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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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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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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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3 0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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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DUMMY

“리시타. 너······ 진짜 괜찮은 거야? 함께 가도.”


조용히 묻는 동료의 말에 성기사단의 단장, 리시타 비론 브리타스는 인상을 팍 구겼다.



“도대체 몇 번째냐. 괜찮다고 했잖나.”

“······.”


짜증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같이 걷는 동료―― 서로 일반 단원일 때부터 대련하는 등 친하게 지내왔던 그는 게슴츠레하게 리시타를 보았다.



“······넌 별로 떠올리지 못한 모양이네.”

“뭐가?”

“아냐, 됐어.”


그렇게 말한 그―― 제1 위상, 가이란은 돌연 분위기를 밝게 했다.



“그나저나 네가 있어서 솔직히 살았어. 나 혼자서는 어떻게 그 여자를 만나야 할지 막막했거든. 심판관이라 공공연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뭐, 말해봤자 그게 뭐냐고 바로 입구에서 막히겠지만.”

“······.”

“응? 아직도 꿍한 거야? 에이~ 진짜 별거 아니래도.”


리시타는 잠시 동료인 가이란을 째려보았으나 거기서 끝내기로 하였다. 주변에 눈이 많기 때문이다.


체격이 좋은 건장한 남자 둘. 거기다 한 명은 눈에 띄는 성기사단의 갑주다. 그것도 다른 성기사들과는 달리 제법 특색있는 형태였다.


성국 밖에서 성기사는 안 그래도 보기가 힘들다. 눈길을 끌기엔 이 이상 더 좋은 게 있을까.


눈썰미가 좋은 이는 벌써 단장이라는 걸 알아차리고는 꽤 빤히 쳐다보는 중이다. 여행자 복장인 가이란은 아마 자신의 견습 수행원쯤으로 생각하고 있을 거다.


섣불리 오해를 불러일으킬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속으로 혀를 찬 리시타는 곁눈질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열띤 얼굴로 한 가지의 주제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정말 잘도 멋대로 떠들어대고 있다.


하지만 겉으로 감정을 내보일 순 없다. 지금 자신은 저리 열을 내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관심거리다.


얼굴 가득 궁금증을 품고 있음에도 잔뜩 정보를 들고 있을 이쪽으로 다가오지 않는 건 그저······ 단장이기에 꺼려졌을 뿐. 지금도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리는 저 소문은 결단코 성국의 사람들에게는 그리 반기지 못할 소식이기에 궁금하면서도 함부로 다가오질 않는 것이다.



“신경 꺼. 어차피 사실뿐이잖아?”

“······뭐?”


뿌득――



“어이쿠, 진정해. 사람들이 본다고?”


리시타는 꽉 깨문 이의 힘을 뺐다. 분노가 들끓었지만 확실히 가이란의 말대로 길거리에서 흥분하는 건 좋지 못하다.


그 모습을 잠시 살피던 가이란이 진정됐다고 느꼈는지 슬며시 물었다.



“근데 이렇게 천천히 가도 괜찮은 거야?”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아니, 이스피리아인 건 이미 알고 있잖아. 그런데 이렇게 조사하면서 갈 필요가 있냐는 것이지.”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다.”

“확실히라······ 하긴 그 여자가 발뺌하면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긴 하지. 그런데 다 좋지만 이렇게나 남겨 놓은 흔적이 없어서야 원. 뭐, 나야 그 여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시간이 얼마큼 걸리든 상관없지만.”


그걸 끝으로 잠시 가이란은 조용히 걷기만 했다. 그러다 묘한 감탄을 해댔다.



“걔네들도 생각이 없진 않았나 봐. 아니, 반대로 철저히 계산 아래 이루어진 행동이었겠구나. 특히 제국 쪽 방면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 아주 절묘해. 그거 때문에 그 여자가 제국 출신이 아니냐고 떠들어 대잖아.”


그건 정말 절묘한 한 수로, 이쪽이 멋대로 정보를 발표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활용한 최고의 계책이었다.


크게 한 방 먹었다던 예하의 말도 이를 뜻하던 것이다. 그걸 조사하다 뒤늦게 알게 되었다.


‘더불어 신언······ 그것만 없었더라도 이 정도로 몰리진 않았을 텐데.’


어째서 이스피리아가 신언으로 말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 예하는 디바오러의 정식 계승자이니 가능한 것이라고는 했지만, 그건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기분이 어떻든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다. 분명 신언은 세인트리안 전역에서 들을 수 있었고, 소문도 벌써 성국과 인접해 있는 이곳 콜다리움까지 퍼져있다.


‘아니, 다 변명일 뿐이지······’


사실 냉정하게 말해서 신언이 없었어도 몰리는 정도만 좀 달랐을 뿐,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다.


이겼으면 모를까, 졌기 때문이다.


