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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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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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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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24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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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DUMMY

관객석이 술렁인다. 저 꼬마가 소문의 그 드래곤 슬레이어냐고. 그래서 황자님을 재치고 상석에 앉은 것이냐고.


이런 외침들 속에 의심의 말은 그다지 없다. 아까 경기장으로 나타나 레드 베어―― 슈페리얼 자이언트 베어의 일격을 막은 전적이 있어선지 의외로 납득하는 모습들이었다. 게다가 사람을 헷갈리지도 않았다. 이쪽의 소개는 전혀 없었건만.


그러나 납득은 해도 받아들이기 힘든 법. 올려다보는 눈빛엔 잔뜩 의구심들이 끼어있었다.


‘에휴. 나도 루시아스 님처럼 존재감을 뿡뿡 내뿜는 걸 연습해야 하나? 조~금 작을 뿐인데 맨날 만만하게 보네.’


한숨을 쉰 리아는 옆을 돌아봤다.



“이거, 엔가 어쩌구 씨가 꾸민 짓이죠?”

“말해 무얼 하냐? 아까 나갈 때 눈빛 봤잖아.”


당연하다는 듯 답하는 루비아의 말은 귓속말처럼 작았다. 주변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마치 들은 것처럼 베르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 혹시 불똥이라고 했던 건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나?!”


베르그에겐 여러 가지의 감정이 담겨있었는데, 그중 경악의 감정을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내고는 눈을 부릅떴다.


그를 보며 루비아는 부채로 입가를 가렸다.



“달리 무엇이 있을지요?”

“하,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간에 중요한 건 그게 아닐 텐데요? 전하 혼자만 예상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시켜주기엔 시간이 아까워요.”


매몰차다. 그러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엔가 어쩌구가 무슨 짓을 벌일지 예상 못한 것은 여기에서 베르그 혼자뿐이니······ 물론 어린 로즈도 있기는 하나, 큰 위안은 되지 않을 것이다.



“뭐, 벌어진 일이니 어쩔 수 없죠. 신경 쓰지 마세요. 다음에 조심하면 되잖아요?”

“미, 미안하네, 이스피리아 공. 내 바로 경기를 취소――”

“――이미 늦었습니다, 베르그 전하.”


말을 자르며 끼어든 사람은 라프리트로, 그녀는 드물게 무척 냉혹한 눈매로 베르그를 보았다.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전하가 함부로 움직이시면 안 되기에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나서야 했습니다.”

“무슨 소리인가? 이건 엔가나의 독단일세. 빨리 취소――”

“――취소하면, 리아 양의 명예가 실추됩니다.”

“아······.”


드디어 베르그도 이해하게 됐나 보다. 엔가 어쩌구―― 기획자로서 그가 꾸며놓은 이 빠져나갈 수 없는 수렁을.


그만큼 현재 상황은 리아에겐 빠져나갈 도리가 없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은 낭떠러지의 외길이었다.


그리고 그 외길이란 무왕과 싸운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다른 선택지는 고를 수가 없다. 중지시킨다면 무왕이 무서워서 도망쳤다는, 허풍쟁이로 낙인이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딱히 드래곤 슬레이어니 뭐니, 관심은 없다. 원치도 않았는데 지킬 마음이 생기기나 하겠는가?


그렇기에 나 자신에게만 피해가 오는 거라면 솔직히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은 한없이 희박하다.


그렇다. 허풍쟁이란 낙인은 자신에게만 새겨지는 게 아니다. 가족인 에르와 아이리스, 여차하면 페리와 델리안,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덩달아 새겨지게 될 것이다.


헐뜯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지.


떠오르는 건 손가락질과 그 손가락의 끝이 향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다.


‘흠······’


그저 상상일 뿐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기분이 나빠진다.



“리아 양······”

“아. 그렇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죠. 다녀올게요.”


잠시 걱정스럽게 보던 라프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편히 하시고 오세요. 다치지 말고요.”

“네. 조심할게요.”

“뭐어······ 하고 싶은 대로 해. 무서운 시어머니의 허락도 떨어졌으니까.”

“허, 허락이라뇨?! 그리고 저는 시어머니가――”

“――네네. 아무렴요. 그나저나, 리아.”

“어, 네.”


발끈한 라프리트에게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은 루비아였지만, 올려다보니 살짝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마치 기대된다고 할까,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왜 그러세요?”

“점차 돌아오는 듯해서 말이야. 역시 이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지.”

“네?”

“아니. 별거 아니야. 그보다 어서 가보기나 해. 좀 늦었다. 아. 그리고――”


루비아가 가까이 와보라는 듯 손짓했다. 그래서 얼굴을 슬쩍 내밀었더니 루비아가 속닥속닥, 슬며시 귓속말해주었다.



“알았지? 기왕 말려든 거, 챙겨가는 것도 있어야 할 거 아냐?”

“어······ 근데 그리해 줄까요?”

“해줄 거 같은데? 안 해주면 자존심 상하잖아.”

“겨우 그런 걸로요?”

“멍청하니까 널 끌어들였겠지. 어쨌든 하는 거다?”

“네에······”


대답은 했지만, 영 내키지 않는 루비아의 지시다. 좀 창피하기도 하고.


뒤에서 무슨 대화를 나눈 거냐고 라프리트가 궁금해하지만, 설명할 시간은 없을 듯하다. 그리고 좀만 있으면 어차피 알게 될 거였다. 미안하지만 그때까지 기다려줬으면 한다.


‘그런데 역시 루비아 씨네. 내가 뭘 하려는 건지 바로 알아차리고.’


그녀답다고 생각하면서 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 밖이 훤히 보이는 난간 앞에 섰다.


