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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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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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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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오토마타라 불리는 이들 중 둘째―― 세컨드는 무표정하게 책상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정리하는 손길에서도 감정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귀여운 외모와는 상반되게 만사에 무심하기만 했다.


하지만 속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흥분되는 나머지 주체하기 힘들었다. 사실 그 반동 탓에 더더욱 무표정하게 된 것뿐이었다.


바로 옆 방에 사람이 있기에 망정이지. 없었으면 당장이라도 기쁨에 뒹굴었으리라.


――창조주, 리아가 설계한 성격대로.


그러나 아쉽게도 그러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해야 할 건 마스터―― 리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본능이나 본성이 끼어들 틈은 없다. 마스터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놓는 것도 망설이지 않아야 할 판국에, 그 손으로 만들어진 자신이 추태를 부려 위신을 깎아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그렇습니다. 모든 건 지고하신 분을 위해······”


재차 말로 다짐했을 뿐이었지만 귀로 돌아오는 소리를 들으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다. 그것은 오르가슴에도 가까운 쾌락의 극치였다.


딱히 세컨드의 취향이 이상한 건 아니다. 지고한 분의 손으로 창조된 이들은 전원 똑같은 감정을 품으리라. 그 외에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일에 지장이 있는 것도 문제가 있다.


책상에 엎드려 달짝지근한 신음을 내며 몸을 비비 꼬던 세컨드는 본분을 떠올리고는 급히 감정을 정비했다.



“저라는 사람이······.”


자책하며 세컨드는 귀엽게 머리를 콩 때렸다. 이것은 리아가 주입해준 1,000가지의 마법소녀 행동론에 따른 것이었다.


금세 차분해진 세컨드는 평온한 눈이 되었다.



“버러지들도 나름대로 쓸 데가 있었네요. 이리도 빨리 성과를 보여드릴 수 있을 줄은. 그 점만은 확실히 칭찬해주죠. 차후 리아 님이 어찌 처리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도 기회가 온다면 상으로 적당히 괴롭히고 죽이도록 할까요······?”


밖에서 들어온 빛에 비친 세컨드의 얼굴은 이 이상은 없을 정도로 밝고 환하였다. 그것은 리아가 설계하고 그린 순수한 마법소녀 그 자체였다. 색욕으로 눈빛이 번들거리던 아까의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없었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러한 일이 있었는지는 모를 것이다.


평소의 무표정이 완전히 깨진 세컨드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 같은 분위기로 남은 서류를 정리했다.


탁탁. 마지막 남은 서류를 책상에 두드려 열을 맞춘 것으로 끝.


세컨드는 즉시 공간을 열어 본인의 [차원수납]에 서류들을 모두 보관했다.


이 일련의 행동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당연했다. 리아가 직접 만든 자신이 겨우 7급에 달하는―― 경우에 따라선 6급까지도 내려가는 [차원수납] 따위에 버거워할 리가 없지 않은가. 되려 이딴 걸로 놀란다면 리아에 대한 불경죄를 물어 목을 뽑아버릴 것이다.



“뭐······ 진짜 실행에 옮기긴 힘들겠지만요. 한동안은······.”


주인에게 폐를 끼치는 종은 그 존재 자체에 아무런 가치가 없다. 버러지들을 일소시키고 싶은 마음은 억눌러둬야 한다. 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세컨드는 무척이나 아쉬워 애처롭게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그 외견과 더불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한순간으로, 곧장 아무런 미련 없이 떨치고는 옆에 고이 모셔둔 챙이 넓은 모자와 지팡이를 들었다. 이것들을 다루는 세컨드의 손길을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경건함마저도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건 창조주께서 직접 만들어 하사하신 물건이니. 소홀히 대한다는 건 있을 수도, 감히 행할 수도 없다.


챙이 넓은 마법사―― 혹은 마녀의 모자를 쓴 세컨드의 얼굴이 의지를 무시하고 헤벌쭉 풀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에헤헤······ 리아 님께서 주신 내 신기······.”


한낱 소모품으로 만들어진 자에게 본인의 힘이 담긴 신기를 내려주다니. 각자 개성을 지어준 것도 모자라 무려 거기에 맞춘 특제품을······.


정말 이만한 주인이―― 창조주가 또 있을까? 아니, 단언컨대 존재할 리가 없다. 이 세계, 온 우주를 둘러보더라도 오직 리아―― 지고한 존재뿐이니라.


이만큼 행운아가 또 없다.


세컨드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리아의 손에 태어날 수 있어서.


살살.


미소로 지팡이를 쓰다듬은 세컨드는 표정을 다잡았다. 이제 시간이 다 됐다.


세컨드는 무표정으로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이전 집 주인은 제법 내부에 공을 들였었는지 경첩 소리도 없이 깔끔하게 문이 열렸다.


밖으로 나오니 기다렸다는 듯 다가오는 사람이 둘 있었다. 그들은 바로 엔가나와 테츠로, 이번에 선생님 역할로 제정된 자들이었다.


‘건방지게도.’


