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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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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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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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DUMMY

세그언도 대륙의 정중앙에 자리한 세인트리안. 그곳으로부터 남서쪽에는 군사 강국으로 유명한 제국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욱 남쪽, 오랜 세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아 푸르른 녹색의 대지가 펼쳐진 곳을, 일반 마차로 6달을 가면 도달하는 곳에 문명의 흔적인 오두막이 있다.


오두막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인근의 나무를 잘라 만들어 특별할 거라고는 하나도 없다. 정면 입구 바로 옆에 커피를 마시기 딱 좋을 듯한 테라스, 그리고 테이블과 의자 등 평범하다. 오두막 근처의 나무 밑동은 의자로도 사용했는지 사람의 손때가 제법 묻어있기까지 했다.


어딜 어떻게 봐도 평범하다. 산속에 사는 나무꾼의 집으로만 보인다. 그러나 오두막이 세워진 장소를 생각하면 꽤 묘하게 느껴질 것이다.


오두막이 있는 곳은 제국의 최남단에서 마차로 6달이 걸리는―― 인간 영토의 끝에서 끝보다도 먼 곳이다. 이곳까지 오려면 쉬는 시간도 아끼는 강행군을 해야지만 겨우 도착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건 길이 나 있을 때를 가정한 것이다. 실제로는 길 같은 건 없어, 배 이상의 소요 시간이 걸리리라. 도중 야생 동물이나 몬스터와 조우할 걸 예상한다면 시간은 더욱 지체돼, 아마 연 단위의 대장정이 되리라 추정된다. 도착했을 땐 만신창이일 거다.


그런 먼 곳에 세워진 것이다. 절대 평범하지 않다. 혹, 인간이 아닌, 다른 인종이 세웠을 가능성이 있긴 했다. 이 의견에 동의하듯 오두막은 잘 관리가 되어 있었다. 어디 하나 헐거나 부식된 데가 없었다.


오두막은 나무로 만들어졌기에, 관리에 조금 소홀해지면 자칫 폐허로 변하기 십상이다. 관리를 하는 게 분명하다. 주위에도 사람의 손길이 명명백백 느껴졌는데, 발목 정도 오는 높이로 잡초가 잘 다듬어져 있었다.


‘그게 좀 이상해.’


리아는 고개를 꼬았다.


잡초란 것은 금방 자란다. 그걸 뜯고 먹는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한 쑥쑥 큰다. 사람도 없는 이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밀림이 형성되어 있는 게 정상일 것이다. 절대 이처럼 자라진 않았을 터.


‘근데 딱히 자른 흔적이······ 없지? 그리고 웬 호수?’


가지런히 자란 초원 옆, 오두막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제법 넓은 반원형의 호수가 있었다. ――원래 있었던 양. 마치 호수가 있기에 오두막을 지은 듯하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다. 순서가 완전히 반대다. 호수는 원래 없었고, 먼저 오두막이 지어졌다.


적어도 리아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그렇기에 오두막이 깨끗한 건 이해할 수 있었다. 제작단계에서부터 에르가 마법으로 헐리지 않게 해놨으니까. 그러나 호수는 아니다.


저건 진짜로 영문을 모르는 일이었다. 좋게 말해봐야 휑하달까, 풀의 색이 적었다. 나쁘게 말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표현해야 할 거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아무것도 없었다. 그뿐이랴, 오두막 주변은 거의 반쯤은 초토화된 대지였었다. 결코 지금처럼 생활하기에 최적화된 곳은 아니었다.



“이곳은 어디여요?”


파란 [발판]을 땅으로 내리고, 루비아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리아는 물고기가 많이 돌아다닐 것만 같이 맑은 호수와 반질반질한 오두막, 정원처럼 짧게 잘 다듬어진 주변을 순서대로 차분히 훑어봤다.



“여긴 제가 예전에―― 한 2년 반쯤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에요.”


기억 속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그리움이 밀려왔다. 나온 목소리도 추억을 상기한 자 특유의 기색이 담겨 있었다. 이에 궁금해졌는지, 뒤이어 발판에서 내려온 베르그들이 흥미롭다는 듯 다가왔다.


다만 왜인지, 유일하게 라프리트만은 어안이벙벙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기 바빴다. 물론 기품은 유지하는 터라 크게 허둥대는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리아는 의아스러웠지만 일단 시선을 거두고 이어 말했다.



“정확한 위치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얼추 제국에서 남쪽으로 쭉 내려오면 된다는 것만 기억해요.”

“제가 들었었던 리아의 고향과는 상당히 방향이 다르군요. ······한눈에 보기에도 마을은 아닌 듯싶고.”

“아, 네. 여긴 별장 같은 곳인데, 사실대로 말하자면 훈련장으로 썼어요. 저는 여기서 5년 정도 머물면서 훈련에 집중했죠.”


또 하나의 이유인 망상―― 혹시 모를 위협을 피해 왔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당시의 생각은 과하지만 옳았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남들에게 들려주기엔 아무래도 주저됐다.


‘응. 내가 무사히 지낼 수 있는 것도, 다 이날의 일 덕분일 수도 있고.’


솔직히 지금만치 강하지 않았더라면 베르다드에서 발생했던 여러 일들을 원만히 넘어갈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잘못했으면 처음 아서와 얽히는 순간부터 힘들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들을 떠올려보면 역시나 이날의 행동은 옳았다는 기분이다.


더군다나 리카드나 델리안, 세스 등―― 다른 시간대의 기억을 떠올린 사람들을 보면, 이스피리아 라는 인간은 꽤 여러모로 고생한 듯하다. 어떻게 된 게 모두 하나 같이 분위기가 우중충하기에 이러한 생각에 더욱 확신을 심어준다.


‘특히 가베인 씨가 좀 그렇지······ 그 감정은 분명······’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리아는 제법 진지한 분위기를 띠었다.


바로 옆에 있어 이를 느꼈을 것이 분명하나, 루비아는 언급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흐음. 5년이라······. 그때가 8살쯤이었나요?”

“어······ 8살이 맞을 거예요. 생일을 보내고 출발했고, 가을쯤인가 마을로 돌아갔으니까······ 아마 맞을 거예요.”


정확한 연도는 잘 기억나지 않아서 모르겠다. 당시의 기억력은 지금만치 좋지 않아서――유독 기억력이 떨어진다거나 한 건 딱히 아니다. 평범했다. 지금이 너무 좋아졌을 뿐.―― 1년 정도의 오차가 있을 수도 있었다.



“그 어린 나이에 5년을?!”


루비아와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던 레스가 놀랐는지 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들도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상당히 놀랐나 보다. 로즈는 눈을 크게 뜨고는 입가를 가리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의 수련은, 다른 곳에 한눈팔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확실히 도움이 되겠지만······”


흘리듯 중얼거린 레스의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곁에 있던 그의 단짝이자 친구인 헤라드에게는 잘 들렸는지, 원래 대화하려던 양 자연스럽게 이어받았다.



“막상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일 거야. 8살이었다면 말할 것도 없어.”

“그래. 평범한 아이였다면 울면서 돌아가겠다고 떼썼겠지. 자발적으로 집을 나오는 일은 단연코 없겠고.”

