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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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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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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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0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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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

DUMMY

‘잘난 듯이 떠들었는데 괜찮았나? 근데 루비아 씨가 그렇게 말했는걸······.’


비범하다 못해 도대체 어찌 알았는지가 더 궁금한 영역까지 오직 추리만으로 유추하는 게 루비아다.


그런 그녀가 단언했었다.


――향후 멜리다 상회는 대륙에 이름을 떨칠 대상회가 될 것이라고.


이것이 리아가 큰소리를 칠 수 있었던 배경이다. 공국의 빛이라며 칭송이 자자한 루비아가 그리 말했다면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질 일들이니까.


‘나로서도 내 물건을 팔아줄 곳이 커지면 좋으니 상관없나? 막시 씨도 왠지 의욕이 끓어올라 보이고 말이야.’


이거라면 허세도 부릴만하지 않을까. 정말 가끔이라면.


‘잘 풀렸으니 넘어가기로 하고, 이제 슬슬 정리해야 할 시간인가······.’


리아는 아직 놀란 기색이 가시지 않은 엔가나를 보았다.



“그럼 막시 씨도 이해해주신 것 같으니 이야기를 계속 진행할게요. 엔가나 씨, 조합의 설립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예.”


반사적으로 대답한 엔가나였는데, 뒤늦게 누가 말을 걸었는지 확인하고는 엄청난 속도로 머리를 털었다.



“실례했습니다. 어흠······. 조합의 설립은 걱정하시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오히려――”

“응?”

“······.”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리아.


빤히 보던 엔가나는 고개를 살짝 흔들고는 예를 취했다.



“당신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어······ 네.”


뭐가 나의 뜻이냐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타이밍을 놓쳤다고 할까, 대단히도 감명받았다는 듯 “훗.”하고 코를 울리는 엔가나를 보니 말이 쏙 들어갔다. 흰머리가 성성한 그의 노집사 또한 비슷한 반응이어서 더더욱 딴말하기가 힘들었다. 혼자만 이해 못 한 반응인지라 껄끄럽기도 했고.


어쨌거나 에르도 그렇고, 다들 문제없다는 판단이다.


루비아의 서슬 퍼런 얼굴이 아른거려 두려웠지만 리아는 억지로 자신을 안심시켰다.


‘으, 응. 분명 괜찮을 거야.’


느낌상 쓰린 속을 달래며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십니까?”

“다음 예정도 있으니까요. 주말인데 시간 내 주셔서 고마워요, 필므 씨.”

“변변찮았습니다.”

“정말 변변찮았다면 줄을 서는 손님도 없었겠죠. 제게도 무척 뜻깊었어요. 이런 점포를 둘러보는 건 처음인지라 신선했고요.”

“그렇습니까.”

“네. 그리고······”


리아는 아직 열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오히려 기세가 더욱 가중되는 듯한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막시 씨도 오늘 고마웠어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저야말로. 앞으로도 확실한 결과로서 기대에 답하겠습니다.”

“너무 성급하시지 않아도 돼요. 천천히, 무리하지 않아도 답은 나올 테니까요.”

“예. 바라신 대로······”


왠지 무지하게 딱딱해진 느낌이 들었으나 리아는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에르가 열어주는 문을 통해 밖으로 나오니 황급히 움직이는 기색과 함께 직원들이 맞아줬다. 가게 밖 창문에서도 “오오. 나왔다!”와 같은 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리아의 뒤를 따라 나왔던 필므는 직원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살짝 분위기가 날카로워졌다.



“신기할 수도 있는 거죠. 자주 보는 광경이잖아요?”

“너그러운 말씀 감사합니다.”

“진짜 너무 예를 차리지 않아도 되는데······”

“알겠습니다.”


대답만큼은 웃는 얼굴로 하였으나 보아하니 절대 편히 대하진 않을 모양이다. 눈에 조금도 농담기가 담겨 있지 않았다.


본인이 저리 행동하겠다는데 뭐라 할 수도 없다. 그나마 학원에서는 좀 더 편히 대해주니 그걸로 위안 삼아야겠지.


리아는 살짝 낙담하고는 출입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 선 리아는 뒤를 돌아봤다.



“그럼. 이만. 또 뵙도록 하죠.”


건네는 인사말에 필므와 막시, 직원들은 즉각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리아로서는 별로 필요도 없는 예의였으나, 아무래도 시선이 많다 보니 별수 없다는 느낌도 들었다.



“다음에는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올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너스레 떠는 리아의 말을 막시가 받았다.



“편하신 대로. 이 멜리다 상회의 문은 이스피리아 님께 언제든 열려있습니다. ······하온데 노파심에 여쭤봅니다만, 돌아가시는 길은?”

“사람도 많고 하니 [발판]으로 날아······갈까 했는데 마중이 왔네요.”


날아간다는 소리에 놀란 막시. 그에게 마중에 대한 설명은 따로 하지 않아도 됐다. 왜냐하면 밖에 있는 시민들이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막시도 술렁거리는 소리를 눈치채고는 곁눈질로 창문 밖을 봤다.


시간 끌 것도 없다. 배웅에 대한 감사를 전한 리아는 막시들을 뒤로하고 에르가 열어준 문을 통해 나아갔다.


구경하던 인파들은 모세의 기적처럼 갈라졌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앞줄의 사람들은 비켜서려고 했지만, 인파가 제법 많았던지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밀리지도, 밀지도 못하는 일종의 고착 상태가 됐다.


이내 좀 물러나라는 고성이 터졌다.


하지만 사람은 많다. 여기저기 웅성대는 소음이 더 컸기에 이들의 고성은 묻혀 하나의 아우성이 되어버렸다.