교육이라며 으스댔을 땐 정말이지 얼마나 반으로 갈라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리아가 직접 정해준 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손을 봐주었을 것이다. 뭐, 진짜로 갈라 죽이거나 하진 않을 거지만. 허가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젠 괜찮다. 더는 기분 상할 일은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이 저자세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위협 따윈 하진 않았다. 멍청하게 리아의 귀에 들어갈 수 있는 일을 하겠는가. 그저 격차를 보여줬을 뿐이었다. 상인으로서, 관리자로서, 존재 자체의 격차를······


좋게 평가하자면 이 둘은 리아에게 지목당하는, 분에 차고 넘치는 영광을 얻을 만은 했다.


그러나 그건 한낱 버러지들 사이에서나 통용될 재롱. 리아의 손에 태어난 자신에 비할 바는 전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겨우 200년밖에 못 사는 버러지 따위가 어찌 지고한 분의 지식을 따라잡겠는가.


역시나 그 지식의 단편을 아주 살짝 보여주니 지금처럼 단숨에 저자세로 변하였다.


‘이 점만큼은 리아 님께서 추천한 자들다웠지. 본인들의 주제를 깨닫는 정도의 지능은 있어. 그건 확실히 다행이야.’


그런 생각과 함께 세컨드는 둘에게 다가갔다.



“맡기신 일은 어찌 되셨습니까?”

“빠듯했지만 시간엔 맞출 수 있었습니다.”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그럴듯한 보고를 올릴 수 있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혼자 했다면 진작에 다 끝났을 일이다. 실로 굼벵이다운 버러지의 일 처리 속도가 아닐 수 없다.


정말 느려터져서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마음 같아서는 싹 다 쳐내고 혼자서 일을 하고 싶다. 하지만 그건 리아의 바람과 거리가 멀다. 창조주인 리아는 이 버러지들과 함께 조합을 운영하기를 원한다.


그래, 이른바 시험이다. 어찌 짜증 난다고 포기할 수 있나.


리아가 고개를 저으며 실망했다고 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너무나 무섭고 두렵다. 간담은 서늘하고 오금마저 지릴 정도다. 정신적 중압감에 잠식되어 마치 멀미라도 나는 듯하다. 마치 깊은 바다에 끌려들어 가는 감각이다.


그렇기에 사실과는 관계없이 온후하게 말하며 둘을 추켜올려준 것이다.


대화 기술이라든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는 화법들도 모두 상인으로서의 필요한 덕목이다. 그것들은 당연히 전해 받았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 실제로 이 둘에겐 더는 가르치려 들겠다는 마음이 남아있지 않았다. 특히 테츠는 내심 품고 있었던 야망마저 버리고는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는 형국이다.


‘과연 나의 창조주. 아주 조금의 지식만으로도 버러지에게 격차를 알려주는구나.’


진심 어린 감사를 마음속에서 올린 세컨드는 건네받은 서류들을 마법으로 살짝 띄어 빠르게 사르륵 넘겨 봤다. 당연히 무영창이다.


상당히 많은 서류였지만 그걸로 끝이다.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전부 읽었다. 눈앞에 있는 둘도 의심하지 않았다. 전에 몇 번이나 보여주어 읽는 척만 하는 게 아님을 증명했기에.



“으흠······ 자제와 인부의 인건비가 뒤죽박죽인 이유가 뭡니까?”


묻는 말에 테츠가 살짝 긴장하며 대답했다.



“시가라고, 각자 제시하는 금액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아······.”


세컨드가 한숨을 내쉬자 테츠는 몸을 떨었다.



“급히 사람을 모았기에 조정할 틈이 없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건축업은 향후 지속적으로 발달할 사업. 이런 틀도 없는 방식은 결코 긍정적이지 않습니다. 제대로 세후를 고려해서 기본급을 설정하고, 성과금을 지급하는 형태로 가닥을 잡으세요.”


지적한 부분이 적힌 장을 이면지로 활용하여 세컨드는 뒷면에 설정한 기본급 등을 정리하여 적어줬다.



“이, 이렇게나 많이?!”

“전체적으로 보면 액수의 차이는 거의 없습니다.”

“하, 하지만 이래서는 기술자들이 다 떠나갈 겁니다.”

“바라던 바입니다. 솔직히 지금의 건축 기술에선 단순 노동력이 훨씬 많이 필요하죠. 전문 기술자의 숫자를 줄인 만큼 노동자가 더욱 늘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날림 공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작업관리자를 두면 됩니다.”

“작업관리자는 원래도 있지 않습니까?”

“조금 다릅니다.”


세컨드는 다른 이면지를 꺼내 조직 개편도를 그렸다. 그건 지구에 있는 건설사의 조직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었다.


현장 책임자인 소장을 머리로, 밑으로는 품질, 공정, 안전, 원가관리의 세부 관리를 하는 중간 관리자가 존재하는 시스템이다. 이 중간 관리자가 단순 인력인 노동자들을 통솔하는 것이다.


이리하면 불필요하게 많았던 전문 기술자를 줄이고 효율적으로 자금을 돌릴 수 있다. 더불어 사공이 줄다 보니 명령 체계에 혼선도 적다. 그 말은 곧 시공 속도가 오른다는 뜻이었다.


진지한 눈으로 읽어보던 테츠도 이점을 알겠는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급한 건 조합 건물 자체입니다. 외관의 화려함이 아니라. 종래처럼 장인이나 기술자를 끌어모아 각자의 생각과 방식으로 일을 하다간 끝이 안 납니다. 완공까지는 무척 오래 걸릴 겁니다. 실제로 리아 님의 연구소도 예정 기간보다 보름 가까이 늦었다고 들었습니다.”

