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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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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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9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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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DUMMY

“자~ 우린 이제 가볼까나?”


너무나도 가벼운 말투. 마치 소일거리를 끝낸 듯하였다. 성전을 선포 당한 인간이라고는 차마 보기 힘들 정도다.


‘더군다나······’


홀린은 멍하니 고개를 내려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손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오랫동안 들지 않았던 자신의 애창이―― 완전히 똑같은 모습의 새로운 창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이를 가볍게 버티고 서 있는 몸.


괜히 오랫동안 들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니다. 한시를 가리지 않고, 심지어 잘 때조차도 이어지던 고통 때문에 창을 잡을 수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고통이 싹 가셨다. 무심코 창에 힘을 담았음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다. 완쾌한 것이다.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렸던 탓인지 잔재처럼 남은 감각에 순간 나았는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어딜 어떻게 봐도 의심의 여지는 없다. 분명 다 나은 거다. 그토록 치료할 방법을 찾으려 고군분투했던 게 무색할 만큼 쉽게, “엿차”라는―― 맥빠지는 기합과 함께 말이다.


정말 허무할 만큼 쉽게 나았다. 되려 이러니 이 현실이 더 믿기지가 않았다. 오죽했으면 이리 쉽게 나을 수 있었던 것에 지금껏 고통을 받아왔던 건가 하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하지만 완치된 지금이니까 가능한 기분과 감정이겠지.’


벅찬 마음이 된 홀린은 이 병을 치료하기 위한 여정들을 떠올리면서 다가오는 어린 소녀를 봤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까까지만 해도 경계를 늦추지 않던 소녀에게 말한 대로라면 길어봐야 5년인 자신의 목숨이 구해지다니······. 세상일은 모른다고는 하지만 이런 일도 다 있구나 싶다.


그리고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저 리아라 불린 소녀는 어째서인지 델리안과 상당히 친밀한 사이로 보인다.


저리 편하게 누군가를 대하는 델리안은 60여 년이 다 되어가는 동안 곁을 지켰던 자신조차도 처음이다.


그러니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첫 만남에서는 서로 몰랐을까? 마법으로 얼굴을 가렸다고는 해도 저만큼 친밀하다면 말하는 어투나 목소리, 감 등으로 알았을 것이 분명할 텐데도.


여러 생각들이 꼬리를 무는 동안 신비한 소녀는 이쪽으로 왔고, 동행인 남자를 고개를 올려 쳐다봤다.



“이봐, 당신. 뭘 빤히 보는 거야? 이제 돌아가자니까. 매일 보는 아내의 얼굴이 그렇게 신기해?”


‘이 남자는 남편이었나?! 어? 그럼 아까 네 아내라고 했던 건 뭐였지?’


모르겠다. 도대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이야기가 연결조차 되지 않으며 따라갈 수조차도 없다.


‘아니, 그 이전에. 저리 어리면서 벌써 결혼했다고······?’


놀란 눈으로 보고 있으니 소녀는 말이 없는 남자에게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뭐어······ 나도 뭐라 할 말이 없네.”


뒷머리를 긁적이는 소녀를 남자는 조용히 보고 있었다. 그러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의――”

“응?”

“당신의 기억 속 나는 어떤 나였어? ――리아.”


소녀는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에 놀란 듯하였다. 그렇지만 이내 살짝 미소를 짓고는 말하였다.



“평범했어.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무지하게 아끼는 평범한 가장이었어.”

“그랬나······”

“조금 유난스럽기는 했지만.”


그렇게 이야기한 소녀는 돌연 박력 넘치는 표정이 되었다.



“그러니까! 괜한 신경 쓰지 말라고. 전혀 상관도 없는 일에 얽매이다간 현재를 놓치고 말아. 당신에게 중요한 건 지금이지 뭔지도 모를 저쪽이 아니잖아?”

“응. 알았어, 리아.”


분명 설교하는 말이다. 그런데 대답한 남자는 눈을 가늘게 하고는 제법 그립다는 듯한 분위기를 풍겨댔다. 나온 목소리 또한 상냥하기 그지없는 달달함이 느껴진다.


이에 도리어 당황한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허둥지둥 몸을 돌려버렸다.



“그, 그래! 시, 시원스러워서 좋구먼. 자자! 이제 집에 가자고. 델리안도 갈 거지?”


