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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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최근연재일 :
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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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9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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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DUMMY

꿈을 꾸었다. 매우 그리웠었던 것 같은 꿈을. 그 꿈은 생각보다도 만족스러웠던 기분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왜 그 꿈에서 자신은―― 발동어 따위를 외치는 건지. 있는 똥폼, 없는 똥폼 다 잡으면서······



“그, 그만둬! 마법 소녀는 아직 허들이 높다고!! 이제 좀 편해진 거지 받아들인 건 아니란······ 응?”


꿈속, 창피함도 없는지 위풍당당하기만 한 자신에게 절규를 지른 리아.


그렇게 절찬리 소리를 높이다가 이윽고 리아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게 되었다. 한순간 아직 꿈인가도 싶었지만――


스윽, 스윽.


에르가 마법을 걸어놨지만 제법 세월을 느낄 수 있는 잠옷.


부모님의 사랑이 듬뿍 담긴 이 옷을 이리도 촉감까지 완벽히 재현할 리는 없달까, 방안 가득―― 이불에 듬뿍 배긴 에르의 채취는 꿈이라지만 감히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할 것이다.


‘만약 가능했다면 추출해서 향수로 만들고 싶은걸.’



“헤헤. 정말로 있었으면 좋겠―― 어라······”


뚝뚝.


손 위로 물이 떨어진다.



“음?”


의아한 기분으로 눈가로 손을 가져가 보니 역시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건 눈물이었다.



“거참 이상하구먼. 잠을 잘못 잤나?”


슬픈 기분도, 그렇다고 예민한 감정선도 전혀 느낄 수 없었던 리아는 그렇게 단정 지었다. 그리고 눈가를 닦은 리아가 한 행동은······


다시 자는 것이었다.


잠을 잘못 잤으면 더 자면 해소될 터.


아주 간단한 지론으로 결론을 낸 리아는 곧장 실행에 옮겼고, 이불 속으로 가라앉듯 들어가 버렸다.


그것이 약 30분 전.


머리 위까지 뒤집어쓴 이불에서 리아는 한동안 나오질 않았다. 그렇다고 정말로 다시 잠을 청한 건 아니었다. 물론 다시 자려고 한 건 맞았다.


하지만······


퍽퍽.


몇 번째인지 모를 소리와 함께 이불이 들썩였다. 그리고 안에서는 너무나도 쓰디쓴 신음이 살짝 들려왔다.



“그렇게 기세등등하지 말아줘······ 그만두라고, 나. 뭐가 [운석 낙하]라는 거야. 부끄러움도 없는 거냐?!”


끼야야악! 작게 비명을 낸 리아는 다시금 퍽퍽―― 이불킥을 시전하였다.


꿈이라지만 정말 너무 심하다.


‘아니, 꿈이라는 건 자신의 욕망이 표출되는 거라고도 들어본 거 같아. 그렇다는 건······ 난 은근히 마법소녀 같은 치렁치렁한 게 취향이라는 건가?!’



“이런 게 여의 취향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응? 여······?”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언가 석연찮은 기분에 드디어 리아는 몸을 일으켜 세워 이불에서 나왔다.


그리고 경악했다.


본인을 지칭할 때 이런 사극에서나 쓸법한 말을 하다니――


‘큰일 났다······’


도대체 꿈에, 마법소녀에 얼마나 심취했었으면 이리도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란 말인가.


‘내심 관심을 가진 수준이 아니었나?!’


뭔가 대처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러다가는 언젠가 사랑과 정의를 외치는 화려한 복장의 무언가를 연기하지 않을까 걱정까지 된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마법봉 같은 것도 들고 돌아다닐지도······


남자였기에, 노인까지 살아온 생이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게 문제였다. 아니, 오히려 남자로서는 금단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더욱 강하게 끌렸을 가능성을 배제한 게 문제였다.


모처럼 여자이니―― 그것도 적정 연령이라 할 수 있는 파릇파릇한 나이. 지금껏 억눌려 있던, 안쪽에 내재하여 있던 욕망이 일깨워진 게 아닐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럴싸한 의견에 리아는 두려웠다. 자신의 억압된 이 욕망이.


그럴 때였다.


스르르, 매끄러운 경첩의 소리가 나며 방문이 열렸다.