“확실히 수긍이 갑니다. 외관 같은 건 나중에도 추가할 수 있고 말이죠. 그렇지만······ 반발하는 자들도 있을 겁니다. 또 현장 책임자를 임명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모두가 납득할 인물이 아니라면 반드시 말이 나올 겁니다.”


이곳은 딱히 건설사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해도 그 규모가 작았다. 거의 대부분이 가족 단위의 소규모에 불과하였다. 그렇기에 테츠가 저런 걱정을 하는 것이다.


미개하거나, 멍청하다는 이유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 사람들의 평균 지능은 지구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런데도 왜 이런 비효율적인 구조냐?


단순하다. 그냥 여기 사람들의 힘이 좋아서다.


이곳 사람들은 지구에 비해 못해도 최소 3배 이상은 힘이 세다. 많게는 10배에도 달한다.


건설의 속도가 남다른 것이다. 중장비가 필요한 짐조차도 가볍게 들어 나르니 지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건물이 지어진다.


완공이 늦어지는 건 단순히 장인들의 고집으로, 조각이나 여타 디자인이 그들 성에 찰 때까지 뭉그적거리기 때문이다. 건물의 뼈대 자체는 진작에 만들어져 상당수의 인부는 이미 집에 돌아가고 없다.


애당초 사람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여긴 높아 봐야 4~5층의 건물이 끝이다. 그나마 왕성 같은 곳이 10층쯤의 높이는 되려나······.


지구처럼 50층이 넘어가는 초고층 빌딩은 단연코 없다. 그러니 소규모의 건축사들로 충분했고, 인원이 더 필요하다면 이번처럼 여러 군데에서 충당하는 식이면 됐다. 이런 급조된 팀이라도 완공 속도는 우월했으니.


리아의 연구소도 완공이 늦긴 했지만, 지구라면 1년이 넘게 걸렸을 걸 한 달로 줄인 것이었다. 겨우 보름 늦었다고 뭐라 하기 민망하다.


독촉하고 있기는 하나 조합의 완공도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로 만족해선 안 됐다. 리아가 바란 세상이 되려면 건축업은 좀 더 발전되고 성행해야 한다.


――아니. 솔직히 그러고 싶지 않다.


생각해보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이쁘다고 미물과 동급인 이 버러지들에게 리아의 지식을 나누어줘야 한단 말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굴지 않기로 했다.


‘그래요. 대충 씨앗을 심었다는 것으로 넘어갈까요? 이거라면 리아 님의 뜻에 따른 모양새이기도 하니. 어차피 한 200년쯤 지나면 알아서들 비슷한 모양새로 발전할 테니까 문제는 없겠죠. ······물론 자기들이 싸질러 놓은 문제를 해결했다는 가정하에지만.’


다만 그럴 가능성은 한없이 낮달까? 그 거대한 똥을 버러지들 따위가 암만 모여봤자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당연히 어찌 되든 상관없다. 리아에게 창조되지 못한 버러지들이 서로 싸우든 말든, 굶어 죽든 말든 아무런 관심도 없다.


‘지고하신 분의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말이지.’


비웃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티 내지 않고 세컨드는 말하였다.



“여태까지의 전통을 깨트릴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조합 건물의 완공을 서두를 뿐, 이번 한정으로 예외임을 알려 혼란을 피해주세요. 마찬가지로 작업관리자 또한 최대한 반발이 나오지 않게 기술자들의 투표로 뽑도록 하죠. 앞서 언급한 방침도 시기상조의 섣부른 생각이니 잊도록 하세요.”

“어, 알겠습니다.”


앞서 격이 다른 능력을 보여줬기에 테츠는 군말하지 않았다.


적당히 씨앗을 뿌렸다가, 도로 잘 회수했다.


나쁘지 않은 결과에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세컨드는 이만 대화를 마치기로 하고 현관으로 걸었다.



“앗. 누나!”


먼저 와있던 이클립스가 세컨드를 발견하고는 손을 붕붕 흔들었다.


이 꼬마는 제법 마음에 든다. 듣자 하니 다른 버러지들과는 달리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지고의 주인을 도왔다고 하지 않는가. 무려 수백만 번을.


실로 기특하기 그지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기특하다고 하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그 당연한 것조차도 이행하지 못하는 게 버러지다. 바랄 수 있는 건 그저 걸림돌이 되지 않길 바라는 것뿐이다.


자신을 따르기도 하니 꽤 귀여운 기분이 들었던 터라, 세컨드는 드물게 살짝 미소를 그리고는 이클립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적으로는 괜찮지만, 공적인 자리에서는 말투에 주의하세요. 뭐, 그리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이라면 척척 해내겠죠.”


다른 때처럼······.


속으로 그리 중얼거린 세컨드는 알겠다고 하는 이클립스를 놔두고 옆을 봤다. 그곳에는 앞선 꼬마와 달리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부자가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필므라고 합니다. 이스피리아 님께 말씀은 전해 들었습니다.”

“또 뵙습니다.”


필므의 뒤로 먼저 봤었던 막시가 인사를 했다.


한순간이지만 세컨드는 표정을 관리하였다. 미소를 무너뜨리지 않았다는 게 아니다. 무표정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노력한 것이었다.


