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손 1
역사는 반복된다.
차야의 쌀 운반선에 몸을 싣고 북쪽의 후시미성을 바라보았다.
언제인지 모른다.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지탱하게 하고 힘을 내게 한 그녀, 그런 그녀를 두고 일본을 떠나야 한다.
물과 같이 다가온 그녀, 무솔의 마음을 휘저어 놓았듯이 다시 어디론가 흘러갈 것이다.
아니, 더 이상 흐르지 못하고 말라 갈 것이다.
뜨거운 햇볕에 아지랑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눈앞 시야가 바람에 흔들리며 후시미성 천수각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얼른 고개를 돌리며 팔을 들어 바람을 막았다.
“강바람이 시원하지 않소?”
누군가가 무솔의 뒤에서 말을 걸어왔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엄청난 기를 느낄 수 있었다.
돌아서서 상대를 보았지만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구신지?”
“하하하, 예전에 선대 한조님과 있을 때 뵌 적이 있지요? 한조라고 합니다.”
“아! 그러면 그쪽이 당주를 이어받은 분이군요.”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젊은 한조를 보며 웃었다.
한조라는 사나이는 선대와 또 다른 기풍이 있어 보였다.
“어디로 가십니까?”
‘차야 시로지로의 상단이 간토와 관계가 있다고 들었다. 혹······.’
긴장하면서 주변을 살폈다.
“일단 오사카로 가봐야 알 것 같습니다만.”
“경계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다만 주군의 심부름으로 온 사자입니다. 하하하.”
불어오는 강바람에 한조의 긴 머리가 휘날렸다.
“하하하,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늘 긴장의 연속이 아니겠소. 어디 심부름 내용을 들어 볼까요.”
한조가 무솔을 바라봤다.
서산으로 지고 있는 해가 붉은 기운을 하늘로 토해내며 자신의 앞에 있는 무사를 감싸고 있었다.
“주군께서 말씀하시길, 품에 있는 물건을 보게 된 것을 최대의 영광이었다고 했소이다.”
“품에 있는 물건이라니요?”
흠칫 놀랐지만, 시치미를 뗐다.
“또한 누군가는 또다시 잘 못 된 망상으로 잘못된 길을 갈 수 있으니 품속 물건의 주인으로서 물건을 잘 보관하셔서 후대를 잘 대비하시라고 했습니다.”
‘음!’
입을 굳게 다물었다.
젊은 한조가 무솔에게 무릎을 꿇어 인사를 하고는 배가 닿은 육지로 사라졌다.
“도쿠카와 이에야스! ······사람들은 그를 간토의 너구리라 한다지.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저택에서 이에야스를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
오사카에서 센과 하이난을 만나 나고야로 가는 배를 탔다.
멀어져 가는 오사카를을 바라보았다.
지난날과 달리 우뚝 솟아 있는 오사카성의 천수각과 성곽들 그리고 그 주변 도시와 항구가 을씨년스러웠다.
많은 무기와 군량미가 실려 있는 배는 병사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돛을 부풀리며 세토내해를 가로질렀고, 병사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눈물을 훔치는 사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오사카의 포구 위 하늘을 날며 배를 따르고 있는 갈매기들.
지난날의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이 땅으로 온 것이 하늘의 뜻이었을까?’
*
조선으로 돌아온 무솔은 고금도 외가를 찾아갔다.
외가에서는 보물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남긴 편지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청동거울의 주인은 한국(韓國)의 천손(天孫)을 지키는 사명을 타고났다.
“한국? 천손? 도무지 알 수 없는 글이다.”
아버지의 편지글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지만 더 이상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고금도 통제영에 있는 준사를 만나고 난 뒤 지리산으로 향했다.
고금도의 통제영은 명 육군과 함께 고니시 유키나가가 있는 순천 왜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출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명나라의 진 린이 이끄는 수군도 출전 준비를 하는지 분주했다.
년 초부터 전쟁은 소강상태였다.
일본군들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아 놓고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순천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사천성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울산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들어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일본 수군도 안골포성과 거제도 일대의 성에 눌러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명군과 조선군이 지난해 겨울, 울산성을 쳤지만 실패했다.