두 명을 상대로 하루아침 만에 성국이 패했다는 사실을 어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승자인―― 멀쩡히 잘 살아있는 이스피리아의 정체를 이쪽이 먼저 밝힐 수도 없었다. 그걸 밝힌다는 것은 곧 성국이 졌다는 걸 알리는 것이기에.


물론 목격자는 없다. 주변을 모두 물려놨기에 진실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 대충 줄거리를 만들어 내어 변절자를 제압했다는 식으로 꾸며도 됐을 거다. 주범인 이스피리아는 범죄자 중 한 명을 내세우면 대중들도 얼추 선동됐을 터.


그런데 아무리 숨기려 들어도 결국 진실은 남아있다. 자칫하다간 진짜 사건을 일으킨 이스피리아에게 좋은 이용 수단으로 쓰여질 수가 있는 것이다.


오히려 진실이 밝혀졌을 때 성국으로 돌아올 위험성을 생각해보면······ 선뜻 실행해볼 엄두 따윈 안 난다.


이래저래 신언이 없었다고 한들 성전의 선포로 인한 뒷수습이나, 이번 일로 소실된 결계, 아티팩트 등으로 인해 매우 혼란스러웠을 거라는 건 주지의 사실. 괜한 가정으로 좀 더 나은 상황을 그려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캬. 단순 무식한 그 여자의 머리에서 나왔다고는 믿기지가 않아. 아, 같이 왔다는 남자가 있었다고 했지? 그럼 그 녀석이 짰겠네.”


가이란은 확신이 가득했다. 마치 이스피리아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이 또한 의문이다. 도대체 어디서 그 변절자를 만났길래 저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일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굳이 묻고 싶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 왠지 듣고 싶지 않다고 할까, 그래서 자신답지 않게 그러려니 하고 넘기기로 했다.



“으음. 그런데 기껏 정보를 아는 놈을 찾았건만······ 쯧. 전혀 불질 않으니. 슈라트 보르셈이라고 했던가? 겨우 길드 마스터 주제에 아주 배짱이 좋더라.”

“겨우가 아니다. 그게 길드 마스터다운 것이었겠지.”

“그러슈? 어쨌든 아무것도 못 들었는데 그냥 가도 되는 거야?”

“위압해봐야 입을 열 자가 아니다. 거기다 이스피리아가 그곳에서 모험가로 가입했다는 사실만은 말해주지 않았나. 그걸로 충분하다.”

“자인 디바오러라고 했지 이스피리아라고는 안 했잖아. 그것만으로는 어딜 어떻게 봐도 연관 짓기에는 힘들어 보이는데······ 모르겠다. 만족할 만큼 조사해 봐.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다.”


어깨를 으쓱이는 가이란을 잠시 노려본 리시타는 묵묵히 몰려드는 시선을 뚫고 계속해서 길을 걸었다.











“우으으으~~ 드디어 끝났다.”


깊은 해방감 같은 여운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한 리아는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런데 그게 못마땅했는지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뭘 힘들었다는 듯이 떠드냐? 아무 긴장감도 없이 손가락만 튕겼을 뿐이면서. 걸린 시간도 채 1분이 안 됐지? 남들은 아등바등 애쓰는데 말이야.”

“윽······.”


암만 사실이라도 너무 가차 없다.


모처럼 옛 학창 시절의 기분을 맛보려 했건만.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 줘도 되는 것이 아닌가.


내심 불만스러운 리아는 딴지를 건 그녀, 루비아를 돌아봤다.



“뭐?”

“아, 아뇨······ 그, 그렇지만 루비아 씨도 금방 끝내셨잖아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지만 지지 않고 한 마디 말대꾸를 한 리아는 흘깃 옆자리인 루비아의 책상 위를 쳐다봤다.


그곳엔 그녀가 만든 탁상형 시계가 있었는데, 리아가 만든 것과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는 완성도를 자랑했다. 제작까지 걸린 시간도 대략 4분 정도로 큰 차이도 없었다. 게다가 심상마법이 아니라 술식마법으로 했으면 아마 더 빨리 만들지 않았을까도 싶다.


그렇지만 루비아는 오히려 기가 찬다는 듯이 리아를 봤다.



“당연한 소릴 하네. 이 내가 이런 기초 클래스에 시간을 잡아먹을 거 같아?”

“응? 어째 말씀하시는 게······”

“너 도대체 날 어떻게 보고 있는 거야? 당연히 공국에서 어지간한 것들은 전부 배워뒀지. 베르다드에서 배울 건 연구반이나 최상급반 정도는 가야 좀 있을걸?”

“조기 교육이라는 거죠? 하긴 공주님이시니 그럴 만도 한가. 어라······? 근데 왜 저와 같이 기초반을 듣는 거예요? 다 아시는 내용이잖아요.”

“왜겠냐?”

