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연재수 :
274 회
조회수 :
33,924
추천수 :
315
글자수 :
3,873,671

작성
22.07.09 08:07
조회
78
추천
0
글자
26쪽

133

DUMMY

순방하는 길목을 막아선 소녀가 있었다.


당돌하기 그지없는 행동을 한 소녀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는 이쪽을 품평하듯 쳐다보았다.



“당신이 이 나라의 대빵이야? 흠. 과연 좀 쓸만하네.”


내뱉는 말조차도 당돌함 그 자체였었다.


――이것이 그녀와의 첫 만남이었다.


솔직히 꽤 유쾌할 뿐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자신에게 저리 대하는 사람은 점차 종적을 감췄으니 말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아예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그리움을 떠올리게 한 소녀를 너그러이 넘어가주고 싶었다만······ 자신을 따르고 모시는 자들에겐 그렇지 않다. 그들은 무례를 저지른 소녀를 붙잡으려고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서야 알게 됐다.


――눈앞에 있는 소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소녀는 한순간에 마법을 완성하고는 다가오던 사람들의 발목을 쳐 쓰러뜨린다.


이토록 마력을 완벽하게 다루다니······ 하마터면 마법을 쓰는 것도 모를 뻔했다. 이 때문에 알아차리는 것도 늦었다. 당시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웠다.


하지만 멍할 수만은 없어, 왜 넘어졌는지 의아해하면서도 다시금 덤벼드는 사람들을 서둘러 말렸다.


그리고······


소녀를 초대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사람들은 당황하며 뭐라 떠들어대지만,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당사자인 소녀도 당연하다는 듯이 웃으며 안내하라고 한다.


덕분에 또다시 만류하는 말들이 튀어나왔지만, 전부 묵살하고 소녀와 함께 나란히 걸어 대성당 가장 안쪽의 내실로 데려갔다. 주변 사람들은 당연히 모두 물렸다.


오면서도 가벼운 대화를 하긴 했지만, 말 그대로 가벼운 대화. 차를 따르고는 본론으로 넘어갔다.


소녀도 기다렸다는 듯,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내 이름은 이스피리아! 내가 당신의 나라에 머물러줄게.”


지나친 당당함은 그렇다고 쳤다. 이 나이나 먹으면 이러한―― 80배나 어린 소녀가 무얼 하든 귀엽게만 비칠 뿐이다.


다만······ 이곳에 머문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물었다.



“그대는 베르다드에서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베르다드는 상당히 괜찮은 곳이었다.


직접 가보진 못했지만, 조사해온 보고서만을 살펴보더라도 최근 들어 매해 그 수준이 올라감에는 경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제법 나쁘지 않은 배움의 터인 건 명백했다.


거기에 벨루디스는 풍족한 나라이다. 타국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비슷하게나마 풍요로운 곳은 성국뿐일 것이다.


안쪽이 썩어들어가고는 있다지만 분명 생활하는 데에는 그곳보다 좋은 곳이 없을 거였다.


작업에 들어가는 중이긴 해도 근 8년쯤은 여유로울 터. 게다가 전란이 벌어지더라도 손쉽게 빠져나올 것이다. 여차 그 땅이 마음에 들었다면 근처로 튀는 불똥을 치우기만 했으면 됐을 거다.


만약 벨루디스가 마음에 들었다면······ 지켜냈으면 됐을 거다. 성국에게서.


――이 소녀라면 그것이 가능하고도 남았다.


당시에도 그것만큼은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듣자 하니 베르다드에 도착한 지도 얼마 되지도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곧바로 뜨기엔 아무래도 일러 보인다만.”


물음을 들은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좀 더 알아간 뒤가 낫지 않았냐고 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


‘배움’이 목적이었다면 말이다.



“그거 진심?”


하지만 소녀에게선 한심하다는 기색이 흘렀다.



“그딴 거야 한눈에 보면 알잖아. 물론 베르다드는 제법 괜찮아. 하지만 그건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다는 거. 아직 발전 도중이야. 제대로 쓰기에는 좀 더 시간이 걸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과 방향성이 달라. 사실 이게 가장 주요했어.”

“방향성?”