이후 큰 손실은 입은 명군은 전투를 자제하며 시간을 허비했다.
이 순신의 조선 수군은 고금도에 진을 설치하고 남해안의 제해권을 조금씩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스승님! ······그동안 무고하셨는지요?”
갈라지는 목소리로 스승을 부르며 큰절했다.
“무솔아! 무사했구나. 너의 소식은 듣고 있었다. 이렇게 직접 보니 감개무량하구나!”
무솔과 함께 지리산으로 돌아온 종하와 연서도 눈물이 나는지 고개를 돌렸다.
스승인 배달처사에게서 천손이라는 것에 대해 들었다.
“청동거울과 검, 그리고 방울은 그 자체라기보다는 천손을 지키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수천 년 동안 전쟁으로 많은 사료가 불타거나 잃어버려서 그 내막을 알 수 없지만, 그것들은 분명히 대대로 수천 년을 내려온 것이다.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고 후대에까지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청동거울에 깃든 어떤 혼이 한국(韓國) 천손의 수호자를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천손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면 저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많다는 것인가요?”
“이곳 지리산의 사명 또한 청동거울의 주인을 도울 수 있는 무사들을 길러내는 것이다.”
“아! ······한국과 천손이라? 뭐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면 알수록 복잡해져 가는 보물들의 사연에 갑갑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이것은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세 가지 보물과 함께 천손의 상징 중 하나가 곡옥이라는 말이 있다.”
“네? 곡, 곡옥이라고 하셨습니까?”
“왜 그러느냐? 혹 곡옥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느냐?”
“아, 아닙니다.”
‘곡옥? 굽옥? ······비슷하지 않은가? 미츠나리를 만나봐야겠다.’
센과 함께 부산포로 갔다.
일본의 사령부가 있는 부산포는 마치 일본에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마도 사람들이 부산포로 건너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고 조선인들도 그들과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저자는 누구인데 조선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까?”
주인이 일을 시키면서 말을 듣지 않는 일꾼들을 사정없이 매질하거나 걷어차고 있었다.
“저런 나쁜 새끼, 같은 조선 사람으로 우째 저럴 수가 있노.”
구경하던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욕을 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지금 뭐라 하셨소. 매질하는 저 사람이 조선 사람이오?”
혹 욕을 한 게 문제가 될까 몸을 사렸다.
“우리는 그저 매 맞는 사람들이 안 돼서 그러오.”
“그렇소. 김 진산가? 먼가하는 저놈은 왜놈덜에게 덜러부터서 잽혀 온 조선 사람들을 괴롭히기로 악명이 높은 놈이라오. 저런 쳐 죽일 놈.”
두 사람을 훑어본 한 사내가 이를 갈며 김 진사를 욕했다.
“야 이놈아! 왜놈덜이 더러믄 우짤라고 지랄이여!”
“덜어라 카지. 한 번 죽지 두 번 죽냐?”
“어이구 잘났다. 왜놈 앞에서는 끽소리도 몬하넝기.”
김 진사라는 사내를 유심히 관찰하고는 미츠나리가 묶고 있는 저택을 찾아갔다.
대문을 지키던 무사가 무솔 일행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섰다.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오.”
“하하하, 부교 나리에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들여보내 주시오.”
문밖이 소란 하자 무장 하나가 병사들 몇 명과 함께 나왔다.
“무엇 하는 놈이냐?”
“네, 우리는 후시미성에서 부교 나리를 찾아왔습니다.”
“후시미성이라? 증표를 보이거라!”
“그런 거는 없소이다만.”
무사가 무솔과 센의 위아래를 살펴보더니 병사들에게 내 치라고 명했다.
무솔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것을 부교 나리에게 전해 주시오.”
무사가 다시 한번 두 사람을 보고는 마지못해 편지를 받았다.
무솔이 건넨 편지를 들고 들어갔던 무사가 돌아와 무솔을 안내했다.
대문을 지나며 정원과 건물들을 살폈다.
어느 건물 입구에서 무사가 무솔 일행을 돌아보았다.
“무기는 들고 갈 수 없다. 여기에 두고 들어가거라.”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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