“아! 혹시 저랑 라프리트 씨랑 같이 수업 들으시려고?! 하지만 루비아 씨······ 그건 감사하지만 모처럼 학원에 오셨는데 좀 더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수업을 들으시는 편이 좋지 않나요?”

“쯧······”


남이 걱정해줬건만 오히려 루비아는 못마땅해하며 혀를 찼다.


덕분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는데, 그 틈을 타 옆자리의 라프리트가 끼어들었다.



“자자.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죠. 강의실도 비워야 하잖아요.”


왠지 다급해 보이는 라프리트의 말마따나 다음 이곳에서 시험을 치를 학생들이 있기에 눌러앉아 떠들 순 없는 노릇이다.



“아, 잠시만요! 금방 다녀올게요.”


일방적으로 알린 리아는 뭐라 할 새도 없이 빠르게 강단으로 내려갔다.



“선생님, 수고하셨어요!”

“응? 아하, 자네였군.”


짐을 정리하고 있던 이 수업의―― 마도구 제작 초급반의 담당자인 노교수는 활기찬 리아의 인사에 손을 멈췄다.



“이스피리아 학생도 지금까지 수고했다네. 수업 태도는 영 좋다고 할 순 없었지만.”

“헤, 헤······ 어, 어쩐지 죄송하네요.”

“괜찮아, 괜찮아. 나름 해탈했네. 게다가 내 선입견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들게 됐어. 수업에 있어 중요한 건 수업 태도가 아니거늘. 잠을 자든 뭘 하든 제대로 수업의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 가치 있는 일이지 않겠나.”


‘······보, 보통은 자면서 수업을 듣진 않을걸요.’


거의 매 수업 꼬박꼬박 꿀잠을 잤던 리아는 미안함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나 이내 처음과 변함없는 태도로 자신을 대해주는 노교수의 행동에 미소로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좋은 가르침 덕분에 많이 배우게 됐어요.”

“도움이 됐다니 그거 다행이로군. 매번 너무 쉽게 해내서 별로 배울 게 없나 내심 조금 걱정했네.”

“아, 아뇨! 진짜로 많이 배웠어요. 저 마도구를 만드는 방법 같은 거 전혀 몰랐거든요.”

“그런 것치고는 매우 훌륭한 솜씨였다만······ 그 부분은 과연 추천생답다고 해야겠지. 나도 덕분에 좋은 자극이 됐단다. 다음 학기에서도 열심히 하게.”

“네! 근데······ 선생님은 계속 초급반을 맡으시는 거예요?”

“기초는 중요하잖나. 최대한 신경을 써야 하니 나 말고도 초급반의 교수들은 전부 그대로 초급반을 맡을 거란다.”

“그렇군요······”


노교수와는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다른 선생님들도.


꽤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야 조금 친근하니 안면 좀 텄는데. 하다못해 마지막으로 최대한 고마움을 담아 예를 표하자.


리아는 정중히 시험 수고했다고 이야기하는 노교수와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다녀왔어요. 기다리셨죠?”

“별로. 이제 막 버려두고 가려 했어.”

“말씀하시더라도――”

“――아아. 됐네요. 너도 바쁜 주제에 땍땍거리지 좀 마.”


리아는 딱히 별다른 반박이 없는 라프리트를 올려다봤다.



“바쁘셨다면 먼저 가시지······”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리아 양. 하지만 인사 정도는 하고 갈 여유는 있답니다?”

“헤헤. 고마워요. 필므 씨도요.”


같이 수업을 듣는 필므도 기다려 줄 요량이었던지 말을 걸자 얼굴색이 밝아졌다가 갑자기 흐려졌다.



“왜 그러세요.”

“죄, 죄송합니다. 그저······ 이스피리아 님과 함께하는 수업이 끝났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그만.”


그렇게 말한 필므는 너무나 원통하다며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저주했다.



“그만들 떠들고 이만 가자. 바쁘다고 했지?”

“어, 네. 루비아 씨도 기다려 주셔서 고마웠어요.”


짧게 대화를 마치고 강의실을 나오자 정말로 바빴던 건지 루비아는 필므를 데리고 곧장 어딘가로 떠나갔다. 라프리트도 마찬가지. 일이 있다며 굉장히 미안해하면서 먼저 갈 길을 갔다.


요즘 들어 바쁜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 배웅해 준 리아는 곁에 있는 에르를 돌아보았다.



“저희도 이만 갈까요?”

“오늘도?”

“네. 아직 학원장님과 약속까진 시간이 남았으니 좀 들르고 싶어요.”


별다른 말 없이 찬동해주는 에르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다드의 도서관으로.


왕성에 불린 지도 벌써 보름. 최근 매일 가고 있는 곳이라 리아는 아주 익숙한 걸음걸이로 학원의 복도를 나아갔다.