리아는 번잡하고 혼란스러운 거리를 봤다.


아직까지는 괜찮다. 당장 큰 문제가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버려 둔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자칫 불상사도 벌어지리라.


‘모처럼의 외출인데 그건 별로 달갑지 않네. ······어쩔 수 없지.’


살짝 내쉬는 한숨과 함께 리아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지금 하려는 일은 무조건 눈에 띈다. 간곡히 사양하고 싶다. 그러나 아비규환은 더 보고 싶지 않다. 루비아 또한 이번엔 쌍심지를 켜진 않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리아는 끌어올린 마력을 해방했다.


정확한 원인은 모르나 몬스터와 동, 식물들은 이 마력을 느끼면 두려움에 떨어댔다. 정령인 다이탈로스의 가호를 받았음에도 그렇다. 쓰다듬어 주는 걸 기분 좋게 받아들이던 동물조차도 미세하게 흘린 리아의 마력을 느끼면 바로 몸을 동그랗게 말아 벌벌 떤다.


고의로 흘리는 것을 제외하면 한 톨도 마력을 흘리지 않아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걸어 다니는 민폐 덩어리가 될 뻔했다.


사람은 어떠할까?


이에 대한 답은 베르다드에서 들었다. 무시무시한 마력의 파동이 ‘또’ 느껴졌다고.


학원에서는 세인트리안에서 벌인 일이 그다지 화제가 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잠잠했던 건 아니었다. 다들 굉장히 조심스러워했지만 친한 이들끼리 소곤소곤 의논을 나누고는 했다.


청각이 엄청나게 뛰어났던 리아는 원하지 않아도 이러한 대화가 귀에 들어왔고, 들을 때마다 움찔거렸었다.


차라리 신경을 쓰지 않고 무심하게 지나쳤다면 모를까, 한 번 인식하니 엿듣는 걸 멈출 수 없었다.


덕분에 한동안 거동이 수상하게 비쳤을 테지만 답은 확실히 얻었다.


‘내 마력은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뭔가가 있어.’


진짜 바라지도 않는 특성이다. 축복도 아니고 누가 이런 걸 바라겠는가. 있다면 120% 중2병 말기에 치달은 중증의 환자일 것이다.


하지만 뭐든지 쓰기 나름이었다.


오직 마이너스밖에 없어 보이는 특성을 살~짝 조정하니 이게 웬걸~? 전혀 뜻밖의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사실은 아이가 말해주어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리아는 썰렁해진 주변을 보았다.


사람은 그대로다. 여전히 바글바글하다. 일일이 세는 게 불가능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귀찮을 거라는 건 자명했다.


그런데 한없이 조용했다.


기괴할 만큼 침묵이 흐른다. 이 많은 사람이 있는 거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치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그러했다. 마치 상업지구 전체가 물속에 잠긴 듯하였다.



『알림. [위압]의 발현 및 안정화를 완료함.』

‘응. 고마워.’


두려움이란 달리 말하면 공포다. 무섭기에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압도당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지칭하는 단어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뿌리다. 결국엔 전부 공포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위압]도 연장선상이다. 적당한 공포를 주어 외경을 느끼게끔 한 것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만만히 볼 수 없는―― 조금 작다고 함부로 깔볼 수 없게 조치를 취했다고 보면 편하다.


다만 너무 세도, 약해도 안 되는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했다.


이는 리아에겐 불가능했다. 애당초 본인 마력의 담긴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컨트롤이 어찌 가능하겠나. 전부 아이의 작품이다. 특성을 단정해낸 아이가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내어 일종의 투기술로서 승화시켰다.


지금도 리아는 마력을 내뿜기만 할 뿐이고, 세세한 조정은 전부 아이가 처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만이다. 방금 막 아이가 알렸듯이 안정화를 끝마친 것이다. 그 데이터를 아이 쪽에서 보내줬고, 다음번에는 리아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정확한 원인과 원리는 모르더라도.


‘음. 정말 완벽해. 이걸로 더 이상 첫인상만으로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적어질 거야.’


이것보다 더 완벽한 투기술이 어디 있을까. 내심 2시간 정도 칭찬을 해주고 싶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이니 리아는 얌전히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다.



“······번잡하네요.”


현재 이 공간은 리아가 지배하고 있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굉장한 담력을 지녔거나, 상당한 수준의 실력―― 적어도 시련을 넘은 이들이어야만 가능했다.


당연하게도 그만한 실력자는 이곳에 없었고, 전원 리아의 조용한 한마디에 길을 비켜섰다.


혼잡함은 없었다. 외곽에서부터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인파는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아까와 달리 질서 정연했다.


휑하니 열린 길을 리아는 걸어갔다.


마치 주인공처럼······


무지하게 부담된다. 하지만 되도록 혼날 일을 줄이기 위해 리아는 가슴을 당당히 폈다.


천천히 다가온 리아를 반긴 건 바짝 기합이 든 기수로, 그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가죽 헬멧을 벗고는 머리를 숙였다. 언뜻 보인 그의 가슴팍에는 리벨리타스 후작 가를 상징하는 문양의 자수가 있었다.



“라프리트 씨가 보내신 건가요?”

“예!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이리 막힐 거라 예상하셨나? 역시 대단하시네.”


루비아 못지않다며 감탄한 리아는 기수의 뒤편을 봤다. 거기엔 전체적으로 밝은 갈색의 깃털에 네발을 지닌 거구의 새가 있었다.


높이 2.5m는 될법한 이 새는 베르다드의 관리장에도 있었던 새와 같은 종이었다.


그때와 같은 새는 아니다. 깃털의 색도 색이지만 풍격이 달랐다. 관리를 잘 받고 자랐는지 이쪽이 훨씬 자태가 고고하였다.