에르인가 싶었던 리아는 고개를 돌렸고――



“아까부터 뭘 하는 겐가? 아침이 약하다고는 하나 일어난 지가 언제인데 너무 꾸물거리는구나.”

“어, 그게······ 조금 그럴만한 사정이―― 에엥?! 델리안?!!”

“아직 귀가 먹진 않았다.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잘 들린단다.”


너무나도 평온한 대꾸가 되려 리아를 더욱 당황스럽게 했다.


혹시나 아직 꿈속인가 싶어 볼을 꼬집었으나······ 아팠다. 뭔가 싶어 빠르게 주위를 살펴보니 자신의 방―― 베르다드 내의 기숙사인 것 또한 변함이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리아는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여기에?”

“그야 빚을 갚을 겸 있는 게 아니겠느냐. 자네도 누누이 강조하지 않았는가. 정산은 확실히 해야 한다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델리안.


눈에 익는 미소를 띤 그녀는 매우 당당했는데, 복장이······ 조금 특이했다. 지난번 보았던 그 여행객의 옷이 아니라, 팔랑팔랑한······ 그러면서도 제법 절제된 매력이 있는 복장이었던 거다.


그렇다. 델리안은 메이드복이라고도 하는 그 옷을 입고 있던 것이다.


머리를 감싸는 브림까지도 완벽히 착용한 그녀는 겉모습만큼은 정말 무지하게 잘 어울렸다. 언뜻 빛나는 외모 때문에 왕가 같은 곳에서 일하는 고급 사용인처럼도 보인다. 은근 고압적인 태도로 평가는 별로일 듯하지만.


그런 델리안은 팔짱을 낀 채로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리아는 부릅뜬 눈으로 사실확인을 했다. 델리안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리아로서는 놀랄 노 자였기 때문이었다.



‘아이, 정말이야?! 이거 꿈이 아니었어?’

『긍정. 꿈이 아님.』

‘진짜, 진짜, 진짜지?’

『답. 시전자―― 이스피리아가 꿈이라 느낀 행동들은 모두 사실임.』

‘아니······ 아무리 폭주했다지만, 진짜로? 진짜 메테오를 썼다고?? 참고로―― 어디까지나 참고인데, 그······ 손을 번쩍 들었다가 내린 제스처도?’

『긍정. 당시의 행동은 모두 실제로 벌어진 일이었음.』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조금의 틈도 없이 답변이 돌아왔다.


······리아는 절망했다. 그로 인해 다음 행동도 매우 빨랐다.


현실도피―― 틀어박히는 것으로.


이불을 도로 뒤집어쓴 리아가 다시 나오는 것은 그로부터 10분이 지났을 때로, 설득에 지친 델리안이 더는 참지 못해 강제로 이불을 빼앗고 나서였다.


그 과정에서 이불에 대롱대롱 딸려온 리아를 보며 황당해하는 일도 있었다만 델리안, 그녀는 무사히 떼쓰는 아이를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현재, 떼를 쓰던 아이―― 리아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에 나와 탁자에 얼굴을 묻고는 다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델리안은 괜찮은 거예요? 잘 생각해보시는 게 좋지 않아요?”

“물론이란다. 잘 생각하고 한 행동이다.”


묻는 말에 델리안은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대답한다.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잘 느껴졌지만, 리아는 재차 묻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왜냐하면 델리안, 그녀가 한다는 건――



“하지만 아이리스의 사용인이라니요. 조금 미안하달까? 초월자이신 분에게 이런 일을 시켜도 되는 건지 싶네요. 단가가 맞지 않는다는 느낌인지라 좀······”

“빚을 졌으면 갚는다.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나 또한 내 아이를 구해줬으니 자네의 아이를 돕는 것뿐이다. 그게 초월자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아니면 나를 은혜도 갚지 않는 뻔뻔한 사람으로 만들 셈이라도 있나?”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러면 괜찮잖나. 음? 혹 아직 미흡한 부분이 있는가? 당장은 무리지만 고쳐나가도록 하지.”

“아뇨, 아뇨! 그거야말로 진짜 괜찮아요! 옷도 무지하게 잘 어울리시고.”

“그, 그런가······”


부끄러운 듯 옷매무새를 만지는 그녀를 보며 리아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벽해요. 아이리스는 어떠니?”