청록 드레스의 리아가 나타나자 우수수 시선이 쏟아진다.


조금 부담스럽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다. 조금 늦기도 했으니 바로 걸어 나가며 손가락을 튕겨 [발판]을 만들었다. 치마 밑은 에르의 마법에 의해 그림자가 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마음 놓고 편안히 앞을 나갔다.


마치 하늘 위를 걷는 듯한 모습에 관객들이 웅성댄다.


――좋은 연출이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다. 아니, 아직 시작조차 하질 않았다. 만족은커녕 제대로 보여준 것조차 없다.


‘절대 잊히지 않을―― 꿈속에서도 볼 화려한 경기를 뇌 속에 새겨줄 테니까 말이야.’


그래. 그것이야말로 노리는 것이다. 최고의 경기. 눈이 즐겁다 못해 등장조차도 화끈하여 세기의 대회로서 두고두고 회자 되게끔 할 거다.


아아. 그려진다. 누군가가 땅을 치며 한탄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즐거운 상상에 리아는 저도 모르게 음침한 웃음을 지었다.



“쿠후후······ 그럼, 갑니다. 다들 똑바로 봐두라고요?”


하늘에서 20여 걸음 느긋하게 걷던 리아. 그러다 순간 발목만을 구부려 도약했다.


발목의 힘만으로 도약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리아는 하늘 높이 올라갔다. 거의 구름에 닿을 듯했다.


질량을 가진 물체는 땅으로 떨어진다. 오엘문리아도 예외는 아니다. 중력이 있기에 특별한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지구와 마찬가지로 자유낙하를 한다.


그런데 리아가 아무리 가볍다고 하더라도 거의 구름에 닿을 듯한 높이였다. 머리부터 땅으로 낙하하는 리아에게 서서히 가속력이 붙더니 이내 위치 에너지가 모두 운동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별로 빠르진 않네. 대략 시속 200km쯤인가? 아마 이게 저항으로 인한 최대 속력이겠지? 후후. 나도 이 세계에 익숙해졌나 봐. 이런 속도를 느리다고 할 정도면. 으음. 아직 멀었나? 좀 높게 뛰었을지도······’


팔짱을 끼고 태평하게 잡생각을 하고 있으니 슬슬 땅이 가까워진다.


막상 때가 되니 조금 두근거린다. 설레는 마음으로 리아는 치마를 잡아 몸을 반 바퀴 전환했다.


바람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치마가 펄럭거린다.


제법 멋진 광경이다. 이 청록의 드레스는 원래 루비아의 것. 공주님의 드레스란 자고로 속 안감들이 풍성한 것들이다. 속옷이 보인다는 걱정 따윈 들지 않을 정도로 바람에 펄럭이는 이 장면이 무척이나 멋지고 마음에 든다.


하지만 이 정도에 만족할 순 없다. 자기만족도 좋지만, 관객들에게도 보기 좋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첫 등장 장면은 신경 써야 할 것이다. 이만큼 인상에 깊게 박히는 건 달리 없으니.


최대한 멋을 낸다.


‘그래. 마치 최종 보스인 것처럼 멋들어지게 등장하는 거야!’


리아는 정신을 집중했다. 위치는 정확하다. 대충 폴 파울로라고 하는 무왕에게서 20걸음쯤 떨어진 곳이었다.


전혀 속도의 가감 없이 수직 낙하한 리아는 양팔을 펼쳤다. 드레스가 뒤집힐 걱정은 없었다. 미리 [보호막]으로 벽을 세워뒀기 때문이었다. 물론 너무 바짝 대진 않았다. 적당히 넓게 펼쳐지도록 잘 조절했다.


이것은 땅에 착지하는 한순간에 이루어진 행동이었다.


리아는 가볍게 발목의 힘만으로 운동에너지를 받아냈다. 대충 적당히. 내심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던 등장 장면이었던 탓에 조금 마음이 설레기까지 한다.


후웅······


온전히 충격을 줄이지 않은 탓에 리아를 중심으로 흙먼지가 밀려 나간다.


제법 좋은 연출이 아닐까 싶으나 솔직히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는 기품있는 멋진 등장으로만 보여 흡족했지만.



“오오! 이, 이스피리아 님―― 드래곤 슬레이어께서 등장하셨습니다! 실로 굉장한 등장이십니다! 이 스페셜 이벤트 매치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흥분한 진행자의 외침에 따라 뒤늦게 여기저기서 감탄의 환호들이 터져 나온다.


‘오? 다행히도 나쁘지는 않았나 봐?’


모처럼 수직 낙하한 보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리아는 고개를 돌렸다.



“진행자님?”

“아, 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다름이 아니라, 이번 경기요. 내기는 없는 건가요?”

“네에······ 이벤트 매치라 딱히 내기는 없습니다만······”

“좀 아쉽지 않나요? 무왕과 드래곤 슬레이어가 맞붙는 건데. 그냥 구경만 하기엔 아무래도 흥이 안 나지 않을까요?”

“어······. 제가 결정할 일은 아닌데······ 음.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부에 의견을 물어보겠습니다.”


그리 말한 진행자는 빠르게 몸을 숙이더니 중얼중얼 속삭였다. 아마 통신 기능이 있는 마도구로 연락하는 것이겠지.


그리고 그 결과는 뻔했다. 상부―― 엔가 어쩌구는 승낙할 것이다.


그것이 루비아가 한 예측이고······ 지시였다. 틀릴 리는 없다. 엔가 어쩌구, 그의 성격으로 봤을 때 지기 싫어할 것은 분명하기에 받아들일 것이었다.



“아아. 허가가 떨어졌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분간 투표할 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내기의 참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서둘러 주십시오! ――이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스피리아 님?”