“어린 시절부터 혼자 사는 경우의 태반은 자발적인 경우가 아니니. 사는 환경과 주변 상황에 억지로 떠밀렸을 뿐이지.”

“과연······ 어째서 리아가 그토록이나 강해질 수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 각오가 달라.”

“응. 우리도 어렸을 때부터 갖은 교육을 배우긴 하지만 이처럼 본격적이진 않으니까. 자발적이지도 않았고. 시키니까 하는 느낌? 애초에 아이를 이런 곳에 보낸다면 여러 군데에서 말이 나올걸? 1~2년이면 모를까, 트집 잡기 좋아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꼬투리를 잡을 거야.”

“음. 그건 좀 곤란하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내 아이에게 해보려고 했는데.”


되려 그게 좀 아니지 않을까? 무슨 괴롭힘도 아니고.


속으로 딴지를 건 리아의 이 의견에 동의하는지, 헤라드도 조금 질린 눈을 했다. 그 얼굴엔 평소와는 다르게 제법 감정이 맺혀 있었다. 평소처럼 무감정으로 연기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레스의 저 발언은 어이가 없는 거겠지.


아니. 잘 생각해보면 레스를 대할 때만큼은 매번 저렇게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이래저래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가 뭔 잘못이 있다고. 그리고 아까 말했다시피, 이건 본인의 의지가 중요한 거야. 레스, 만약 네가 갑자기 8살에 이런 곳에 떨어졌다고 쳐봐. 어떨 거 같아? 수련을 하겠어?”

“······아니. 먹고살 것부터 걱정하겠지.”

“그러면 다행이지. 막막해서 울지나 않으면.”

“으음. 확실히······. 강제로 끌려오면 수련은커녕 시간만 날리겠네.”

“――저기.”


듣다 참지 못한 리아는 끼어들었다.


설마 들렸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나, “응?” 소리를 내며 쳐다본 둘은 화들짝 놀랬다. 특히 먼저 이야기를 꺼낸 레스는 못된 일을 획책하다 들킨 사람 같이, 그게 아니라며 서둘러 변명을 늘어놨다.


리아는 도리도리 손사래를 쳤다.



“아뇨, 별건 아니고 조금 정정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응? 정정?”


레스와 헤라드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하지만 답이 나올 리는 없었고, 이내 둘은 리아에게 시선을 옮겼다.



“밥이요.”

“밥?”


레스를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갸웃했다. 루비아만은 바로 진상을 파악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네. 저는 에르가 가사 전반을 도맡아줘서 식사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어요. 덕분에 훈련에만 오롯이 매진할 수 있었죠. 마력레벨이 오르고 나선 피로감이 잘 안 느껴져서 더욱 훈련에만 몰두했고요.”

“분명······ 반년 내내 한 적도 있었다고······”


이전 그리모르와의 대화에서 나온 이야기였다. 그때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사람도 많았는데, 레스와는 단짝인 헤라드도 전해 듣지 못했나, 드물게 두 눈망울을 크게 뜨며 놀랍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러다 침착해진 헤라드는 확실히 마력레벨이 높아질수록 육체가 강인해진다는 소리를 들었었다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그게 진짜였냐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그럼 생리현상은 어떻게 하셨나요?”


――순수하고 맑은, 한 점의 더러움도 묻지 않은 물음이 리아에게로 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로즈린느로, 마치 영혼조차 깨끗할 순진무구한 눈을 빛내며 얼굴엔 가득 기대감을 품었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다른 의도 따윈 없다. 정말 있는 그대로 묻는 것이었다.


순간 할 말을 잃었었던 리아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말문을 열었다. 다만 있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되, 숨길 부분은 철저하게 숨겼다. 초월자라는 건 절대 알리고 싶지 않았으니.



“마력레벨이 높아지면 피로감만 줄어드는 게 아니에요. 기본적인 생리현상마저도 지극히 희박해지죠. 그러한 욕구조차도 자제된달까? 아, 그렇다고 억지로 참는 게 아니에요. 육체 자체가 그리 변했을 뿐이죠.”

“어? 그렇다면 리아 님의 수련은 마력레벨을 높인 다음에 실시한 건가요?”


어디에나 있는 어린아이처럼 보이지만 과연 대국의 황손이다. 의외로 예리한 점을 지적한다.


리아는 제법 감탄하며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네. 이곳에 머문 기간 대부분을 마력레벨만 높이는 데에 보냈어요. 대략 4년간이었나······?”

“왜요?”


여전히 순수하게 눈을 빛내는 로즈. 문득 첫 만남이 떠오른다. 그때도 이렇게 거침없이 물었었다.


하지만 당혹스러웠던 리아는 조금 더듬었다.



“왜라는 건······ 어떤 연유로 묻는 것인지?”

“마력레벨만 높인 이유요! 다른 훈련을 하시거나, 병행하셔도 되셨잖아요? 강해지기 위해선 오히려 그편이 나을 거예요. 그런데 굳이 마력레벨을 높이는 데에만 치중하신 건 왜인가요?”


리아는 무심코 감탄했다. 로즈의 물음은 바로 어제 루시아스에게도 들었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설마 신이 물었던 것을 어린아이에게 똑같이 들을 거라고 예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루시아스와 만난 그날의 모든 것을――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수십 번을 복기했다. 하나라도 무언가 정보를 얻기 위해. 반성회도 가져, 이때 이렇게 할 걸, 저 땐 이렇게 대답할 걸 등등 여러 고심도 했다.


성과는 있어, 다음에 만났을 땐 조금은 누그러진 행동을 보이진 않을까 한다. 이러나저러나 시어머니인데 못난 행동을 계속 보일 순 없잖은가.


여하튼 정작 정보를 건져내진 못하였으나, 이때의 반성회를 토대로 대답 자체는 막힘없이 나왔다.



“육체가 강인해지기 위한 첫걸음은 마력량이에요. 아까도 말했지만, 육체가 강해지기 위해선 마력은 꼭 필요하죠. 반대로, 마력이 없으면―― 특히 극도로 적으면 숨을 쉬는 것조차도 꽤 힘이 들어요.”

“――아. 그러고 보니, 리아는 옛날에 몸이 약했었다고 했었지요. 그게 마력량의 문제였나요?”


기억력이 좋은 루비아답게 몇 개월 전 정자에서의 대화를 잊지 않고 언급했다.



“맞아요. 유년 시절의 고생 때문에 저는 남들보다도 마력의 중요성을 크게 절감했죠. 실제로도 여러분들이 생각하시는 것보다도 마력이란 중요한 요소에요. 걷거나 뛰거나, 숨을 쉬거나, 마시거나 할 때도 미세하지만 마력이 소모되죠. 그래서 최우선으로 마력레벨의 증진만을 노린 거예요.”

“그럴 수가······”


로즈의 얼굴이 흐려진다.


어린아이의 미소는 모두의 재산이다. 어른은 이것을 지킬 의무가 있기에 리아는 황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아. 일상에서는 여러분들이 걱정할 수준의 마력이 필요하진 않으니 전혀 신경 쓰시지 않아도 돼요.”

“달리 말하면, 리아는 남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생각조차 하지 않을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로군.”

“그렇게나 마력이 적으셨다니······”


염려스럽다는 듯이 말한 레스와 헤라드. 그제야 리아는 자신이 로즈의 말을 잘못 파악했음을 깨닫게 됐다.