둘러보는 학원 내부도 라프리트가 이야기해준 대로 세스 때의 일은 완전히 가라앉아 가끔 이야기가 들려올 뿐이었다.


다시금 돌아온 평화로운 학원 생활. 아주 만족스럽게 되었다.


하지만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들려왔던 거다.



“와! 이스피리아 님이셔!”

“오······. 오늘도 요정처럼 아름다운 모습이시군.”

“응. 굉장히 의젓해 보이셔.”

“그 슈페리얼 래퍼드는 데려오시지 않으셨네.”


――라고, 자신을 보게 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가.


물론 그뿐이었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거다.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지만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에.


정작 문제는 다른 이들―― 방어전을 함께 치른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조금 달랐다.


그때의 189명의 학생은 도대체 무엇에 그리 감명이 깊었던 건지 선망을 넘어 뭐라 잘 설명할 수 없는 열렬한 시선을 보내왔던 거다. 심한 사람은 이전 악수회에서 손등에 키스해주는 등 그 정도가 좀 지나쳤다.


하지만 그것도 모자랐는지, 이후로도 이쪽을 발견하게 되면 무지하게 높은 사람을 대하듯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거는 게 아니겠는가.



“이것은 이스피리아 님. 만나 뵐 수 있을 줄이야. 오늘은 아주 운수가 좋은 날이 될 거 같습니다.”


지금 이렇게 말이다. 행운의 부적 같은 취급은 덤이고.


리아는 할 말을 잃은 채 앞을 올려다봤다. 지금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을 듯 너무나 부담스럽게 예를 보이는 두 사람을. 기억하기로 이 둘은 제국과 벨루디스 쪽의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소소한 일상 대화는 은근슬쩍 편하게 대해 달라는 리아의 요청과 여태 그랬던 것처럼 귓등으로도 안 듣는 두 사람과의 팽팽한 신경전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한 학생이 마침 떠올랐다는 듯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딜 가시던 길이십니까?”

“저요? 도서관에 가려고요.”

“시험도 끝나셨는데 말입니까?”

“네. 조금 알아볼 것이 있어서요.”

“크으으으! 역시 대단하십니다. 저도 본받고 더욱 열심히 학업에 정진해야겠다고 반성합니다. 물론 내일부터 말이죠. 오늘 겨우 모든 시험이 끝났는데 아무래도 조금 벅차서······ 하하.”

“그, 그렇군요. 열심히 하세요. 잘 쉬시고요.”

“넵! 말씀 감사합니다. 이스피리아 님께서도 부디 많은 성취를 이루시길.”


적당히 대화를 마친 리아는 다시금 너무 정중한 예를 취한 두 학생과 헤어져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과 멀어졌을 때 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왜 내 요구는 듣는 척도 안 하는 걸까······”

“후훗.”

“이, 이게 웃을 일이에요?”

“미안. 그렇지만 저들로서도 나름대로 감사를 표하는 게 아니겠어?”

“알고 있어요. 알고는 있지만······ 정도라는 게 있는 거잖아요.”

“뭐, 그래도 바지탄스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잖아. 그걸로 위안 삼아야지.”

“으윽······”


자그마하게 재차 웃는 에르.


말문이 막혔기도 하거니와 너무나도 반짝거리는 남편을 똑바로 직시하기 힘들었던 리아는 서둘러 발을 놀렸다.


그 과정에서 에르가 다시 웃어 심장에 타격을 받았으나, 어찌어찌 참아내며 겨우 도서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 시험 기간이 끝나니까 사람이 제법 빠졌네.”

“잘 공감할 순 없지만 원래 그런 거야?”

“글쎄요. 저도 예전 학창 시절에는 혼자 방에서 공부했던 스타일이었던지라. 그렇지만 아들 녀석은 시험 기간만 되면 맨날 바삐 근처 국립 도서관으로 갔던 걸 보면 아마 비슷한 타입의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어요. 고시원이라든가 기숙 학원 같은 것도 많았었으니까요.”

“일부러 그러한 곳을? 그렇군······”


알았다고는 했으나 원체 머리가 좋은 에르로서는 굳이 이러한 곳을 찾아와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아무래도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어지간한 책 정도는 한 번 쓱 넘겨보는 걸로 완벽하게 습득할 테니 말이다.


‘뭔가 공부하는 그 분위기가 중요한 거라고 그랬던 거 같기도 하다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네.’


고개를 갸웃했지만,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니 그만 생각을 멈추고 도서관의 문을 열었다.


이제는 제법 눈에 익은 5층으로 나뉜 거대한 도서관의 정경을 빠르게 살펴본 리아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최근 입구에서부터 사람이 붐볐던 것과 달리 내부는 바깥에서 마력을 파악했던 바처럼 꽤 한산해졌다.


제법 새롭다는 기분을 느끼며 입구 옆 카운터에 있는 중년의 여성 사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라? 오늘도 오셨군요. 시험도 끝나셨는데.”