“네. 요구를 들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


예를 표하는 진행자에게서 리아는 시선을 돌렸다. 뻔한 결과에는 별 감흥도 없었다. 이후의 일도 루비아와 에르에게 맡겨뒀다.


‘흠흠. 딱히 돈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수고비 명목으로 좀 챙겨가도 벌 받진 않겠지. 제멋대로 끌어들이기까지 했는데.’


배율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나, 주금화 4,000장을 몰방하는 것이니 나름대로 액수가 불어날 것이다.


거는 쪽은 당연히 자신에게다. 지는 거? 그건 안중에도 없다. 절대 질 리가 없으니. 그런 확률은 만에 하나라도 존재하지 않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본 그곳에는 먼저 나와 기다리고 있던 그―― 무왕이 있었다.


리아는 그에게 사뿐히, 귀족의 예식에 따라 살짝 묵례를 하였다. 미안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터라 제법 정중했다.



“이쪽 멋대로 정해서 미안해요. 기껏 달아오른 분위기를 죽이기나 하고.”


이만큼 김이 빠진 것이다. 불만일 수도 있으니 사과하는 건 당연했다.


폴 파울로는 살짝 얼굴을 굳혔다.


무왕이라는 건―― 강자라는 건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를 잘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전투란 갑작스러움의 연속이니까. 이에 대응하지 못해서는 무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생각대로 폴 파울로는 제법 침착하니 말을 받았다.



“나는 괜찮―― 아니, 저는 괜찮습니다.”

“아, 말은 편히 하셔도 돼요. 신경 안 쓰거든요.”

“그리 말해주면 나야 편해서 좋지. 최고 국빈이라니까 아무래도 조심스러웠거든.”


정말로 안심했다는 듯 폴은 얼굴을 폈다. 누구랑은 정말 다르다. 더불어 최고 국빈이라는 게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도 얼추 감이 잡힌다.


그런데도 막되게 군 엔가 어쩌구는 도대체······



“근데······ 보기와 달리 호전적이로군. 구경하다 흥이 올라 상대를 찾다니. 뭐, 놀러 왔다가 받아들인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웃음소리가 섞인, 겸연쩍어하는 목소리.


딱히 무언가의 의도는 느껴지지 않는다. 순수하게 사실을 말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걸 보면 이 사람도 단순히 엔가 어쩌구에게 휘둘린 게 아닐까 한다.


‘지어낸다는 말이 참······ 그러네. 루비아 씨처럼 제멋대로인 사람으로 보나?’


약간의 호의와 호기심으로 폴을 보던 리아는 문득 어떤 의문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당주의 부탁을 받아들이신 거예요? 놀러 왔다면서요.”

“아아.”


이해했다는 듯이 말을 흘린 폴은 막상 말하기 부끄러웠는지, 어색하게 웃으면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어두운 톤의 금발이 흔들리는 그 모습은 웃는 상과도 꽤 어울렸다.



“그······ 나도 한 번쯤은 붙어보고 싶었달까, 무시무시했던 마력을 내뿜은 사룡을 물리친 힘을 직접 느껴보고 싶었어. 거기에 루시아스 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등의 이야기가 나돌아서 말이야.”

“으윽. 하루 만에······. 루시아스 님,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응?”

“아, 아뇨. 잠시 얼빵한 어떤 분이 떠올라서요.”


고개를 갸웃하는 폴.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분명 만나본 루시아스는 어딘가 얼빵했으니.


사실을 말한 것이다. 제아무리 지금 이곳을 ‘본다’ 할지라도 철회할 마음은 전혀 없다. 진짜 그렇게 느낀 걸 어쩌겠는가. 이런 걸로 부당하게 천벌 같은 걸 내리진 않으리라. 만약 천벌을 내려도 저항은 할 거라 상관은 없지만.


‘그러니 듣기 싫다면 이제 좀 그만 보시죠, 루시아스 님??’


리아는 불만스럽게 시선이 느껴지는 하늘을 노려봤다.


대답은······ 없었다. 멋대로라는 건 자각하지만, 이럴 때만큼은 루시아스가 이 불만을 읽지 못하는 게 좀 안타깝다.


‘아쉽지만 정말로 읽지 못하는 모양이네.’


저 시선이 느껴진 건 천상에 다녀온 이후로, 그때부터 계속 이쪽을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전에 느꼈던 두 시선 중 하나인가도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노골적이었다. 얼마나 숨길 마음이 없었는지, 지난번에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었던 에르도 이번에는 단박에 느껴버릴 정도였다.


이처럼 아예 대놓고 보겠다는 심보가 너무나 잘 느껴지는데 그때의 인물과 동일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루시아스는 분명 몰래 훔쳐봤던 사람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어딘가 다른 존재라고―― 지금 쳐다보는 이 시선은 루시아스의 것이라는 묘한 확신의 찬 감이 있었다.


‘그건 그렇다만······ 루비아 씨나 라프리트 씨가 알면 신경 쓰일까 봐 말은 안 했는데, 이제 그만 적당히 봐주었으면 하네. 프라이버시라는 것도 있으니 말이야.’


그렇다. 절대 에르와 꽁냥거리지 못해서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 쭉 쳐다보는 게 싫을 뿐이다.


화장실이라든가, 기타 생리현상이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당장 항의라도 했을 거다. 아니, 옷 갈아입을 때도 시선이 신경 쓰이니 지금이라도 바로 그만둬줬으면 한다.



“진짜 무지하게 할 일도 없으시나 보네.”

“뭐······?”

“아, 아니! 방금 말한 어, 얼빵한 분 얘기에요! 폴 씨보고 한 게 아니에요! 아, 그렇지! 자기소개도 아직이었네요.”