리아는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아이리스를 쳐다봤다.


아이리스는 먼저 일어나서 에르에게 사전에 이야기를 들어뒀는지 느긋하였다. 대답도 이미 생각해뒀는지 막힘이 없었다.



“갑작스럽지만 딱히 폐도 아니고 저는 괜찮아요. 잘 부탁드려요, 델리안 씨.”

“음. 나도 잘 부탁한단다, 아이리스야.”


여운이 묻어나오는 델리안의 얼굴을 보니 더는 무슨 말을 꺼내지도 못하겠다.


그런데다가 이쪽으로선 델리안만한 사람이 사용인으로 있어 준다는 건 든든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솔직히 아이리스의 안전은 제법 신경이 쓰이던 안건이라 살았다는 느낌까지도 든다.


손해 따윈 전혀 없으며, 오히려 무일푼으로 사용인을 자처해준다는 사실에 감사를 드려야 할 판이다.


‘그래도 양심상 최소한의 일당은 좀 쥐여줘야 하지 않나 싶은데······ 초월자의 최소 일당은 어느 선이다냐?’


경제 관념이 확고하지 않은 리아로서는 잘 감이 잡히지 않는 일이다. 그렇기에 상당한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터라 리아는 생각하길 포기하고 다른 주제를 꺼내어 보았다.


그건 격렬한 마력의 흐름에 의식을 잃은―― 폭주 모드로 돌입했다는 그 당시의 일로, 이후의 일들을 좀 더 상세히 물었다.


동시에 리아는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아이의 말은 잘 듣겠다고. 더 이상의 흑역사는 사양이라며.






월요일 아침. 오늘까지만 수업을 쉬기로 했다.


아이리스도 꽤 흥미를 보이고는 같이 쉬기로 하였고, 어느새 조용히 다가온 페리도 자리에 깔고 누워 들을 준비 만반이었다.


그런 관중들을 보며 델리안은 이야기하였다.


내용 자체는 이해하는 데 지장이 없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렸긴 했지만, 대충 기억은 났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델리안의 설명 자체가 매우 훌륭했다. 기억이 날아간 이쪽의 사정을 고려했는지 굉장히 자세하면서도 흡입력 좋게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렇지만······ 이건 과연 어떨는지.’


리아는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델리안을 쳐다봤다.


마침 이야기도 절정으로 향해 가고 있었는데, 그녀는 평소 무표정과 달리 무척이나 풍부한 감정과 그에 따르는 표정으로 말을 하였다.


그래. 마치 동화를 들려주듯이 말이다.



“그녀의 신언을 들은 세인트리안 측은 믿을 수 없어 했단다.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바보 같은!’, ‘어째서 변절자가!’라며, 소리를 질러댔지. 하지만 몸은 정직했구나. 그들은 곧장 넙죽 엎드리고는 그 귀한 말씀을 들으려 예를 취했지. 그런 그들에게 자인 디바오러는 나지막하니 선언했단다. ‘너희의 죄를 사 할 기회를 주겠다!’ 신성한 기운을 두른 그녀는 그리 외치고 무릎 꿇은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리고선 왼손을 번쩍 들어――”

“――자, 잠깐!!”

“응? 왜 그러느냐. 이제 재밌는 부분인데.”

《그래. 모처럼 흥미진진하니 잘 듣고 있는데 무슨 짓이냐.》


페리까지도 딴지를 걸지만 리아에겐 반드시 넘어가야 할 일이었다. 그렇지 못하면 다시금 이불속으로 뛰어들 테니 말이다.


델리안의 의외의 특기는 머릿속 한편으로 밀어 넣고 리아는 필사적으로 핑곗거리를 찾았다.



“인사! 그러고 보니 서로 인사도 안 나눴잖아요. 저도 아직 다녀왔다는 인사도 못 했으니 대충 끝내도록 해요!”

“하지만 이걸 넘어가면 끝이란다, 이스피리아야.”

“주, 중요한 건 이후의 일이죠! 네네. 그래요······ 델리안! 델리안이야말로 프리에나 씨를 따라서 가지 않아도 되는 거였어요? 제 고향에 가는 거였다면서요.”