‘분명 그리핀이라고 했었던가? ······과연. 게임에서 보던 것과 제법 닮았군. 크기라든가 압박감은 상당히 차이가 있지만.’


전생의 기억 속 그리핀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받으며 리아는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자 그리핀은 꾸벅―― 머리를 깊게 내렸다.


리아는 같은 눈높이까지 내려온 그리핀의 머리를 보며 고민하다가 살며시 손을 뻗었다.


내심 [위압] 때문에 화들짝 놀라 난동을 부리진 않을까 염려했는데,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핀은 눈을 감은 상태로 얌전히 리아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가호의 효과인가······’


뭐가 됐든 도망가지 않으니 기분 좋다.


즐기지 않으면 손해라는 기분에 리아는 미소를 그리고는 아주 정성스레 그리핀의 미간과 날카로운 부리를 한 번 쓰다듬어줬다.



“잘 부탁드릴게요.”


역시나 마수. 말을 알아듣고는 알겠다며 그리핀은 작게 울었다.


그렇게 대충 인사를 끝마치고 뒤를 돌아보니 기수가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눈을 끔뻑거렸다.



“왜 그러시죠?”

“아, 아닙니다! 어, 얼른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솔직히 발판으로 날아가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어지간한 전투기보다 빠르기도 하니 말이다. 미안하지만 그리핀이 그 정도로 빠르게 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러나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 그리핀을 타보겠는가. 거기다 기껏 배려해준 라프리트의 마음을 무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리아가 옆으로 돌아가자 그리핀이 엎드려 높이를 낮춰줬다.


그리핀의 등에는 안장이 달려있었는데, 앞에는 기수의 자리가 있었고 뒤에는 2인승의 좌석이 있었다. 물론 하늘을 날아야 하니 무게에 제한이 있어 그리 넓진 않았다만.


리아는 먼저 받침대를 밟고 훌쩍 올라탄 에르의――한순간이었지만 침묵을 뚫고 감탄의 환성이 터졌다.―― 손을 잡고 좌석에 올라갔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자리에 앉는 걸 꼼꼼히 확인한 뒤 출발을 알린 기수는 그리핀의 가슴 줄을 슬며시 잡아당겼다.


신호를 받은 그리핀은 천천히 날개를 펄럭였다.


4m에 달하는 날개다 보니 제법 장관이었는데, 물리법칙이 애매하게 다른 곳이다 보니 생각보다는 바람이 크게 불진 않았다.


그럼 어떻게 날 수 있는 거냐?


그 물음에 답은 천천히 떠오르는 그리핀에게서 얻을 수 있었다.


‘투기술이네······.’


그리핀에게서 느껴지는 건 분명 마법의 감각으로, 사람이 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투기술을 발현하고 있었다.


소모되는 마력의 양도 사람이 걸을 때와 크게 차이가 없었다.


이 부분은 과연 새라고 할 수 있겠다. 하늘을 자유롭게 거니는 이들에겐 나는 것쯤은 지극히도 당연한 일일 테니.


‘흠. 날갯짓은 부가적인 느낌인가? 실질적인 기능보단 이미지를 잡기 위한 행동으로 보이네. 살짝이지만 에르가 나는 방법과 비슷할지도. 그러면 노력여하에 따라 날개를 움직이지 않아도 날 수 있다는 소리인가?’


고도를 올려 나아가는 그리핀의 탑승감은 무척이나 편안했다. 신경 써줘서 날아주기 때문인지 마치 세단을 탄 것 같았는데, 안전장치 하나 없던 것도 조금은 납득이 갔다. 전투 같은 급박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처럼 평범한 이동 수단으로 활용한다면 얌전히 있는 것으로 충분할 거다. 물론 그래도 최소 하나쯤은 안전장치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긴 하다만.


그런 생각과 함께 리아는 편안히 좌석에 기대어 나는 방법에 대한 고찰을 이어갔다.






교통체증이라는 게 없는 하늘인지라 그리핀은 천천히 날았음에도 막힘 없이 쭉쭉 나아갔다. 분명 목적지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때였다. 금세 고찰을 그만두고 밑의 경치를 구경하고 있던 리아에게 뭔가가 눈에 밟혔다.



“저기요! 잠시 내려가 볼 수 있을까요?”

“이 아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금방 끝날 거예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꺼리는 목소리였으나 리아는 단호하게 말하였다.


정중히 모셔 오라는 주인의 명과 저울질을 하던 기수는 조용히 고삐를 당겼고, 그리핀은 냉큼 날개를 쭉 펼쳐 천천히 활강하였다.


이윽고 내려온 곳은 속칭 빈민가로 불리는, 주변이 허름한 뒷골목의 공터였다.


이게 기수가 꺼리던 이유다.


꽤 풍족한 벨루디스라도 빈민은 존재했고, 그런 이들이 외진 곳으로 모여 빈민가를 만들어 냈다. 물론 다른 나라보단 한참 사정이 괜찮겠지만.


그러나 이곳은 예외다. 다른 지역에 비해 유달리 허름했다. 다른 나라의 빈민가와 충분히 견줄 수 있다. 괜히 빈민가 중에서도 경계선 끝자락에 있는 게 아니다. 모셔 오라고 했던 손님을 과연 이런 곳에 내려줘도 될지 상당히 고민되었을 기수의 심정이 바로 그려진다.


그 셀러리맨의 처지가 공감되어 리아는 미안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내려와 직접 보고 싶었다.


――멋들어진 작품을.


정말 빈민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웅장한 그림이었다. 멀리서 목격했음에도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뛰어난 예술성이 담겨 있었다.


다만 이 작품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약간의 절차가 존재했다.