얼렁뚱땅 넘길 겸, 리아는 드레스를 잡아 고풍스럽게 머리를 숙였다.



“이스피리아 라고 해요.”

“어, 나는 폴 파울로라고 해. 이미 기억해준 모양이지만.”

“네. 만나서 반가워요. 무왕을 만나게 될 거란 생각을 못 해서 더욱 반갑네요.”

“나야말로. 설마하니 드래곤 슬레이어로 이름 높은 그쪽을 만날 거라고는. 참으로 영광이야.”

“저······ 그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거, 혹시 유명한가요?”


리아는 제발 아니길 빌었다. 그러나 사실 어떤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야······ 폴이 알고 있지 않았는가?


폴만이 따로 어딘가에서 정보를 얻은 게 아니라면, 평범하게 소문은 널리 확산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 번쯤은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이지 않나? 저 창피한 이명이 따라붙기보다는······


물론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 않다. 기대했던 희망은 한순간에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그저······ 폴이 얼굴에 물음표를 뛰었을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 이미 대답은 충분했으니.


그리고 이를 알 리가 없었던 폴의 입은 잔인하게 열렸다.



“벨루디스에서 대대적으로 선언했다고 들었는데? 뭐, 수백 년 만에 나타난 드래곤 슬레이어이니 자랑하고 싶을 만도 하지. 아마 어지간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을 거야.”

“따, 딴 나라도요?”

“아마 그렇겠지?”


별게 다 궁금하다는 양 쳐다보는 폴.


그리고 할 말을 잃은 리아와 함께 시간은 흘러갔다.



“자! 모두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럼 이제 시작하오니 다들 늦지 않게 착석해 주십시오!”


곧 시작된다는 진행자의 이야기에 우르르 바삐 사람들이 움직인다.


덩달아 정신을 차린 리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기대가 어려있어 이번 경기에 얼마큼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실망하진 않을 테니. ――폴 파울로 씨, 당신도요.’


드래곤 슬레이어에 관해 물었을 때부터 폴의 눈 깊은 곳에서는 욕망이 일렁였다. 그것들은 질투와 선망 같은 것으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아닐까 싶다.


원하지도, 하지도 않은 드래곤 슬레이어의 이명 따위 원하면 그냥 가져갔으면 한다. 그러나 이명이란 본래 남들이 붙이고 인식하는 것이다. 준다고 해서 뚝딱 넘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하다못해 휘말린 폴을 위해서 겸사겸사 최고의 경기를 만들어내면 좋을 거다.


그에게 드래곤 슬레이어 못지않은 이명이 생기게끔.


계획에는 없었던 일이었지만, 폴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이래저래 어려 보이는 자신을 막 대하지도 않고. 덕분에 열의도 생각 이상으로 불타올랐다.


그 대망의 시작으로 리아는 오른손을 옆으로 뻗었다. 그리고 왼손가락을 튕겼다.


리아의 손으로 빛이 모여들었다.


사용한 마법은 [생성]. 빛이 사그라지자 츠바이헨더와 비슷한, 리아의 신장만 한 기다란 검이 들려있었다.


외형은 꽤 화려했다. 금속 하나를 통으로 쓴 건 언제나처럼 같았으나, 평소 투박한 디자인과 달리 좌우로 쭉 뻗은 검받이부터 전체적으로 만화에서나 나올 듯 금빛이 휘황찬란하게 제작되어 있다. 화룡점정으로 조금 어두운 검신에는 기형학적인 문양들이 붉은빛을 뿜어댔다.


물론 빛만 내뿜을 뿐이다. 특별한 효능 따윈 있지도 않았다. 전부 다 멋을 위해서 이리 제작한 것이다.


근데······ 막상 실물로 보니 너무 화려하단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솔직히 자신이 만들긴 했지만, 이런 걸 들고 다니긴 부끄럽다.


그러나 참아야 했다. 이유가 있어서 요런 겉보기만 요란한 검을 만든 것이었니 말이다.


우선, 기억에 각인시키기 위함이었다. 화려한 것만큼 기억이 잘 나는 건 달리 없으니. 그리고 이와 더불어 알리려고 했다. 이 검이야말로 이스피리아를 상징한다는 것을.


‘그래야 교회에서의 내 검을 잊을 거 아냐? 여차하면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도 있고.’


카메라가 존재하는 지구였다면 씨도 통하지 않을 잔꾀였다. 다들 일단 뭔가하고 핸드폰부터 꺼내 루시아스에게 끌려간 그날의 일을 찍고 있었을 테니.


그러나 오엘문리아에서는 본 것을 그대로 확실하게 기록하는 매체가 드물다. 의외로 통할지도 모를 잔꾀였고, 시도는 해봄 직하다.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검을 만드는 모습을 본 진행자가 흥분해 소리를 높였다.



“오오!! 이스피리아 님이 검을 소환했습니다! 굉장히 엄청나 보이는 검이군요. 마검의 일종이 아닐까 싶습니다. 혹, 물리쳤던 사룡을 소재로 만든 검일까요?!”


진행자를 따라 관객들도 흥분하여 떠들어댔다.



“사룡을 물리쳤다는 거 진짜였어?”

“야, 허풍이었으면 벨루디스에서 최고 국빈으로 모셨겠냐? 거기에 아까 듣자 하니 우리 제국에서도 최고 국빈으로 모신다고 했던 거 같던데?”

“어이, 거기 둘. 그거보다 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있었잖아. 그 마력의 파동 말이야. 그걸 느끼고도 허풍이라는 말이 나와?”

“그건 그렇지······ 무시무시했었지. 최근에 세인트리안에서 다시 비슷한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사도님이 재림하여 엄히 꾸짖었다는 그거?”