“아직 보고 싶은 것들이 더 있어서요.”

“부지런하시네요. 오늘도 역사 쪽 관련 내용을 찾으시는지요?”

“네.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던 건 혹시······”

“아, 따로 보관 중인 역사서요? 그게 찾아는 봤는데 많지는 않았어요.”


그리 말한 사서는 책상 밑으로 몸을 숙였다. 그리고는 곧장 몸을 일으켰는데 손에 오래된 고서로 보이는 책이 4권 있었다.



“알고 계시겠지만 책에 손상이 없게 봐주세요.”

“네! 조심히 볼게요. 찾아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사서 언니!”

“후후. 뭘요. 이게 제 일인데. 그럼 느긋한 시간이 되시길.”


책을 건네받은 리아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중문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도서관은 가운데 홀이 뚫린 형태였는데, 먼저 도서관에 와 있던 몇몇 사람들은 인기척에 시선을 보냈다.


그런 사람 중 제법 안면을 트게 된 사서들에게 짧게 묵례로 인사를 한 리아는 빠르게 아치형의 계단을 올랐다.


인기가 별로 없는 것인지 역사 관련 서적들은 제일 위층인 5층 구석에 모여있었는데, 실제로도 그리 관심받는 분야가 아닌가 보다. 그렇게 사람이 많았던 시험 기간에도 이곳은 제법 한산했건만 지금은 더더욱 한산해졌다.



‘역사 공부는 중요하거늘.’


조금 애석하게 생각하며 리아는 얼른 근처에 홀이 내려다보이는 자리로 가 앉았다. 제법 명당자리다.



“에르······”


그도 앉으라며 옆자리 의자를 톡톡 두드렸으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살며시 고개를 젓고는 뒤로 와 대기하였다.


에르는 꽤 완고하다. 설득은 힘들다는 걸 이미 몇 번의 시도로 잘 알고 있던 터라 더는 권유하지 않고 받아 온 책들을 보기로 했다.


‘오호. 보호 마법이 걸려있구나. 하긴 그러니까 이런 고서를 보라고 줄 수 있었겠지.’


하지만 조심해서 봐달라는 사서의 주의처럼 보호 마법 또한 완벽한 건 아니어서, 고서로 보일 정도로 세월의 풍파를 맞닥뜨린 모습이다.


‘그렇지만 굉장한 가치를 지닌 책이겠지? 일단 심상마법이 쓰인 고서이기도 하니. 그리고 분명······ 엄청 비쌀 거야.’


따로 보관하기도 했는데 백 퍼센트 비쌀 거다. 어쩌면 문화제 수준일지도 모를 일이고 말이다. 오히려 잘도 보라고 건네줬다는 기분마저 든다.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게, 제일 위에 있는 책에 쓰여있는 제작 연도가 무려 안식력 31년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800년도 더 전이기 때문이다.



“오, 오늘만큼은 최고 국빈이란 직책이 좀 고맙네.”


그게 아니었다면 아마 절대 구경도 못 하지 않았을까.


조금 어색해진 기분으로 리아는 조심스럽게 책을 펼쳤다. 그리고 반대쪽의 끝을 잡아 다시금 조심스럽게 눕혔다.


――이게 읽는 것이었다.


실제로도 책을 펼쳤다가 바로 접어버리는 저 이상한 행동으로 방금 막 첫 번째 책은 모두 읽었다. 농담도 뭣도 아니다. 정말로 중력에 의해 밑으로 떨어지는 그 찰나의 틈에 모든 페이지의 내용을 눈에 새겨넣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해했다는 건 아니다. 그냥 기억만 해뒀을 뿐이다.


그러면 무슨 소용인가 싶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노리던 바였다.


그야 겁나지 않는가.


――문화제일지도 모를 고서를 잡고 본다는 것이.


만약 실수로 손상이라도 내면 그 배상 비용이 도대체 얼마일지······ 상상만 해도 손이 떨려올 지경이다.


그래서 이 방법을 취한 것이다. 내용을 일단 머릿속에 모두 옮기고 본다는, 경이로운 기억력이 없었다면 실행할 엄두도 못 냈을 비합리적인 행위의 끝판 격인 이 짓을 말이다.


하지만 무척이나 겁이 났던 리아는 누가 뭐라 해도 좋다는 기분으로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4권의 고서를 모두 머릿속에 옮긴 리아는 멈췄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손상은 다행히도 없었다.


잠시 숨을 고른 리아는 고서들을 한 곳에 조심스럽게 치워두고는 팔짱을 꼈다. 그리고는 머릿속에서 새롭게 탄생한 고서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표지에서도 그랬지만 다행히 읽을 수가 있네. 같은 공용문자라도 800년이나 전이면 조금 다를 줄 알았는데 말이야.’