정말 잠시만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이 벌레 같은 놈들을 당장에 찢어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운이 좋게도 이 벌레들은 현재 주인과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쌓은 상태. 주인의 뜻을 무시하고 멋대로 죽인다면 그건 곧 반역이다. 감히 그럴 순 없다.


······열불나지만 참아야 한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언젠간 주인에게 버림받기를 비는 것뿐이다.


‘만약 바라던 대로 버림받는다면 그 길로 잡아 와 평생――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 귀여워해 드리죠.’


바로 그럴 수 없다는 사실에 못내 아쉬워하며 세컨드는 고개를 숙였다.


인사는 그걸로 마쳤다. 당장 찢어 죽이고 싶은 자들에게 더 뭐가 있겠는가. 말을 섞어봐야 살해 충동만 치민다.


그딴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하기 싫다.


거기에 조금 있으면 그분이 온다. 버러지들 따위에 할애할 신경은 없다.


맞이함에 미흡함이나 모자람이 있어선 안 된다. 즉시 몸가짐을 비롯하여 리아 앞에 서는 데 이상은 없는지 체크하였다.


지금도 이미 완벽하지만 혹시 모른다. 그럴 일은 만에 하나 있을 리가 없지만, 신기의 옷자락이나 모자의 끝자락이 구겨지진 않았나 점검하였다. 지팡이에도 얼룩은 지지 않았는지, 먼지는 쌓이지 않았는지 정성스레 살폈다.


모든 점검을 마치고, 세컨드는 가슴에 손을 얹고 무릎을 꿇어 때를 기다렸다.


자화자찬이라 해도 좋다. 이 이상은 없을, 자신의 모든 걸 담은 최고의 예우였다.


바로 그때였다. 이 더할 나위 없는 경의를 잠자코 쳐다보던 필므가 똑같이 무릎을 꿇고 예를 보이는 게 아니겠는가.


‘흥. 제까짓 게 그래봐야 저를 따라올 순 없겠죠.’


한껏 무시한 세컨드는 곁눈질로 필므를 보았다.


――그 눈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아름다웠다.


버러지 따위에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스스로도 의아하다. 그렇지만 정말로 아름다웠다.


그것은 마치 구도자. 거대한 깨달음을 얻은 자의 말로였다.


그 신을 향한 숭배의 기척은 아무리 세컨드라 할지라도 가볍게 볼 수 없을 만큼 신성한 것이었다. 오히려 필므에게 시선을 빼앗긴 만큼 세컨드가 뒤떨어졌다고 할 수도 있었다.


한낱 버러지에게······


세컨드에게 치욕이란 감정이 내달렸다. 자괴감에 목숨으로 리아에게 사죄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코 변명 따위를 대며 부정하진 않았다. 더불어 필므의 저 주인을 향한 숭배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만큼 필므의 저 마음가짐은 진실한 것이었다.


리아의 종이자, 사도인 세컨드가 잘못 볼 리는 없다. 미물보다도 못한 존재에 불과하지만, 이 자는 사도에 필적할 만큼 신앙심이 깊다.


‘필므 멜리다······. 어떤 심경의 변화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스터를 향한 그 마음은 인정하죠.’


잠시 필므의 얼굴을 쳐다본 세컨드는 눈을 감고 마음을 비웠다. 리아의 손으로 빗어진 자신이 뒤처질 순 없다는 일념으로.


이윽고 주변의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직 리아의―― 주인의 기척만을 애가 닳도록 기다렸다.


그러다 마침내 주인의 기운이 다가온 게 느껴졌다.


착각하거나 헷갈릴 순 없다. 주인의 기척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만 리 밖에서도 인식할 수 있으니까. 스스로가 본인의 기운을 감추더라도 모를지언정, 사도 되는 자로서 다른 자와 착각할 리는 만무하다. 반대로 기운을 드러낸다면 반대편 대륙에서도 정확히 주인을 감지해내리라.


역시나 곧 문이 두드려졌다.


대기하고 있던 엔가나의 노집사가 즉시 나갔다.


열린 문을 통해 숨을 삼키는 기척이 전해져왔다. 주인이다. 리아가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다.


다만 놀라는 게 너무 길다.


이 세상 모든 걸―― 하물며 미래조차도 샅샅이 내다볼 수 있는 주인치고는 의아한 반응이다.


이상함에 리아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감각을 넓혔다. 그랬더니 곧장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뒤에 버러지들이 똑같이 무릎을 꿇고 예를 보이고 있던 것이다.


놀라운 건 담긴 감정으로, 다들 필므에 준하는 신앙심―― 숭배의 감정을 리아에게 품고 있었다. 이클립스 꼬마도 그러하다. 뭔지도 모를 감정일 텐데도 성실히 최선을 다해 경의를 표했다.


외부자는 오직 테츠뿐이다. 이 버러지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남들이 다 하니 따라하는 것에 불과했다.


화는 나지만 그보다는 어느새 이토록 마음을 사로잡은 리아의 수완에 전율하였다.


아니, 지극히도 당연한 절차다. 오히려 놀라는 게 불경이다.


세컨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책했다.



“다, 다들 얼른 일어나세요.”