명백하게 피하는 행동. 순번이 넘어 온 걸 모를 리가 없는 델리안은 이를 자연스레 받아 줄 것이다.


하지만 조용했다. 이어지는 말 같은 건 없었다.


의아함에 델리안을 쳐다보니 그녀는 응시하고 있었다.


――어린 소녀의 남편이라는 자를. 여러 감정을 담아 뚫어지게 보고 있던 것이었다.


홀린은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봤다.



“델리안?”


그제야 화들짝 놀란 델리안은 어렵사리, 정말 힘겹다는 듯이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미안하다고 짤막하게 이야기한 델리안은 평소의 그녀로 돌아와 소녀에게 미소를 보여주었다.



“물론이란다. 원래는 한 방 먹여줄 예정이었는데 자네가 대신했으니 넘어가도 되겠지.”

“으음. 괜찮은 거야? 뭣하면 델리안도 시원하게 풀고 가지 그래.”

“아니다. 저거만으로도 적당히 통쾌하단다.”


델리안은 하늘을 가리켰다.


그 방향을 따라 올려다본 소녀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적당히로 괜찮으려나······”

“그래. 난 정말 괜찮단다. 그보단 이제 움직이자꾸나. 여기 있다간 우리도 말려들겠다.”

“그러네. 우리야 괜찮겠지만――”


말을 멈춘 소녀가 힐끔, 이쪽을 쳐다본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엄하게 힘을 뺄 필요는 없겠지. 서두르자.”


기분이 나쁘다. 왠지 무시당한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목숨을 구해준 은인. 이 정도는 참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소녀는 자신을 저리 평가해도 용인될 정도의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직접 앞에서 목격했다. 그 격차가 어느 정도인지는······ 자존심이 상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동하는 모습조차 보이지도 않았으니 말이야. 하지만 [운석 낙하]라니. 마법도 대마법사 수준에 이른다는 건가? 물론 델리안에게까지 도달하진 못했겠지만.’


근데 생각과 달리 델리안에게 마법에 대해 알려주던 소녀의 모습이 자꾸만 떠오른다.


‘설마 아니겠지.’


전사로서도 아득한 경지인―― 하물며 최강이라고 선언했다. 저 교황이 말이다.


그러한데 마법으로 델리안을 넘어선다는 건 있을 수 없달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잘못됐다는 기분마저도 든다.


재빨리 고개를 흔들어 떨쳐낸 홀린은 먼저 선두로 앞장서는 소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얼마나 빨리 갈지는 모르겠고 뒤처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랜만에 제대로 뛰어볼 수 있겠다는 설렘이 더 앞섰다.


그렇게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있으려니――


제지하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어딜 가느냐?!”


놀라울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다. 그 심정을 그대로 담아 노려보았다.


이 막돼먹은 나라의 단장이라는 자를.


그런데 막아 세운 저자는 자신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다. 시선은 오로지 소녀에게만 쏠려있었다.


일종 일관 대단한 집착이다. 아무리 자인 디바오러라 사칭한 게 마음에 안 들었다지만, 교황이 이를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린 소녀에게 잘도 저런다.


‘신언이라고 하는 뭔가의 억지력도 발현했는데 말이야.’


그건 정말 깜짝 놀랐다. 갑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릎을 꿇게 만든 그것은 분명 힘에 의한 압박은 아니었기에.


잘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였다. 홀린이 느끼기에도 평범하진 않았으며 신성하다고까지 여겨진 것이었다. 그러니 사도의 이름을 계승하기엔 정당성이 충분해 보였다.


신언을 알고 있던 저들은 더욱 뼈저리게 이를 느끼고 있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한 나라의 중추라 할 수 있는 단장이 저 꼬락서니다.


‘역시 이 나라는 글러 먹었어.’


덕분에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 당사자인 소녀도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딱히 그렇진 않았다. 소녀는 발걸음을 멈춘 채 가만히 서서 차분하게 단장을 살펴보기만 했다.



“흐음······ 다시 봐도 역시 닮지 않았어. 이제 보니까 닮은 건 머리카락 색뿐인가. 하긴 애초에 난 루데릭이 성장한 모습 자체를 본 적이 없었구나. 다른 나도······ 비슷하네.”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한 소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세계는 얼었다.


그런 일은 없었다고 착각할만한 일순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세계는 한순간 얼었었다.


형용할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 허용 가능한 범위를 초월한 살기로 인해서.


