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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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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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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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5

DUMMY

새침한 표정으로 리아는 상인 조합 건물에서 나왔다.


조합 내부의 묘한 분위기가 열린 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고, 근처 길거리를 걷던 사람들은 무슨 일인가 하고 힐끌힐끔 시선을 보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경비원들도 아까의 소동을 봤나 보다. 잔뜩 경직되어 어색하게 조심히 돌아가라며 배웅했다. 다만 왜인지 에르에게는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무섭다는 기색이었다.


의아했으나 리아는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고 한동안 라프리트에게 단련된 귀족의 자태를 연기하며 나아갔다.


‘흐음······ 미행인가?’


길거리 나아가는 등 뒤로 끈적끈적하면서도 께름칙한 시선이 느껴진다.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서 저러는지 이유는 알 수는 없었다. 지금 처음 본 사람들이니까.


하지만 뭐가 됐든 괜히 붙들려 입방아에 올라 봐야 좋을 건 없을 것이다.


단숨에 결론을 내린 리아는 번거롭더라도 귀족적인 자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그렇게 묵묵히 나아가니 순간 미행이 멀어졌다.


큰 대로변이라 생긴 기회였는데, 학원에서부터 따라오던 감시자에게도 엉겁결에 도움을 받았다. 미행하는 사람과 감시자의 동선이 같다 보니 뜻하지 않게 견제가 된 것이다.


본디 미행이란 남들의 눈에 띄지 말고 자연스러워야 하는 법. 서로 눈치를 보는 두 그룹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이 틈에 리아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며 조용히 물었다.



“에르, 이 건이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살짝 시선만 내린 에르가 대답했다.



“나쁘진 않아. 불필요한 지출이 줄어드는 거니까. 장기적 관점으로 보면 이득밖에 없어.”

“그건 그렇지만······ 설마하니 대놓고 뒷돈을 요구할 줄은 몰랐어요. 그것도 조합장이라는 사람이 앞장서서······”


정말 깜짝 놀랐었다. 카운터 담당 직원치고는 뭔가 거만하다 싶더니 조합장이었고, 그 조합장이라는 사람이 대뜸 돈을 요구할 줄은······.


더 웃긴 건 명목이다. 편히 조합을 이용하고 싶다면 좋은 말로 할 때 성의를 보이라며 그는 뻔뻔하게 으스댔었다.


그때를 떠올린 리아는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에르 또한 동의한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직의 장이라는 인물이 저러니 다른 녀석들도 매한가지겠지.”

“츠카, 테츠 씨도 그랬을까요?”

“관례처럼 굳어진 듯하니 어쩌면······. 하지만 오늘 만나본 낌새로는 그리 노골적이진 않았을 거 같아.”

“하긴 출세하려면 관례를 따르는 처신도 필요하겠죠.”


어느 회사,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너무 청렴하면 청렴한 대로 미움을 사고 만다. 특이한 건 아니다. 주변에 그런 자가 있다면 여러모로 피곤해질 테니 말이다.


위를 향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올바르게만 살아서는 경쟁 사회에서 도태된다. 위를 올라가기는커녕 한없이 추락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게 현실이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고, 그런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또한 절대 만만하지 않다. 만약 순수하고 착하게 살고 노력해서 위를 올라갈 수 있다면 거긴 모두가 정적인, 아무 생동감도 없는 멈춘 세계일 것이다.


위로 올라가며 손을 더럽히지 않는 건 그야말로 꿈속에서나 가능할 일. 그러니 테츠를 헐뜯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자신 나름의 선을 지켜왔다.


혹시 몰라 확인도 해봤다. 테츠의 마력은 전혀 흔들리지도 않았고, 눈 또한 맑게 힘을 발하고 있었다.


‘물론 나무랄 데 없는 호인이라든가, 성인군자라는 건 또 아니지만······’


테츠는 좋게 표현하자면 상인이랄까, 그는 자신에게 오는 이익에 따라 움직일 것이란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다만 그 안에서 본인만의 선이 있고, 이를 지키는 상식인이란 기분이다.


반대로 나쁘게 말하자면 기회주의자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겠지만······ 세상 누구나가 다 그러하니 딱히 감점 요인은 아니다. 오히려 제대로 현실을 본다는 점에서 가산점이 붙었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론적인 이야기만 떠들어대는 사람보단 훨씬 낫지.’


리아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음······ 분명 예의상 말했을 뿐이겠지만 이번에는 얼굴에 철판을 까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너무나도 뻔뻔하여 벌써부터 얼굴이 빨개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부조합장인 테츠의 도움을 받는다면 기반을 다지는 것도 한결 수월할 것이라는 건 자명하다.



“응. 든든해. 하지만 이후가 문제인가······”


하지만 테츠는 어디까지나 잠깐 도움을 줄 뿐. 조합을 새로 만든다면 제대로 운영하는 인원이 필요했다.



“츠카 씨가 오신다지만―― 아니, 애초에 멀쩡히 다니시는 곳을 때려치우고 오셔도 되는 거야?”


머리에 열이 날 정도로 고민했지만 당장 답이 나올 리 만무하다. 경영은커녕, 한낱 월급쟁이의 경험밖에 없는 리아로서는 조직의 설립 같은 건 먼 세상의 일. 너무나도 무리한 주문이었다.


하는 수 없다. 나중에 잘 생각해볼 수밖에.


미래의 자신에게 모든 일거리를 떠넘기기로 한 리아는 고민을 떨쳐내고 걷는 속도를 높였다.



“혹시 루비아 씨가 가보라고 했던 게 이런 현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을지도······.”

“겸사겸사였겠지.”

“역시 그런가요?! 으으······ 몰랐다고는 하지만 엔가나 씨에게 일을 몽땅 맡긴 게 미안해지네요.”

“아니. 그 녀석은 큰 규모의 사업을 총괄하던 놈이었잖아? 이 정도야 난관도 아니었겠지. 그러니 리아가 미안할 필요는 없어.”

“······.”


날카롭게 쏘듯 말하는 에르.


엔가나가 민폐를 끼쳤던 건 사실. 일리가 있던 터라 리아는 딱히 반박하지 못하고 어물댔다.


어쩔 수 없지. 본인이 잘못한 게 있는데.


미행도 멀어졌는데 굳이 축 처져서 갈 이유는 없다. 사소한 뒤끝 정도는 넘어가도록 하자.


분위기를 밝게 한 리아는 에르의 손을 잡고 함께 주변을 구경하며 마실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윽고 다음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상업지구 끝자락에 있는 곳으로, 제조업 시설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어느 한 집 앞에 멈춰 선 리아는 고개를 들어 건물을 쳐다봤다.


부지의 규모가 조금 큰 주변 공장들과는 달리 일반 가정집으로도 보이는 건물이다. 그렇지만 정문 위에 달린 간판은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줬다.


혹시 몰라 슬쩍 옆을 쳐다보니 에르도 맞다고 작게 말해줬다.


기름과 무언가가 탄 듯한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리아는 직접 닫힌 문을 두드렸다.