과연 자비로운 주인이다. 무례한 버러지가 껴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모두를 챙긴다. 세컨드 또한 그 고귀한 몸께서 직접 일으켜 준 자비로움에 크게 감동하였다.



“어, 왜, 왜 그러니?”

“실례했습니다. 감격한 나머지 그만······”


종으로서 주인에게 걱정을 끼칠 수 없다. 품에서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그리고 주인에게 멀쩡한, 미소 짓는 얼굴을 보여줬다.


여전히 눈시울이 붉었던지 염려스럽게 보는 리아.


그 마음 씀씀이에 세컨드는 감동하면서도 동시에 깊은 경외심을 품었다.


‘정말 굉장하십니다. 이토록 막대한―― 헤아리기도 힘든 마력이라니. 지고하다는 표현은 오로지 이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분명합니다.’


잔잔하게 가라앉아 있으면서도 오직 마력의 압력만으로 주위가 아지랑이처럼 일그러져 보이는 리아다. 달리 누가 어울리겠는가. 제아무리 용왕이라 한들 까마득하게 부족할 따름이다.


이러하듯 리아는 본인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아주 너그럽게 보여줬다. 이에 취할 행동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다. 다른 선택지를 고른다면 제정신인지부터 의심해봐야 하리라.


그런데 저것들은 뭐란 말인가.


제정신이 아닌 녀석들이 있다. 이클립스야 그나마 어리다는 이유로 넘어갈 수 있지만 나머지 것들은 용서가 안 된다.


‘맞습니다. 뭔가요, 저 긴장한 얼굴들은. 모처럼 리아 님께서 투지를 내보이셨는데.’


그렇다. 리아의 주변이 일렁이는 건 투지 때문으로, 전투의 고양감과도 닮은 감정으로 인해 평소 드러나지 않던 마력의 압력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마력이 바깥으로 흘러나온 것이랑은 다르다. 애당초 주인의 마력은 너무나도 강렬한 나머지 버러지들은 그저 쏘이는 것만으로도 죽어버릴 것이다. 암만 못해도 발광에 빠지리라.


이처럼 자비롭게 위에 선 자로서의 위엄을 내비쳤건만 감격은 하지 못할망정 굳어버리다니······


‘그나마 이건 이해합니다. 하등한 버러지들이니 긴장해버리는 것도 어쩔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저 버러지만큼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세컨드는 미소를 유지한 채 곁눈질로 테츠를 노려보았다.


저 벌레만도 못한 버러지는 리아를 두려움에 질린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더불어 머릿속에서 여러 상업적인 이득을 따지는 중이었다. 그 안에 리아를 생각 이상의 존재라고 인식한 감정이 섞여 있다는 게 특히 기분을 나쁘게 했다.


‘하등한 생물은 리아 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도 한눈에 알지 못하는 겁니까?’


안 그래도 리아에 대한 숭배가 부족했던 놈인지라 당장 찢어 죽이고 싶다.


‘우선 그 쓸모없는 눈부터――’



“――세컨드?”

“네헷?!”

“······.”


리아가 반사적으로 대답한 세컨드를 빤히 쳐다보았다.


숨을 삼킨 세컨드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분명 자신을 바라보는 주인의 눈은 평온하였다.


――하지만 너무나도 큰 공포가 몰려왔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다. 사도인 세컨드마저도 채 읽을 수 없을 만큼 리아의 눈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어리석은 자신을 책망하는 것 같다.


그리 생각하자 손엔 땀이 차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흐른다. 그러나 감히 주인의 시선을 피한다는 죄를 저지를 순 없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감각과 함께 천천히 리아의 입이 열렸다.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조금만 어깨에 힘을 빼렴.”

“옛!”


다정하게 울리는 주인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뜻을 전하였다.


――멋대로 굴지 말라고.


경고의 의미에 세컨드는 깊게 머리를 조아렸다.


과연 하등한 버러지들 따위가 리아에게 도움이나 될까, 그러한 의문들이 떠오르기도 하였지만, 한순간에 일소하였다. 주인의 말씀은 절대적이기에. 하찮기만 한 자신의 의견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뚝.


송글송글 맺힌 식은땀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다.



“리아······.”


무거운 분위기를 뚫고 감미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주인의 반려―― 찬크에르레이였다. 그가 조용히 부르더니 몸을 숙여 리아에게 귓속말을 하였다. 주의 깊게 마법으로 차단하여 목소리가 들려오진 않았다.


묵묵히 듣던 리아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에?! 지, 진짜요?!”


되묻는 말에 찬크에르레이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정말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리아가 넋이 나간 얼굴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더니 무언가에 집중하였다. 그러자 내뿜고 있던 투지가 급격하게 가라앉더니, 이윽고 완전히 잔잔하게 되었다.


세컨드에게만 보이던 창조주의 기운마저도 그러했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게 아니라면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라앉았다.


몸을 짓누르는 중압감이 사라지자 여기저기서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울렸다.



“저기, 미안해요. 여러분들을 향한 게 아니었어요. 그게······”


말문을 끈 리아가 힐끔 메이어를 쳐다봤다.


‘과연. 불손하게 신성의 이름을 붙인 벌레들에게 투지를 발하신 거군요.’


전의를 불태웠다고 하여도 되리라. 그 하등한 존재들의 기척을 감지했다면 어쩔 수 없다.