“세스 녀석이 살아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얼굴 같은 건 나중에라도 보면 되겠지. 듣자 하니 자네도 가을엔 돌아가는 모양이고. 그거면 됐다. 그때까진 자네 곁에서 은혜를 갚고 있도록 하지.”

“그, 그런가요. 본인이 그러신다니 뭐······”


왠지 델리안에게는 세게 나가기가 힘들었던 리아는 그걸로 끝내기로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다녀왔단다, 아이리스. 페리도요. 다들 별일 없었어요?”

“저흰 유젯 씨가 계셔주어서 편하게 잘 지냈어요.”

“유젯 씨는 공국에서 우릴 안내해 주셨던 그분이지? 레시피도 가져다준 착하신 분!”

“맞아요.”

“이번에도 도움을 주시고 꼭 감사를 드려야겠는데······”


리아는 주위를 둘러봤다.



“벌써 돌아가셨네.”

“네. 어제 어머니랑 돌아오신 걸 보고 바로 복귀하셨어요.”

“아쉽네. 또 다른 일은 없었지? 하루 만에 냉큼 다녀온 건데 있을 리가――”

《――있지.》

“응?”


갑자기 끼어든 페리에게 놀라기는 했지만······ 딱히 허튼 말은 아닌 듯 아이리스 또한 어설프게 웃는다. 이것이 조금 트러블이 있었다는 걸 암시하게 만들었다.


추궁하니 아이리스가 떨떠름하게 말하기로는――



“뭐?! 제 1와, 왕자님이? 뭘 어쩌면. 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거니······?”

“저도 그게······”

《우리도 봉변이었다.》

“아, 페리도 고마워요.”


칭찬도 할 겸, 제 욕구도 챙기고 싶었던 리아는 잽싸게 페리에게 다가가 머리와 턱을 쓰다듬어줬다.



“왕자님이 찾아오는 것도 큰일이기는 한데, 용사······ 그 사람은 왜 여기에 와서 행패를 부린 거지?”


떠오른 의문에 중얼거리니 페리는 기분 좋은 듯 그르렁 소리를 내면서 대꾸하였다.



《모른다. 다만 제법 적의를 품고 있더군. 너, 또 뭔가 했던 거 아니냐?》

“절 무슨 사고뭉치로 보는 거예요?! 그 사람과는 아~무런 연고도······ 어라. 혹시 그거 때문인가?”

《봐라.》

“아, 아니에요! 이번 건 진짜 억울해요! 전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그 사람이 시비를 걸었을 뿐이에요. 뭐라 하지도 않았고! 그 후로도 대화한 적조차 없다고요!”

《흐음. 아무래도 그건 사실인 듯하군.》


미심쩍은 눈을 거두는 페리를 보며 리아는 킁! 거친 콧바람을 내뿜었다.



“자, 자. 어머니 진정하시고······ 아, 다들 식사 아직이죠? 저기 마침 준비도 됐나 보네요.”


리아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랑스러운 아들이 애써 중재하는데 어찌 뽀로통할 수 있겠는가.


그래. 결코 저 코를 자극하는 냄새에 이끌린 게 아니었다.


그러한 변명을 이어가며 리아는 멋들어진 앞치마 차림인 에르가 차려준 요리를 먹어 치웠다.


이때 델리안이 사용인의 예절에 따라 같이 식사하지 않으려고도――더욱이 먹지 않아도 지장이 없다며―― 했으나, 당연히 이를 두고 볼 리는 없다. 억지로 앉히니 그녀도 마지못해 따라주었다.


그렇게 화목하게 식사를 마치고 서로 친해지기도 할 겸 대화를 나누었다.



“오호······ 엘프들의 나라, 갈라사르! 한 번쯤은 가보고 싶네요.”

“인간들은 그리 반기지 않지만······ 자네라면 괜찮겠지. 여차 들를 일이 생긴다면 나나 홀린의 이름을 대게. 아니면 게헤르라도 괜찮다네. ······그렇지만 나라 자체는 별로 기대는 하지 말게. 그냥 숲속에 마을이 있을 뿐, 눈이 즐거워질 만한 건 거의 없단다.”

“그런 거야 제 고향도 비슷 데요 뭘.”

“자네의 고향은――”

“――아! 끊어서 미안해요, 델리안. 제 친구들이 왔어요!”