질문을 하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무겁고 끈적끈적하게. 하지만 그건 한순간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지만 잘못 보진 않았다. 왜냐하면 찰랑거리는 연갈색의 머리카락 사이에서 비치는 붉은 눈이 섬뜩한 빛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유가 있겠지.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원한. 증오. 분노.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이 얽힌 문제라는 것을. 허나 이토록 진한 기운은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결코 저 나이대의 어린 소녀가 보일만 한 것들이 아니었다.


조금은 걱정스레 보니 소녀는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아, 미안. 조금 진지해져 버렸어.”


보기와 달리 소녀는 눈치가 제법 좋았다. 이쪽의 반응을 예민하게 알아차리고는 심호흡으로 다스렸다.


그것으로 끝. 한순간에 감정을 억제했다.


이처럼 수준 높은 마인드컨트롤을 어린 소녀가 잘도 해냈다. 덕분에 소녀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얼추 알 것도 같았다.


그렇게 어딘가 조금 맹한 모습인―― 평상시로 돌아온 소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방향성 이야기였지? 방향성······ 그래. 베르다드가 지향하는 건 학문적인 요소. 실용과는 꽤 거리가 멀어. 그 단계에 이르기에는 아까도 말했듯 시간이 걸릴 거야. 내가 추구하는 목표엔 부합하지 않지.”

“그래서 이곳으로 온 거였나?”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여기도 처음엔 그냥 살펴보러 온 거였어. 그도 그런 게······ 이 나라는 가운데에 있잖아?”

“무슨 뜻인――”


말을 멈추고 눈을 크게 뜬 자신을 향해 소녀는 순진무구하게 웃어 보였다.



“맞아. 번거롭게 여러 군데를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는 소리야. 피곤하기도 하고, 시간도 아깝잖아? 그래서 이리로 온 거야. 세그언도 대륙 정중앙에 있는 이 나라에.”

“그것만으로 알 수 있다는 건가?”

“나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면 되려나? 공교롭게도 내 마력탐지 범위가 딱 근방 나라들까지거든.”

“······.”

“가벼운 탐색 정도라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힘들게 들르지 않아서 살았다니까 정말.”


솔직히 생각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다.


아무리 인간들의 나라가 모여들었다 해도 그 거리는 상당하다. 벨루디스의 수도인 아네픽시르, 그곳만 하더라도 성국에선 마차로 한 달이 걸린다.


――하루 20시간가량 이동한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그나마 제법 힘이 있는 자라면 1주일 안에 주파할 수도 있긴 할 것이다. ――최근 5일 만에 복귀한 운과 케트로처럼.――


하지만 그 어떤 뛰어난 자라도 성국에서 아네픽시르에 있는 마력을 느낀다는, 망상이란 단어로도 부족한 일은 결단코 할 수 없다.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이야기.


그렇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소녀는 정말로 그 먼 거리에 있는 마력을 느낄 수 있다고.



“여기가 그나마 내 고향과 제일 비슷해. 술식이라는 묘하게 번거로운 마법도 안 쓰고 말이야. 물론 소수만이지만. 게다가 마력레벨 300을 넘긴 사람이 꽤 있어.”

“하지만 다른 곳은 아니다?”

“응. 확실해. 저쪽이 제국이지? 저곳엔 300을 넘긴 사람이 몇 있긴 한데······ 마력의 흐름이 다들 엉망진창이야. 마력조작 훈련은 빼놓고 단순 무식하게 수련만 해댔겠지. 아,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야. 실전에선 괜찮을 테고. 개인적으로는 꽤 호감이 가는 부류야. ······하지만 어느 방면이든 위를 노리려면 마력을 손발처럼 다루는 건 필수 불가결적인 요소잖아? 게을리해선 안 되지. 저 사람들도 더 위로 올라가려면 처음부터 기초를 다시 다져야 하고 말이야. 마법은 말할 것도 없이 술식이고.”

“수준이 떨어진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저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그렇다는 거지. 그런데 여긴 아니야. 다들 탄탄하게 바닥이 깔려있어. 어설픈 부분이 좀 있기는 해도 그건 개인적인 역량. 막무가내식은 아니야. 제대로 체계가 잡혀있어.”