못난 종에게 실망한 게 아님을 알게 되자 급격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풀어지거나 하진 않는다. 이러나저러나 주의를 받은 사실이 남아있으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도 반성하게 되는 부분이 있으니까요.’


스윽――


빠르게 눈을 돌려 옆에 무릎을 꿇고 있는 남자―― 필므를 보았다.


이 자는 지천으로 널린 버러지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남들은 중압감에 짓눌려 힘들어했을 때 홀로 환희했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리아가 작게 머리를 숙이며 사과하자 거의 혼비백산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실로 올바른 자세예요. ――아, 그렇군요! 리아 님께서는 이것을 알려주시려 한 겁니까?! 버러지 중에서도 나름 쓸만한 놈들이 있다고?’


몸소 이만한 자비를 베풀어주다니······


재차 눈시울이 붉어지는 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이 이상 창조주께 못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으니 설정해준 성격대로 발랄한 미소를 그렸다.


그렇게 충성을 새롭게 다진 세컨드는 믿고 맡겨준 임무에 대한 보고를 위해 리아를 방으로 모셨다.






“그러면 문제는 없는 건가요?”

“예. 늦어도 다음 주 안으로 기본적인 뼈대는 갖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런가요······. 비비안에게도 슬슬 말해봐야겠네요. 여러모로 애써주셔서 감사해요.”

“그리 말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매우 정중히 예를 차리며 머리를 숙이는 엔가나.


부담스럽다······. 정중한 거야 원래도 그랬었지만 그 정도가 훨씬 심해졌다. 진짜 왕이라도 된 기분이다. 혼자만 앉아있기도 하고.


‘물론 왕이 되어 본 적은 없지만······’



“흐, 흐음.”


리아는 고심하는 척 굴며 주위를 살펴봤다.


틀렸다. 누구 하나 정상적으로―― 평범하게 대하는 사람이 없다. 그나마 태도가 가벼웠던 테츠마저도 이젠 잔뜩 경직되었다.


‘크으윽! 전투 전의 고양감이라든가, 그런 건 전부 소설에나 나오는 진부한 문구 아니었어?! 무, 물론 세스 때 신경이 곤두서는 그런 게 있긴 했는데, 설마 그게 진짜 투지였을 줄 난들 알았겠어?’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대충 그런 느낌이지 않나 싶었던 게 실은 정답이었을 줄이야······.


과연 판타지. 앞으로는 어지간한 건―― ‘에이~ 설마 그런 게 있겠어?’ 싶은 일도 만화나 소설에서 등장했다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둬야겠다.


‘그리고 그걸 내가 할 수도 있다고 똑똑히 명심해야 해.’


또 저질렀다는 기분에 리아는 살짝 풀이 죽었다. 특히 세컨드―― 지금이야 밝게 웃고 있지만 저 침착하고 똑 부러지는 아이를 울렸다는 생각에 몹시도 착잡했다.


아무리 좀 감정이 격해졌다지만 이렇게 주변에 영향을 끼칠 줄이야······.


그나마 이곳까지 [발판]으로 날아와서 다행이었다. 다른 때처럼 맹하니 걸어왔으면 난리가 났을 테고, 곧장 루비아나 라프리트의 귀에도 들어갔을 거다.


‘휴, 휴우. 정말 다행이야. 여긴 우리밖에 없으니까 두 분에게까진 전달되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럴까?


안심하던 리아는 무심코 든 생각에 몸을 떨었다.


그렇다. 너무 안일하다. 그 어디에도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건만. 방금까지 조심하자 해놓고 뭐하는 짓인가.


정신이 번쩍 든 리아는 황급히, 하지만 결코 서두른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입을 열었다.



“흐, 흠. 노파심에 말씀드리는데······. 아까 투지를 내뿜은 일은 전부 잊어주셨으면 좋겠어요. 듣지 않았으면 싶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거짓말이나 이야기를 꾸미는 데에는 소질이 없다는 걸 자각하고 있기에 최대한 사실대로 말하였다. 하지만 어딜 어떻게 봐도 궁상한 변명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다.


이래서는 누구라도 의문이 들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리아는 머리를 굴려 다음 할 말을 쥐어짜 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전원이 즉각 이해의 빛을 띠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모두를 대표하여 세컨드가 말하였다.



“심려하신 그 고견 잘 알겠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물며 이 목숨이 져버린다고 할지라도 절대 오늘의 일을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아도 돼. 진짜로.”

“예!”


즉시 알겠다며 대답한 세컨드였지만······ 신뢰가 가질 않는다. 그야 저리 눈빛이 진지한데 어찌 믿겠는가.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아직 뭔 일이 벌어지거나 한 건 아니니 더는 뭐라 말하기 힘들다.


‘왠지 지치네. 그냥 엔가나 씨가 연락한 이유나 들으러 왔을 뿐인데······. 혹시 이게 남에게 다 떠넘긴 업보인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리아는 답답한 마음에 허튼 생각까지 했다.


속으로 한숨을 쉰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기는 다 들었으니 이만 가볼게요. 또 특이 사항이 있으면 알려주세요. 사양하진 말아요. 어떤 정보가 도움이 될지 모르거든요. ······막시 씨도. 일부러 연락해주셔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입니다.”


막시는 필므와 함께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그런데 이스피리아 님.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네. 말씀해보세요, 막시 씨.”