“저쪽인가?”

“기, 기다려주십시오, 제가 먼저――”

“――아뇨. 감사하지만 우려할만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하,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그도 그럴 게, 제 탐지를 피해 갔다는 건 요전번에 상대한 사룡보다도 강하다는 소리인데, 그런 위험이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기수는 리벨리타스 가의 사람이다. 라프리트도 휘말렸던 터라 체험학습 때의 트러블을 남들보다도 더 자세히 알 터였다.


과연 그는 리아가 먼저 사룡―― 세스를 감지한 일까지도 들었었는지 묵례로 예를 보이고는 한발 물러섰다. 자만이 아니라는 건 [위압]을 통해 깨달았을 터, 생각보다는 시원스러운 태도였다.


‘역시 최고의 투기술이 맞는 거 같지?! 고마워, 아이!’


기수와 더불어 아이에게도 감사를 전한 리아는 금방 다녀오겠다 하고는 에르만을 대동하여 골목길을 나아갔다.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수도 따라오려 하였으나, 그리핀을 봐줄 사람도 필요하기에 기다리라고 하였다.


슥슥.


하늘에서 본 전경을 떠올린 리아는 대충 주위를 살펴보며 걸었다.



“흐음. 역시 인위적이네.”


언뜻 보면 전형적인 빈민가다운 풍경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정정한다. 상상 속의 빈민가에서 두세 배 처참함을 곱하면 현재 이곳의 풍경과 비슷할 것이다. 까놓고 말해 그냥 쓰레기 처리장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그리 소개받는다면 모두가 바로 수긍하리라.


하지만 진짜 빈민가라면 무조건 있어야 할 것이 빠져있었다. 이곳엔······.



“여긴가······”


확실한 위화감을 느끼며 리아는 목적한 곳에 섰다. 기가 막힌 우연인지 딱 정면만 시야가 뻥 뚫려 있었다.



“애매하네.”


요리조리 고개를 움직이며 각도를 잡아봤지만 영 아니다.


어쩌지 고민하고 있자니 ‘때마침’ 근처에 놓여있던 나무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냉큼 달려가 두드려보니 제법 단단하니 괜찮았다.


이거다 싶은 리아는 상자를 들고 왔다. 그러고는 몇 차례나 상자를 옮기며 위치를 잡았다.



“좋아. 여기면 될 거야.”


만족스럽게 세팅을 끝마치고 리아는 상자를 밟고 올라섰다.



“이야~ 장관이네.”


한 곳만 훤히 뚫린 곳으로 보이는 건 하나의 그림이었다. 주제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단순 명료했다.



“드래곤을 무찌르는 전사의 모험담인가······”


이 작품을 만든 사람의 천재성이 절로 느껴진다.


그림이 훌륭해서가 아니다. 거대한 도시 전경을 캔버스 삼아 그려낸 작품을 보노라면 누구나가 다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할 거다. 이게 천재라고.


그만큼 불길을 뚫고 검을 수직으로 찍는 전사는 역동적이었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드래곤에게서는 생동감이 느껴졌다.


이런 걸 물감도 아니고 아무 데나 널린 쓰레기들로 표현하였다. 불길은 더러움이 묻은 주황색의 천으로 명암을 줬고, 용의 배에 달린 빨간 보주는 칠이 살짝 벗겨진 금속으로 빛의 반사광을 만들었다.


더욱이 일렬로 세운 게 아니라, 원근감에 따라 적절히 배치했다. 이에 따라 3D 같은 입체감이 생겨났고, 더더욱 작품의 퀄리티가 올라갔다.


조금만 계산을 잘못했더라면 이상해졌을 텐데 이처럼 완벽하게 조율하다니······.



“후우.”


무심결에 경탄의 한숨이 나왔다.



“일부러 내려올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었네요.”

“나름 볼 만은 했어. 학원이나 왕성에 있는 것보단 한참 좋았어.”

“그렇죠?! 근데 누가 이런 곳에 작품을 남겼을까요? 보통 손이 가는 작업이 아니었을 텐데.”


묻긴 했으나 같이 이제 막 온 에르가 알 턱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건 굳이 이 구석진 곳에서 관람하게끔 의도한 제작자밖에 없을 것이다.


어깨를 으쓱거린 리아는 상자에서 내려와 되돌아가기로 했다. 기다리고 있는 기수도 이 멋진 작품을 감상하지 못한다면 통탄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 골목길 안쪽에 있는 대로변에서 황급히 뛰어오는 인기척이 느껴진 것이다.


발걸음 소리를 보건대 몸무게가 가벼운 어린 아이쯤으로 추측된다.


마력으로 탐지해보아도 비슷한 형상이 관찰됐다. 성별은 모르겠지만.


인기척은 곧장 리아가 있는 곳까지 왔다.


모습을 드러낸 건 예상대로 8살은 되어 보이는 귀여운 남자아이로, 전력을 다해 뛰어왔던 탓에 남색의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빈민가답게 꾀죄죄한 차림새의 남자아이는 숨을 헐떡였는데, 다른 데에는 줄 신경이 없다는 양 눈알을 빠르게 굴렸다.


그러다 곧 리아와 에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눈이 커졌다.



“누나들은 어디서 온 거야?”


다짜고짜 묻는 말에 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하늘을 가리켰다.



“위에서. 그리핀을 타고 왔거든.”

“하늘······. 칫. 맹점이었네.”


위를 쳐다본 남자아이는 인상을 쓰며 혀를 찼다.


어쩐지 순진해 보였던 첫인상과는 꽤 다른 분위기다.



“이미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그것보다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야? 하늘을 날고 있었다며.”