“실례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쪽에서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벌컥 안으로 당겨 열렸다.



“어, 어서 오세요, 이스피리아 님!”


어깨를 살짝 넘어가는 밝은 갈색빛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허둥지둥 머리를 숙이는 여성. 그녀를 향해 리아는 반갑게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셀레스테 씨.”


어색하게 웃는 셀레스테는 집안 일을 돕고 있었는지 여러 공구가 꽂힌 가죽 앞치마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평소 풀어놓는 것과 달리 옆머리를 한데 모아 뒤로 묶어놓았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셀레스테는 안 그래도 귀여웠는데, 지금은 마치 부모를 돕는 기특한 아이로 비쳐 더욱 귀여웠다.


학원에서는 볼 수 없는 색다른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진 리아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던 때였다. 셀레스테의 뒤에서 불쑥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울렸다.



“손님이냐?”

“아니. 오신다고 했던 분!”


밝게 대답한 셀레스테 뒤로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셀레스테와 똑같이 가죽 앞치마를 두른 차림이지만, 그녀와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장인의 관록이랄까 예리한 기운이 감돌았다. 더불어 앞치마나 걸린 도구들 또한 셀레스테보다 훨씬 사용감이 있었다.


그리고 아마······



“나룬. 공방장이자 공방주라오.”

“아, 아버지에요.”


‘역시!’


일반인인 그에게 굳이 귀족의 예법을 취하지 않아도 되겠지. 부담될 수도 있고.


리아는 꾸벅, 공손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스피리아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나룬 씨. 견학을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무런 말이 없다. 이상함에 고개를 들어보니 나룬이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매가 좀 날카롭다 보니 무섭다.


솔직히 말해 나룬과 셀레스테는 전혀 닮지 않았다. 열기에 그을려 끝자락이 탄 너저분한 수염도 그렇지만, 얼굴형 자체가 완전 달랐다.


굳이 표현하자면 각진 얼굴이 사내답다고나 해야 하나? 되려 잘도 저 얼굴에서 귀엽고 깜찍한 셀레스테가 태어났다 싶다. 아버지임을 알아본 건 순전히 장인다운 분위기와 셀레스테가 편히 얘기한 덕분이었다. 달리 보기란 어려웠다.


째려보는 듯한 눈빛에 잔뜩 주눅이 든 리아는 쭈뼛댔다.



“저기······”

“――들어오시게.”


짤막한 한마디만 하고 나룬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도 참······. 죄송해요. 말주변이 없어서요. 어머니도 무뚝뚝하다며 핀잔주시고는 해요.”

“어, 네.”


저래 보여도 나룬은 환영하는 거라며 셀레스테는 웃었다.


얼떨떨했지만 딸인 그녀가 하는 말이다. 미덥진 않았으나 살짝 안심하고는 앞서가는 셀레스테의 뒤를 따랐다.


공방 내부는 여러 직종이 한데 모인 풍경으로, 작업대와 그 위에 놓인 공구들을 보면 보석을 세공하는 곳 같기도 하고, 모루나 줄톱 같은 걸 보면 금속 가공이 전문인 공방 같기도 하다.


‘제대로 된 공방이네······.’


가정집으로 보였던 외관과는 완전 딴판이다.


여러 알 수 없는 기구들에 흥미를 느낀 리아는 눈을 빛내고는 촌놈처럼 두리번거렸다.


안에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세 명 있었는데,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던 그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리아는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셀리, 안내해줘라.”

“아, 응.”


대답을 들은 나룬은 사무실 같은 곳으로 갔다.


휭하니 떠나는 그 뒷모습을 보던 셀레스테가 작게 속삭였다.



“오신다는 소릴 들은 다음부터 계속 긴장 중이세요. 혹여 말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봐. 사실 지금도 편하게 둘러보시라고 배려하는 거예요.”

“너, 너무 조심하시지 않아도 되시는데······”

“저도 몇 번이고 괜찮다고 말했는데, 아무래도 신경 쓰이나 봐요. 뭐, 조금 지나가 보면 금방 풀리겠죠. 이스피리아 님이시니까요.”

“그, 그럴까요?”

“네!”


과연 그럴까 싶었다만 셀레스테는 믿어 의심치 않는 눈치이다.


여기에 대고 뭐라 반박할 수 있을까. 리아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안내해주는 셀레스테를 따라갔다.


릴 공방이라 불리는 이곳은――간판에는 망치와 송곳만 그려져 있어 명칭은 몰랐다.―― 공정에 따라 크게 5군대로 구획이 나뉘어 있었다. 대충 분진이 많이 날리는 공정 등을 한군데로 모은 느낌이다.


가다가 마주치는 직원들도 소개해줬는데, 다들 미리 신분에 대해 들었는지 잔뜩 굳어 딱딱한 태도로 인사해줬다.


그리고 이제 1년 되었다는 막내 직원 차례에 리아는 흠칫했다.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이야······.’


슬쩍 에르의 눈치를 보니 그가 눈빛으로 긍정한다.


딱히 그게 아니더라도 마력을 통해 알았다. 좔좔 윤기가 흐르는 금발의 이 남자는 세스와의 일전 때 염탐하던 또 한 명의 사람이라는 걸······



“게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연기를 잘하는 건지, 2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남자는 정말 처음 만난다는 양 정중히, 그러면서도 긴장하여 인사하였다.


귀족을 대하는 듯한 태도는 모르고 만났으면 그대로 지나쳤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명색이 첩보원이라는 건가? 이름도 아마 가명이겠지.’


어째서 여기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첩보원이 굳이 허튼짓할 리가 없으니 필요 이상으로 경계하진 않아도 되리라.


‘셀레스테 씨에겐 보험도 있고.’


하지만 그녀의 가족이나 다른 직원들에겐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다.


순간 고민했던 리아는 혹시 모르니 돌아갈 때 마법이나 좀 걸어둘까 생각하며 인사했다.



“앞으로는 종종 마주칠 기회도 많겠죠. 저야말로 잘 부탁드려요.”

“네.”


의심받지 않게 적당히 인사를 마쳤다.


이어서 2층까지 모두 둘러보고는 로비로 돌아왔다.


정문에서 바로 맞아주는 로비는 쉼터 및 회의장으로 쓰이는 듯했는데, 릴 공방에서 만든 물건도 내놓나 보다. 각양각색의 여러 물건이 전시되어 있다.


관심이 동한 리아는 유리로 되어있는 전시장 앞으로 갔다.


‘이 유리관도 이곳에서 만든 건가? 투명한 게 완성도가 좋네. 다른 물건들도 그렇고. 과연 루비아 씨가 눈독 들일 만해.’


명품 가방 같은 파우치도 있는 안을 훑어보던 리아의 눈에 어느 한 물건이 들어왔다.


“응? 이거······. 셀레스테 씨, 이거 혹시 제 안경인가요?”

“아, 맞아요.”


은은한 금속의 광택을 내는 이 안경은 회심의 100번째 기획안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릴 공방에서 만든 거다.