더 놀라운 사실은 페리다. 바로 옆에서 《멍청이》라고 외치는 게 아닌가. 이 뜻은 페리는 지금의 흐름을 무리 없이 따라갔다는 소리이다.


충격적이다. 한낱 고양이보다도 못하다니······.


자존심은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자괴감에 털썩 쓰러질 것만 같다.


그러나 진짜 쓰러지기라도 하면 걱정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거기에 고양이에게 졌다는 걸 인정하는 꼬락서니가 되기에 찔끔 나오려는 눈물을 꾹 참아냈다.



“지, 지금은 완전 생생해요.”

“하긴, 시련도 넘어섰으니. 이젠 마력이 부족할 일은 거의 없겠네.”

“다, 다행이에요, 리아 님. ······아니다. 당연한 건가? 리아 님은 루시아스 님께―― 앗. 이건 비밀이지 참. 헤헤. 아무것도 아녜요.”


로즈는 어색하게 웃으며 무마하려고 했다.


하지만······


휙휙.


빠르게 눈동자만을 굴려 모두를 살펴보니······ 확실하다.


귀족이란 자고로 눈치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라는 게 정석. 그런데 이곳에 있는 사람은 전원이 대귀족 내지는 왕족, 일국의 탑을 달릴 고위층뿐이다. 아이다운 귀여운 행동에 속아 넘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듣지 못했다는 양 슬그머니 눈길을 돌린다.


‘숨길 거라면 좀 더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다들 눈치는 좋지만 음습한 귀족의 관록은 부족한 모양이다.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그만큼 순수하다는 것이니.


다만 한편으로는 치열한 귀족 사회에서 잘 지낼지, 조금은······ 걱정도 된다. 굳이 저 혼자 여유만만인 루비아를 본받을 필요는 없겠지만, 적당히 처신할 수 있는 몸가짐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뭐, 다들 어련히 잘하시겠지. 나처럼 평민이 아니라 진짜 귀족들이니. 그보다는······ 역시 루시아스 님께 끌려간 소문은 파다하게 퍼졌구나. 어쩌면 진짜로 황제 씨가 입막음을 지시했을지도. 근데 뭣 때문인지는 짐작이 안 가네.’


도대체 칼윈은 무엇을 노리는 걸까. 단순히 호의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꿍꿍이랄까, 황제의 첫인상에서 느끼기로는 반드시 뭔가가 있을 것이란 예감만이 생겨난다.


그러나 그 이상 떠오르는 건 없다. 요즘은 생각할 거리가 많아져 쉽게 정리가 되지 않는다.


‘베르다드로 돌아가면 한 번 차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겠어. ······루시아스 님의 물음에 대해서도. 어린아이가 똑같이 물을 정도면 내 행동은 평범한 게 아니었겠지. 왜 그렇게 생각하고 결정했는지 차근차근 짚어봐야겠어.’


가장 쉽게 정리해줄 아이의 도움은······ 이번에 한에서는 기대하지 않는다. 왠지 꺼리는 게 느껴지니. 강제로 시킬 순 없는 것이다. 거기다 이건 스스로 생각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리아가 생각하는 동안, 잠시 생긴 침묵을 깨는 레스의 어색한 목소리가 들린다.



“어······음. 나도 앞으로의 수련 방향은 그쪽으로 잡아야 하나?”

“확실히 좋은 생각 같아. 뛰어난 자의 발자취를 그대로 답습하는 건 흔한 일이니.”

“그렇지?”

“――외람되오나, 한 말씀 드려도 되겠나이까?”


말을 꺼낸 이는 델리안으로, 여태 조용히 사용인 역할을 다하던 그녀가 끼어들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레스와 헤라드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어쩌면 가볍게 넘어가려 했는데 끼어들어 놀란 것일지도.



“어, 응. 괜찮아.”


레스의 허락이 떨어지자 델리안은 조신하게 묵례로 감사를 표했다. 워낙 이쁜 사람이다 보니 이것만으로도 그림이 된다. 비단 리아 혼자만의 의견은 아니었는지, 베르그는 한순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실례이오나 그 방식은 아가씨 개인에게 맞춰진 것입니다. 다른 분들―― 프라바이드 님이나, 샤라즈 님께서 따라 하신다 한들, 큰 성과는 얻지 못하실 겁니다.”

“왜인지 물어도 될까요? 델리안 씨.”


헤라드가 차분하게 물었다.



“물론 꾸준히 하다 보면 마력레벨은 오를 겁니다. 하지만 효율이 낮습니다. 육체가 마력에 적응하는 시간이 있으므로. 이건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결코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과 같은 것입니다.”

“허나, 그 말은 이스피리아 공도······”

“예. 아가씨께서도 이 법칙은 피해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4년이란 긴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아!”


조금의 시차를 두고 헤라드가 이해의 탄성을 내질렀다. 더불어 같이 듣고 있던 라프리트도.


헤라드는 주위를 둘러봤다. 지적인 생김새와 더불어 진한 갈색의 머리카락이 살살 흔들리는 모습은 과연 잘생겼다. 왠지 좋은 향기와 함께 배경이 꽃으로 도배가 될 것만 같다.


아니다. 배경까지는 모르겠지만, 진짜로 무언가 기분 좋은 향기가 바람에 실려 풍겨온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는 이곳이 훈련장으로 채택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계속 집중하시기엔 최고의 환경이지요.”

“뭣?!”


뒤늦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레스와 유즈라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4년 내내 마력을 모았다니. 그런 게 가능하다고?”


델리안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에 효율이 나쁘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애당초 4년 내내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아니, 가능해야 그 나이에 시련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인가?”


한 박자 멈춘 델리안은 이어서 말했다.



“······거기다 두 분께서는 공작 가의 차기 가주이신 몸. 여타 공무로 인해 그럴 시간조차 나시지 않으리라 사료됩니다. ――또한, 조금 착각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착각?”

“아가씨께서 설명하신 마력에 대해서입니다. 평소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의 마력량이라 함은, 상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마력이 없어야만 발현되는 증상입니다. 간혹 이야기에 실리는 무마력―― 마력이 없다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더 적은 수준으로, 음. 생활마법을 쓰는 데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보시면 이해하시기 편할 겁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그, 그렇게나 위험한 상태였다니······. 아니, 그전에 그리도 상태가 심각했다면······”

“짐작하신 대로. 아가씨는 매 순간순간이 생사를 오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것과 같은 유아기 시절을 보내셨습니다.”


짧게 자른 아이보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고개를 빠르게 돌린 레스가 리아를 근심이 가득한 눈으로 보았다.


생활마법에 필요한 마력량을 생각해보면 저러한 반응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생활마법에 드는 마력은 무지하게 적다. 좁쌀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그리고······ 헤라드와는 또 다른 멋이지만 찡그린 표정마저 역시 잘 생겼다.


덤으로 이것만은 좀 놀랐는지, 펼쳐 든 부채 사이로 루비아가 보랏빛 눈동자를 향해왔는데―― 새삼 그녀 또한 성격을 제외한다면 정말 엄청 예쁜 외모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순간 찌릿 째려보는 눈빛은······ 못 본 걸로 치부했다.