자신을 포함해 여기저기 거칠 게 토해내는 숨소리가 꿈이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죽지 않은 건 짧았기에, 어쩌면 단순한 우연으로 산 건 아닐까 싶었다.



“홀린, 괜찮다. 이제 됐네.”


델리안이 손을 내리눌렀다.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내려보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창을 겨누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어린 소녀를 향해······


그렇지만 식은땀이 가득한 손은 달달 떨리고 있어 제대로 겨누긴커녕 그저 들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창술을 배웠다고―― 달인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자의 자세라고는 결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은 소녀는 어딘지 모를 먼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아. 실수했네. 끊어줘서 고마워.’

『······이젠 괜찮은 겁니까?』

‘엉. 너도 알잖아. 그냥······ 옛 생각이 나서 그랬어. 다 진정됐어.’


잠시 이쪽의 속을 읽으려던 것인지 아이는 침묵했다. 이윽고 확인을 마쳤는지 조용히 의사를 전달해왔다.



『아시겠지만 지금 그들은 당신이 알던 그들과는 다릅니다.』

‘그러······네.’


리아는 깊게 숨을 내뱉었다.



‘말리는 게 빨라서 살았어. 예상해둔 거야?’

『당연합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있어서 가장 죽이고 싶은 대상들이었으니.』

‘죽일 수가 없는 녀석들이었으니 더더욱 그랬었지. 그래······ 바지탄스라는 이름이었구나.’

『말씀드렸듯 당신이 아는 자들이 아닙니다.』

‘알아. 지금 나의 기억을 봤으니까. 잘도 아가씨라며 깍듯이 대하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애석하군······’


아아. 정말로 애석하다. 모처럼 살아있는 녀석들을―― 이 시기엔 살아있는 경우가 없다시피 한 그놈들이 전원 멀쩡히 살아 숨을 쉬는 특수한 때이건만.


다시는 없을 기회다. 분명. 그러한데 할아버지와 부모님, 마을 사람들을 학살한 그놈들을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를 이렇게 보내야만 한다니······


‘한 번도 아니고 셀 수도 없이 반복해온 그들을 말이지.’


한탄하고 있으려니 기척이 느껴진다. 조마조마 떠는 아이의 기척이.


리아는 힘을 뺐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신의 딸과도 같은 애가 노심초사하는데 엄마라는 인간이 언제까지고 꿍할 수도 없는 노릇이잖나.


벌어지지도 않은 일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크게 숨을 쉬어 떨쳐낸 리아는 주위를 둘러보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사과하였다.



“아, 미안, 미안. 조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지 뭐야. 다들 미안하게 됐어.”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긴커녕 다들 함부로 말을 걸기조차 두렵다는 듯이 겁에 질린 눈을 하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방금 살기는 확실히 좀 심했으니.


작게 한숨을 토한 리아는 특히나 놀란 눈을 한 그에게 말하였다.



“리시타. 당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니까 너무 마음에 담진 말아. 그리고 아까 물었던 말에 답을 하자면, 일격만 먹이고 돌아간다고 했었지? 그래서 가는 것뿐이야. 당신은 지금 우릴 신경 쓸 때가 아니고. 그보단 조금 후면 도착할 저거에 사력을 다해. 살고 싶으면.”


그럼 간다고 작별 인사를 한 리아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몇 걸음도 가지 않고 다시금 멈춰서고는 돌아보았다. 계속 신경에 쓰이던 걸 말해주기 위해.



“마지막으로······ 당신, 무의식중에 내 잔재를 쫓는 모양인데. 그거 그만두도록 해. 의미도 없을뿐더러, 점차 허무해질 거야. 당신이 쫓는 건 애당초 있지도 않은 허상이니까. 그런 것보다는 현재의 자신을 가다듬어. 그럼 언젠가는 도달할 수도 있을 거야. 당신이 원하던 꿈에.”


리시타는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을 거다. 하지만 저 남자는 자신이 인정했던 사람이다. 알아서 잘 극복해낼 거다.


만약 그러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나라면 어찌어찌 그를 바로 잡겠지.


‘이런 미래를 만들어낸 나니까.’



“그러면 진짜 가볼게. 예하도 힘내. 응원은 안 하지만 말이야.”

“알았다. 그대도 조심히 가게나.”

“응. 만나서 나름 반가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고?”

“나 또한 반가웠네만, 그건 장담하진 못하겠군.”