“아~ 그건······”


말을 끌던 리아는 남자아이를 봤다. 그리고 사라졌다.


이윽고 다시 모습을 드러낸 리아의 앞엔 양 옆구리가 붙들린 남자아이가 있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구구절절한 설명보다는 직접 보는 편이 빠르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대롱대롱 매달리게 된 피해자가 이를 이해하라는 건 무리다.


뜬금없는 고속 이동에 잠시 넋이 빠져있었던 남자아이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버둥댔다.



“이거 놔! ――윽?! 뭐, 뭐야 이거. 꼼짝도 안 하잖아?”

“아, 미안. 잡는 게 별로였나 보네. 요전번에 아니마무스 씨를 안던 버릇 탓에 나도 모르게 그만······”

“알아듣지도 못할 소린 그만하고 내려놔! 무식하게 힘만 센 아줌마야!”

“그, 그래.”


아줌마······


이번 생에서―― 아니, 모든 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듣는 소리에 리아는 당황하면서 윽박지른 남자아이를 나무 상자에 내려줬다. 누나라 부르며 미소 짓던 남자아이의 첫인상은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저, 정면에 그림 보이지? 나 저거 보려고 온 거였어. 너무 멋지지 않니······? 내가 표현을 잘 못해서 그렇지, 너도 보면 분명 감탄할 거야.”

“그런 건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그것보다 아줌마가 하늘에서 발견해서 내려온 거야?”

“응? 어어. 우연찮게 눈에 띄었거든.”

“아니······ 암만 위에서 내려봤다지만 쉽게 발견될 리가 없을 텐데? 흠······”


남자아이가 진지한 눈매로 리아를 살펴봤다.


상자 위에 올라간 덕에 눈높이가 같아서 남자아이의 얼굴이 잘 보였는데, 기분 탓은 아닌지 분위기가 나이에 비해 꽤 어른스러웠다.


‘으으. 나 아줌마가 아닌데―― 아닌가? 아이리스란 아들도 있고, 결혼도 했으니 아줌마가······ 맞나?’


더욱이 남자아이처럼 어리다면 딱히 아무 배경이 없어도 충분히 아줌마로 비치지 않을까······



“그거 누가 만들었어?”

“어, 어떤 거?”

“옷이랑 귀걸이 말이야. 만든 사람이랑 친해?”

“친······하지? 그게 왜?”


되물었으나 남자아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에르가 만든 옷과 귀걸이를 자세하게 관찰했다.



“제법이야. 이만한 녀석이 있을 거라고는······. 귀족 쪽에는 꽤 흔하나? 아니, 그렇다기엔 이거랑 비견될 만한 걸 본 적이 없는데······”

“마, 만져서 봐도 돼.”

“됐어. 무릇 작품이란 눈으로 즐겨야 하는 거야. 함부로 만져대서 망칠 수야 없지. 오롯이 아줌마를 위해 만든 것이기도 하고. 거기다가 애정이라고 하던가······? 만든 녀석의 기분 같은 게 느껴져. 분명 집착이 심한 놈이겠지. 멋대로 만져대서 원망을 사고 싶진 않아.”

“헤에······ 그런 게 느껴진다고?”


꽤 자세한 이야기에 리아는 옷을 둘러봤다.



“그리고 아줌마도······”

“나?”

“아줌마, 도대체 몇 살이야?”

“16살. 이제 막 성인이 됐어.”

“이제······ 성인이라고? 그럴 리가.”

“어, 진짠데······ 나 그리 늙어 보이나?”


여태 어려 보이는 걸로 고민이었건만······


리아는 혹시나 순식간에 겉늙어졌나 싶어 에르를 쳐다봤다.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고, 에르는 슬쩍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해줬다.


그럼 대체 왜 저런 소리를?



“외모가 아니야. 행동 때문이지.”

“······응?”


조금도 이해가 되지 않았던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움직임을 말하는 거야. 손을 움직이거나 발을 움직이거나, 걷거나 뛰거나 하는 것들은 전부 반복적인 연습의 산물이야. 날이 갈수록 경험은 축적되고 그것이 행동 하나하나에서 묻어나와.”

“할머니들 특유의 나긋한 분위기 같은 건가?”

“쉽게 말하면 그렇지. 그런 건 만들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잖아?”

“하긴. 그건 연륜이 쌓여야만 낼 수 있는 분위기지.”

“아줌마도 마찬가지야. 손가락을 움직이는 행동 하나에마저 아득한 세월이 깃든 게 엿보여. ······아아. 귀찮을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딱히 촌스럽다는 소린 아니니까 꺅꺅대지마. 내 귀는 소중하거든.”

“어······ 그래.”


‘난 충분히 젊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이야기를 전혀 못 따라가겠네.’


전생의 기억이 있는 만큼 역시나 여러모로 나이 들어 보이는가 보다.


어쩔 수 없지. 현생보다 전생의 인생이 더 긴데 어쩌겠는가. 아줌마를 받아들인 것처럼 이젠 애늙은이라 불리는 것도 받아들여야겠지.


그런 식으로 대충 스스로를 위로한 리아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이······ 아줌마.”

“왜에?”

“제안이 있어.”


남자아이의 목소리는 매우 진지했다.


힘이 빠져 늘어지게 대답했던 리아는 달라진 분위기에 고개를 들었다.


역시 잘못 들은 건 아니었는지 남자아이는 결심마저 한 눈으로 똑바로 시선을 마주했다.


암만 어리다지만 생각과 의지가 있는 존재다. 한 명의 사람으로서 제대로 존중해주기로 하자.


리아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말씀해보세요.”


[위압]을 쓰지 않았지만 달라진 분위기에 남자아이는 압력을 느끼고는 숨을 삼켰다.