“칭찬 감사하군.”

“뭘.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어깨를 으쓱인 소녀. 그러더니 순간 날카로운 눈빛을 향해왔다.



“그리고 ――당신이 있어.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마력량인 당신이.”

“그렇군. 살펴보러 온 건 날 말한 거였나.”

“뭐, 그렇지. 당신이 인간 중에선 마력이 가장 많았거든. 여기라면 겸사겸사 다른 나라도 살펴볼 수 있었고.”

“참고로 가장 마력이 많았던 자는 누구였는가?”

“전체에서? 음. 그리 생각해볼 것도 없네. 비젠탈이야. 베르다드에 있던 커다란 말 있지? 그 과묵한 아저씨.”

“역시나군.”

“마력레벨은······ 느낌상 당신이 더 높은 듯싶지만. 말하자면 종족 차라는 거겠지. 개인차도 조금 있을 거고.”


――그렇다. 이렇게나 상세한 것이다. 그러한데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녀는―― 이스피리아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일 것이다. 비록 그 내용이 자신은커녕 그나마 떠오르는 비교 가능한 대상이 용왕 정도뿐인 엄청난 능력일지라도 말이다.


위험분자.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스피리아는 자신의 목적을 방해할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라고. 능력 면으로 보나, 자유분방한 사고나 행동 등은 분명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했다.


걱정이 들었다. 망설여졌다. 오랜 세월 일궈놓은 우리가 망가질 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어째서인지 받아들였다. 그것도 꽤 시원스럽게.


자기 자신조차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돌이켜보면 짚이는 건 있었다.


비젠탈에게 아저씨라 한 것이―― 인간 이외에도 인격체로 대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동하진 않았을까, 그러한 기분이 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런 조사도, 진실 규명도 없었는데 안일하긴 했다.


더군다나――



“미리 말해두겠는데. 이곳에 지내면서 나도 일을 하긴 할 거야. 어지간해서는 지시하는 건 다 할 용의가 있어. ――하지만 마음에 내키지 않으면 안 할 거야. 그렇다고 방해는 안 해.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하라는 거지. 그런데도 날 강제하려고 하면······ 다음은 상상에 맡길게.”


――이렇게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나오는 말은 환영한다는 말뿐이었다.



“그대가 좋을 대로 하게나. 다만 이곳에서 지낼 거라면 당신이라 지칭하는 건 그만두게나. 난 상관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을 거야.”

“알았어! 나도 편하게 이스피리아라고 불러줘. 응? 그게 그건 가?”


그렇게 시작된 생활. 다음날부터 예하라 부르게 된 그녀는 자기가 내뱉은 말을 철석같이 지켰다. 마음에 내키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까지.


그 때문에 평소 그녀를 아니꼽게 보았던 심판관이 뭐라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 절대로 하질 않았다. 도리어 나중엔 거세게 질책까지 했다.


――추잡한 짓 좀 하지 말라고.


반발한 심판관에게만 국한된 발언이 아니었다. 저 질책은 자신을 포함한 성국의 중추 수뇌부들 전원을 향해 말한 것이었다.


이를 알아들은 그 심판관은 참지 못하고 이스피리아에게 결투를 청했다.


분을 참지 못한 거겠지. 갑자기 교황청 소속이 된 웬 소녀가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도 모자라 교황에게조차도 친구 대하듯 가볍게 대하니.


물론 그녀에게 나쁜 뜻은 전혀 없었다. 그녀는 단지 직설적인 사람이었으며, 그저 호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알 리가 없는―― 어쩌면 알면서도 질투나 부러움 등의 여러 이유로 그는 결투를 신청했고,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다.


소식을 듣게 된 주교와 다른 심판관들은 그의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제1 위상. 다른 심판관들과는 격을 달리하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제2 위상, 미하엘이 나름 근접했다고 말이 있으나,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실제 둘 간의 격차는 상당하다. 단순히 제1 위상인 그가 동료인 미하엘을 추켜세워주기 위해 꺼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런 실력자이다. 사람들은 아무런 걱정도 없이 가벼운 볼거리를 보는 기분으로 이 결투를 구경하러 시간 내어 모여들었다. 용케 전원이.