마력으로 기척을 알아차린 리아는 서둘러 문을 향해 뛰어갔다. 델리안도 자리에서 일어나고는 손님을 맞이하러 주방으로 향하는 에르를 따라갔다.


똑똑――


노크 소리가 나자마자 리아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앞에는 예상대로의 사람들이 있었다.



“어서 오세요!”


갑작스러운 반김에 수업이 끝나고 곧장 온 듯한 친구들은 놀랐다. 하지만 고위 신분인 사람답게 금세 평정을 찾고는 우아하게 예를 취했다.


다만 그렇지 못한 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녀는 표정만큼은 우아한 공주님을 연기하고 있었으나 눈빛만큼은 사납게 외치고 있었다.


적당히 하고 자신들을 빨리 안으로 들이라고······


물론 따지거나 반발할 용기가 전혀 없었던 리아는 서둘러 찾아온 친구들―― 라프리트와 루비아를 방으로 들였다.



“잘 쉬셨나요?”

“네. 저는 잘――”

“――뻔한 짓거린 됐으니까 그만하고 앉기나 해봐.”


여전히 제집처럼 편안하기 그지없는 루비아. 이런 그녀의 모습에 라프리트가 순간 욱했지만, 리아가 재빨리 손을 잡고 소파로 이끌어 이를 막아냈다.


그렇게 아무 문제도 없이 모두가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루비아가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있었다.



“너, 꽤 화려하게 저질러줬더라?”


기분이 나쁜 줄 알았던 건 착각이었나 보다. 루비아의 얼굴도 그렇고 목소리도 꽤 즐거운 낌새가 어려있었다.


‘어쩌면 빨리 말하고 싶어서 그런 분위기였을지도.’


상당히 일리가 있는 추측을 속으로 하면서 리아는 재빨리 변명했다.



“으음~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저는 잤을 뿐이라.”

“야. 내가 왜 사용인을 붙여줬을 거 같냐? 너무 뻔한 걸 일일이 언급하게 하지 마. 그리고 그거 덕분에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벌써 잊은 거야?”

“으윽······”


역시 루비아에게 머리로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다.


그걸 다시금 느끼고 있을 때였다.


――스윽.


발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델리안이 다가와 차를 건네주었다. 찻잔을 내려놓는 순간조차도 아무 소리를 내지 않는 그 모습은 흡사 일류 사용인 같았다.


‘정말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 있구나. 예쁘기도 하고.’


감탄하고 있는 사이 델리안은 친구들에게도 다가가 차를 건네주었고, 그제야 새롭게 등장한 그녀의 모습에 둘은 관심을 가지고 쳐다보았다.


그리고――


“아, 고마워요······ 그러니까 성함이―― 응?!! 푸웃!!!!”


건네준 차를 마신 라프리트가 대차게 뿜었다.


마치 무지개라도 그릴 듯 넓게 넓게 분사되는 물방울들. 리아는 따로 분무기를 갖출 필요조차 없는 그녀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했다.


‘······그만 현실을 볼까. 그나저나 사례라도 들리셨나?’


쭈욱 늘어나는 감각으로 인해 거의 정지된 듯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느긋하던 리아는 슬쩍 주먹을 쥐었다. 이는 세인트리안에서 유일하게 얻어온 중력마법을 사용한 것으로, 이번에도 실패하지 않고 제대로 발동했다.


‘근데 조금 제어하기가 까다롭네.’


여차하면 목표물 이외의 다른 것들까지도 빨려든다는―― 생각해보면 당연한 문제점을 떠오르는 머리카락으로 확인한 리아는 뭉친 물방울들을 창문 밖으로 옮겨 정원에 뿌려주었다.



“괜찮아요, 라프리트 씨?”

“켁, 케헷. 네, 네. 괘, 괜찮아요. 죄송하게 됐어요, 리아 양.”

“아뇨. 하나도 튀지도 않았고 멀쩡해요.”


보고 있던 루비아도 슬쩍 거들었다.



“그래그래. 또 뭔가 굉장한 마법으로 정말 하나도 안 튀고 잘 모았더라.”

“그, 그렇군요.”


안심한 라프리트는 한동안 다시 콜록대었고, 안네가 재빨리 채워주는 물을 쭉쭉 들이켜고 나서야 겨우 진정하여 멈출 수 있었다.