“어디에 발주를 맡기나 했는데, 릴 공방이었군요. 저기, 한 번 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제작자이신데.”


리아는 반가운 마음으로 렌즈가 없는 안경을 건네받았다.



“오오. 잘 만드셨네요. 경첩도 어디 하나 걸리지 않고 부드러워요.”

“헤헤. 감사합니다.”

“발주는 어떻게 하시나요?”

“대량생산은 아직 무리여서 소량만 제작하여 멜리다 상회에 납품하고 있어요. 애초에 공주님께서 수량을 조절하라 하셨고요.”

“음.”


감명받은 리아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 안경 고스트 서치는 이름 그대로 귀신을 볼 수 있는 물건으로, 기념비적인 100번째 기획안을 장식하기 위해 제법 애써 만든 것이었다. 특히 안경의 다리가 접히는 경첩은 거듭 신경 써 아무것도 없는 밑바닥에서부터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설계한 특제품이었다.


정말 애쓴 만큼 명품으로 취급해준다면 기분이 좋았고,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수량을 조절한다니 납득이 됐다.


······다만, 고스트 서치란 이름은 반감을 살 수 있다며 마안경으로 바뀌게 된 건 조금 속상하다.



“근데 이름 때문에 안 팔리는 것도 웃기긴 해. 음음. 그래. 양보도 좀 있어야지.”


툭.



“응?”


흡족하게 중얼거리고 있던 리아의 앞에 금속이 놓였다.


대충 보니 안경에도 쓰였던 티타늄 합금 같다.


누가 놨나 싶어 돌아봤더니 뒤에 나룬이 있었다.



“이건······”

“만들어 봐라.”

“······네?”

“안경······. 직접 만들었었다고 들었다.”

“아, 원본을 보고 싶으시다는 건가요?”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음대로 써도 된다며 나룬이 말했다. 조금 편해져서 그런가, 아니면 본업에 관련됐기에 원래 성격이 나왔나 말투가 좀 가벼워졌다.


하지만 마냥 반색하며 기뻐할 순 없었다.


그의 눈은 매우 진지하기 이를 데 없다. 진심으로 보고 싶어 한다는 게 전해진다. 게일을 비롯한 다른 두 직원도 하던 일을 멈추고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다가왔다.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다. 내빼기도 그러하니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리아는 손가락을 맞댔다.



“시작할게요.”


딱!


손가락을 튕기는 게 발동어 대신이라는 걸 아는 건 학원의 학생들뿐이다.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리아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꾸물꾸물. 형태를 바꿔 가는 금속을 보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룬은 금속 덩어리에서 작게 떨어져 완성된 안경을 들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진지한 눈으로 살펴보았다.



“제작 과정을 느리게 할 수 있나?”

“어······ 천천히 만들어 보라는 거죠?”


나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되려나?’


해본 적 없는 일에 당황했지만, 차분히 가능한지 확인했더니 긍정적인 피드백이 돌아왔다.


실패하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얻은 리아는 재차 [성형]을 발동했다.


꾸물꾸물.


남아있는 금속 덩어리가 아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천천히 형태를 바꿔갔다.


완성될 때까지는 2분이 걸렸는데, 10초 만에 완성된 처음에 비하면 제작 과정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했다.


지켜보던 직원들의 눈에도 그러했는지 우와 소리를 내며 놀라기만 한 것과 달리, 이번에는 작게 탄성을 내면서 과정들을 관찰하였다.


나룬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걸기가 주저될 만큼 진지하게 눈을 떼지 않았다. 날카로운 눈빛에서는 안광마저 뿜어져 나오는 듯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나룬이 입을 뗐다.



“훌륭하군······.”

“가, 감사합니다.”

“스승은 누구지?”

“스승이요?”

“단조를 가르쳐준 스승 말이다. 금속을 다루는 걸 누구에게 배웠더냐?”

“아, 안 배웠는데요.”


허리를 꼿꼿이 세운 나룬이 지긋이 눈을 보았다.



“왜, 왜 그러세요?”

“금속을 다루는 데에는 각자 방식이 각양각색이다. 미세할 뿐이지만 그 차이는 확실히 존재하지. 그리고 그건 곧 개인의 개성이나 다름없다. 마법이라고 다르지 않다. 아니, 완벽히 모든 걸 계산해야 하는 마법이기에 더욱 개성이 담길 수밖에 없다. 방식만 다를 뿐, 결국 같은 절차를 밟으니까.”


얼떨떨하게 올려보는 리아에게 나룬은 단언했다.



“너도 마찬가지다. 네 작업 과정엔 분명 개성이 담겨 있었다. 명성을 떨치는 건 손쉬웠을 어느 대장장이의 일생이.”

“하, 하지만 전 진짜 누군가에게 배운 적이 없어요.”

“······그런가.”


추궁할 마음은 없다는 듯 나룬은 잠시 보다가 몸을 돌렸다.



“저······”

“――언제든 마음 내킬 때 찾아와도 된다.”


용건은 끝났다는 듯 무뚝뚝하게 말한 나룬은 곧장 작업실로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그의 태도에 셀레스테가 안절부절못하여 말을 걸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버지의 말투라든가 여러 가지로······”

“아뇨. 괜찮아요. 신경 쓰지 않아요. 오히려 편히 대해줘서 좋기만 해요.”


웃는 얼굴로 말하니 셀레스테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계속 남아있기엔 방해가 될 거 같네요.”

“그, 그렇게 바쁘진 않은데······.”

“그래도 미안하잖아요. 어차피 들를 데도 더 있으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갈게요.”

“아! 아직 다른 데를 안 가셨나요?”

“네. 필므 씨네랑 연구소도 들려야 해요.”

“으으. 아쉽네요. 좀 더 여러 가질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후후. 다음 기회에 부탁드릴게요.”

“그러면, 저기――!”

“아아. 괜찮아요.”


리아는 돌아간다는 걸 소리쳐 알리려던 셀레스테를 황급히 막았다.



“저렇게 집중하고 계시잖아요.”

“그래도······”

“저는 정말 괜찮아요. 잘 둘러보고 간다고 전해주세요.”

“으으. 알겠습니다.”


미안하다는 듯 표정이 흐려지는 셀레스테에게 재차 괜찮다고 말을 한 리아는 밖으로 나왔다.



“그럼. 학원에서 봬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성실하게 에르에게도 조심히 가라고 배웅해 주는 셀레스테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리아는 제법 볼거리가 많았던 릴 공방을 뒤로 했다.


그리고 미행이 붙는다.


아까보다는 한참 적긴 하나 끈덕지게 놓치지 않고 잘도 따라왔다.



“뭐, 미행이야 반년 가까이 당하다 보니 익숙해졌달까. 없으면 되레 허전한 느낌이지? 바라진 않았어도. 그보단 부여술사라······ 마법사도 세분화하여 전문을 나누는구나.”


릴 공방은 하나의 독립된 공방으로, 여타 다른 공방들과 달리 자체적으로 완성품을 만들 수 있는 곳이었다.