불만이 그만큼 쌓였다는 것이었겠지만, 덕분에 그들―― 주교와 심판관들은 보게 되었다.


이스피리아――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


제1 위상이 이길 리가 없다.


당연했다. 애당초 첫 만남이 있던 그때 이미 그녀는 심판관 전원을 여유롭게 상대하고도 남았는데 이길 리가 있겠는가.


실로 그녀를 받아들인 선택이 후회되지 않을 순간이었다. 그뿐이랴 아주 현명하기까지 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성국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진실한 의미에서의 성국으로.


거기다가 이 제멋대로인 소녀는 이후 여러 문제를 초래했지만 결국 인류의 수호자로서 성장하기까지 한다.


이 이상의 선택이 어디에 있을까. 자신의 인생에 이것과 비등한 선택은 아마 없을 거란 생각마저도 든다.


‘이곳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말이지.’


그렇다. 이는 다른 어딘가의 이야기. 지금 이곳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 허상이나 다름없는 이 추억은 떠올리는 것조차도 낭비이며 어리석음의 극치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자꾸만 떠오른다. 어느덧 마력의 영향으로 머리가 하얗게 센 이스피리아와 술잔을 기울이던 때가.


자신보다 아득히 강한 인간은 그녀가 처음이라 그랬던 것인가.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속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나약한 마음을 드러냈다.


조용히 진지하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한마디만을 내뱉었다.



“지랄맞게 겁도 많네.”


말은 비난과 아니꼬움으로도 들린다. 아니, 실제로도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눈에 어린 건 경멸이 아니다. 언뜻 잔잔한 그 눈망울에 맺힌 건 공감이었다.


물론 지지해주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저렇게 말하지 않았을 테고. 그저······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서로 강대한 힘을 지닌 자로서 그 마음만은 이해가 갔기 때문일 것이다.


그 이외에 그녀는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술만을 홀짝홀짝 들이킬 뿐이었다.


하지만 인생의 절정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충실한 시간. 침묵조차도 그 당시에는 황홀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게 그녀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대륙 최고이자 최강인 그녀는 토벌대로서 여행을 떠나고,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니, 돌아오긴 했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서.


상처 하나 없이 깨끗이 정리된 그녀는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듯싶었다. 하지만 그 몸에서는 온기와 마력이 조금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녀는 죽은 것이다.


그래. 비록 인정해주진 않았더라도 자신을 진정으로 공감해준 이해자가 사라진 것이다.


그 사실을 인식하게 되자 엄청난 허무함과 ――상실감이 몰려왔다.


목적을······ 용왕을 죽였다는 믿지 못할 과업을 해냈다는 등의 보고를 말해오지만, 오히려 그 목소리는 번잡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그들을 탓할 순 없다.


그들 또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으니. 유독 따랐었던 리블리지는 그녀의 시신을 목격하고는 울다가 탈진하여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크게 행해진 장례.


어떻게 끝났는지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대성당에 안치된 비석의 글귀만이 떠오를 뿐이다.


――세계를 구한 위대한 여섯 영웅,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 애장인 신검과 함께 이곳에 잠들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녀가 숨을 거둘 줄이야.


이는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혼이 빠져나간 듯 폐인처럼 살아가던 리블리지가 뒤따라가듯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곁에는 편지가 한 통 있었는데······ 읽진 않았다. 정중히 그녀와 함께 묻어 주기로 했다.


이후로는 멍한 시간이 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이스피리아, 그녀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장소를 맴돌았다.


그런 자신에 비해 세계는 활기찼다. 희망을 품게 된 사람들은 내일을 노래하며 열심히, 웃음 꽃을 피우며 살아갔다.


그랬다. 세계는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구원을――그녀―― 잃었다.


그것이 저 가증스러운 인간들을 구한 대가.


나의 세계는――성국―― 절망에 물들었다.


또 한 번의 끝없는 절망. 하지만 우리는, 나는 슬픔과 비통에 잠길 수 없다. 아니, 잠겨선 안 됐다.


무슨 염치로 그러겠는가.


‘우리들은 그녀에게――’



“예하.”


조용히 부르는 말에 바오로 교황은 사색에서 빠져나와 감았던 눈을 떴다.