“하지만 마냥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마력량이 적었던 덕분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가씨는 마력에 무척이나 민감하신 것도 모자라, 마력조작에 무척이나 탁월한 재능을 지니셨습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바탕이 있었기에 작금의 수련도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흐음. 대강은 이해했지만······ 역시 4년이란 긴 시간 내내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하다고밖에 표현이 안 되는군. 따라 할 엄두조차 나질 않아.”

“맞아. 달리 사룡을 무찌를 정도의 힘을 지닌 게 아니라는 것이 확 와닿았어.”

“정말로······. 나름 노력했다고 여겼는데 그건 기고만장한 생각이었어.”


진짜 그렇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사람이길래 4년이나 계속 집중할 수 있는 정신력을 지녔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 사람은 신인류인가 뭔가 하는, 사람을 뛰어넘은 새로운 인종이 아닐까. 누군지 알게 된다면 반드시 사인을 받아둘 것이다.


‘그나저나 주위가 워낙 미인들뿐이라 뒤늦게 알았는데, 유즈라 씨도 꽤 미인이지 않아? 포니테일도 잘 어울리고. 나도 내일 해볼까?’


풀어헤친 생머리를 에르가 좋아해서 여태 다른 머리 스타일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맨날 똑같은 것을 보면 질리는 법. 에르가 매일 정성스레 다듬어주는 머리는 언제나 매끈하고 훌륭하지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다만 너무 큰 변화는 에르가 싫어할지도 모르니 그 부분은 반응을 예민하게 파악해야 하리라.


‘스스로 묶을 자신은 없으니, 델리안에게 부탁해야 하나?’


델리안은 아이들을 많이 돌본 거 같으니 능숙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쁜 선택지는 아니니라. 여차하면 라프리트나 안네에게 부탁하는 수도 있으니 그때 가서 결정해도 된다.



“어······ 그럼, 생리현상은 어떻게 해결하셨나요? 4년 동안이나 집중하셨는데.”


도중부터 이해가 안 되는지 멍한 얼굴로 두리번거릴 뿐이었던 로즈가 물었다. 이 모습은 당연히 사랑스럽고 깜찍했다. 생리현상에 집착하는 건 아무래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 아무래도 좋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루비아로, 그녀는 잔뜩 인상을 찡그린 채로――부채로 가려져 있기에 그저 예상일 뿐이다. 그러나 미간이 모여있는 것으로 봐서 그럴 확률은 매우 높다.―― 로즈의 말을 끊듯이 이야기하였다.



“――리아,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여기 온 목적부터 처리하시어요. 굳이 알리지 않더라도 아시겠지만, 이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닌, 전인미답의 지역. 현대에 이르러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위험한 장소임을 인지해주세요.”


루비아가 알아들었냐는 눈빛으로 보았다. 리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를.


저 반응으로 보건대, 외모를 평가하며 딴짓을 하던 건 진작에 들통났다. 그저 말로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아까 째려봤던 건 이것 때문이었나 보다.


더 이상 지체되면 뼈도 못 추린다. 싸늘하게 식어있는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한 리아는 몸을 떨고는 잽싸게 행동을 개시했다.


리아는 곧장 뒤돌아 비젠탈에게로 향했다.



“비, 비젠탈 씨, 용건이 있다고 하셨죠? 저희도 이제 용무를 볼 거니까 다녀오세요.”

《아니. 굳이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다. 내가 용건이 있던 상대도 이곳에 있으니 말이다.》

“네?”


되묻는 말에 비젠탈은 대답 대신 시선을 옮겼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은 오두막을 향해 있었다.



“어라? 저기에 계신다고요? 그런 우연이 있을 리가······ 저긴 빈집일 텐데. 응······? ――앗! 에르, 델리안! 모두를 보호해 주세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델리안은 한순간에 아이리스의 앞에 나타났다. 마법으로 가속했기에 누구 하나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였다. 베르그들의 호위인 유즈라는 검에 손을 얹고는 멍하니 쳐다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녀보다 반응이 훨씬 빨랐던 레딧츠도 델리안의 움직임을 놓쳐 굵직한 신음을 흘렸다.


에르는 진작에 오두막에 있는 존재를 눈치챘었는지 태평하게 [방어벽]을 쳤다. 행동에 비해 매우 신속하고 정밀했는데, 땅 밑까지 쳐진 투명한 벽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대충 마법을 쓴 것도 아니었다. [방어벽]의 강도는 어마어마하여 정말 어지간해서는 깨기도 어려울 만큼 단단한 것이었다.


역시 에르랄까? 저 정도라면 혹시 모를 사태에도 피해는 없을 것이다.


한시름 던 리아는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여러분들은 잠시 기다려주세요. 설명은 조금 있다가 할게요.”


긴급한 사태임을 알아 루비아와 라프리트는 조심하란 말로 배웅해주었다.


그러나 레스는 그럴 수 없었나 보다.



“아니, 두 분! 그렇게 보내면 어떡합니까?!”


여자 혼자 보낸다는 게 용납이 안 되는지 레스는 처음으로 루비아들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그와 달리 그녀들은 리아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완곡히 돌려 말했지만,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말과 함께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대화가 안 된다고 판단한 레스는 곧장 고개를 돌렸다.



“크윽······. 리아, 나만이라도 함께 갈게!”

“어······ 아뇨. 말씀은 고마운데, 저 혼자 가는 편이 대처하기가 쉬워요.”

“그건 그럴지 모르지만······”


사양하는 게 아니다. 정말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것이다. 레스 본인조차도 긍정할 정도로. 그러나 물러설 수 없는지 말을 끌었는데, 보다 못한 헤라드가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레스, 여기선 얌전히 기다리자. 응? 우리가 가도 방해만 될 거야. 이스피리아 공을 곤란하게 만들 셈은 아니지?”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 묻어나는 헤라드의 말에 고민하던 레스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



“리아, 위험해지면 꼭 불러. 알겠지?”

“으음. 네.”


알겠다고는 했으나, 이는 이야기가 길어질까 봐서였다. 만약 위급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레스를 부를 마음은 전혀 없다.


‘일단 너무 위험하니.’


지금의 레스에게는 너무 버겁다. 그 정도로 오두막에 있는 존재는 매우 강력했다. 달리 비견되는 사람은 델리안밖에 떠오르지 않을 만큼 강한 존재다.


‘근데 왜 우리 오두막에 있는 거지? 그전에 안엔 어떻게 들어갔어?’


물론 문 같은 건 잠가 놓지 않았다. 당시에는 인간의 생활권이 그리 좁은지 몰라 여행 중인 사람들이 머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기왕 잘 만들어 놓은 오두막이니 쓰게 냅두면 좋지 않은가. 그러니 안에 누군가가 있더라도, 혹여 동물들이 지내는 건 아닐까 즐거운 상상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 존재가 오두막 안에 있다는 상상만큼은―― 아니, 이곳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혼란스러움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리아는 오두막으로 향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문 앞에 선 리아는 마력을 감지해봤다.


역시 잘못 느낀 건 아니었다. 안에는 지극히도 잘 절제된 2단계의 마력이―― 잘 알고 있는 구면의 마력이 느껴진다.


염려스러움과 함께 괜스레 반가움을 느끼며 리아는 커다란 창문 옆에 있는 정문을 열었다.