마도구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릴 공방 안에서 마광석에 마법을 부여하여 제작했다.


마법의 부여는 릴 공방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직원이 주로 담당한다고 하는데, 그는 자신을 부여술사라 소개했었다.


이 말인즉슨, 부여술사라 나뉘고 지칭하는 건 일반적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이를 몰랐던 건 단순히 마법을 쉽게 쓸 수 있기에―― 특정 마법 이외에는 딱히 어려움이 없었던 터라 그랬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분류였다. 어느 사람마다 잘하는 분야가 있을 테고, 각자의 흥미도 전부 제각각이니 말이다.


게다가 무언가를 습득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인생은 무한하지 않다. 취사선택하여 본인에게 필요한 것을 선별할 수밖에 없다. 결과, 각자 자신만의 강점 같은 게 생겨난다. 이력서 같은 것에도 이러한 점을 명시하여 본인의 가치를 올리지 않는가.


너무나도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자 현실이다.


그러나 오랜 시간 사회를 경험하지 못한 부작용이었나 보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더군다나 곁에는 세상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태어난―― 어찌 보면 신과도 같은 존재인 에르가 있었다. 그에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상식의 허들이 올라갔다는 느낌이 든다.



“마법에 대해서는 유독 더 그래. 으흐음······ 이것도 루비아 씨의 노림수인가? 내 사회 경험이 부족함을 알고? 물론 재활의 느낌이 더 강하지만······ 왠지 학원 안에서는 알 수 없는 점을 깨닫게 하려는 게 아닐까 싶네.”

“······.”


낌새가 이상하기에 올려다보니 에르가 굉장히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꽤 고민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 무척이나 드문 광경에 리아는 곧장 물었다.



“왜 그러세요?”

“······.”


입을 꾹 다물고는 말하기를 주저하는 에르.


오늘은 정말 특별한 날인가 보다. 손에 꼽는 그의 이 모습에 리아는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 혹시 제가 뭐 놓친 게 있어요?”

“아니······. 역시 리아라고 감탄했을 뿐이야.”

“거짓말······”


에르에 대해서는 착각 따위 불가능하다. 명백히 말을 돌렸다.


하지만 에르는 요지부동이었다. 눈을 가늘게 하여 쭉 째려봤음에도 결단코 입을 열지 않았다.


내심 뭔가 싶어 불어내게 하고 싶다.


그렇지만 그만뒀다. 모처럼 분위기도 좋은데 깨고 싶지 않을뿐더러, 좋은 아내란 남편을 닦달하지 않는 법이니까.



“대신―― 읏샤!”


기합을 지름과 동시에 리아는 에르에게 뛰어들었다.


에르는 당황하면서도 날아오는 리아를 어렵지 않게 잡아 팔에 앉히듯 안았다.



“거짓말을 한 벌이에요! 에르는 이대로 제 택시가 되어주세요.”


놀란 듯했던 에르는 작게 미소를 그렸다.



“벌이라면 어쩔 수 없지. 맡겨줘.”

“고고!”


리아는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사실이 어떻든 귀족으로 보이는 자신이 소리친다면 시선이 모인다는 건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즐거웠던 터라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더욱이 현재 이곳은 산업지구 중에서도 가장 인적이 드문 곳이다.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미행뿐인지라 리아는 맘 편히 에르에게 몸을 의탁했다. 물론 잊지 않고 릴 공방에 마법도 걸어뒀다.


왜 그가 여기 있는지, 여러 궁금증과 의문들이 생겨났지만 당장 상황이 급변하거나 하진 않는다.


이후 루비아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그다지 머리를 쓰고 싶지 않았던―― 솔직히 오늘 하루는 편히 노는 날로 정하고 싶었던 리아는 머리를 비우고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꽃이 핀 듯한 미소는 이내 곧 딱딱하게 굳었고, 최대한 얼굴을 감추려 머리를 숙였다.


리아가 이러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다음 행선지는 상업지구 초입. 상회 밀집 지역이었다. 상세하게 따지면 귀족들과 평민들이 자주 가는 곳이 나누어져 있었는데, 이번에 리아가 가려는 곳은 그 중간. 귀족과 평민들이 이용하는 상회들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아니, 딱히 귀족들이 가는 곳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이 많기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쇼핑하러, 평민들은 식료품을 구하러 말이다. 하급 귀족의 경우 물품을 납품시킬 재력이 부족하여 사용인들을 이곳으로 보내기도 한다.


그러한 사람들이 이 상회 밀집 지역에 오는 것이다. 리아가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인파가 밀어닥친 뒤였다.


내려달라고 할 타이밍을 완전히 놓쳤다.


물론 인파가 많다 하더라도 사람에 치일 정도로 가득한 건 아닌지라, 그냥 내려달라고 하고 걸으면 되긴 했다. 그러나 루비아가 신신당부한 게 있었다.


――이목 좀 그만 끌라고.


뭔가 포기한 듯한 루비아는 한숨과 함께 사고 좀 그만 일으키라고―― 하다못해 평판만은 깎지 말라고 애원하다시피 부탁하였다.


우선 이목을 끌지 않는 건 실패했다.


집사의 품에 안겨 길거리를 거니는 귀족은 신기하게 비치는지, 지나치는 모두가 한 번씩은 쳐다봤다. 어머니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아이도 “우와~!”라면서 이쪽을 가리키고는 했다. 곧장 어머니가 버릇없게 그러면 안 된다면서 삿대질한 손을 내리게 했지만.


시장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 데이트하는 커플도 많았는데, 그들도 리아를 쳐다봤다가 자기들끼리 소곤거리고는 서로 얼굴을 붉히기 일쑤였다.


당최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의식을 집중하면 엿들을 수 있었으나 그러진 않았다. 그저 대충 “나중에 우리 아이도 쟤처럼――” 같은 소리만 들려왔을 뿐이었다.


여하튼 부정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체로 밝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다.


그러하니 변화를 주기 부담스럽다. 괜히 내려왔다가 급변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현상 유지’라는 말이 있다. 딱 이때를 위한 것이었다.


‘그래. 도착할 때까지 마음을 비우는 거야.’


평판을 깎지 말라는 루비아의 지시도 이행할 겸 리아는 숙였던 머리를 들고는 빳빳하게 세워 정면을 봤다. 속으로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구구단을 외면서······.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힌 남자가 뛰었다. 키가 작고 적당히 붙은 살집 때문에 뒤뚱거리는 모습처럼 보여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남자―― 막시 멜리다는 최선을 다해 뛰는 것이었고, 주변에서 어떻게 보던 신경 쓸 여유 같은 건 조금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는 그러한 여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이었다.



“바쁘다, 바빠!”


바쁘길 원했던 건 맞다. 이전에는 분명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하지만 너무 만만하게 봤나 보다.