“실례했어요, 리아 양.”

“뭘요. 괜찮아요.”


사과하는 그녀의 말을 받자마자, 곧바로 루비아가 치고 들어왔다.



“저 사용인은 또 뭐냐. 아니, 다르게 물어볼게. ――저 괴물은 당최 누구냐? 세인트리안에 가더니 별 요상한 걸 데려왔다?”

“괴, 괴물이라뇨?! 실례되는 말씀을.”

“실례가 아니야. 너한테는 어떨지 모르겠는데, 내가 볼 땐 괴물이 맞아. 명백하게 궤를 벗어났어. 아니군······ 이제 보니 너희들 전부가 그렇네. 비교할 게 생겨서 그런가, 리아, 너도 그렇고 네 남편도 비슷하게 보여. 뭐, 정확하게 같다는 건 아니고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저기······ 궤를 벗어났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상궤를 벗어났다고. 간단하게 말하면 평범과는 거리가 멀다는 거야. 달리 표현하자면 순리에서 벗어났다는 느낌이지? 네 아들이나 저 애완동물은 그냥저냥······ 아니, 둘 다 꽤 특출나는가? 그래봤자 평범하지만. 어쨌든 너희들은 명백히 달라.”


‘혹시 초월자를 말하는 건가? 진짜 굉장하네. 루비아 씨는 보는 것만으로 그걸 알 수 있는 거야?’


하지만 놀라움은 놀라움이고, 뭐라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어물쩍거리고 있으니 델리안이 조용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돌아보니 다 맡기라는 듯 빙긋 웃는다.



“이미 알았다시피 이 아이와는 세인트리안에서 만났지. 그리고 빚을 지게 되어 이렇게 사용인으로서 거들고 있는 거다.”

“빚?”

“아, 빚이랄 건 아닌데······”

“아니. 빚이 맞단다, 이스피리아야. 세스를―― 내 아이를 살려주지 않았는가.”

“······그렇게 된 거로군.”


루비아는 그것만으로 모든 상황을 이해하게 됐는지 곧바로 이해한 광채를 띠었다.


그 뒤를 이어 잠시 후에 라프리트 또한 어찌 된 일인지 눈치채고는 굉장히 놀란 눈으로 델리안과 리아를 번갈아 쳐다봤다.



“괴물은 그 부모 또한 괴물이라는 건가.”

“친모는 아니지만 말이다.”


자꾸 괴물, 괴물이라 하고 너무 무례한 게 아닌가도 싶었지만, 델리안은 아무렇지도 않은지 너스레까지 떨며 말을 받았다.


그것이 꽤 루비아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로서는 드물게 기분 좋은 미소로 차를 마셨다.



“아, 그래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 난 소베르비아 루 몬테르야.”

“루 몬테르? 제법 그리운 이름이로군.”


감회가 새롭다는 듯이 중얼거린 델리안은 가슴을 폈다. 그렇게 양손을 허리에 얹고, 사용인으로서는 과연 어떨까 싶은 모습으로 델리안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였다.



“나는 델리안 아세트 세니알이라고 한다.”


그리고――



“푸웃!!!”


두 번째 분출이 벌어졌다.


이번엔 라프리트가 아니었다. 다른 한 명의 친구, 루비아였다.


설마 그녀가―― 루비아가 내뿜을 거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 했던 리아다. 이번엔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정면에서 날아오는 물방울들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 모두 놀란 눈으로 루비아만을 바라보았다.


광범위하게 물 분수가 덮쳐들었다.


하지만 젖는 일은 없었다. 본인조차도 휩쓸렸기에 그런 건 아니겠지만 재빨리 델리안이 한곳으로 모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오호? 이건 저번에도 썼던 공간 관련 마법인가?!’


감각으로 파악하게 된 리아는 공간이동에 관련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단 생각에 재빨리 분석에 들어갔다.


주변의 상황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꿈인 거다. 주변을 신경 써 주기엔 걸린 게 너무나도 컸다. 지난번엔 제법 거리가 있었던 터라 제대로 분석하기가 힘들었으니 더욱이나 이 기회는 리아에겐 천금과도 같이 느껴졌다.


그래서 머릿속이 바빴던 리아는 보질 못했다.


――벌떡 일어난 루비아가 무릎을 꿇는 것을.