안심한 리아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대략 15분 후, 도중 무얼 말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단어들 때문에 헷갈리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만 무사히 전부 읽었다.



“으음. 하지만 이건 좀······”


혼잣말을 중얼거리니 에르가 물어왔다.



“왜? 알고 싶었던 게 없었어?”

“네. 전쟁 이후 휘말리게 된 엘프, 드워프, 수인들, 그리고 일부 협력적이었던 몬스터들이 인간과 교류를 끓었다는 이야기가 잠깐 등장하긴 했지만요.”


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정작 그 전쟁에 대해선 하나도 기술되어있지 않은 거지? 꽤 거대한 전쟁이었다면 반드시 전쟁의 양상이라든가 정리를 해놨을 텐데 말이야. 그런데도 이런 고서마저도 자그마한 실마리가 전혀 없다라······ 어쩌면 아직 못 읽은 다른 책들도 별로 기대할 수 없을지도.”


푸념을 늘어놓아도 어쩔 수 없다. 없는 게 샘 솟아나는 것도 아니니.


리아는 빠르게 단념하고 기왕 온 거 다른 역사서도 뒤져보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걸음을 옮기는데, 그때 굉장히 고심이 많아 보이는 에르가 눈에 띄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확실한 건 아닌데 조금 걸리는 게 있어서.”

“어, 어떤 게요?!”


벌써 보름째 아무런 소득도 없이 반복 작업을 하듯 책을 뒤지던 리아에게는 너무나도 뜻하지 않은 소식이다. 그 기분 그대로 에르에게 달라붙어 옷깃을 잡고는 올려봤다.


잠시 내려다보고 있던 에르는 살며시 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음의 결계를 펼쳐냈다.



“응?”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아하. 그렇군요. 그래서요? 걸리신 게 뭐에요?”

“일단 아까도 말했듯 확실한 건 아니야. 아직 확정하기엔 정보가 조금 부족해.”

“알겠어요. 감안하고 들을게요.”


이쪽의 반응을 본 에르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왠지 고의로 자료들을 처리한 느낌이 든달까, 그러한 심증이 들어. 리아도 비슷한 소리를 했잖아. 어떻게 하나도 기술되어있지 않냐고. 내 생각도 그래. 딱히 승자는 없었지만 그만한 전쟁이었다면 반드시 어딘가에는 기록이 됐을 거야.”

“하지만 전혀 없으니 의심이 된다고요?”

“응. 단지 이곳에 자료가 없을 뿐일지도 모르지만, 여긴 의외로 제법 괜찮게 구색이 갖춰졌어.”

“쉽게 이야기하면 좋은 교육시설이라는 거죠? 그리고 그런 베르다드에도 없는 것이니 인위적인 낌새가 느껴진다는 거고요?”

“맞아.”

“으음. 그럼 어디서 찾을 수 있으려나. 골동품 가게나 시장 같은 데라도 들러야 하나?”

“만약 어떠한 세력이 개입된 것이라면 오히려 그편이 찾을 확률이 높을 거야. 아무리 철저했다지만 분명 놓친 부분이 있을 테니까.”


‘응? 뭔가 이상한데?’


혹시나 하는 기분으로 리아는 물었다.



“설마 에르는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추측한 거 아녜요? 세력이라든가, 뭔가 말하는 게 의도를 파악한 걸로 보이는데요.”

“······.”

“엑?! 지, 진짜였어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에르에 대해서는 가히 루비아 급의 눈치를 자랑하는 리아다. 제법 당혹스러워하는 그의 기색을 알 수 있었다.


암만 조심했다지만 결계를 펼친 것도 좀 유난이다 싶었는데, 남이 들어선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나 보다.


‘아. 도서관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네. 나······ 대차게 소리를 지르기도 했으니.’


창피함과 무심하게 신경 써준 에르에 대한 고마움으로 뒤죽박죽이 된 리아는 서둘러 이야기를 마치기로 했다.


추궁? 그건 하지 않을 거다.


에르의 기본 스탠스는 자신의 도움 없이 스스로 생각하고 배워가길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것이었다. 그러한데도 굳이 돌려 힌트를 준 거다. 여기서 어떻게 더더욱 알려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아내로서 남편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오히려 전화위복!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야!’


후에 모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여 멋들어지게 설명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린 리아는 음흉하게 웃었다.



“그러면 꽤 이르지만 리카드 씨에게 갈까요?”

“괜찮아?”

“네. 벨루디스와 주변국의 역사는 얼추 흐름을 파악했으니까요. 못 읽은 책들도 많긴 한데 제목을 봐서는 겹치는 부분이 꽤 될 거예요. 그 정도라면 넘어가도 괜찮겠죠. 어차피 알고 싶은 건 없을 테고.”

“흠. 그래서 책들을 선별해서 봤던 거로군. 역시 리아야. 어렴풋하게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있었구나.”