“그래. 근데 아는 상인에게 들어보니까, 진짜 사도였다더라. 자기도 목소리를 들었다던데? 마치 천상에서 들리는 것처럼 머릿속에서 울렸다나?”


이러한 식으로 여기저기에서 비슷한 주제로 말하였다. 어느 누구도 이 검이 지금 만든 것임을 맞추는 사람은 없었다. 더불어 세인트리안에 나타난 사도를 리아로 보는 사람도 없었다.


좋은 현상이다. 게다가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졌음이 느껴진다. 평범한 어린아이에서, 평범하진 않을 수 있는 어린아이로.


분명 작은 차이다. 그렇지만 달리 보게 되었다면 실패는 아니다. 오히려 꽤 잘 풀렸다고 할 수 있었다.


‘원래 첫 시작이 어려운 거니 말이야.’


어찌 보면 가장 어려울 수 있는 일이 끝났다. 이후는 쉽다. 이 경기가 끝났을 때쯤엔 분명 자신만이 아닌, 폴까지도 쳐다보는 시선이 처음과는 180도 달라져 있을 것이다.


준비는 끝났다.


리아는 가슴을 폈다.



“잘 부탁하죠.”

“아아. 잘 부탁하지.”

“거리라든가······ 이대로 시작하면 될까요?”

“그래.”

“흐음. 13m쯤이라 제 사정거리 안인데······ 뭐어, 상관없겠죠. 열심히 오랫동안 버텨주세요. 최고의 무대가 될 수 있게.”


폴의 얼굴이 굳고는 눈에 분노가 담겨간다.


딱 절절한 도발이지 않았을까. 이 정도는 되어야지 박진감 넘치는 연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같은 연기를······


‘진짜 화난 게 맞긴 하지만.’


그렇지만 모두 자신의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등장하는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 실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나름의 배려는 해준 것이다. 이것을 못 알아보고 화를 내는 건 순전히 본인의 선택과 역량이다.


물론 알아봤다고 한들, 자만심에 빠진 강자를 어떻게 공략할지 냉철하게 보기보단, 폴이라면 왠지 지금과 다를 바 없이 화를 내는 건 아닐지······ 괜스레 그런 상상이 든다.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한 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땅!!


종이 울렸다.


동시에 순식간에 리아에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오호······ 발동어가 없네? 이게 3연속 무왕의 자릴 지킨 비결인가 보네.’


그림자의 정체는 무영창으로 신체 강화를 하여 거리를 좁힌 폴이었다. 보기엔 [능력증강] 같다.


손엔 어느새 뽑아낸 장검이 들려있었는데, 내려치려는 자세의 그에게선 이 일격으로 끝내버리겠다는 기백이 담겨있었다.


하지만 기백이 전부였다.


다른 사람들에겐 혼자 투기술을 한 박자 빨리 사용한다는 이 전법이 통했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아니다. 이 정도라면 그냥 손으로 잡거나 검으로 걷어내도 된다. 아무 무리도 없다.


그러나······ 진짜 그래 버리면 연출에 있어선 좋지 못하다. 눈이 즐거운 극적인 모습이 없다면 재미가 반감될 것이다.


느긋하게 검의 궤적을 보며 최적의 계산을 마친 리아는 움직였다. 폴의 움직임과 비슷한 정도의 속도로 크게 선회하여 회피했다.


다만, 평소처럼 능력치를 폴에게 맞추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의 목적은 적절히 최고의 경기를 펼치면서 ‘압도’하는 거다. 서로 배워가는 대련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 굳이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폴은 진짜 이쪽을 죽이려 들고 있다.


그리모르 때와는 다르다. 그도 죽을 둥 살 둥 덤벼들긴 하였으나, 이처럼 명확한 살기를 띠고 있진 않았었다.


상대부터가 대련으로 보질 않는 거다. 봐줄 이유 따윈······ 찾지 못하겠다. 죽지 않을 정도로만 굴리고 굴려, 만족스러운 연출을 해내도록 쥐어짜 낼 거다.


쿠앙!!


온 힘을 다한 일격은 땅에 그대로 박혀 큰 폭음을 만들어냈다. 흙먼지도 치솟아 흩뿌려진다.


제 딴에는 경계했기에 한 점에 힘을 집중하기보다는 넓게 분산했기에 이런 결과가 벌어진 게 아닐까 한다. 하지만 손쉽게 피해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나 보다. 거리를 벌린 리아를 보며 눈을 크게 뜬다.


한 합이었지만, 투기장에선 함성이 메아리치듯 울렸다.


이와는 대비되게 리아는 살짝 입술을 내밀었다.


‘날 너무 만만히 보는 거 아냐?’



“간 보는 건 슬슬 이쯤으로 하죠? 제대로 하시는 편이 좋을 거예요. 조금 긴장의 끈을 놓으면······ 죽을 거거든요.”


입술 끝을 올린 리아는 경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달렸다.


장검을 겨눈, 어느 자세로든 전환할 수 있는 효율 좋은 움직임을 취하고 있던 폴은 화들짝 놀라 아직 허리춤에 있던 중검을 빼 들었다.


두 자루의 검을 겨누게 된 폴에게선 생각 이상의 견고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오랜 훈련의 결과가 보인다. 절대 꾀만 부린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접근한 리아는 바로 화려한 장검을 내려쳤다. 양손 검임에도 한 손으로 가뿐했다.


원심력이 더해진 장검에 담긴 힘은 만만히 볼 게 아니었다.


새롭게 꺼내든 중검으로 흘려내고 반격하려 했던 폴은 뒤늦게 묵직하게 실리는 힘을 느끼고는 그대로 막았다.



“윽!”


쓰린 신음이 솟았다.


충격에 마비감이 전해졌는지 폴의 움직임이 굳었다.