“과연······.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높게 봐줬다면 고맙네요. 그래서, 제안이라는 건 뭐죠?”


남자아이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앞으로 꺼낼 이야기에 긴장한 듯도 보였는데, 이내 이를 악물고는 단숨에 불안을 떨쳐냈다.



“저를 고용해주십시오.”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설마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남자아이의 눈에 놀라움이 담겼다. 그리고 똑똑한 아이답게 기회를 잡기 위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이클립스. 당신께서 대단하다고 칭찬해준 작품―― ‘결전’을 만든 자입니다.”

“이걸 말인가요?”

“정말입니다. 분명 제가――”

“아아. 그건 믿어요.”


남자아이―― 이클립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가 이런 말을 하긴 그렇지만 저는 7살밖에 안 되는 꼬마입니다. 저런 그림을 혼자 만들기엔 좀 무리가 있잖아요?”

“그렇지만 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은걸요.”

“대체 뭘 보고 단정을······”

“어라? 모르셨나요? 당신이 아까 저 작품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듬뿍 자부심을 담았단 걸. 하나하나 직접 만든 사람이 아닌 한 보통 그러긴 불가능하겠죠. 게다가 납득되는 것도 있어요.”


리아는 옆에 서 있는 에르를 가리켰다.



“찬크에르라고 해요. 제 옷과 귀걸이를 만든 분이죠.”


이클립스는 품평하듯 에르를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흥미롭다는 눈이 되었다. 관찰안이 좋다 싶었는데 단박에 진짜임을 알아본 모양이다.



“에르는 실력만큼이나 보는 눈이 좋죠. 그런 에르가 저 결전을 제법 볼만했대요. 상당한 칭찬이에요. 근래에 본 것 중에선 최고라고도 했으니까. 제가 봐도 그랬어요. 직관적인 작품인지라 한눈에 굉장하다는 걸 알아봤죠. 그러한데 당신은 아무 반응도 없었죠.”

“옛날에 봐서 익숙해졌을 뿐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기엔 작품을 대하는 당신의 태도나, 사물을 꿰뚫어 보는 관찰력 등이 뛰어나네요. 마치 예술가처럼. 평범한 아이는 보통 그러지 않거든요.”

“여긴 빈민가에요. 뻔뻔한 사기꾼 따위 널렸습니다.”

“고용해 달라면서요? 결전 때문에 안 그래도 기대치가 높아졌는데 사기꾼이 만족시켜줄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믿는 거예요.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도전하진 않을 테니.”


도전하는 바보도 있다며 이클립스는 중얼거렸으나 더 이상의 문책은 하지 않고 믿어준 경위를 납득해줬다.


대충 정리가 됐다고 본 리아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목적이 뭔가요? 굳이 오늘 처음 만나는 저에게 고용되려는 점이 무척이나 부자연스럽네요. 단순히 빈민가를 벗어나기 위해선가요?”

“말씀대로 돈이 목적인 것은 맞습니다. 달리 이유가 없죠. 그렇지만 누가 빈민가의 꼬마를 고용하겠습니까? 버림 말로서 쓰고 버릴 게 아니고서는.”


본인의 차림새가 새삼 초라하다고 자각했는지 이클립스는 굉장히 씁쓸한 표정으로 다 떨어진 옷자락의 끄트머리를 문질렀다.



“저도 현실적으로 고용되기란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보는 눈이 높은 사람이 오게끔.”

“과연. 입체적으로 표현한 건 작품 밖의 외적인 이유도 존재했군요?”

“그렇습니다. 작품을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장소는 이곳 한 곳뿐. 조금만 틀어져도 의미 없는 쓰레기 더미에 불과할 뿐이죠.”

“그 쓰레기 더미 속에서 작품을 찾아낸―― 당신의 선택을 받은 자들만이 여기에 올 수 있다는 거네요.”


작품을 통해 이클립스는 고른 것이다. 자신을 고용해줄 인물을. 대담하게도 시험을 내, 통과한 이들에게 본인을 고용할 기회를 준 것이었다.


실로 오만한 취준생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실력에 자신이 있기에 나온 발로로, 어필이라고 봐도 된다. 이클립스는 반드시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강하게 자신감을 내비친 것이다.


‘누군지 모른다는 점도 좋아. 어리다고 편견 가질 일도 없고. 되려 저 작품에 빠졌다면 나이 따위야 어찌 돼도 상관없겠지.’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썼다.


이러한 생각을 부정하지 않고 이클립스는 웃었다. 첫인상과 같은, 아이다운 귀여운 미소였다. 아마 이 모습이 이클립스 본래의 성격이지 않을까.



“갑자기 여기에서 인기척이 들리기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설마 하늘에서 내려올 거라고는.”

“아하. 저 대로변 근처에서 누군가가 오나 대기하고 있었던 거네요.”

“인성을 시험하기 위해서죠. 악덕한 사람에겐 고용되긴 싫으니까요. 그래서 나올 때쯤 길목에 누워 어찌 반응할지 보려고 했습니다. 거기서 기꺼이 도움의 손을 내미는 사람에게 고용 건을 말하기로 마음먹었죠.”

“근데 저에게 묻는 걸 보니 여태 그런 사람이 없었나 봐요?”

“아뇨. 애초에 그림을 발견하고 찾아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이 처음입니다.”

“에?”


리아가 얼빵한 표정으로 쳐다보니 이클립스는 살짝 난색을 보이며 말했다.



“그······ 문제의 출제 난이도를 잘못 정했나 봅니다.”

“어, 언제 저 그림을 완성했나요?”

“작년 막바지쯤이었으니까······ 8달은 됐을 겁니다.”

“꽤 오래됐네요······.”