“분점의 직원에게 들은 바로는 다시 찾아올 낌새였다는데, 혹여 휴가가 끝나고 본점에 그들이 오면 어찌합니까?”

“음. 일단 우호적으로 맞이하세요. 이래저래 더할 나위 없는 연줄이잖아요? 막시 씨는 그저 상회주로서 그들을 대하시면 될 거예요. 그 사람들도 타국까지 와서 딱히 문제를 일으키진 않겠죠.”

“이스피리아 님과의 관계를 물을 땐······”

“사실대로 말씀드려도 괜찮아요. 딱히 숨길 것도 없이 어차피 다들 알고 있잖아요?”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막시에게서 내심 안도하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그의 입장으로는 당연했다. 암만 타국이라지만 성기사 단장이 묻는 말에 대답을 안 하기란 무척이나 곤란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너무 째려보지 마세요, 필므 씨.’


저리 따라주는 건 고맙지만 그가 곤경에 처하는 건 바라지 않는다. 혹시 모르니 리아는 필므에게도 순순히 그들이 묻는 대로 대답할 것을 부탁하였다.


필므는 잠시 망설였지만, 재차 부탁하니 알겠다며 납득해주었다.



“아아. 그리고 직원들에게 말해서 그들과―― 특히 성기사 단장과 함께 올 인물과는 절대 접촉하지 않도록 해주세요. 먼저 그들이 악수를 청하거나 하더라도 송구하다며 피하세요. 혹시 가능하다면 아예 근처에 접근하지 않았으면 해요.”

“직원들이야 그걸로 되겠지만······ 저는 아무래도 입장이 있는지라 힘듭니다.”

“막시 씨는 접촉해도 괜찮아요. 아뇨, 제게 액세서리를 받으신 분은 전원 괜찮아요.”


막시를 비롯하여 액세서리를 받은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것을 쳐다보았다.


액세서리를 받지 못한 테츠와 이클립스, 메이어는 고개를 갸웃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세컨드, 테츠 씨는 네가 봐주도록 하렴. 문제없지?”

“물론입니다, 리아 님. 맡겨만 주십시오.”


든든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세컨드.


듣자 하니 배울 게 전혀 없다며, 엔가나가 감복마저 했다고 한다. 거기에 테츠는 오히려 본인이 배움을 청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스스로가 자진하여 세컨드의 밑으로 들어가기로 했단다.


이해는 안 되지만 본인들끼리는 이야기가 다 끝난 모양인지라 딴지를 걸 수 없었다.


덕분에 꽤 걱정스러웠지만······ 저리 의욕을 보이니 괜찮으리라 판단 된다. 분명 부하 직원을 지켜야 하는 상사의 마음가짐을 벌써 갖춘 것이겠지.


‘능력면에서도 초월자니까 마음 놓아도 될 거야.’


아이에게 전해 듣기로도 세컨드라면 어지간한 해주 정도는 손쉽게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대처 못 할 상황으로 치닫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클립스와 메이어 씨인가······?”


조금 생각에 잠겼던 리아는 손을 앞으로 뻗었다.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빛이 모여들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리아는 민 머리의 남자―― 일전에 만났었던 모험가 팀, 아젠트의 리더를 미묘하게 닮은 남자의 손을 잡아 마력을 불어 넣었다.


남자는 곧장 눈을 떠 적갈색의 눈동자를 향해왔다.



“여! 만나서 반갑다구, 마스터.”

“응. 나도 반가워. 근데 마스터 대신 리아라고 불러줄래? 그리고 네 이름은 서드로 하려는데, 마음에 드니?”

“그럭저럭 만족해, 리아 님아.”


하얀 이를 드러내며 가볍게 말한 서드는 몸을 숙여 리아의 손을 잡았다.


흡사 리아의 손을 감싼 것만 같았는데, 그 상태로 서드는 위아래로 살살 흔들었다. 꽤 험악한 생김새와는 달리 섬세하게 힘을 조절하였기에 아프거나 하진 않았다.



“오랜 시간 잘 부탁해.”

“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해, 서드.”


그렇게 얼추 인사가 끝나자 뒤에서 분에 찬 외침이 울렸다.



“감히 리아 님께 그딴 불경을······?! 제대로 경어를 붙이세요, 서드!”

“어이어이, 겨우 며칠 먼저 태어났다고 텃세 부리는 거야?”

“그게 아닙니다! 창조주께 경의를 갖추라는 것입니다!”

“잔소리하지 않아도 이미 넘칠 만큼 갖추고 있네요. 그야 당연하잖아? 창조주인 걸 떠나, 리아 님 만큼 존엄한 존재가 어디 있다고.”

“그렇다면 어투를 고치십시오. 그.리.고! 리아 님의 머리를 쓰다듬는 그 손모가지를 당장 치우세요!”

“에에~”

“······.”


뿌득. 이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세컨드가 지팡이를 겨누었다.


관자놀이에 힘줄까지 솟아오른 세컨드는 진심이었다. 마력까지 끌어올리는 모습에 서드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리아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근데 그게 또 세컨드의 신경을 건드렸나 보다. 귀엽기만 한 얼굴이―― 마법소녀로서는 절대 보여선 안 되는 얼굴이 되어버렸다.