리아는 더 몰아세우지 않았다. 대신 돌려차기를 쏴줬다.


몸이 붕 뜬 폴은 빠르게 날아가다가 10m쯤에서 몸을 회전하여 편히 착지했다. 타격은······ 당연히 없었다. 일부러 몸에 딱 붙여 톡, 밀었으니 말이다.


이를 알 수가 없었던 진행자는 서로 전혀 피해를 받지 않은 모습에 수준이 다른 공방이었다며 소리를 높였다.



“너······ 뭐 하는 거냐?”


관객들의 함성을 뚫고 폴이 물었다. 그로서는 장난치는 게 아닐까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리아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진지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최고의 무대를 만들려 한다고. 순식간에 결판을 내면 안 돼요.”

“뭐······?”

“당신도 힘 좀 내서 제대로 해보세요. 저에게 지고 싶진 않을 거 아녜요? 거기에 이건 기회이기도 해요. 만약 당신이 이긴다면, 드래곤 슬레이어를 이긴 자로서 명성이 드높아질 테니.”


이 말에 분노로 얼룩졌던 폴의 눈에 다시금 욕망이 지펴졌다.


‘그렇군······ 명성에 대한 욕심 때문에 엔가 어쩌구 씨의 제안을 수락한 거였군.’


목적을 재차 상기한 폴은 달라졌다. 몸을 비스듬히 틀어 중검을 내밀고 장검을 뒤로 뺀 자세를 취한 그에게서 강한 기척이 느껴진다.


‘이제야 제대로 하려나 보네.’


욕망에 솔직하고 충실한 저 모습은 보기 좋다. 이쪽도 그에 부응해 한 꺼풀 벗도록 하자.


쉭.


눈 한번 깜빡이는 동안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리아는 빈 왼손으로 폴의 옆구리를 올려 쳤다.


폴에게는 뜻하지 않은 어퍼였을 거다. 비스듬한 그의 자세에서는 무척이나 때리기 어려운 곳이었으니. 덕분에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격을 허용했다.


“헉”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폴은 캑캑거렸다.


옆구리는 정면과 달리 근육이 잘 발달하지 않는다.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져 고통과 함께 숨이 잘 안 쉬어질 것이다. 회복에도 상당 시간 필요할 거다.


이게 실전이었다면 여기서 끝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끝낼 순 없다. 리아는 스윽, 빠짐과 동시에 장검을 든 폴의 손을 잡아, 마치 그가 휘두른 것처럼 움직이게 했다.


물론 아무도 못 보게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일격을 허용했던 무왕이 빠르게 반격하여 추가타를 저지합니다!”


절찬리 착각한 진행자가 소리친다. 관객들은 환호성을 내질렀다.


‘음음.’


만족스러운 결과에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곧장 몸을 날렸다. 그 순간 등 뒤에 칼날이 지나갔다. 빠르게 호흡을 고른 폴이 휘두른 것이었다.



“흠. 많이 화나셨나 보네요. 검 끝이 많이 흔들려요.”

“장난치지 마라! 이건 엄연한 결투――”

“――헤에. 결투요? 등 뒤를 노린 분에게서 나올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요? 게다가 결투란 자고로 어느 정도 실력이 맞는 자들끼리 성립되는 거예요. 당신에겐 압도적으로 부족하죠.”


말을 끊은 리아는 비웃음을 흘렸다.



“당신은 기껏 잘 쳐줘도 짚을 이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한량에 불과해요. 그러한데······ 냉철하게 기회를 엿보긴커녕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꼴이라니. 한참 멀었네요.”

“······아무리 실력에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결투는 결투다.”

“네. 다른 때라면――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저도 그리 말했겠죠. 하지만 그건 진심으로 결투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당신처럼, 상대를 짓밟고 올라갈 디딤돌로 생각하는 자들에겐 아니라고요.”


리아는 검을 들어 폴을 겨누었다.



“오만한 당신에게 제대로 한 수 가르쳐드리죠. 불만은 품지 마세요. 절 죽이려 했으니 저도 당신을 어찌 굴리던 제 마음이잖아요? 아아. 그래도 무작정 굴리기만 하는 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이 제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경기가 끝났을 때쯤엔 엄청난 실력 상승이 있을 테니까요.”


거짓말은 아니다. 정말로 끝까지 잘 따라오면 처음의 그와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른바 극기 훈련이다. 수업료로서 이쪽은 폴을 이 경기의 출연 배우로서 마구 굴릴 뿐이었다.


‘나름 싼 수업료지?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난 베르다드에서는 줄을 지어 한 수 배우려 드는 인기 강사니까.’


이젠 거의 천 명 단위로 사람들을 끌고 다니는 인기 강사다. 그런 자신에게 공짜로 배우는 거니 그에게도 손해는 아니니라.


크게 고개를 주억거린 리아.


그리고 그 끄덕임이 멈추는 순간 바로 튀어 나갔다. 폴의 시선이 따라오기는 하나, 그것뿐이다. 몸이 따라오지는 못한다.


‘좀 빠른가?’


뒤를 잡은 리아는 아까 움직였을 때보다 상당히 속도를 낮춰 검을 휘둘렀다.



“윽!”


힘겹기는 했지만 늦춘 보람이 있게 폴은 무사히 검을 받아냈다.


좋은 징조다. 이 감각과 기세를 폴이 잊지 않게 리아는 더욱 몰아세우듯 사방에서 검을 베고 찔렀다.



“이익. 촐싹촐싹!”

“오? 조금 여유가 생겼나 봐요? 떠들 수도 있게 되고. 그러면 막 익숙해져서 힘들 수도 있지만 더 속도를 올려볼게요. 참고로 힘도 올릴 겁니다. 잘 버티세요.”