물론 시선 한구석으로 대충 보기는 했다. 그렇지만 거기에 할애할 신경은 존재하질 않았다.



“켁! 케헥! 흠, 흠. 실례했어요.”


정중한 예를 취한 루비아. 하지만 얼마나 당황했는지 쉽사리 사레를 멈추지 못했다. 잠시 뒤 라프리트처럼 레딧츠가 건네주는 물을 마시고 나서야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레딧츠가 뒤로 물러나고, 루비아는 평소의 우아한 모습으로 머리를 숙였다.



“위대한 마도사, 쿠 엘 델리안 아세트 세니알 옹께 인사드리어요.”


그녀의 인사말을―― 평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중한 목소리를 들은 라프리트는 역시라면서 눈을 가늘게 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델리안은 상당히 의외인 듯 고개를 기울였다.



“흠? 나를 알고 있는 듯하구나.”

“네. 다시금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루 몬테르 공작가의 여식으로, 제 어머니는 레이니 델리안 루 몬테르. 쿠 엘 델리안 왕가의 마지막 남은 후손입니다. 세니알 옹에 대한 건 왕가의 문헌을 통해 들었나이다.”

“호. 애송이의 후손이었나. 한데 살아있는 자가 있긴 했군. 대전쟁 때 명운이 끊겼다고 들었다만.”

“완전히 끊기진 않았습니다. 일부 몇 명은 살아남아 피를 이어 나갔죠.”

“그게 마지막 한 명이 되었다는 거로구먼.”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작 가에 몇 세대나 왕가의 피가 섞여들었으니 개인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치부할 순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확실히 그 합리적인 사고방식은 애송이와도 좀 닮았군. 그런 녀석이 내 이름을 이어받아도 되겠냐고 했을 땐 좀 놀랐었지만. 후후.”

“문헌에 의하면 자신을 길러준 은인의 이름을 드높이고 싶었답니다.”

“그렇지만 하나 실수했지.”

“예. 쿠 엘은 이름이 아니라 위대한 자와 달인을 가리키는 칭호였습니다만, 당시 시조는 모르고 그대로 사용했지요.”

“어쩔 수 없지. 엘프의 마을에서 자랐다 해도 그리 언급할 내용도 아니었으니. 거기에 애송인 꽤 이른 시기에 떠났던 터라 더 몰랐겠지.”


그리 말한 델리안의 눈엔 제법 따스한 기운이 머물렀다.



“그리운 이야기로군. ······허나 애송이의 피를 잇는 자여. 난 쿠 엘의 칭호를 버렸단다. 앞으로는 편하게 델리안이라고 불러 다오.”


꽤 놀란 듯하였던 루비아는 살짝 고개를 조아렸다. 시조의 은사라고 할 만한 자의 부탁이다 보니 저 루비아조차도 더는 묻거나 하질 않는다.


하지만 고개를 든 그녀는 조금 곤란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 모습을 델리안은 의아하게 쳐다보았고―― 그때를 맞춰 리아의 분석이 끝났다. 아니, 정확히는 지금 당장 분석하고 끝날 게 아니라 잠시 중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한 귀로 듣고 있었던 모든 이야기가 들이닥쳤다.


한순간에 모두 정리한 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아앗! 그래! 어디서 들어봤나 했더니 공왕비님의 미들네임이 델리안이었어!! 델리안도 델리안이고!”

“······.”

“으음. 뭐······ 쿠 엘도 버렸고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는 게 아니겠느냐.”

“그렇지요.”


델리안에게 평탄한 목소리로 대꾸하는 루비아.


하지만 리아는 느꼈다. 그 목소리 속에 숨겨진――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가. 루비아, 그녀는 미리 말해주지 않았던 것에 화를 내는 것이었다.


억울하기는 하나 조금은 이해도 된다. 상당히 시건방지게 델리안을 대했는데, 사실 시조의 은사였으니. 암만 루비아라도 진땀 좀 빼는 상황이었을 거다.


‘그렇지만······ 세스도 그렇고, 루비아 씨의 시조님도 주워다가 키웠구나. 델리안은 그런 봉사활동을 옛날부터 했나 보네. 역시 마음씨가 좋아. 그리고 그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나중에 유명인으로 큰다라······ 이른바 유명인 제조기! ――는 아니고 그냥 많은 아이가 거쳐 갔기에 확률이 높았을 뿐이겠지.’