아쉬운 듯 이클립스의 어깨가 축 처졌다.


달리 위로할 말이 없었던 리아는 헛기침으로 때웠다.



“으음. 그, 그럴 수도 있는 거겠죠. 그보다 저는 아직 테스트를 거치지 않았는데, 대뜸 저에게 고용돼도 괜찮은 거예요?”

“아뇨. 인성 검사는 이미 끝마쳤습니다.”

“에? 언제요?”

“아줌마 말입니다. 여자라면 무조건 예민하게들 반응하는 그 단어를 남발했음에도 화를 전혀 내시지 않았기에 바로 문제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아~”

“죄송했습니다.”

“아아. 괜찮아요.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던데다 필요한 일이었잖아요. 지금 사과하신 걸로 끝내도록 하죠.”

“감사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던 이클립스는 긴장이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어떠하신지요······”

“물어볼 게 있어요. 만약 제게 고용된다면 전속 화가로서 있길 원하시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결전에서도 그랬듯이 제작과 관련된 일이라면 대체로 자신 있으니 화가로 한정 짓지 말고 다양한 일을 주셨으면 합니다.”

“호오. 그러면 혹시 마도구도 만드실 수 있나요?”

“아, 아뇨······ 술식은 배우질 못해서······”

“아아. 그런가요? 그러면 금속을 다루실 줄은 아시나요?”

“그, 그것도······”

“그러겠죠. 아이가 모루에 망치를 두드릴 일은 여간해선 있을 리가 없죠. 보석 세공이나 재봉은 어떤가요?”

“······.”


이클립스는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뭐, 당연했다. 저 어린 나이에 전문기술을 언제 배우겠는가. 그것도 빈민가에서 사는 아이가 무슨 수로.


분명 결전은 뛰어난 작품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전문적인 기술은 하나도 쓰이지 않았다. 오롯이 철저한 계산을 통한 배치와 뛰어난 미적 센스로 이루어낸 작품이었다.



“재능은 있지만 지식은 없다는 건가······”


중얼거림을 들은 이클립스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졌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무산될까 걱정하는 게 눈에 훤하다.


조금 고민하던 리아는 귀걸이에서 양피지와 마광석 가루를 꺼냈다. 마도구 제작 중급반에서 마법 스크롤을 만들고 남은 걸 받은 것이었다.


지금 하려는 것도 수업 때와 같은 일로, 리아가 손가락을 튕기자 마광석 가루가 흘러가더니 양피지 위에 술식을 그렸다.


이게 끝. 마지막으로 기껏 새겨놓은 술식이 망가지지 않게 니스나 방부 오일을 바르면 됐다만, 리아는 마법으로 압착시키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완성된 마법 스크롤을 이클립스 앞―― 나무상자 위에 내려놨다.



“마력조작은 하실 수 있나요?”

“네에. 하, 할 수 있습니다.”

“좋아요.”


최소한의 조건은 충족한 걸 확인한 리아는 자세한 설명을 하였다.



“제가 드린 건 [성형]이란 마법이 담긴 스크롤이에요. 사용하는 방법은 술식에다가 마력을 주입하면 돼요. 먼저 시범을 보여드리죠.”


리아는 바로 마력을 주입했다.


마력이 차오르자 이윽고 스크롤에서―― 술식에서 옅은 빛이 나왔는데, 이것이 마법의 발동을 알리는 신호이다. 직접 쓰는 마법과 달리 연결되는 감각이 옅으니 이 빛을 보고 발동 여부를 판단해야만 했다. 리아에게는 살짝 감각이 둔해진 정도에 불과했지만.



“어디 보자······”


멀리 가기가 귀찮아 리아는 바로 아래에 있는 흙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굳이 이러한 부가적인 행동은 필요 없었으나 이번엔 시범을 보이는 거라 액션을 크게 했다.


[성형]의 효과에 의해 일정 영역의 흙이 뭉치기 시작했다. 저 혼자 꾸물꾸물 움직이는 이 모습을 이클립스는 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이윽고 완성된 건 15cm의 흙으로 된 전신상으로, 허겁지겁 뛰는 남자아이―― 대로변에서 나타났었던 이클립스의 모습을 기억 그대로 옮긴 터라 역동적으로 잘 표현됐다.



“이런 식으로 [성형]은 머릿속에 그린 그대로 형태를 바꿀 수 있어요. 당신도 한 번 해보세요.”

“아, 아, 예.”


본인의 흙상을 보고 마른침을 삼킨 이클립스는 스크롤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력을 주입하기 시작했다.


마광석을 사용하는 마도구는 과한 연속 사용이 아닌 한 꽤 오랫동안 계속 쓸 수 있다. 품질에 따라서 적게는 몇 년에서, 많게는 수천이나 수백 년까지도 멀쩡히 작동한다고 한다.


그에 비해 술식만을 양피지에 새겨 사용하는 스크롤의 경우 열화가 매우 빠르다. 왜냐하면 마력이 담기면 마광석 가루가 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력이 많이 들어가는 고위 마법의 경우 더더욱 수명이 짧아, 한 번 사용하면 만화처럼 양피지째로 재가 되어 사라진다.


학원에서 배우기로 양피지의 품질과는 무관하다고 한다. 종이로 바꿔도 열화엔 큰 영향이 없고, 단지 잘 찢어지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양피지가 채택됐을 뿐이었다.


애당초 마광석의 특징이니 품질이 높은 마광석 가루를 쓰면 조금은 사용횟수가 늘어난다고도 하는데······ 효율과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잘 시도하진 않는다고 담당 교수가 알려줬다.