씨익, 웃는 이스피리아.


마치 사악한 악귀와도 같은 미소로만 보인다. 적어도 대치하고 있는 폴 파울로에게는 그리 보였다.


쉽게 볼 마음은 없었다. 그 엄청났던 사룡의 마력은 자신도 분명하게 느꼈으니. 단언할 수도 있다. 그 마력을 느껴본 자는 절대 쉽게 볼 수 없다고.


그렇지만 저 외모가 뭐란 말인가.


물론 여자인 걸 듣긴 했다. 더불어 여자라고 얕잡아 볼 생각 따윈 없었다.


멍청한 놈들은 남자가 무조건 유리한 줄 알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성별의 차이는 희미해진다. 그렇기에 엔가나의 부탁을 수락할 때까지만 해도 제법 긴장했었다. 진지하게 한 수 배워볼 생각도 있었다.


그런데······ 나타난 건 손주나 조카뻘 되는 어린 여자아이였다.


진행자가 귀빈석을 가리켰을 땐 순간 다른 사람이 아닐까, 뻔했음에도 빌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변은 없었다. 제대로 본 게 맞았다.


드래곤 슬레이어―― 아마 모두 한 번쯤은 꿈꿔봤을 이 칭호의 주인은 어린아이였다.


진지하게 되는 게 무리다. 도대체 쟤는 무슨 복을 타고났길래 저러한 재능을 지녔다는 말인가. 이러한 질척질척한 질투심만이 피어올랐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이기면 될 게 아닌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굳이 벨루디스가 들킬 거짓말을 하진 않을 테니 능력 면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을 것이다. 분명 자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단지 등장뿐이었음에도 격이 다르다는 게 느껴졌다. 높이가 높이였으니. 특히 펼치는 팔의 힘만으로 낙하 속도를 모조리 줄이는 것을 보고 ‘미친······ 새야 뭐야?’라며 저도 모르게 경악했었다.


솔직히 말해 본인도 대전해 보고 싶다며 시건방을 떨 수준은 됐다. 적어도 순수 능력만으로 이길 자는 없어 보였다. 자신 이전의 무왕이었던 그―― 괴물 같았던 가베인이라면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그러나 암만 바란다고 한들 그런 힘을 갑작스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현실적으로 자신에겐 저 이스피리아를 이길 방도 따윈 없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도 기회는 찾아온다고 했던가. 딱히 승산이 없다고만 여겨지지 않았다. 잘 찾아보면 의외로 승산은 있었다.


왜냐하면······ 이스피리아는 어리기 때문이다.


분명 몬스터와는 잘 싸울 수 있다. 외견―― 생김새가 다른데다가,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아무 거리낌이나 주저 없이 물리칠 수 있다.


그에 비해 사람은 다르다. 일단 외형이 비슷하고 말까지 통한다. 휘둘릴 여지는 많고 많다. 거기에 사람이란 본능적으로 동족에게 해를 끼치기 어려워한다. 어리면 어릴수록 더욱 그렇다.


모험가의 세계에서는 유명한 이야기다. 몬스터를 상대로는 날고 긴 상위 모험가가 강도를 상대로 쉽게 죽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있다. 이 때문에 신출내기 모험가에게 필수로 사람과 싸우는 법을 훈련코스로 지정하는 모험가 길드도 있었다.


그만큼 사람과의 전투는 익숙해지지 않는 한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기뻐했다.


재능이 전부인 저 얼빵한 이스피리아를 이긴다면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은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될 것이기에!


사람들에게 환호받는―― 어렸을 적 꿈에서 그려본 빛나는 미래가 다가오자 절정에 이를 만큼 흥분됐다.


――하지만 헛된 미래였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말 헛된 꿈이었지······’


투기장의 규칙엔 상대를 죽이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긴 하다. 그러나 실수란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라 드문드문 사망자가 나오기도 한다.


바로 이점을 노렸다. 시작하자마자 달려들어 실수인 척 전력으로 이스피리아를 죽이려 했다. 상대는 드래곤 슬레이어다. 죽이더라도 설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는 식으로 둘러댈 예정이었다.


그런데······ 너무나 쉽게 피한 것도 모자라, ‘제대로’ 하라며 한소리까지 했다.


조금의 방심은 물론 있었다. 되려 저 이스피리아와 마주하고 방심을 안 하는 게 더 힘들다. 어딜 어떻게 봐도 약해 보이니까.


그렇지만 최선을 다하긴 했다. [전능력증강]과 [신속]을 무영창으로 발동한 필승법도 썼다.


[전능력증강]과 [신속] 자체가 어중이떠중이는 할 수도 없는 최상급의 투기술이다. 그걸 무영창으로 해내기까지 한 거다. 마주한 상대는 언제나 반응하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었다.


이스피리아도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못하더라도 최소 자세가 무너져 반격은커녕 계속 방어 일변도로 몰아갈 걸 그렸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스피리아는 그냥 회피해버렸다.


아니, 그냥 회피했다면 충격이 덜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피리아는 정말 너무나도 편히 피해냈다. 마치 이 정도의 속도는 일상이라는 듯 자세하나 흔들리지 않고······


너무나 여유만만이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실로 능력의 차이가 크다.


――이때 그만뒀어야 했다.


아니, 이때 말고도 그만둘 때는 많았다. 특히 옆구리에 한방, 방비가 제일 단단한 그곳을 뚫고 제집 드나들듯 파고들었을 때―― 사람과의 싸움이 익숙하다는 걸 알았을 때 그만뒀어야 했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러나 이런 후회가 들 때는 이미 이런 꼬마에게―― 재능이 전부인 녀석에게 지는 것이 싫어 달려들고 난 뒤였다.