‘이게 바로 새장 밖을 모르는 새라는 거겠지. 나도 이리 바쁜데, 더 몸집이 큰 상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일을 다 처리한다냐? 소장님이 그쪽 방면도 잘 알고 있으려나······? 음. 그런데 노하우들을 계속 묻는 것도 좀······’


고민하는 사이 목적지인 건물과 가까워졌다.


중요한 사항이지만 생각은 나중이다. 막시는 직원용 출입문에 손을 얹었다.


‘전혀 쓸 일이 없었던 이 문을 이용하게 될 줄은······’


누가 뭣 하러 삥 돌아가야 하는 이곳으로 출입하겠는가. 그냥 정문으로 들어가고 말지.


멀리 가지 않아도 됐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하더라도 직원용 출입문을 사용할 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그러했다. 워낙 사용할 일이 없다 보니 도둑도 방지할 겸, 출입문 뒤에는 온갖 물건들을 쌓아 창고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들어가는 건 고사하고, 열릴 일조차 전무했다.


절대 바랬던 건 아니지만, 내심 영원토록 사용할 일은 없을 거라고 약한 마음을 품기까지도 했었다.



“그랬던 게 지금은······”


조금 감개무량한 기분으로 막시는 문을 열어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지요. 먼저 실례하고 있었습니다.”

“옷. 오셨습니까? 소장님.”

“방금 막 도착했습니다.”


앉아있던 소파에서 일어나며 소장은 빙긋 친근하니 미소 지었다.


사실 소장의 첫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하였다.


외견 때문이었다. 소장의 마른 몸과 상대를 품평하는 듯한 쭉 찢어진 눈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했던 거다.


물론 그 직감대로 소장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폭넓은 지식과 경영에 대한 센스는 저도 모르게 탄복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를 단호히 실행할 담력까지도. 그쪽 분야에서는 엄청 이름을 떨치지 않았을까 싶기까지 하다.


하지만 지금은 날이 빠졌달까······


첫인상과는 달리 사근사근 부드러운 태도 일관이다. 상대하기 피곤한 그런 녀석들을 떠올린 게 무색만큼.


현재에 이르러서는 좋은 상담자이자, 든든한 조언자였다.


이스피리아 연구소의 소장―― 엔가나는.


‘상상 이상이었지. 처음에는 그 아가씨가 데려온 사람이라기에 관심만 가졌을 뿐이건만.’


좋은 안목을 가졌다는 건가······


술식을 고쳐 쓰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사람도 잘 본다니 조금 있을 대면이 제법 기대된다.



“이제 왔어? 왜 이렇게 늦은 거야? 아부지.”


점포 내에 있던 아들이 인기척을 느끼고는 방으로 들어와 물었다.



“그게, 길이 막혔지 뭐냐.”

“왜? 행사 같은 것도 없잖아.”

“난들 알겠냐. 갑자기 우르르 몰려서 와서는 귀공자니, 인형이니, 요정이 어떻고 떠들어대며 비키지 않더라. 빠져나오는데 진짜 힘들었다구?”

“귀공자, 인형······? 거기다 요정?”

“그렇게 보지 마라. 의심되면 나가 보던지.”


웬 헛소리를 하냔 생각이 들 것이다.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자신 또한 그러했을 거다.


귀공자나 인형은 그렇다 치지만, 정령으로 분류되는 요정은 그만큼 보기 힘들다. 적어도 이런 도심 속에서 볼 존재는 아니다. 그려지는 광경처럼 깊은 산속. 그런 곳에서나 겨우 볼 듯하다.


하지만 거짓 하나 없는 엄연한 사실만을 말했다. 떳떳이 가슴을 펴니 아들에게서 의심의 눈초리가 가셨다.



“단호하네.”

“서운하게 아버지를 의심하는 게 아니다, 아들아.”


상처받았다는 듯이 말했음에도 아들―― 필므 멜리다는 듣는 척도 안 하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아부지가 꿈을 꿨다던가,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런 소리가······ 듣자 하니 인파를 끌고 다닌 듯한데. 그러한 일이 괜히 있을 리는 없을 테니 분명 이유가―― 아! 그렇게 된 건가?!”


눈을 크게 뜬 필므가 손을 뻗으며 외쳤다.



“준비해! 빨리!”

“갑자기 왜 그러냐?”

“설명할 시간 없어! 아부지는 입구로 맞이하러 나가!”

“누굴?”

“누구긴 누구야! 이스피리아 님이시지!”

“뭐······?”

“인형과 요정은 백방 이스피리아 님을 말하는 거야! 귀공자는······ 그분의 집사님을 말하는 거고. 다른 사람일 리가 없어!”

“잠깐! 내가 가라고? 음. 어차피 너 보러 오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정한 대로 네가 마중 나가면 되잖아?”


원래대로라면 최고 국빈의 마중은 막시가 나가는 게 맞다. 직원을 보낸다는 고려는 그 시도조차가 가당찮았다.


백이면 백 누구나가 그리 생각할 상식이다.


그러나 필므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최고 국빈은 다른 귀족들과는 다르게 그러한 예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소한의 예의만을 가진 채 대하는 것만으로 충분. 기분이 상할 리는 절대 없다고까지 단언했었다.


제법 안심됐다. 그래서 견학하러 온다는 소릴 듣고는 마중 나가는 건 필므에게 맡겼었다.


아는 사이인 필므가 마중하고 접대하는 게 국빈도 편할 테고, 막시로서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뻘쭘해질 순간을 피할 수 있기에 택한 방안이었다.


‘그랬던 걸 이제 와서······. 어이어이, 마음의 준비가 전혀 안 됐다고. 아니. 그전에 온 게 맞긴 해?’


지금 했던 이야기에서 이스피리아 임을 추측할 수 있는 점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막시는 의심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읽은 것인가, 필므가 눈가를 찡그리며 노려보았다.



“뭐야, 아부지. 멜리다 상회를 벌써 나에게 넘겨줄 생각이었어?”

“앙? 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냐?”

“직접 나가서 확인해. 알려줄 시간이 없어.”

“기, 기다려――!”


대답해줄 여유도 없다는 듯이 필므는 무시하고 방을 나갔다.


그랬는 줄로만 알았는데······ 어찌 된 건지 열린 문틈으로 얼굴만 빼꼼 내밀었다.



“잊지 마. 이스피리아 님은 최고 국빈이야. 벨루디스에선 타국의 왕과도 같음을 명심해. 딱히 그런 게 아니라도 아부지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모셔.”


입가는 웃고 있으나,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저게 아비에게 할 눈인지는 둘째치더라도······


무섭다. 각오 같은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반론은 허락하지 않는다는 듯한 필므의 위압감에 밀린 막시는 끄덕끄덕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았어.”

“맡긴다? 오늘 아부지의 행동에 따라 우리 멜리다 상회가 더 커질 테니까 잘해.”

“뭐? 그건 무슨――”

“――시간 없어. 빨리 옷 갈아입고 준비해! 저번에 마련한 거 있지? 그걸로 입어.”