이러다간 정말 누구 하나 사달이 나겠다.


위기 센서가 울린 리아는 다급히 끼어들었다.



“세, 세컨드? 지, 진정하렴. 서드의 이 성격과 말투는 내가 정한 거야. 그러니까, 응? 차, 착하지?”

“그래그래. 위대하고 위대하신 우리 리아 님이 정했다~ 이 말이지.”

“쉬, 쉿! 서드는 잠시 조용히 있으렴.”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쭉 내미는 서드. 그렇지만 지시엔 따라주어 입을 열거나 하진 않았다.


이 틈에 리아는 재빨리 세컨드에게 향하여 지팡이를 내리게 하고는 좋게 타일렀다.


한동안 그렇게 기분을 풀어주자 점차 세컨드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죄, 죄송합니다. 이러한 추태를······”

“완전 괜찮아. 나를 생각해준 거잖니? 기쁘기만 하니까 무릎 꿇으려고 하지 않아도 돼.”

“하, 하지만······”

“자자. 착한 아이니까 말을 잘 들어야지?”

“으읏. 아, 알겠습니다.”


풀이 잔뜩 죽어 고개를 숙이는 세컨드. 왠지 키가 좀 큰 동생 같다.


‘어라? 리블리지 씨도 이런 느낌이지 않았나?’


기시감 같은 걸 느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딱히 중요하진 않았기에 흘려 넘겼다. 오늘은 바쁘기도 하니 다른 데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진이 쏙 빠진 리아는 터벅터벅,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서드에게로 갔다.



“돌아가기 전에 혹시 모르니 확인하는데, 이상한 데가 있니?”

“전혀? 리아 님아가 창조했는데 이상이 있을 리가 없잖아. 아니면 이상해 보여?”

“아니. 고안했던 그대로야.”


이 쾌활함과 긍정적인 모습이야말로 바라던 것. 정말 완벽하게 그렸던 그대로 만들어졌다.


‘서드라면 문제없이 이클립스와 메이어의 보호자가 될 수 있겠지.’


어린 이클립스는 물론이고, 이제 겨우 20대가 된 메이어에게도 듬직한 보호자가 있으면 좋을 것이다.


물론 부모의 대체가 될 순 없다. 그건 어떠한 존재를 데려와도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주위에 자신을 긍정해주는 보호자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리아도 전생에서 겪어봤기에 그 기분을 잘 알고 있었다.



“서드, 네가 해야 할 일은 알고 있지?”

“당근.”

“······.”

“걱정 말라고. 반드시 리아 님이 바라는 대로 이루어낼 테니······.”


서드는 특유의 웃음기도 없이 진지하였다.



“고마워. 잘 부탁할게.”


몸을 돌린 리아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는 이클립스에게로 가 시선을 맞췄다.



“이클립스, 앞으로는 저기 서드가 함께 생활할 거예요. 혹여 힘든 일이나,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를 의지하세요.”

“어, 어······ 같이 사는 거야―― 아니, 겁니까?”

“네. 보기와 달리 좋은 사람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메이어 씨도. 서드와 사이좋게 지내 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험악한 인상과 더불어 큰 덩치가 부담스러운지 메이어의 말에는 주저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같이 지내다 보면 점점 경계심이 풀려나갈 것이다.


‘적어도 안전은 확보했으니 안심이야.’


만족한 리아는 달라진 눈빛으로 쳐다보는 이들을 보았다. 테츠는 유독 혼란스러운 눈이었다.


설명을 바라는 눈치였으나 말해줘 봐야 변하는 건 없다. 이해할 리도 없고. 어디 가서 떠벌리고 다니지 말라는 루비아의 말도 있고 하니 무시하기로 했다.



“그럼 이만 돌아갈게요. 다들 제가 한 경고를 잊지 마세요.”

“예.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세컨드의 선창과 함께 배웅해주는 이들을 뒤로하고 리아는 저택을 나왔다.



“후아······.”


힘들다. 정말로 진이 다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침대로 다이빙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자꾸만 근질거리는 등골이 그렇게 하는 걸 내버려 두질 않았다.


찹찹.


뺨을 두들겨 의욕을 다진 리아는 잠자코 옆을 지켜준 에르를 올려다봤다.



“바로 리카드 씨에게 가요. 늦지 않게 준비하고 싶어요.”

“내가 반대할 일은 없어. 리아가 바란다면 무엇이든 도와줄게.”

“후후. 그러면 호의에 기대 말씀드릴게요. 에르, 당신의 지식도 좀 빌려주세요.”

“얼마든지.”


상냥하게 웃는 에르.


리아도 미소 짓고는 곧장 [발판]을 만들어 출발했다. 리카드가 있는 베르다드로······.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입니다!


후훗. 드디어 표지를 달았습니다. 저번화에 올린 견본이랑 그림체가 달라 놀라셨나요?!

사실 저번화에 올린 건 여러분들을 속이기 위한 몰카였답니다 후하핫!

반 정도는 농담이고...

표지에 폰트도 달아 제목을 쓰고 싶었지만... 넣고 보니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뺐습니다.

말하자면 미완성이랄까...

나중에 따로 작업할 생각이 있긴 하지만 당분간은 이대로 놔둘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 각 화마다 일러도 한, 두장 넣어볼까 하는데...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너무 기대하진 말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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