눈에 비치는 정경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에르가 오두막이 썩게 내버려 둘 순 없다며 부지 통째로 마법으로 보존했기에 손상된 곳이 하나도 없었다.


남쪽에서 떠서 북쪽으로 지는 빛을――원리는 당연히 모른다. 태양이 없는 곳이니 대충 마법이 관련되지 않았을까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여명과 황혼을 즐기기 위해 남과 북에 하나씩 나 있는 큼지막한 쌍여닫이 창문. 투명한 유리창으로 되어 있는 그곳에서 원룸형의 제법 넓은 실내 전체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서쪽에는 난방엔 그다지 실용성이 없으나 로망 때문에 설치한 벽난로가, 거기서 오른쪽 벽 끝 쪽에는 없으면 섭섭할 것만 같은 6단 높이의 책장이 있었다. 이것들은 너무나 관리가 잘 되어 먼지 하나 쌓여있지 않았다. 벽난로도 최근엔 사용한 흔적도 없어 재가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벽난로의 왼쪽에는 부엌으로, 마도구 레인지나 조리대 등이 있었다. 마도구 레인지는 베르다드에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없었는데, 마찬가지로 사용의 흔적이 없다. 실내 한가운데에 놓인 원형의 테이블도 그러했다. 4개의 의자가 흐트러짐 없이 떠날 때 그대로였다.


전체적으로 짐 하나 남겨놓지 않은 실내는 휑하였다. 그러나 리아가 추억에 잠겨 들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러한 회상은 곧장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오른쪽―― 실내의 동쪽에는 침구를 놓을 자리로, 바닥의 찬기가 올라오지 않게 카펫을 깔고, 그 위에 나무로 만든 단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거기에 있었다. 밖에서 느껴졌던 마력의 주인이. 나무 단 위에 똬리를 틀듯 누워있었다.


리아는 고개만 들어 쳐다보는 그 존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에?! 자, 작아?!!”


기억 속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다. 마력을 기억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정말 모든 게 달랐다.



‘어, 어쩐지 들어와 있더라니. 작아질 수도 있었나 보네.’


에르나 아이리스는 아예 다른 종으로 변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의외로 작아질 수 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뭘 어떻게 해도 안 되지만―― 응?!”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리아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는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생각보다도 먼저 몸이 움직였다. 사라지듯 순식간에 접근한 리아는 단숨에 나무 단에 누워있던 존재―― 강아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귀여워!!”

《갑자기 찾아와서는 이게 무슨 짓이냐?!》


상대방이 항의 하지만 눈이 돌아간 리아의 귀엔 그딴 건 들어오지 않았다.



“커, 커여워! 악마도 한 수 접을 얼굴이 어찌 이렇게 커여워질 수가! 이게 인체의 신비―― 아니, 마법인가?! 냄새도 좋아! 동물에게 날 냄새가 아니잖아!”


습하~ 스읍하~


리아는 강아지의 배에 얼굴을 묻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것도 모자라 얼굴을 좌우로 마구 비비기 시작했다. 위아래로 비기기도 하였는데, 털이라도 핥을 기세였다.


마치 안 좋은 약물에 취하기라도 한 듯한 리아의 모습에 경직한 강아지는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이런 반응을 리아도 느꼈으나 멈출 수는 없었다.


그만큼 강아지는 귀여웠다. 이전과 똑같이 전체적으로 하얀색에 끝 쪽에만 하늘색인 털은 체모가 가늘어 하늘거렸는데, 부드러운 건 둘째치고, 덩치가 50cm 정도로 대폭 작아져서인지 신비로운 느낌이 들게 하였다. 알록달록한 눈동자는 똘망똘망하여, 오금이 저릴 것만 같았던 이전의 눈매 따윈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귀. 여기야말로 챠밍 포인트였다. 전에는 얼굴 뒤로 날렵하게 날이 선 귀였으나, 지금은 크고 땅에 닿을 정도로 축 처져 군밤 모자를 쓴 듯하다. 이 점이 참을 수 없을 만치 가슴을 파고든다. 살랑거리는 짧은 꼬리 또한 매력이 넘친다.


하지만 가장 치사한 건 냄새다. 분명 전에도 딱히 악취가 났다거나 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향기가 나거나 하진 않았었다. 딱 이거다, 단정 짓기 어려운 이 향기는 꽃밭에 둘러싸인 듯한 환상을 자아내어 언제까지고 코를 박고 싶게 만든다.


그렇다.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다. 모든 잘못은 이 엄청난 페로몬을 뿌려대는 강아지에게 있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합리화를 한 리아는 더욱 맹렬히 숨을 들이켰다.



“리아?! 무슨 일이야?! 크윽. 언제 이런 방벽을······”


뭔가를 두들기는 소리와 함께 분한 듯한 레스의 목소리가 들린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리아는 겨우 파묻고 있던 얼굴을 떼어냈다.


넋이 나가 있던 강아지도 혼이 돌아온 듯하였는데, 즉시 벗어나려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이미 붙잡은 상태다. 외형과는 달리 리아의 육체적인 힘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치 막강하다. 몸부림치는 강아지의 저항이 무색하게, 리아는 놓치지 않겠다는 양, 가슴 사이에 끼워 넣듯 두 팔로 강아지를 안았다.


그것으로 상황은 종료됐다. 강아지가 버둥거림에도 빠져나갈 틈은 조금도 생기지 않았다.



《놔라! 무식하게 힘만 센 녀석아!》

“모두에게 소개할 거니까, 잠시만 가만히 있어 봐요. 첫인상이 중요한 거 몰라요? 원래는 무서운 얼굴이니까 이때 점수를 따야 한다고요.”

《내가 인간에게 점수를 따서 어디에다가 쓴다는 거냐?》

“에이~ 그러지 말고요.”

《맹한 건 좀 나아졌나 했더니······. 본성이 변하는 건 아닌가 보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니 포기했는지 강아지는 몸부림치던 걸 멈추고 힘을 뺐다.


밖으로 나가며 리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사실 강아지는 빠져나오려고만 했으면 할 수 있었다. 그야 이 강아지는······ ‘초월자’에 도달했으니 말이다.


그렇다. 2단계 마력을 쌓기 시작하는 초월자인 것이다. 마력의 양으로 따져보면 압도적이다. 비젠탈보다도 한참 마력이 많은 델리안을 뛰어넘는다. 마력레벨도 개방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정확히 측정조차 안 된다. 대충 느껴지기로는 델리안과 비슷해 보이지만.


리아에게 상처를 입히기엔 충분하고, 진짜 싫었으면 이빨에 마력을 담아 안고 있는 팔을 물었으면 됐다. 그러면 제아무리 리아라 하더라도 놓을 수밖에는 없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건, 마냥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였다.


‘이래저래 오래 산 듯하니 부끄러웠겠지.’


기다리고 있던 모두의 앞에 리아가 도착하자 에르는 바로 [방어벽]을 해제했다. 그 탓에 [방어벽]에 붙어있던 레스는 앞으로 튀어나오게 됐다. 순간 균형을 잃긴 했지만, 열심히 몸을 단련한 레스답게 금방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 사라졌다. ······아, 그게 아니지. 리아, 괜찮아?”