지시를 내린 필므는 빠르게 직원들의 휴게실로 달려갔다. 아마 쉬고 있는 직원들까지 몽땅 동원할 모양이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치지만······ 저리 긴장하는 필므는 오랜만에 본다.



“맛이 간 이후로는 처음인가······? 뭐가 됐든 예전보다야 백배 천배 낫지만.”


이전, 교회를 서성이는 미치광이와 다를 바 없다고 한 건 과장이 아니다. 분명 그날 이후로 이스피리아를 언급하는 필므에게선 광신적인 뭔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나쁘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지금의 필므는 기분 나쁘긴 하다. 이스피리아에게 받았다는 목걸이를 보며 실실대는 걸 목격하면 누구라도 속이 매스꺼울 것이다.


그러나 쓰레기, 말종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던 지난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진심이다.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까지 한다.


오죽했으면 훗날 자신의 손을 떠난 필므에게서 연락이 끊긴다면 그건 위험한 일에 손을 대 죽은 거라고, 벌써 마음을 다져놓기까지 했다.


그리고 백방 필므는 그리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런 확신이 10년도 더 전부터 들었었다.


물론 어떻게든 아들의 결여된 인간성을 메꾸려고 노력했었다. 그렇지만 원래 가지지 않은 자에게 말로 표현하기 애매모호한 개념을 가르치기란 쉽지 않았고, 덧없이 시간만이 흘렀다.


베르다드는 마지막으로 최후의 기대를 담아 보낸 것이었다. 엘리트들만이 모인 그곳이라면 혹시나 하고······.



“그 구제 불능의 아들을 바꿔주다니. 만나는 게 떨리면서도 무척 기대되는구먼. 후후. 이래저래 감사할 일도 많으니 기합 좀 넣을까?”


의욕을 불태운 막시는 서둘러 본인의 방으로 들어가 옷장 안에 가지런히 보관되어있던 의복을 집어 들었다.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준비해 놓았던 것이었다. 그만큼 비쌌다. 하지만 귀족을 상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


‘당시에는 이걸 사놓는 게 시기상조로만 보였는데 말이야.’


귀족도 제법 늘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사용인을 통해 심부름을 보내는 정도다. 주 장사는 서민을 상대로 하고 있다.


간단하게 말해 이제 주가가 오르는 중이라고 할까?


그래서 이런 고급 의복은 일정 궤도에 오른 다음에야 살 예정이었다. 그전까지는 대충 중고로 나온 걸 입고.


귀족이 온다고 해도 기껏 해봐야 남작 위의 하급일 테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보다는 의복 구매에 나가는 돈이 더 뼈아팠다.


맞춤의 신상이라는 건 안다. 그런데 비싸도 너무 비쌌다.


그 비싸다던 마도무구와 엇비슷한 가격을 주인장에게 들었을 때는 무조건 사기를 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돈 냄새에 민감한 필므가 별말이 없었다. 주인장은 정직했던 거다.


‘웬일로 강력히 필므가 밀어붙이길래 못이기는 척 구매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악랄한 가격이야.’


푹 한숨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없었으면 당장 곤란했던 것도 사실. 앞으로는 쓸 일도 많을 거라고 자신을 달랬다.



“아무리 아들놈이 광신처럼 빠졌다지만, 설마 오늘을 위해 사라고 하진 않았을 테고. ······아니겠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차마 부정하진 못하고 막시는 어색한 의복을 입었다.



“오~? 편하잖아?! 비싼 값을 한다는 거냐?”


이게 명품이라는 건가······


옷자락을 쓱쓱 문질러본 막시는 왠지 모를 감동을 받았다.


하지만 들뜬 마음은 문을 나서는 순간 사라졌다. 한 명의 상회주가 되어 당당히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시선이 모인다.


대귀족을 상대해도 전혀 무례하지 않을 의복을 이런 볼품없는 상회에서 입고 나타나면 당연히 눈에 띈다.


그렇지만 막시는 신경 쓰지 않고 가게 안을 둘러봤다.


가게에는 아직 여러 손님이 있었는데, 필므가 최근 늘어난 직원들과 함께 대응하고 있었다. 그냥 같이 일하는 게 아니다. 능숙하게 적재적소에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곳에 보낸다.


이 또한 성장의 증거로, 소극적이었던 예전과는 사뭇 상반된다.


문제는 없을 듯하다.


한동안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잠자코 지켜봤던 막시는 발걸음을 돌려 가게밖으로 나왔다.


역시나 눈에 띄는지 가게보다도 훨씬 많은 시선이 쏟아진다.


스윽, 둘러보니 입구에 ‘임시 휴업’이라는 문구가 써진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정문 유리창에도 작게 임시 휴업의 문패가 달려있었다.


필므가 잽싸게 한 조치였을 텐데, 지극히도 당연한 판단이었다. 최고 국빈이 오는 마당에 손님이 바글거릴 순 없지 않은가.


하지만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에겐 아니었나 보다. 본인 차례에 입점하지 못하게 된 선두의 손님들은 불만이 극에 달하였는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직원으로는 대응에 한계가 있다.


막시는 곧장 앞으로 나왔다.



“아! 상회장님······”

“수고했네. 사정을 못 말함에도 노력 많았어.”


직원에게 짧게 노고를 위로한 막시가 돌아보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값비싼 의복에 기가 죽었는지 줄기차게 따지던 손님은 입을 뻐금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쳐다보는 사람 중에서 낯익은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근처 포목 상회를 운영하는 점주로, 오늘도 사업이 번창하는 이유가 뭔지, 쉬는 겸 염탐하러 온 듯했다.



“주인장, 어인 일인겨? 갑자기 휴업이라니.”


막시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들으라는 양 대답했다.



“일이 생겼으니 그런 게 아니겠는가.”

“그래도······”

“암. 내 어찌 자네의 맘을 모르겠나. 하지만 며칠 전부터 공지를 한 점을 봐서라도 이해해주었으면 싶네.”

“당최 이유는 뭔가? 하다못해 그거라도 듣고 싶으이. 붙여놓은 공지에도 안 쓰여 있었잖어.”

“직원이 말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일세. 귀한 분이 오시기로 했거든. 그런 걸 함부로 떠벌릴 순 없지 않은가?”

“그, 그건 그렇지.”


맞장구는 치지만 낌새를 보니 남자는 처음 듣는 소리인 듯하다.


귀족을 상대할 일이 거의 없는 포목 점주로서는 별수 없는 일이지만,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명백한 사실로, 귀족의 동향을 함부로 떠벌리면 좋은 꼴은 보지 못한다.


귀족들도 결코 쉽게 넘어가지 않는다. 본인들의 안전이 달려있기에 집요하게 책임 소재를 물으려 한다.


이 부분이 직원들의 교육에 가장 힘썼던 부분이기도 했다. 경솔하게 귀족의 동향을 말하는 일이 없도록 겁까지 주며 단단히 일러뒀다.


귀족이란 구체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다들 분위기로 대충 알았나 보다. 따지던 목소리가 급격하게 사그라든다.


‘복장도 신빙성을 높이는 데에 한몫했겠지.’