“그래? 마음대로 하셔.”


그걸 끝으로 리아는 달려 나갔다. 이번엔 아무도 막지 않았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일행들을 이끌고 리아는 제국 쪽 방면의 관문을 향했다.


그렇게 사람들을 물려놨기에 마치 유령도시 같은 스산함이 감도는 길을 묵묵히 달렸다.


도중 너무 빨라 이제 막 회복한 홀린이 살짝 뒤처지기도 했으나, 델리안이 여러 버프를 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일정하게 갈 수 있었다.


관문은 10명의 병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렇지만 저들이 이 속도를 따라올 순 없다. 무시하고 지나쳐 세인트리안을 벗어났다.


그리고 향한 곳은 10km는 떨어져 있는 수풀 림.


이곳은 델리안이 구출한 사람들을 옮겨놓은 곳이었다.


인기척이 나자 경계하고 있던 그들은 이쪽을 확인하고는 덮어놓은 수풀을 걷고 밖으로 나왔다.



“오오! 게헤르시여, 무사하셨군요. 세니알 공께서도. 무시무시한 기운들이 풍기길래 걱정했습니다.”


반갑게 맞이한 사람은 처음 구출한 여성 수인으로, 그녀는 진심으로 안도했다는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른 수인들도 마찬가지로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고마워. 근데 그거 내가 한 거야.”

“예······?”


바뀐 분위기 탓인지 얼빠진 얼굴을 하는 수인들을 뒤로하고 리아는 또 하나의 마력―― 델리안이 구출한 또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다.



“오호······ 오랜만이네, 프리에나.”


아직 정신을 잃은 채로 수풀 속에 웅그리고 있던 그녀―― 프리에나를 확인한 리아의 얼굴엔 반가움이 깃들었다.


프리에나는 자신이 알던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천성적인 알비노로――현재 자신에 의해 안 지식―― 인한 하얀 머리하며, 이전 수인의 나라 카이낙스에서 봤던 그녀와 완전히 같았다.


복장조차도 본인의 첫 사냥물인 언아이올 화이트 타이거의 가죽을 옷으로 만들어 통째로 두른, 멀리서 보면 작은 백호 같은 차림새였다. 다만 여기저기 가죽이 찢어지거나 해져있어 꽤 험한 꼴을 당했다는 걸 추측하게 했다.


그렇게 살펴보고 있으니 델리안이 곁으로 다가왔다.



“어떻나? 급한 대로 치료하긴 했는데.”

“음. 나쁘진 않게 됐어. 근육이나 신경의 연결이 조금 미흡하게 된 정도? 가만히 놔둬도 일주일이면 다 나을 거야.”

“그런가.”


안심하는 델리안을 본 리아는 드디어 굳은 얼굴을 풀고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치유]를 사용하여 마저 프리에나의 상처를 치료하였다. 덤으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백호 옷도 멀쩡하게 수선해줬다.



“여전히 훌륭한 솜씨구나.”

“뭘. 델리안이야말로 제법 많이 늘었어. 고치는 쪽은 영 젬병이었잖아.”

“그랬었지······.”


깊은 여운이 느껴지는 델리안의 말을 들으며 리아는 일어섰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델리안도 따라서 고개를 올렸다.


후우우웅――


폭풍처럼 바람이 밀려온다. 이윽고 이 주변도 먼지와 함께 훑었고, 그 세기로 인해 나무와 수풀들이 요동을 쳤다.


하지만 이곳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에르가 즉시 보호막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걸 모르는 수인들만이 주변만 날뛰는 이상 상황에 어리둥절하였고, 마침내 구름을 밀어내고 그것이 등장했다.


――불타는 듯 시뻘건 운석이.


에르와 델리안을 제외한 모두가 입을 떡 벌리고 눈을 부릅떴다.


크기가 크기이다 보니 무리는 아니다. 저 운석은 세인트리안 영토 절반에 가까운 덩치이니까.



“저, 저기······”


겁을 먹은 듯 수인들은 털을 곤두세웠다.


내심 당장이라도 도망가고 싶은 모습이었다만, 머리는 이곳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는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였다.


리아는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진정시키려 하지 않았다.


구출은 이미 해줬다. 도망치든 이 자리에 남든 이후의 선택은 본인들의 몫이며,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본인들이 지고 가는 거다. 이 이상 해줄 의리 같은 건 없다.