“무, 뭐······ 그렇죠?”


아니. 사실은 그냥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비슷한 내용의 책을 계속 읽기엔 아무래도 힘들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역사서를.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보기 위해 앞 장을 읽어 겹치는 걸 걸러낸 것뿐이었는데······ 방금 막 남편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짐했건만 사실대로 말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거짓말을 한다는 것에 조금은 죄책감이 들었던 리아는 황급히 다급한 척 받아온 4권의 책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러고는 먼저 앞장서 걸었다.


뒤에서 어쩐지 웃는 듯한 에르의 기척이 흘렀지만······ 그건 잘못 느낀 거라며 모른 척 넘어갔다.











‘으음······ 여전히 으리으리하구먼.’


학원장실 앞에 멈춰선 리아는 거대한 문을 올려다봤다.


최근엔 자주 들러 익숙했지만 정말 볼 때마다 그 크기와 호화로움에 감탄이 든다. 정말 문짝 하나에 얼마를 쏟은 건지 정확한 액수가 궁금하다.


‘그렇지만 난 성장해냈어. 어제도 해냈고 말이야. 파세 씨가 찾아왔을 땐 직접 체감도 해봤잖아!’


언제까지고 지레 겁을 먹던 자신이 아닌 거다. 이 정도쯤은 이제 에르의 도움 없이도 손쉽게 할 수 있다.


득의양양한 리아는 거침없이 손을 올려 문을 두드렸다.


똑······ 똑······.


그리도 자신만만했건만······ 마음과는 반대로 아주아주 살살 두드렸다. 안에 있는 사람은 문을 두드렸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을 만큼 살살.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상대방의 청력이 좋았나 보다. 안쪽에서 익숙한 마력이 문을 향해 다가왔다.


끼익······


경첩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대는 문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세리오 선생님. 학원장실에서 보긴 또 처음이네요.”

“어라······ 이스피리아 양?”


뭔가를 조심스럽게 살피던 세리오는 방문자가 리아임을 확인하고는 바로 경계의 시선을 거두었다.



“오신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일찍 오셨네요.”

“네. 볼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요.”

“그렇군요······”


말을 흘린 세리오는 빤히 리아를 쳐다봤다.



“왜 그러세요?”

“아, 아뇨. 수업 때에도 느꼈지만 왠지 분위기가 조금 바뀌신 듯해서······.”

“그래요?”

“네. 여유롭달까, 실례지만 좀 더 어른스러워지신 거 같아요.”


아마 좋게 바뀌었다는 소리이지 않을까. 어른스러워졌다는 게 칭찬이 아닐 리도 없고 말이다.


‘그렇지만 새삼스레 언급하는 걸 보면 내 성장이 밖으로 표출된 거 아냐?! 응응. 그게 맞을 거야. 난 여러모로 눈부신 발전을 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눈에 띌 정도라니. 괜스레 뿌듯해지네.’


노력의 성과가 벌써 빛을 보다니.


기분이 매우 좋아진 리아는 들어오라 권하는 세리오를 따라 발걸음도 가볍게 학원장실로 들어갔다.


여전히 학원장실은 난잡했다. 그래도 요즘은 제법 청소하게 됐는지 먼지 자체는 지난번보다는 적었다.


올 때마다 좀 더 깔끔해지는 것 같은 실내를 둘러보고 있자니 응접 테이블에 앉아 있던 리카드가 반긴다.



“빨리 오셨군요.”

“학원장님도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이스피리아 양. 오늘도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밝게 인사를 한 리아는 곧장 리카드의 맞은편에 앉았다.


허락도 받지 않고 꽤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게 학원장실을 찾아오는 것도 벌써 일주일 정도는 됐으니 말이다.


새삼 격식을 차리는 게 더 어색한 기분이랄까? 세리오도 자주 찾아오는 걸 들었는지 눈살을 찌푸리거나 하지도 않았다.



“우선 시험 고생하셨습니다. 그리고 전 강의 만점 축하드립니다.”

“헤헤헤······ 고마워요. 벌써 들으셨나요?”


기초반이기에 시험 기간임에도 도서관이나 리카드에게 들르는 등 여유가 넘쳐흘렀으나 막상 축하해주니 매우 기쁘다. 전생에서도 필기, 실기를 통틀어 만점을 받은 건 체육 과목 하나였었기에 더욱이나.


헤실헤실 웃은 리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근데 두 분은 뭘 하고 계셨어요?”

“저희는 이스피리아 양께서 내주신 과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하~ 잘 되어가나요?”

“그게······”


리카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어느 부분이 힘든가요? 기왕 언급된 김에 봐 드릴게요.”

“괜찮으십니까?! 그러면 염치 불고하고 조언을 얻고 싶습니다.”

“네네. 편하게 물어보세요. 아는 대로 답해드릴게요. 세리오 선생님도 궁금하신 게 있으시다면 사양 말고 오세요!”