“모두 모였습니다.”

“수고했네.”


노고를 위로한 바오로는 국무회의실을 둘러봤다.


확실히 모두가 모여있었다. 마력고갈로 쓰러진 리블리지와 간병을 맡은 인디아를 뺀 전원이. 주교와 심판관, 단장을 비롯한, 어제저녁에 모였던 쟁쟁한 인원들과 더불어 또 한 명, 오늘 도착한 그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은 제법 피곤해 보였다.


어제부터 쭉 자지 못했으니 당연할 것이다. 특히나 어젠 굉장히 격렬했으니. 어제 오지 못했던 그도 복귀 이후 줄곧 도왔는지 피로의 기색이 역력했다.


귀를 기울여 보면 밖에서 서두르는 고함들이 들려온다. 아직 채 정리가 끝나지 않은 것이다.


그 정도로 큰 사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쉬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대들에게 모두 맡겨버려서.”

“아, 아닙니다! 저흰 괜찮습니다, 예하.”

“맞습니다요. 정신적으로 좀 피곤한 거지 몸은 며칠을 굴려도 멀쩡합니다요!”

“카를로 운! 예하께 무슨 말버릇이냐.”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어색하게 웃는 운.


그는 사실 자신에겐 무척이나 생소한 자이다. 얼굴만큼은 그나마 조금 기억은 한다. 어찌 됐든 카를로 운은 일신성단에 있긴 했으니. 다만 직책은 미비한 일개 평단원. 그렇기에 그다지 볼 일이 없어 생소한 것이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분명 그러하였다.


그러했는데······ 이번엔 심판관 자리에 앉아 있다. 원래 심판관이었던 그는 백익편성의 단원이고.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자신이 기억하던 것이다. 그녀는, 이스피리아는 모두를 제법 그립다는 듯이 보았다.


그 반응으로 보자면 아마 몇 번은 이처럼 심판관에 올라왔을 거다. 단지 이쪽이 모르고, 기억을 못 한 것이겠지. 지금처럼 운은 몇 번 올라왔을 거다. 자신의 노력만으로.


아직 괴리감은 있지만, 조금은 운이 대견하게도 느껴진다.


그 생각을 끝으로 바오로는 의식을 전환했다. 이제 이곳에 있는 건 교황 바오로뿐, 최고 지배자의 다운 강철 같은 시선으로 에쿠릴을 쳐다봤다.



“보고를 듣도록 하지.”

“예.”


고개를 한 번 숙인 에쿠릴은 정리한 내용을 말하였다.


그렇지만 이건 피해 보고다. 무수히 많은 내용 중 좋은 소식은 담겨 있지 않았다.



“우선 아시다시피 신당의 모든 마법―― 결계를 비롯한 갖가지 물건들에 부여된 마법들이 모두 소실 됐습니다. 그리고 효력이 발휘한 범위를 측정한 결과······ 이는 국토 전역에 영향이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성국에 있던 모든 결계가 사라지거나, 갖가지 마도구들이 평범한 물건이 됐다는 거로군.”

“······예. ‘원초마법’으로 행해진 것이라면 전부.”

“흐음.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로고. 일단 술식마법으로 된 것들은 멀쩡하니 신도들의 생활엔 어려움이 없지 않겠나.”


분위기를 조금 쇄신할 겸 가볍게 말하였으나 의도와는 다르게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그만큼 피해는 엄청났다. 놀라움을 넘어선, 눈 앞을 가리고 싶을 정도의 피해니까.


‘웃어넘기긴 힘들겠지.’


하지만 에쿠릴만큼은 다른 이들처럼 동요를 보이지 않고 평온하게 말을 받아줬다.



“더불어 복구도 조금은 편해질 거 같습니다. 촉매제가 된 재료들이 전부 멀쩡합니다.”

“과연 대단하군.”

“예. 이번만큼은 너무나 깔끔하게 마법만을 없앤 그 엄청난 실력 덕분에 살았습니다. 시일은 소비되겠으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상당히 어깨가 가벼워졌습니다. 하지만······”


말을 흐린 에쿠릴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때를 노려 오늘 합류한 그가 끼어들어 왔다.



