 원하는 바가 달랐으니.


롬이 올라오자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말할 수 있었어?”


“네가 나가고 난 뒤에.”


“기가 차.”


당황조차 삼키며 엘리스는 분노를 끌어당기려했다. 자꾸만 자신을 방해하려는 그에 배신감이 들었다. 그런데도 한편으로는 안심이 들었다.


이 모든 엉망들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그 정도로 고생할 이유가 있는 건가. 엘리스는 그 속내를 내뱉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


“개 멍청해서.”


엘리스가 했던 말이었다. 롬은 툭툭 내뱉었다. 입이 여전히 말썽이었다. 그는 손안에 쥔 투구를 손으로 움켜잡았다.


“둘 다 얌전히 실려가줘야겠다.”


“핫... 네가?”


엘리스가 비웃었다. 그에 롬은 크게 끄덕였다. 검은 과녁 옆에서 비틀거리고 있는 하얀 과녁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그래.”


누군가가 눈치를 봤다. 결투의 신호가 필요했다. 그리고 자매들 중에 누가 먼저 할 것인지. 그 미묘함에 대고서 롬은 흉악한 이빨을 드러냈다.


들개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롬은 팔을 번쩍 쳐들었다. 순간 그의 팔 안에서 놀고 있던 투구가 손에 잡혔다.


격식이고 뭐고 없는 개전선언은 몸으로 하면 된다! 투석기가 된 롬의 팔이 휘둘러졌다.


깡!


순간 모두의 눈이 점이 됐다. 날아간 투구에 이마를 정통으로 맞은 엘리자가 풀썩 뒤로 넘어갔다. 그것을 보고서 묵기사단이 비명을 질렀다.


“로드!?”


“야, 롬...! 이 미친놈아!”


“푸하핫!?”


한편에서 챔피언은 폭소하고, 청기사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레이첼의 표정도 미묘해졌다. 롤랑은 은근하게 헛웃음을 냈다.


그리고 상대인 엘리스의 표정이 굳건 말건 롬은 허리춤의 검을 뽑아들었다. 좌중의 경악을 뒤로하고서 롬이 하울링했다.


그가 쌓아온 증오와 분노를 받으라. 그는 해방감에 울부짖었다.


“덤벼! 개년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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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 우는 소리 24.09.04 11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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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하얀 거절 24.08.30 12 1 17쪽
» 하얀 거절 24.08.29 10 1 10쪽
151 하얀 거절 24.08.28 14 1 16쪽
150 검고 하얀 그대들에게 24.08.26 12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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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이어지는 길 24.08.26 5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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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죽거나 살거나 24.08.21 7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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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4 도망치고 전진하는 자들. 24.08.02 12 1 15쪽
133 늑대와 마법사. 그리고 황금 24.07.29 14 1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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