수업에서 쓰다 남은 것으로 만든 저 스크롤도 다르지 않다. 품질은 아주 평범하여 사용횟수는 최대 2번이 한계로, 이클립스의 마력이 주입되니 살짝 빛이 뿜어져 나왔다가 번쩍하며 술식이 불타올랐다.


불은 붙자마자 순식간에 꺼졌으나 처음 본 현상에 상당히 놀란 이클립스는 딱딱하게 굳어서는 두 걸음 떨어졌다.



“스크롤은 원래 이런 물건이에요. 불도 전혀 뜨겁지 않잖아요. 그보다 마법이 발동됐으니 서두르세요.”


계속 유지되는 게 아니라고 하자 이클립스는 냉큼 바닥에 주저앉아 손을 뻗었다.


‘먼저 시범을 보인 보람이 있었네.’


손을 뻗는 동작은 큰 의미가 없는 행동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는 충분했고, 이는 곧 집중력의 상승으로 이어진다.


스크롤을―― [성형]을 처음으로 써 봤을 이클립스가 앞서 보인 시범이 정답이라 믿는 건 당연지사. 의도한 대로 잘 풀렸다. 이런 건 직접 알려준다고 해서 효과가 있는 건 아니기에 정말 안심했다.


아직 쓸만한 양피지를 회수하고 1분여. 각고의 노력 끝에 이클립스가 흙을 움직였다. 한 번 움직이자 바로 감을 잡았는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몰두했다.


상당한 속도로 쌓여 올라가는 흙더미. 적응력이 대단하다.


이대로 끝까지 움직이지 않을 거 같았던 이클립스가 품속을 더듬거렸다. 왠지 물건을 찾는 느낌이었는데, 잠시 후 나온 손에는 조그마한 단검이 들려있었다.


아마 호신용이 아닐까.


하지만 이클립스는 망설임 없이 구색을 갖춰가는 흙더미 속에 단검을 던졌다.


‘호······ 이건 좀 놀라운데? 벌써 [성형]의 원리를 깨닫다니. 이것도 관찰안이 좋은 덕분인가?’


놀라는 사이 이클립스가 헉, 하며 막혔던 숨을 토해냈다. 완성한 것이다.


대항하려는 의지가 있는 건가, 이클립스가 만든 건 현재 있는 뒷골목이었다.


다만 평범하진 않았다. 위에서 내려다본 부감으로 표현됐는데, 원근감 또한 놓치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졌다.


단검을 넣은 건 이 때문이었다. 꽤 불안정한 중심을 잡기 위해 무게추의 역할로 맨 밑에다가 깐 것이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넘어지지 않고 안정적으로 세워져 있었다.



“진취적이네. 과장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직접 위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섬세해. 여기 서 있는 건 우리? 아하. 지금 현재 우리를 내려다본 거구나. 이거 내가 평가할 수준을 뛰어넘었는데?”

“가, 감사합니다.”


리아의 혼잣말을 들은 이클립스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으음······. 아직 기뻐하긴 이르지 않을까 싶은데요.”


기쁨에 활짝 꽃이 폈던 이클립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물론 저런 걸 보고 싶어서 초를 친 게 아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제대로 고용하기 위해서는.


리아는 이클립스의 작품을 톡 건드렸다.


푹.


절대 힘을 주지 않았다. 정말 살살 민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모래의 도시는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다. 남아있는 건 무게추가 된 철판 구조물만이 전부였다.


리아는 시범으로 만들었던 본인의 흙상도 찔러봤다.


결과는 빙글, 돌며 쓰러지긴 했으나 무너지진 않았다.



“분명 [성형]은 머릿속에서 그린 그대로 형태를 바꿔주죠. 하지만 모르는 걸 가능케 하는 만능의 마법은 아니에요. 흙을 굽는 도기 방식이나 유리세공 방식을 모른다면 평범한 흙과 모래에 불과해요.”


리아는 입술이 애처롭게 부들거리는 이클립스에게 검지를 들어 보였다.



“그래서 제안이 있는데, 고용 조건의 수정을 요청해요.”

“수······정?”

“네. 지금 보셨다시피 당신은 배움이 부족해요. 그러니까 후원의 형태로 자금 및 교육을 지원하고, 이후 한 사람의 몫이 되었을 때 정식으로 계약하도록 하죠.”

“왜······? 일도 안 하면 손해 아니야?”

“후후. 인재 투자라는 건데······ 그 부분도 앞으로 배워야겠네요. 뭐,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당신의 미래에 투자한다고 생각하시면 편해요. 그만큼 가능성을 봤다는 소리죠.”

“하, 하지만 나 계속 실패했는데······”

“실패를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나요? 거기에 당신의 경우엔 실패도 아니에요. 모르는 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보고 싶네요.”


똘망똘망한 눈망울로 올려다보는 이클립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신은 훌륭했어요. 전부 제 기대 이상이었죠.”

“저, 정말?”

“네. 그러니까 후원하고 계약 하는 거 아니겠나요?”

“······.”


아무리 똑똑하고 영리하더라도 7살 아이에 불과하다.


일찍이 부모 없이 자라 너무 빨리 철이 들었어도 그렇다. 아이는 아이다. 지구였으면 유치원생일 나이에 아무리 정신적 성숙을 이루었다 한들 어른과 같을 리 없다.



“앞으로 오랫동안 잘 부탁드려요, 이클립스.”


다정하게 말한 리아는 한동안 고개를 깊게 숙인 이클립스의 머리를 상냥히 쓸어줬다.


작가의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늦었지만 새해 인사 올립니다!


크... 최대한 빨리 오려고 했는데, 신정 전후로 제법 바빠졌네요


어쨌든 늦어서 죄송하고, 앞으로 하시는 일들 잘들 되셨으면 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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