“예하 갑자기 실례합니다만, 거리 곳곳에서 ‘신언’―― 신탁이 내려왔다고 시끌시끌하던데······ 어찌 된 것입니까?”

“가이란!”

“아아. 괜찮다네, 에쿠릴. 사실, 피해 보고는 뒤로 미루어도 될 사항이지 않은가.”


송구스러운 얼굴로 물러서는 에쿠릴. 역시나 그는 마음을 써줬던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교황이란 자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 그를 뒤로하고 끼어든 가이란―― 제 1위상은 상당히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보아하니 제대로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하다.



“자네가 들은 건 무엇이었나.”


질문을 하자 처음엔 가이란은 말을 흘렸다. 하지만 이내 제1 위상답게 강한 눈빛을 향해왔다.



“자인 디바오러라고 하는 변절자가 침공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다네. 그 말대로야, 자네가 보고 들은 그대로라네.”

“흠. 신도들이 떠드는 것처럼 정말 디바오러의 계승자란 말씀이십니까?”

“신언은 듣지 못하였는가?”

“예. 저 멀리 운석이 떨어지는 것과 그것을 소멸시키던 예하만을 보았습니다.”

“시기가 조금 나빴군. 보기 드문 희귀한 것이었다만.”

“그럼 정말로?”

“······내 단언해주겠네. 그건 분명 디바오러의 정통 계승자. 의심의 여지가 없는 진짜다. 그리고 결과는 자네들 모두가 보고 느낀 대로라네.”


숨을 삼키는 좌중을 둘러보며 바오로는 힘을 담았다.



“우린 성전을 선포했고, 그리고 졌다. 이의가 없을 만큼 완벽하게. 디바오러에 의해서 말이네.”

“자, 잠시만······ 예하께선 자인 디바오러라는 자가 정통한 계승자임을 알면서도 성전을 선포하신 겁니까?!”

“그렇지. 납득이 안 가는가? ”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찌 성자의 성명을 잊는 자에게 그러한 무례를――”

“――이스피리아 자인 디바오러.”


나지막하니 이 이름을 말하니 전원이 흠칫하였다.


이것만으로 충분했다.


바오로는 엄청난 투지를 내뿜게 된 그를 향해 말하였다.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다네. 그녀가 우릴 친다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 전력으로 응해야겠지. 그렇지 않은가? 가이란이여.”

“그것이 도리겠지요. 변절자에게 어찌 성국이 물러설 수 있겠나이까.”


그렇게 말한 가이란을 숨을 들이마셨다.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고 예를 취했다.



“예하, 청이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바오로는 바로 대답하였다.



“뜻대로 하게.”

“이미 예상하셨나이까?”

“그렇다네.”


바오로는 국무회의실에 있는 전원을 쭉 둘러보며 말했다.



“자네들에게도 해당하는 얘기라네. 그대들도 뜻하는바, 원하는 바가 있다면 실행하게. 이번 사건을 벌인 나처럼 말일세. 재차 말하지만, 굳이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네. 모든 책임은 내가 지도록 할 테니 주저하지들 말게.”


이 말을 듣자 다들 고민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런 그들 사이에서 가이란은 조용히 물어왔다.



“예하께서는······ 그것으로 괜찮으신 겁니까?”

“아쉬움은 있네. 하지만 만족은 했지. 완벽한 패배로서. 자네도 알다시피 말이야.”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너스레를 떨자 가이란도 은은한 미소로 받아줬다.



“예. 다시금 재림한 성자도 몰라보고 성전을 선포한 예하의 선택을 신도들은 쉬쉬하면서 의심하고 있죠.”

“당연한 반응들이로고. ······하지만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완벽한 한방이었네. 설마 거기서 신언을 외칠 거라고 예상할 수나 있었겠는가? 내용조차도 모르는 자가 본다면 마치 신벌이지 않나. 후후. 정말 한방 크게 먹었다네.”

“실례지만, 예하께서는 무얼 하시려 한 겁니까?”