‘그냥 인정하고 포기하지.’


몇 번째인지 모를 생각을 해봤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포기조차 할 수 없는 이 지옥과 같은 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제멋대로 몸이 움직이는 이 고통을.


처음에는 착각이 아닌가 싶었다. 위치를 놓친 이스피리아의 검을 중검으로 막더라도 그냥 위급상황이기에 집중력이 올랐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 번도 아니고, 수십 차례나 반복되니 아무래도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 위화감이 곧 확신으로 변하고, 일부러 이스피리아의 공격을 막지 않아봤다. 혹시 모르기에 크게 다치지 않을 부분도 제대로 선정했다.


하지만 부질없게도 몸은 멋대로 움직여 이스피리아의 공격을 쳐냈다.


황당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진상은 금세 파악됐다. 달리 누가 하겠는가? 이 투기장엔 자신과 이스피리아 뿐인데.


바로 무슨 짓이냐고 따져 물으려 했다. 그런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확히는 입은 벌어졌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분명 성대가 울리는 건 느껴지건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덕분에 항복도 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악에 받쳐 항복 따위 할 마음이 없었다. 누가 이런 처사를 당하고 순순히 항복하겠나?


그러나 그 굳은 마음은 금세 바뀌었다. 더불어 확신할 수 있게 됐다. 누구라도 지금 자신의 처지가 된다면 곧장 항복하려고 했을 거라고.


이만한 고통―― 고문에도 가까운 이 고통을 느꼈다면 반드시.


자존심이 상해서 아프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정말 물리적으로 아픈 것이다.


고통에 이렇게까지 면역이 없었던 건가 싶어 자신도 놀랐다. 그런데 이 고통은 조금 달랐다. 내부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다. 이스피리아가 입힌 상처에서 발생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러나저러나 저 괴물 때문인 건 맞지.’


괴물······ 그냥 한 번 불러봤을 뿐이지만, 이 잔혹하고 무자비한 년에게 이보다 어울리는 단어는 또 없을 거란 기분이 들었다.


정말 그만한 괴물이다. 대적? 그건 진짜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이었다. 달리 상석에 앉은 게 아니며, 달리 사이가 안 좋은 두 국가에서 최고 국빈으로 모셔가려는 게 아니다. 이례적인 것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만약 맞부딪힐 일이 발생하더라도 공손히 예를 취하여 자비를―― 하다못해 즉시 패배를 외쳐야 한다. 그 외의 선택은 우매한 자의 어리석은 선택이 될 거다.


자신처럼 항복도 못 하고, 좋을 대로 굴려지는 인형이 되고 싶지 않다면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으읍!!’


그렇게 후회하고 있으니 재차 잊고 있었던 고통이 몰려왔다. 다른 생각으로 어떻게든 버티려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고통―― ‘근육통’에 폴은 나오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내부에서부터 느껴지는 고통이란 바로 이것이었다. 하지만 A랭크의 모험가였으며, 무왕의 자리까지 오른 자가 겨우 근육통 따위에 죽는 소릴 낸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언제나 달고 살았을 테니.


그러나 폴은 의심하는 이들에게 주장하고 싶었다.


이 근육통은 여태 경험했었던 평범한 근육통과는 다른 부류로 구분해야 한다고. 그 정도로 느껴본 적 없는 끔찍한 고통이라고.


폴이 이리 단언할 정도로 근육통이 고통스러워진 데에는 특별하거나, 기상천외한 무언가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생각보다도 단순한 이유였다.


그냥 한계 이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었다······


말하기 무섭게 원래는 낼 수도 없을 엄청난 속도로 두 검을 휘두른다. 그것도 모자라 휘두른 검에서 마력의 칼날―― 검기가 나가기까지 했다.


당연히 이쪽이 한 게 아니다. 몸이 멋대로 움직였을 뿐이었다. 그 이전에 저 검기의 마력 자체가 폴의 것이 아니었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긴 하나 틀릴 리는 없다. 이스피리아의 마력이다.


즉, 어떻게 한 건지는 수수께끼이나, 이스피리아는 남의 몸을 한계 이상으로 조종하면서 검신류의 비기인 검기를 가볍게 날려댈 수 있는 것이다.


뭐 이딴 존재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다.


이런 괴물에게 재능뿐이니 뭐니, 시기하고 질투했던 자신이 어리석다. 이건 그런 시선으로―― 인간과 같은 범주에 넣어선 안 되는 존재다. 기왕 비교한다면 천재지변과 비슷한 것이지 않을까.


생각할수록 두렵다. 더불어 도대체 이러한 잡생각을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스피리아―― 저 괴물은 속도와 힘을 높인다는 본인의 말을 그대로 지켰다. 그렇기에 따라잡지 못하게 됐고 인형처럼 휘둘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현재까지도 지속됐다. 한계가 없다는 듯 끊임없이 속도와 힘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 뜻은 몸에 부담되는 충격과 고통이 더 해진다는 소리였다.


‘어, 어떻게 해야······’


고민했지만, 방법이 나왔으면 진작에 했을 거다. 벗어날 방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고통을 줄이기 위해 힘을 빼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워낙 속도와 맞부딪히는 충격이 강하다 보니 몸에 전해지는 고통이 상상을 초월했다.


앞으로 더 강해질 걸 상상하니 두려움에 눈물과 함께 지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건 허락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속절없이 이대로 이스피리아의 뜻대로 굴려져야만 했다.


‘제, 제발 그만해! 이 괴물아! ――크으아아악! ······헉헉.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이스피리아 님!’


처절히 불러보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말은 허무하게 폴의 속에서 사그라졌다.


작가의말
리아에게 악의는 별로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다들 잘 지내셨나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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