진심으로 걱정했는지 레스는 리아의 어깨를 붙잡고는 다친 곳은 없는지 살펴봤다. 안고 있는 강아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모양이다.


‘만화에서나 가능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진 않나 보네.’


피식 웃은 리아는 슬며시 강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뭔가 싶었던 레스는 고개를 내렸다가 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더니 황급히 어깨에 올린 손을 뗐다.



“미, 미안! 딴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

“알고 있어요, 레스 씨.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어, 응.”


본인도 너무 호들갑을 떨었다고 여겼나, 레스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풋풋한 그의 반응에 리아는 속으로 흐뭇해했다.


‘정말로 그래. 애당초 허튼 마음을 품고 있었더라면 에르가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에르는 쿨 해 보이는 모습과 달리 ‘의외’로 질투가 심하다. 용왕인지라 감각도 예민하여 딴마음을 먹고 있었더라면 즉각 알아차려, 손이 닿기도 전에 막아냈으리라.


물론 그게 싫다는 건 아니다. 아내를 아낀다는 말인데 싫을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상상하는 것만으로 살짝 몸서리가 쳐질 것만 같다.



“――핫! 그게 아니지 참.”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리아는 헛기침했다. 황당한 눈매로 쳐다보는 레스와 싸늘하게 식은 눈매로 쳐다보는 루비아와 라프리트의 시선은 애써 무시하였다.



“코홈. 그럼 여러분께 소개하는데, 이 강아지는 친구 겸, 제 수련에 어울려준 동료 같은 분이에요.”

《어울려준 적 없다. 네 녀석이 멋대로 와서 죄다 부숴대는 통에 막은 것뿐이지.》

“······.”


이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시, 심하긴 했지.’


조금 멍했던 그 당시는 어떻게든 강해지겠다는 일념뿐이었던지라 주위에는 눈을 둘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급격히 늘어난 마력레벨로 인해 강대해진 몸이 제어가 안 돼, 인간 굴삭기가 되어 주변을 마구 부수는 데에도 눈길을 주지 못했었다.


그뿐이라면 그래도 괜찮았겠으나, 날기 위해 산에 처박히거나, 검으로 산을 베어보겠다고 하여 산의 절반을 무너뜨리는 등 제법 사고를 쳤었다. 물론 화풀이는 아니었다. 진짜로······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이 강아지는 참았었다. 그러다 오른팔이 날아갔던 그 마력 폭발의 사건이 인내심의 끈을 끊어버렸다. 문제를 벌이지 않을까 근처에서 감시하던 이 강아지가 그 폭발에 휘말렸던 거다.


더는 참을 수 없게 된 강아지는 에르가 쳐놓은 결계를 뚫고 들어와 따졌다.


――남이 사는 곳을 그만 망가뜨리라고.


자신들은 이방인. 원주민의 이 요구를 무시할 방도 따윈 없다. 되려 지금까지 참아준 것만으로 감사히 여겨야 할 판국이다.


그만큼 둘러본 주위는 처참했다. 땅은 깊게 파헤쳐져 대규모 전투라도 벌어진 듯했고, 마력의 폭발이 있었던 곳은 거대한 크레이터와 함께 고온에 의해 암석지대로 변하였다. 온통 초토화가 된 이곳에 녹색의 빛은 완전 자취를 감췄다. 풀 한 포기도 남지 않은 대지는 매우 황량하게 변해있었다.


처음 왔을 때의 모습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그 모습에 리아는 크게 반성했다. 때마침 팔의 재활도 해야 했기에 앞으로는 자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자고로 자연이란 아끼고 가꾸는 것. 파괴해야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훈련은 계속해야만 했다. 그래서 찾아온 이 강아지에게 대련 상대를 부탁했다. 에르라는 확실한 대련 상대가 있긴 했으나, 그는 아내에게 약하다. 은근슬쩍 힘을 빼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에 비해 강아지는 약간의 악감정이 남아있을 터였다. 에르보단 좀 더 본심을 다하리라. 더군다나 이 강아지는 강했다. 생긴 것도 그랬지만, 무려 에르의 결계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힘이 있으니 말이다.


이 생각은 정확했다. 제법 봐주는 느낌이 강했지만, 치고받고 하는 사이에 제법 육체의 제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힘 조절 훈련도 많이 봐줘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됐다.



“······그렇구나. 진작에 따지러 올 수 있었는데, 에르의 눈치를 보느라 그러지 않았던 거구나.”


그렇게나 강했던 거다. 에르가 없었다면 주변이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찾아오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 에르의 기운을 느꼈기에 계속 주저했겠지.


그때 에르는 제법 대규모 마법을 많이 썼으니 마력을 느낄 새는 많았을 거다. 평범한 자라면 모르고 넘어갔겠으나, 이 강아지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딱히 헛다리 짚은 건 아니었는지, 강아지는 고개를 팩 돌렸으나 시선은 저도 모르게 에르를 향해 있었다.



“후후. 고마워요.”


여러 마음을 담아 리아는 작게 감사함을 전했다.



“그, 그 강아지가 리아, 너의 수련을 도왔다고?”


묻는 레스의 목소리에는 불신의 기운이 강하게 풍겨왔다.


그러나 한 점 거짓 없는 사실이다. 리아는 고개를 똑바로 끄덕였다.



“네. 이래 봬도 무지하게 강해요.”

“처음 보는 종이기는 한데······ 아니, 강아지가 맞긴 한 거야?”

“그럼요. 본 모습은 조금 무서운데 분명 강아지에요.”

“그, 그렇군.”


레스는 납득하진 못한 듯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잠깐만. 변할 수 있다고? ······리아, 그 강아지의 이름은 뭐죠?”


루비아였다. 그녀는 자못 신중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부채 너머에서 가늘게 뜨고 있는 눈도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이 모습에 레딧츠는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루비아를 잘 알고 있는 라프리트도 슬쩍 긴장하는 게 보였다.


이러한 반응들에 영문을 몰라 고개를 기울이던 리아는 일단 묻는 말에 대답했다.



“이 강아지의 이름은――”


멈칫.


리아는 말하던 입 모양 그대로 멈췄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더라?’


그랬다. 리아는 강아지의 이름을 몰랐다. 언제나 ‘강아지 씨’, 혹은 ‘멍멍이 씨’라 불렀던 터라 이름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자동화]로 인해 머리가 바빠 멍해졌기에 생긴 폐해다. 생각 자체가 짧아졌다 보니 강아지 씨라고 부르는 것에 아무 의문도 느끼지 못했고, 이름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리아는 굳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친구, 동료라 해놓고는 이름도 모르는 것이다. 이제 와서 묻기에는 제아무리 리아라도 주저될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던 때였다. 의외의 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내려왔다.



《오랜만이다, 환수―― 아니마무스여.》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비젠탈로, 그가 앞으로 걸어와 살며시 머리를 숙이며 말하였다. 말만큼은 딱딱했으나 경의를 표한다는 게 잘 느껴진다. 머리를 숙인 것도 그러한 뜻이리라.


갑자기 앞으로 나온 비젠탈에게 모두가 놀라는 사이, 아니마무스라고 불린 강아지와 비젠탈의 대화는 계속됐다.