역시 겉보기란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막시는 입구 앞에서 대기했다.


입점에 실패한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왕 온 김에 대체 누가 오는지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다. 돌아가지 않고 그대로 가게 근처에 서 있었다.


‘정말 많이 커졌어. 처음 상회를 열었을 때만 하더라도 손님이 줄을 설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았는데. 아들의 무모한 돌진이 이러한 결과를 자아낼 거라고는.’


처음 연을 맺은 과정을 들었을 때는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본인도 십년감수했다는 걸 알기에 망정이지, 정말 호되게 혼내려고 했다.


그런데 세상일은 모른다고 했던가. 상상했던 불온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되려 위험지대에 한 걸음 내디뎠던 아들에겐 좋은 변화의 바람이 닥쳐왔다.


모든 상황이 너무 잘 풀리기에 간혹 꿈이라도 꾸는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다.



“허허. 무모한 짓도 하고 볼 일이야.”


한 차례 너털너털한 웃음을 터트린 막시는 표정을 다잡았다.


이제 곧 이 꿈 같은 일을 실현해 준 사람이 온다.


아들의 일만으로도 감사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그런 사람이 자신 때문에 창피를 당하게 할 순 없다.


막시는 쳐다보는 주위의 시선은 잊고 다부진 얼굴로 때를 기다렸다.


이윽고 멀리서 웅성웅성거림과 함께 들뜬 분위기가 사람들에게 전파되듯 퍼졌다.


거리는 제법 소란스럽게 됐다. 그런 현장에서 아까 오면서 들었었던 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오오. 요정이야.”

“요정과 귀공자님이셔.”


당최 무슨 헛소리들을 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도나도 같은 이야기를 했고, 고개를 돌려 바라보는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진짜 귀공자와 요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스스로도 실없는 생각이란 건 알지만 주변의 반응은 정말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다 큰 어른이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보면 알겠지. 필므의 말대로라면 본인들이라니까.’


잠시 후, 저 멀리서부터 인파가 둘로 갈라진다. 마치 중앙에 무언가의 척력이라도 존재하는 듯 사람들은 좌우로 길을 비켜섰다. 넋을 잃어 미처 비키지 못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도 늦지 않게 다른 사람이 잡아끌었다.


이 기묘한 행렬은 점차 멜리다 상회로 다가왔다.


이윽고 막시의 정면까지 도달했고, 뻥 뚫린 길의 끝에 한 인영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아니. 하나가 아니었다. 커다란 인영의 중심에 다른 인영이 하나 더 있었다. 큰 인영에 작은 인영 하나가 엉겨 붙어있었다.


그들은 파도가 갈라진 듯한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여기까지 이렇게 왔겠지.


대단한 담력이 아닐 수 없다. 이 많은 인파가 동시에 보고 있음에도 조금의 동요가 없는 게 경탄스럽다. 필시 이러한 상황을 밥 먹듯 겪었으리라.


저러한 이들이 똑바로 멜리다 상회로 오고 있다.


다른 사람일 확률은 한없이 낮다.


하지만 단언하기엔 마차를 안 탔다는 점이 좀 이상했다. 최고 국빈이나 되는 사람이 저리 걸어나 오겠는가. 가당찮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 분위기를 평범한 사람이 만들 수 있을 리가······’


여기에 더해 소박하다는 필므의 이야기도 있었다.


저울은 기운 느낌이지만······ 막시는 섣불리 결론을 내지 않고 잠시 기다려보기로 했다.


이내 가까워지던 인영의 면면들이 보인다.


막시는 숨을 들이켰다.


한순간에 모든 걸 깨달았다. 왜 귀공자느니, 인형, 요정이라고 떠들어 댔는지 바로 이해했다.


정면에 있는 건 그야말로 귀공자. 집사 차림이란 점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스스로가 빛을 발하는 듯한 외모는 여자처럼 아름다우면서도, 몸이 찌르르 떨릴 만큼 남자다운 카리스마를 뽐냈다.


그리고 집사의 가슴께에 있는 소녀.


무표정하니 집사의 팔 위에 앉은 소녀는 떠들어 대던 것과 흡사했다. 얼핏 흘겨본다면 정말 인형이라 착각할 수도 있어 보인다. 그만큼 소녀의 이목구비는 매우 단정했다.


특히나 연분홍빛의 눈동자는 보고 있노라면 영혼이 소녀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 신기함 때문에 그런가, 소녀는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로 여겨졌다.


‘요정이라······. 아들놈이 또 헛소리나 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어.’


과장 따윈 없다. 직접 보고도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 녀석은 눈이 먼 장님이거나, 감정이 메마른 놈이리라. 필므가 확신하던 것도 납득이 된다.


막시 또한 확신했다.


――분명 그들이다.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실감이 난다. 덕분에 긴장감이 한계치까지 부풀어 오른다.


최대한 두근대는 심정을 달래는 동안 그들이 왔다. 웅성대던 주변은 진작에 숨을 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뚫리다 못해, 폭발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시선이 몰아친다.


막시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머뭇거린다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이것이 기회라고 하지 않았는가. 잡지 않는다는 건 상인으로서 수치다.


막시는 순간 숨을 들이쉬는 것으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과연 선보일 날이 오긴 할까, 의심하면서도 꾸준히 연습해왔던 예법을 당당히 내보였다.



“멜리다 상회의 상회주, 막시 멜리다 입니다. 이렇게 드래곤 슬레이어를 모실 수 있어 가문의 영광입니다.”


여기저기서 “헉!” 소리가 터져 나오며 아까의 막시와 마찬가지로 숨을 들이마셨다.


설마 그 화제의 드래곤 슬레이어가 나타날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 했겠지.


상판대기 좀 보자고, 입점에 실패로 잔뜩 화를 내던 이들은 조금도 투덜대지 않고 벙어리가 된 듯 멍하니 입을 벌렸다. 다른 이들도 비슷했다. 그 드래곤 슬레이어냐면서 환성을 내질렀다.


도대체 누구냐며, 혼란이나 착각은 발생하지 않았다.


보통 국빈이나, 영웅의 이야기는 서민들에겐 두루뭉술하게 전해진다. 구두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살이 붙어 후엔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 변모하는 것도 드물지 않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구국의 영웅이라며 왕실에서 대대적으로 외형부터 업적까지 아주 상세하게 발표한 것이다.


정식 공문이 여기저기 붙어있으니 달리 지어낼 거리도 없다. 부풀리기에도 혼자 해낸 업적이 이미 말이 안 될 만큼 대단하여 시원찮기만 하였다. 기껏 해봐야 음유시인들이 사룡과의 싸움을 각색해내는 정도에 그쳤다. 물론 그 각색이 인간의 한계라고 하는 7급 마법이 난무하고, 땅과 구름을 찢는 환상 속의 싸움이기는 했지만······


여하튼 사룡과의 싸움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강렬했던 마력의 파동을 다들 느껴봤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역시 실물을 앞에 두니 어쩔 수 없나 보다. 대놓고 티를 내진 않으나 의혹 어린 눈초리를 했다.