“조금 역할이 바뀐 것 같습니다만······ 그런 걸 가릴 처지는 아니겠죠.”


어쩐지 시무룩해진 세리오가 급히 차를 준비하고 리카드의 옆에 앉았다.


건네주는 차를 받은 리아는 줄곧 서 있던 에르를 보며 옆자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데 오늘은 세리오가 있어서 그런지 도서관 때와 같이 슬쩍 고개를 저어 사양했다.


그 모습을 리카드도 보았는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찬크에르 씨, 편히 계셔도 됩니다. 여기 세리오 씨에겐 여러분들의 사정을 조금 말해두었습니다.”

“······.”


정말 어찌 된 건지.


거듭된 말에도 불구하고 에르는 조용히 리카드를 바라보았다. 아니, 눈매가 조금 매섭게 된 것이 째려보는 게 아닌가도 싶었다.



“에르?”


재차 부르니 그때서야 에르는 한숨을 내쉬고는 옆자리에 앉았다.



“걱정하시지 않아도 돼요! 세리오 선생님 무지 착하셔요. 아시잖아요?”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야, 리아.”

“어? 그럼요?”

“······.”


말이 없는 에르.


그때, 그와 교대하듯 놀라 소리치는 외침이 울렸다.



“에에엑?!”


세리오였다. 그녀는 무엇에 그리 놀란 것인지 두 눈을 부릅뜨고는 리아와 에르를 계속해서 번갈아 보았다.


이런 세리오의 반응에 리카드도 무언갈 깨달은 것인지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힐끔힐끔, 에르의 눈치를 굉장히 살폈다.


의아한 리아는 물었다.



“왜 그러시는 거예요? 학원장님?”

“어······ 그것이 말이죠······”


말을 흐린 리카드는 더욱 에르의 눈치를 봤다.



“하아······ 우리의 관계 때문이야, 리아.”

“관계요? 그게 왜요?”


다시금 한숨을 쉰 에르는 흘깃 리카드를―― 이번엔 확실히 째려보는 거라는 걸 알겠다.



“저기, 혹시 두 분은······”


여전히 사슴 같은 눈망울을 크게 뜬 채로 세리오는 더듬더듬 말하였다.


리아는 도대체 왜 그런 것인지 방금 내뱉은 세리오의 말과 분위기를 토대로 잠시 생각해보았다. 그러다 가능성을 추리고 추려 도달하게 되었다.



“아. 세리오 선생님은 저와 에르의 관계를 아직 못 들으셨나요?”

“네······.”

“제가 함부로 말하고 다니기엔 주저돼서 말이죠.”


덧붙인 리카드의 말을 들은 리아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그로서는 굳이 숨기고 있는 이쪽의 사정을 멋대로 떠들기란 아무래도 좀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성실하다고 해야 할지, 융통성이 없다고 해야 할지. 본인의 최측근인 세리오에게 말하지 않은 건 조금 과하지 않았나 싶다.


물론 이쪽을 신경 써주는 것이기에 지적하는 등의 배은망덕한 짓은 하지 않았다. 대신 자발적으로 이쪽의 가족관계를 이야기해주도록 하자.


조금 곤란한 듯한 에르나 리카드가 신경 쓰이기는 하였으나, 나름 돈독히 지내는 그녀만 따돌리는 건 더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세리오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이어갔다.



“남편······ 결혼······ 귀엽디귀여운 아이······”

“저, 저기 세리오 선생님?”

“남편······! 결혼······!! 아이······!!!”

“······.”


길어질 거 같은 느낌이다.


‘내가 결혼했다는 게 그렇게나 신기한가―― 아! 그, 그렇구나. 그게 아니라 세리오 선생님도 한창 그때인가 보네.’


왠지 친가에서 “언제 결혼하니?”, “만나는 남자는 있고?” 등의 닦달과도 같은 물음에 잔뜩 시달리는 세리오가 저절로 그려진다.


이세계이건만 지구와 다르지 않은 부분도 제법 됐었다. 아마 그 부분도 크게 다르진 않을 듯싶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비슷하니 말이다.


‘히, 힘드시겠다.’


악의는 아니고, 순수한 마음에 걱정되어 자꾸만 물어보는 것일 테지만, 당사자로서는 절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처지가 제법 공감이 가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던 리아는······ 잠시 그녀를 혼자만의 세계에 놔두기로 했다.


본인도 자주 하는 현실도피이기에 좋지 않다는 것도 알긴 하지만 이번만큼은 오히려 응원하고 싶은 기분이다. 인사말이 “결혼은 언제 할 거니”로 바뀐 참혹한 현실을 잠시 잊고, 부디 조금이라도 홀가분해지시길 바라며.


작가의말

안녕하세요 라스티아 입니다!


다들 좋은 하루 되세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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