《그래. 오랜만이다, 비젠탈. 800여 년 만인가? 아직 안 죽었구먼.》

《덕분에.》

《후후. 애송이 주제에 제법 관록이 붙었어. 디안은 어찌 됐나?》

《먼저 신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런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인다 싶더라니. 참으로 아까운 자를 잃었어. 멍청한 전쟁 때문에.》


잠시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다.



《그나저나 여기까진 어쩐 일이냐? 다시는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여겼거늘.》

《따라왔을 뿐이다.》


아니마무스는 고개를 돌려 리아를 쳐다봤다.



《과연. 너도 마찬가지로군······》

《······.》

《그게 네 선택인가? 앞으로의 고생이 훤하구먼. 이 녀석이랑 어울리는 건 쉽지 않으니 말이야.》

《그렇지만도 않다.》

《호오······ 네가 그리 말할 줄은. 내가 알고 있는 게 전부는 아닌 모양이야. ······뭐, 마음껏 발버둥 치거라. 그편이 디안도 마음이 놓이겠지.》


이것을 끝으로 둘은 대화를 마쳤다.


살짝 눈치를 보던 리아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 이 강아지―― 아니, 이 분의 성함은 아니마무스인데. 어, 그게, 환수라고 하네요――가 아니라, 환수예요. 네. 환수요.”


만능언어를 할 줄 안다는 건 비밀로 하라고 했다. 당장 오늘 루비아에게 주의받았는데 조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않고 조용히 듣기만 한 것이다.


그런 노력은 빛을 보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당연하다. 대배우가 될 자신의 연기는 완벽했으니.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물 흐르는 듯했을 것이다. 어색함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는 거다.


‘음······ 근데 이 분위기는 뭐지?’


앞에 있는 레스를 비롯해 베르그와 유즈라까지도 딱딱한 웃음을 흘린다. 하물며 루비아마저도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혹시 환수라는 게 믿기지 않나? 하긴 이 모습으론 어딜 어떻게 봐도 한낱 강아지에 불과하니.’


옆구리를 붙들려 다리를 대롱대롱하는 모습에선 관록은커녕 그 파편조차 보이지 않는다. 믿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나마 털이 수북해 생식기가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랄까.



《어이. 갑자기 분이니, 성함이니 하는 건 또 무슨 짓이냐?》

“뒤늦게 대단하다는 걸 깨달아서 그러는 게 아니니까 조용히 좀 하세요. 기껏 남이 모르는 척하는데.”

《어······ 그래.》


다른 이들에겐 들리지 않게 속사포로 속삭인 리아는 순진함을 가장해 빙긋 웃어 보였다.



“하아······ 환수를 만났음에도 놀랄 틈이 없을 줄은. 아니, 환수를 강아지라고 지칭하는 건 좀 놀랐지만.”


그리 중얼거린 루비아는 리아에게 다가왔다.



“할 말은 많지만 이곳에 오랫동안 있을 마음은 없어요. 바로 본론부터 해치우도록 하죠. 이의 있나요?”

“어, 없어요.”

“좋아요. 그럼, 리아. 그 환수―― 아니마무스가 오기 전에 말한 맡길 자여요?”

“맞아요.”

“굳이 찾으러 가지 않고 바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심적으로는 제대로 인사를 드리고 부탁드리고 싶으나, 초면인 제가 그러기엔 주제를 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리아. 어서 말씀을 드리세요.”


리아는 느꼈다. 말만큼은 정중하나 루비아의 말엔 잔뜩 가시가 박혀있다고. 잘 보면 미간의 주름이 더욱 깊게 파여 있기도 했다. 즉, 짜증이 났다는 것이다.


더 어영부영하면 폭발할 조짐이 느껴진다.


두려움에 몸을 떤 리아는 황급히 아니마무스를 들고 슈페리얼 자이언트 베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슈페리얼 자이언트 베어는 도착했을 때부터 상황을 알 수 없음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설명하고 달랠 틈은 없다. 리아는 곧장 아니마무스를 들이댔다.



《뭐냐, 이 핏덩이는? 제법 역량을 지닌 듯하다만.》

“강아지 씨―― 아니마무스 씨!”

《둘 중 하나만 해라.》

“그럼······ 아니마무스 씨! 부탁이 있어요.”

《아까도 그런 이야기가 나왔었지. 그런데 네 부탁이라······ 왠지 귀찮을 거 같아서 싫은데?》

“그러지 말고요. 무척 기특한 일이에요.”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일단 들어는 보지.》

“여기 슈페리얼 자이언트 베어 말이에요.”

《그래. 네가 지나치게 가까이 들이대서 털 뭉치만 보이는 녀석이 뭐?》

“아, 미안해요.”


리아는 조심히 아니마무스를 도로 품에 안았다.



“여기 이 아이요. 사정이 있어서 인간들의 나라에 있었는데, 부모를 찾아주려고 하고 있거든요.”

《난 탁아소가 아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마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거기에서 부모를 찾으라고? 그런 게 가당키나 할 거 같냐?》

“쯧쯧.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요. 아까 아니마무스 씨도 말했잖아요? 상당한 역량이 있다고.”

《핏덩이가 이 정도이니 부모는 나름 알려진 마수가 아니겠냐는 거냐?》

“네. 아니마무스 씨는 오랫동안 이 근방에서 지냈다면서요? 아까도 들어보니 800여 년인가 하는 소리도 나왔었고.”

《기껏 해봐야 800년밖에 안 됐다.》

“밖에 라니······ 800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라고요?”

《인간으로 치면 겨우 4세대가 지나갈 뿐이잖냐? 그게 뭐가 길다고 하는 건지 원······》


도대체 얼마나 살았길래 800년이란 시간을 한 달처럼 말하는 건지······. 오래 살았을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상상 이상이다. 시간의 감각 자체가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과연 환수라는 건가?’


아니마무스가 환수인 건 지금 알았지만, 환수에 대해서는 에르에게 들어본 적이 있어 알고 있다.


환수는 환상종이라 하여 현대에는 멸종되거나, 이야기 속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 그대로 살아생전 보기 힘든 종들을 일컫는다.


하지만 이건 오랜 세월 시간이 흘러 의미가 변질하거나 잊힌 것으로, 실제로는 오엘문리아가 형성된 초창기에 존재했던 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대충 용왕과 정령이 관리를 맡기 시작한 이래로 탄생하기 시작한 첫 지성체들이거나, 그보단 조금 뒤늦게 생겨난 종이라고 보면 된다.


다이로스―― 다이탈로스의 종인 스피릿 선도 이 중 하나로, 보다시피 현대에서는 굉장히 보기 드문 특성들이――불타는 것처럼 보이는 깃털이라든가―― 있다고 한다. 에르가 환수에 대해 알려준 것도 이러한 특성들에 혹여 당황할까 봐, 다이탈로스와의 만남 뒤에 알려준 것이었다.


이러한 환수들은 각각의 강함엔 차이가 있으나, 대부분은 현대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했다. 자세한 건 언제나처럼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에까지 살아남은 개체는 강대한 존재들뿐으로, 살아있는 화석이나 마찬가지인 그들은 강대함과 동시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 어마어마한 생물체로 변모하게 됐다. ――다이탈로스는 마력레벨이 낮았으나 정령이니 예외이다. 정령은 본디 반신이라고 하니, 뭔가 술수를 부린 것이라 여겨진다.――


앞선 연유들로 인해 항간에선 환수는 용왕에 버금가는 존재로 두려움의 대상이라고도 한다. 에르가 말하기로는 어림도 없다는 듯하지만.