그렇게 올려다만 보고 있으니 델리안이 느긋한 태도로 물어봤다.



“어찌 될 거라고 보나?”

“당연히 막아내겠지. 델리안도 저 정도에 죽거나 하진 않잖아?”

“나야 그렇다만······”


아무렇지 않게 하는 대답에 수인들은 화들짝 놀라고는 경외 어린 눈을 하였다. 하물며 홀린마저도 상당히 놀란 눈치다.


맨날 붙어 다니는 홀린이 델리안의 저력을 모른다는 건 좀 의외지만,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너무나 평화로운 이곳에선 델리안이 전력을 발휘하는 상황 자체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건 교황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그는 더욱 제힘을 발휘할 기회가 훨씬 적을 것이다.



“바오로 교황은 강해. 특히 무생물에 한에서는 델리안의 생각보다도 훨씬 강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어.”

“무생물에 한정된 건 또 뭔가 싶다만······ 그만한 힘이 있는데 어째서 그땐 합류하지 않았던 겐가?”


델리안의 목소리에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당시를 떠올렸던 거겠지.


하지만 그럴만한 사정은 있었다. 피치 못할 사정이.



“그 사람이라고 세계가 위험한 상황인데 자기 한 몸 간수하려 토벌대에 참가하지 않은 게 아니야. 그저······ 그럴 수가 없었던 것뿐이야. 한 마디로 약점이라는 거지.”

“약점?”

“응. 교황―― 바오로 클레멘스는 세인트리안의 영토를 벗어날 수가 없어. 벗어나는 순간 바로 죽어.”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냐는 듯이 델리안이 쳐다봤다.


그야 한 지역을 벗어나면 비명횡사한다는 데 저렇게 보는 것도 이해는 간다. 더욱이 그게 초월자에 이른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누구도 믿기 힘든 이야기일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나 사실인데.



“교황은 지극히도 평범한 사람이야. 다만 한 가지 특기가 있었어.”

“그게 뭔가?”

“계약. 오로지 그것만이 다른 분야엔 눈곱만치도 재능이 없던 그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었어. 혼에다 거는 계약 있잖아. 델리안도 아는 그거. 지금의 나는 [맹약]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교황이 생각해낸 거야. 그리고 기억할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대를 강제로 따르게 하는 거. [예속의 서약]도 거기서 파생되어 나온 거고. 뭐, 그래봐야 둘 다 같은 계약일 뿐이지만.”


놀라는 델리안에게 리아는 이어서 말하였다.



“왜 그랬는지는 나도 몰라. 대략적인 건 예상이 가지만. 어쨌든 교황은 계약을 했어.”

“저 토지와?”

“아니. 예리하긴 한데 틀렸어. 말했잖아. 교황은 평범한 인간이었다고.”


그 말을 들은 델리안의 눈엔 이해한 광채가 깃들었다.


이것을 본 리아는 이젠 제법 거대한 윤곽이 확연하게 보이는 운석에 시선을 옮겼다.



“맞아. 스스로에게 계약을 건 거야. 아니, 제약이라고 봐도 되겠지. 그는 이 땅에 묶여있기로 했거든. 힘은 이를 대가로 얻을 수 있었던 거고.”

“계약이라는―― 단 하나밖에 없는 그 재능이 있었기에 가능한 기적이었겠군.”

“응. 그렇지 않으면 그딴 편법이 가능할 리가 없지.”

“하지만 이단이라 할 만한 술수다. 성공했다 한들 분명 따라오는 리스크가 존재할 터. 아닌가?”

“역시 델리안이야. 아주 정확해. 우선 그에겐 미래가 없어졌어. 알다시피 아무리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죽어라 하고 노력하면 초월자에 도달할 수도 있잖아? 사람 앞날은 어찌 될지 모른다는 거지. 교황은 그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버린 거야. 현재를 위해서. 그렇기에 그는 지금 서 있는 곳이 종착지. 더는 강해지지 못해.”


거기까지 말한 리아는 문득 옛 생각이 났다. 교황으로서가 아닌, 바오로 클레멘스라는 한 인간과 술잔을 나누던 그때가.


이만큼 겁쟁이인 사람도 또 없을 거다.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자였었다.


하지만 그 각오만큼은 절대 비웃을 수가 없었다.