“단순히 나를―― 바오로 클레멘스라는 인간을 보였을 뿐이라네. 내가 살아온 길과 그 신념을 말일세. 다만 그 과정에서 그녀를 화나게 만들어 면목이 없구려. 그것 때문에 신언도 나왔고. 정말 큰 실수를 했지. 자네도 무얼 하든 간에 그녀에게 이 말만은 조심하게.”

“어떤 것입니까?”

“‘대영웅’. 그건 그녀의 터부인 모양이야. 주의하게. 나처럼 되지 않으려면.”

“말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취한 가이란은 일어섰다.



“벌써 가려는 겐가?”

“예.”

“조심하게나.”

“감사드립니다. 허나 너무 걱정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하의 일을 너무 늘리지 않도록 선은 지키겠습니다.”

“그건 고맙군. 안 그래도 이후 처리할 일들이 많아 곤란하던 차였네. 하지만 난 자네를 걱정한 것이야.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게나.”


가이란은 재차 예를 취하고는 국무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마지막 말에 대한 답은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잠시 시차를 두고 갑옷 소리를 울리며 한 명이 벌떡 일어났다.


바오로는 번뇌가 가득한 그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쳤다.



“가도록 하게나, 단장. 말하지 않았나. 망설이지 말라고. 안 그래도 가이란 혼자 보내기엔 염려되던 차였네. 자네가 있다면 명분상으로도 충분할 터. 그도 움직이기 편해지겠지. 성기사단은 신경 쓰지 말게. 어차피 요즘 할 일도 별로 없지 않은가. 부장 한 명을 대리로 서게 하면 충분하겠지.”


잔뜩 고민스러워 보였던 리시타는 이윽고 고개를 숙였다.



“예하의 온정에 따라 잠시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자네도 조심하게나.”

“예! 말씀 감사드립니다.”


리시타도 퇴실하고,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바오로는 말하였다.



“그 외에도 뜻하는 바가 있는 자는 행동으로 옮기도록 하게나.”


그 말에 한 명―― 여성이 손을 들었다.


굳은 얼굴인 여성은 놀라운 청을 하였다.


바오로 또한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여성의 의견을 존중하기로 하였다.


결정이 떨어지자 그 즉시 에쿠릴과 레이드안이 반발하고 나섰지만, 그들이라고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이 여성―― 아베라 자르 디비치온의 바람이거늘.


그렇게 곧바로 아베라도 퇴석하고, 바오로는 침묵이 흐르는 이들에게 되도록 밝게 말을 꺼냈다.



“또 다른 자가 있는가? 있다면 언제든 편하게 말해주게나. 아아. 물론 나중에라도 상관은 없네. 다만 당장 결정하지 않았다면······ 나 좀 도와주지 않겠는가? 실은 이번 일의 사후 처리가 솔직히 꽤 버겁다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만렙 히로인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55 137 22.07.13 78 0 34쪽
154 136 22.07.11 73 0 36쪽
153 1XX-4 22.07.11 48 0 36쪽
152 1XX-3 22.07.11 44 0 39쪽
151 1XX-2 22.07.11 47 0 24쪽
150 1XX (특별편) 22.07.11 57 0 41쪽
149 135-2 22.07.11 85 0 8쪽
148 135 22.07.11 87 0 40쪽
147 134 22.07.11 72 0 42쪽
» 133 22.07.09 79 0 26쪽
145 132 22.07.09 91 0 39쪽
144 131-2 22.07.09 65 0 20쪽
143 131 22.07.09 75 0 24쪽
142 130-2 22.07.08 60 0 14쪽
141 130 22.07.08 83 0 40쪽
140 129 22.07.08 78 0 38쪽
139 128-2 22.07.08 67 0 15쪽
138 128 22.07.08 81 0 29쪽
137 127 22.07.08 86 1 26쪽
136 126 22.07.08 81 0 26쪽
135 125 22.07.07 69 0 36쪽
134 124 22.07.07 97 0 36쪽
133 123 22.07.07 61 0 34쪽
132 122 22.07.07 92 0 32쪽
131 121 22.07.07 92 0 30쪽
130 120 22.07.06 89 0 36쪽
129 119 22.07.06 90 0 30쪽
128 118 22.07.06 67 0 34쪽
127 117 22.07.06 69 0 20쪽
126 116 22.07.06 84 0 4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