평가가 모지게도 보이지만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에르는 딱 잘라 약하다고 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비교하면 나약하나, 나름 강하다고 이야기해줬다. 용왕이 인정한 것이다. 아니마무스에게 이 일을 맡기기엔 부족함이 없으리라.


리아는 미소를 띠고 아니마무스를 내려다봤다.



“800년이 순식간이면 문제없겠네요. 혼자 있으면 심심하니 느긋하게 부모 찾기를 하면서 지내면 되겠어요.”

《뭐가 느긋하게야? 귀찮게. 그 시간에 잠이나 자지.》

“모처럼 뿌듯한 일을 하는 거라고요? 잠은 언제든지 잘 수 있는 데다가, 무덤에 들어가면 쭈욱~ 잘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안 하신다니······ 딱하셔라.”

《그렇게 뿌듯한 일이라면 네가 하면 되잖냐?》

“아~ 기왕 맡은 거니 그러고 싶지만, 저 학원에 다니고 있거든요.”

《학원?》

“네. 베르다드라고 하는데, 저기~ 벨루디스 라는 나라에 있어요. 거기서 마법이나 검술 같은 걸 배우고 있어요.”

《검술은 여기서도 깨작거렸으니 그렇다 쳐도, 마법을 배워? 네가? 인간의 마법 따위를?》

“여러모로 보람차요. 접근 방식이 완전 새롭거든요.”

《새롭기야 하겠다만은······ 흠. 모르겠군. 인간이 벌써 그 정도로 발전했나?》


도통 이해가 안 되는지 아니마무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귀엽다······ 자그마한 머리를 움직이는 것 자체가 너무 귀엽다. 이대로 비비고 그대로 데려가고 싶기만 하다. 하지만 진짜로 데려가면 부모를 찾아줄 사람이 없으니 입을 꽉 다물어 참아냈다.



《어이, 쪼인다.》

“앗! 미, 미안해요.”


입에 힘을 준다는 게 무심코 팔에도 힘을 줬다.



“근데 제 이름은 어이가 아니에요. 리아라고요.”

《여태 강아지 씨라고 부른 녀석이 할 소리냐?》

“읏! 그, 그치만 이젠 제대로 아니마무스 씨라고 부르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제대로 리아라고 불러달라고요.”

《마음이 내키면.》

“칫. 쪼잔해.”

《뭐?》

“아, 아뇨. 하해와 같은 넓은 마음을 지니셨다고요. 여태 강아지 씨라고 부른 것도 뭐라 안 하시고.”


리아는 어설프게 웃는 것으로 대충 때우려 했다.


고개를 들어 그 모습을 보던 아니마무스는 잠시 후 한숨을 토해냈다.



《너의 멍청한 짓을 보는 것도 지친다. 알았으니 그만 주접떨어도 돼.》

“주접이라뇨?! 동정심을 부르는―― 응? 어? 알았다고요?”

《그래. 이것도 여흥이다. 심심풀이나 할 겸 찾아보도록 하지. 이 근방이 아니거나 죽었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두서가 달리긴 했으나 부탁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무척이나 기뻤던 리아는 아니마무스를 더욱 끌어안으며 그의――아마도―― 머리에 볼을 비볐다.



“흠. 이야기는 끝났나요?”


뒤에서 지켜보던 루비아가 대화가 끝났음을 알고는 말을 걸었다. 그녀의 곁에는 함께 가기를 말리는 기색인 안네를 대동한 라프리트도 있었다.



“네. 맡아주시기로 했어요.”

“그거 잘됐네요. 덕분에 저희도 한시름 덜 게 됐습니다.”


그리 말한 루비아는 배꼽에 두 손을 모아 아니마무스를 향해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저희 쪽의 사정으로 인한 문제는 아니오나, 같은 인간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는바, 감사를 전하겠습니다. 환수, 아니마무스시여.”

“루비아 씨?”


행동도 그렇지만 루비아치고는 굉장히 정중한 어투다. 하물며 공국의 예법조차도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대했던 건 델리안뿐이어서 리아는 좀 놀랐다.


그리고 무척이나 희귀한 루비아의 감사를 받은 아니마무스는······



《이 인간은 또 뭐지? 뭔데 잘난 녀석인 양 인간 전체를 대변한다는 듯이 구는 거냐?》


거칠다. 원래부터도 말투가 거칠긴 했으나 이번엔 더욱 거칠었다. 화들짝 놀란 리아는 최대한 순화하여 이를 루비아에게 전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머리를 든 루비아에게서 대답이 나왔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로, 이곳과는 떨어진, 루 몬테르에서 온 자입니다.”

《인간의 나라 따위엔 관심 없지만······ 조약 때문에 원치 않게 알고 있지. 그래······ 루 몬테르에서 왔다고?》

“어······ 아니마무스 씨, 덧붙여서 설명해 드리자면, 루비아 씨는 루 몬테르 공국의 공주님이세요. 이른바 공녀님이죠.”

《인간의 직책 따위가 별거라고. 너에 비하면 전부 하찮거늘. 그런 것보다 멸망하지 않고 아직 남아있나 보군. 인간의 나라 같은 건 매번 순식간에 없어지고들 하던데.》

“덕분에 무사히 영위하고 있습니다.”

《감정을 파악하여 대답하는 것인가? 흥! 유사 의사소통 따위로 말을 섞으려 들다니,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제 분수를 알아라.》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꿋꿋이 대답하는 루비아.


순간 째려봤던 아니마무스는 혀를 찼다.



《쯧. 마음에 든다며 많은 마수들이 그 나라에 정착하길래 난 또 괜찮은 곳인가 했는데, 공주라는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꼴이 어떨지 훤하군. 그곳에 정착한 녀석들이 불쌍할 지경이야.》

“아니마무스 씨!”

“리아.”


조용히 부른 루비아가 살짝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라는 의미였다.



《하······ 알겠다, 인간. 네가 노리던 대로 눈도장은 제대로 찍었다. 목적을 이루었으니 얼른 이곳에서 떠나라. 날 안고 있는 이 녀석 때문에 이번엔 그냥 넘어갔으나, 본래 너희는 이 땅을 밟아선 안 된다.》

“송구합니다. ······리아도 고마워요.”

“어······ 아뇨.”


그것으로 볼일은 끝났다는 듯 루비아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한 달만에 인사 드립니다!


이야~ 다행히도 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습니다.


어... 근황부터 말씀드리자면, 한 달 동안 정말 푹 잘쉬었습니다. 읽고 싶었던 책들 다 읽으면서 필력도 충전하고 보람찬 시간들이었습니다.


당시엔 몰랐는데, 그렇게 느긋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보니 제가 좀 지쳤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여하튼 잘 쉬어서 에너지도 만땅으로 채워왔습니다. 기다려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도 만족스러운 연재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s. 아... 근데 오랜만에 쓰다보니 분량 조절 실패. 어정쩡한 부분에서 끊게 됐습니다.

되도록 빨리 다음 화를 대령할 터이니, 너그러이 기다려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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