“교황이 바란 건 이 땅의 인간을 통제할 힘이었어. 그러므로 그는 이 땅에선 누구보다도 강력할 수가 있어. 하지만 통제를 벗어난――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겐 어떠한 힘도 발휘할 수가 없는 리스크가 생기고 말았지. 이 땅을 벗어날 수 없는 건 당연한 수순이고.”

“모순이 있긴 하다만······ 강해진 방법 자체가 정상적이질 않으니 그러한 뒤틀림이 생기는 건가.”

“그렇겠지.”


지금의 자신은 몰랐겠지만 사실 세스의 일격도 상당히 위험했었다. 세스가 직접한 것이라면 괜찮았겠지만 그걸 행하는 건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의 약점은 방어조차도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겐 그리 힘을 쓸 수가 없는 치명적인 것이었다. 공격할 때보단 조금 낫지만.


교황이 나타나는 게 늦었던 것도 이를 대체할 아티팩트와 신기들을 주렁주렁 챙기느라 그런 거였다. 대표적으로는 들고 있던 석장. 그건 디바오러가 남기고 간 것으로 신기중 하나였다.


하지만 본인의 약점을 알고 철저히 준비했어도 결국 한계는 존재했다.


세스의 일격까진 어떻게든 막아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의 자신이 행하려 했던―― 세스를 잠재웠던 [유성 천공]은 절대 버텨내지 못했을 거다.


솔직히 그건 자신조차도 실현 불가능한 정신 나간 것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아이라는 묘한 존재는 진땀빼며 자신을 부른 것이다.


――수백만 명이 죽는 대참사를 막아내기 위해.


물론 지금의 자신 또한 나이니 후회 따윈 하지 않고 의연히 넘어가긴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음엔 이 일이 언제까지고 남아 괴롭게 할 거다. 분명히.


아이는 이것을 막은 거다. 지금의 자신이 상처받지 않도록.


‘참으로 기특하구먼. 안 그래?’


능글맞게 물어보았으나 대답은 없었다. 그 대신이랄까, 델리안의 물음이 들려왔다.



“근데 왜 저런 운석을 만들어내어 떨군 게냐?”

“대충 눈치챘겠지만, 교황은 통제할 대상이 아닌―― 무생물에는 상당한 권능을 발휘할 수 있어.”

“그래서 묻는 거다. 꽤 관대한 처사이지 않은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에게 보여주기식이랄까? 속인다고 해도 될 거야. 지금의 내가 보더라도 납득할 수 있게. 그래서 세스의 일격보다도 적당히 강한 운석을 준비한 거야. 겉보기엔 화려하잖아. 분명 지금의 나는 ‘메테오다!’라면서 강력한 마법이라도 떨궜다고 여길걸?”

“······그걸로 괜찮겠나?”

“응. 어차피 저건 덤이야. 진짜 한 방은 아주 큰 걸로 먹여놨으니 충분해.”

“그렇군.”


그 말을 끝으로 서로 조용히 떨어지는 운석을 쳐다봤다.


점점 지상을 향해 다가오는 운석은 안 그래도 컸던 덩치가 더욱 커 보인다. 저대로 떨어진다면 피해는 세인트리안에 국한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작됐다.


성지에 피해 따윈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세인트리안의 전역에서는 마력이―― 모든 인간에게서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뿜어져 나왔다.


저 영토에서 이것이 가능한 인물은 단 한 명뿐.


빠져나온 마력은 곧장 교황에게로 향했다.


인간을 통제한다는 특수함 덕분에 타인의 마력에도 아무렇지 않은 교황은 수천만 명분의 마력을 품고 날아올랐다.


곧이어 육안으로 보이게 된 교황은 무수히 많은 마력으로 인해 빛의 분산처럼 알록달록한 오라를 두르고 있었다. 그 뒤를 조금 여력이 남은 사람들의 지원 사격이 쫓았다.


그렇게 큰 무지개의 빛 하나와 작은 여러 개의 불빛이 운석을 향해 접근하였다.


짤랑――


명랑한 소리가 크게 울리고, 밝은 빛이 번쩍였다. 흡사 대낮이라도 된 듯하다.


이 엄청난 광량 속에서도 전혀 지장이 없었던 리아는 눈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보았다. 운석이 테두리부터 빠른 속도로 분해되고 있는 것을.


다시 어둠이 내려왔을 때 운석은 사라지고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놀라는 건 수인들과 홀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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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132 22.07.09 91 0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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