――이에 대해 소녀가 화답했다.


또각. 또각.


청량하게 구둣발 소리를 내며 소녀가 한 계단씩 밟고 집사의 품에서 내려왔다.


그렇다. 계단을 타고 내려온 것이다.


막시는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재생한 광경은 변하지 않았다. 소녀는 백과 흑의 드레스와 회색의 짧은 케이프 코트 자락을 흔들리면서 역광을 뚫고 계단을 밟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마법이 아니었을까.


빠르게 뭔가를 외고 있었는데, 그게 발동어가 아니었나 싶다.


이러나저러나 하늘을 거니는 건 범인이 해낼 일이 아니다. 소녀는 행동으로 이를 사람들에게 인식시켰고, 모든 의문을 불식시켰다. 내려올 때의 행동거지도 매우 우아하여 최고 국빈임을 단숨에 인식시켰다.


하나의 행동으로 몇 가지나 되는 득을 챙겨가다니······. 요정 같은 외모와 달리 상당한 지략가다.


급격히 달라진 시선을 받으며 소녀는 드레스를 잡았다.



“이스피리아예요. 정중히 맞아주셔서 감사해요, 멜리다 씨.”

“별말씀을······”


답례를 하면서도 놀랐다. 소녀―― 이스피리아가 한 인사는 본인과 동격의 상대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예법에 대해 조금 알고 있는 사람들도 파격이라 할 수 있는 이 행동에 눈을 부릅떴다.


주위의 기색을 읽었는지, 슬쩍 곁눈질로 둘러본 소녀―― 이스피리아의 얼굴이 흐려졌다.



“미안해요. 주말은 한창 바쁘실 텐데 고려하지 않고 견학을 부탁했네요. 그렇지만 제가 만든 물건을 팔아주시는데 인사드리는 게 더 늦어선 안 될 것 같았어요.”

“괘념치 마십시오. 아직 학생의 신분이시니 달리 시간이 안 나시지 않습니까.”


제 딴에는 위로를 한 것인데 이스피리아가 힘없이 미소를 그렸다.


바로 그 순간―― 막시의 머리에 벼락이 쳤다.


‘어? 설마? 진짜로······?!’


이성은 아니라고 격렬하게 외쳐댔다. 하지만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평범하지 않은 이스피리아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역시 과한 생각이라 치부하긴 어렵다. 저 힘없는 미소도 왠지 실망에서 비롯하여 나온 것 같았다.


무엇보다 걸어왔다는 점이 결정적으로 다가왔다.


혹시 이스피리아는 고의로 주목받아 인파를 몰고 온 게 아닐까. 다름이 아니라 이곳 멜리다 상회를 홍보해주려······.


물론, 이미 홍보는 대성공이라 봐도 무방했다.


이만한 인파의 주목을 받은 것이다. 한동안은 사람들의 입에 멜리다 상회가 오르내릴 거다.


그래. 분명 상상 이상의 선전 효과를 봤다.


굳이 자신을 보내려고 한 필므의 판단도 옳았다. 이만큼 상회와 상회주를 알릴 최고의 자리도 없으니 말이다. 정말 조금이지만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하여 정확한 판단을 내린 아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런데 정작 이 모든 일을 획책한 이스피리아가 만족하지 못했다. 달빛이 내리쬐는 듯한 이 소녀는 더더욱 확실하게―― 사람들의 뇌리에 영원토록 새기고 싶어 하는 것이다.


‘탐욕스러우시구먼, 최고 국빈께선. 뭐······ 그게 싫은 건 아니지만.’


상인 같은 사고방식을 싫어할 상인이 어디 있겠는가. 오히려 여기까지 해주었는데 호응해주지 못한다면 아까도 말했듯 상인의 수치다.


속으로 피식 웃은 막시는 과장되게 두 팔을 펼쳤다.



“이곳 멜리다 상회는 이스피리아 님 덕에 번성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건국 기념일에 오신다고 하셔도 기꺼이! 어찌 감히 이스피리아 님께서, 본인의 작품이 잘 팔리는지 점검하시는 걸 막겠습니까?”


귀족과의 계약은―― 굳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계약 내용은 기본적으로 비밀이다. 비밀 유지 측면도 그렇지만, 떠벌리지 않는 쪽이 다른 사람과의 계약에서 흥정하기 좋기 때문이다.


장사의 기본이다. 상대가 정보를 모르면 모를수록 상인에겐 유리하다. 그렇기에 보통 이렇게 대중 앞에서 밝히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계약자는 특급 기밀이다. 다른 상회에서 채가려는 등의 수작을 부릴 수 있으니 꽁꽁 싸매어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계약자를 알려야 득을 볼 수 있었다.


효과는 확실하여 즉각 반응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여기 상회 물건들, 손전등을 시작으로 요즘 괜찮은 게 좀 들어왔지?”

“어. 확실히······. 뜬금없지만 뭔 예술품 같은 안경도 있었고.”

“안경은 그렇지만, 다른 건 가격도 적당하고 마력도 별로 안 들어서 괜찮았어. 쓸데없이 사용하기 어렵지도 않고.”

“손풍기도 적극 추천해. 더울 때 쓰는 거 말고 냄새를 날린다든가, 의외로 쓸 데가 많아.”

“아이들도 좋아하더라. 손풍기를 마법지팡이처럼 가지고 놀더라.”

“우리도! 그걸로 소꿉놀이하던데? 다만 너무 가지고 노는 바람에 마력고갈로 쓰러지고는 해. 그런데도 재밌는지 손에서 놓질 않지 뭐야.”

“그래. 나도 딸이 사달라고 하도 졸라서 오늘 사러 왔는데······ 설마 그게······”


저마다 한마디씩 했던 사람들은 경악의 눈빛으로 이스피리아를 보았다.


작전은 성공적. 흐려졌던 이스피리아의 얼굴도 배시시, 그 연령대 아이의 부드러운 미소로 변하게 됐다.


‘역시나······. 놀랍구먼. 진짜로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연출한 것일 줄은. 높은 지위에 있을수록 자신의 얼굴을 파는 게 꺼려질 텐데 말이야. 확실히 필므가 그리 빠져들 이유가 있긴 해.’


분명 대단한 소녀다. 이제 막 대면했음에도 뼈저리게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필므처럼 맛이 갈 일은 절대 없다.


‘직접 보았기에 확신할 수 있어. 나는 아들 녀석처럼 되지 않아.’


내심 걱정했던 근심이 가신 막시는 웃는 얼굴로 정중히 말하였다.



“그럼 들어오시지요.”

“네. 실례할게요.”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일단 아무 소식이 없었던 점 사과드립니다.


자세한 사정은 공지에 써 놓겠다만, 코로나 후유증에 좀 고생하다가 이제야 돌아왔습니다. 그 외에도 악재가 여럿 겹쳤던 탓에 공지 올릴 생각도 못했네요.


다시 한 번 죄송하단 말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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