“어? 근데 델리안을 어찌 그 은사인 델리안으로 알아본 거예요? 아주 오래전의 사람이잖아요. 동명이인일 수도 있는데.”


물음에 순간 루비아는 사나운 눈매로 흘겼으나, 그녀는 돌연 축 늘어지더니 어깨를 떨구었다.



“하아. 먼저 눈치를 챘었어야 했는데. 이 내가······ 아니, 솔직히 정보가 부족하긴 했어.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조심해야겠네.”

“왜, 왜 그러시는데요?”

“이스피리아야. 쉽게 설명해주자면······ 나만 한 존재가 또 있느냐?”

“어, 델리안 만한 수준의 사람은―― 아하. 그렇게 된 거군요.”

“그렇단다. 저 아이도 괴물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름까지 같으면 아무래도 의심하긴 힘들겠지. 물론 애초에 저 아이의 관찰안이 좋았기에 알아본 것이겠지만.”

“시, 실례했사옵니다. 무례한 발언을 하여.”

“아니란다. 편하게 대해주라고 하지 않았나. 신경 쓰지 말거라.”


루비아가 눈에 띄게 안심한다.


‘호······ 과연. 대단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저 루비아 씨를 쩔쩔매게 하다니. 무릎도 꿇게 만들고. 어쩌면 델리안은 내 생각보다도 더 엄청난 사람일지도.’


――그리고 그런 사람을 사용인으로 쓰고 있는 자신.



“······응. 아이디어 열심히 내야겠네.”


암만 그래도 무일푼으로 부릴 순 없으니 말이다. 빨리 돈을 벌어야만 한다.


재차 굳은 다짐을 하는 동안 델리안이 자리를 정리했다. 손수 루비아도 일으켜 세워 자리에 앉힌 델리안은 내뿜어서 빈 그녀와 라프리트의 찻잔에 차를 채워줬다.


여전히 능숙한 모습. 달라진 건 그걸 받는 두 여성으로, 아까와는 달리 엄청나게 송구스러워한다.



“응? 그런데 라프리트 씨는 왜 뿜으신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의아하게 쳐다보는 눈빛이 모였다. 델리안마저도 가세하니 라프리트의 눈이 빙글빙글 돌았다.



“아, 아뇨! 그게! 예, 예뻐서······ 네! 맞아요. 너무 예쁘신 분이라 깜짝 놀랐어요. 죄송하게 됐어요.”

“아~ 그렇군요.”

“고맙구나.”

“······.”


하긴 델리안만치 이쁜 사람은 보기가 힘들지.


깊은 공감을 하며 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루비아의 눈이 빛나기도 했지만, 딱히 꼬투리 잡는 것도 없었다. 이것만큼은 그녀도 인정하는 모양이다.


‘태도가 달라진 건 라프리트 씨도 델리안의 이름을 들어봐서겠고.’


그렇게 모두가 별 말없이 넘어가고, 델리안도 이 둘이라면 제법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꽤 부드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후 시작된 대화. 그 대망의 물꼬를 튼 사람은 루비아로, 그녀는 우선 세인트리안에 가서 뭘 했냐고 물어왔다.


리아는 당연히 재차 방에서 자고 있었다며 변명하였으나······ 루비아에겐 통하지 않았다.


라프리트마저도 당연하다는 듯 세인트리안으로 빠져나간 걸 알고 있어 리아는 어쩔 수 없이 사실을 이실직고하였다.


아이리스의 뒤에 대기한 델리안이 제법 근질거리는 듯하였으나, 흑역사를 상세히 떠벌릴 마음은 전혀 없다. 미안하지만 그녀에게 기회를 아예 주지 않았다.


그렇게 빠르고 간결하게 자신이 아는 범위 내의 이야기를 모두 하였고, 그것을 들은 친구들은 어이없어했다.


특히 루비아는 다시는 못 볼 바보라도 만난 듯하였다.



“운석을······ 떨궈? 폭주해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아무리 화가 났다지만 이성이 끊긴 끝에 운석을 떨어뜨린다니······ 그냥 테러리스트나 다름이 없었다. 그들과 다를 바가 없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무 피해가 없었다는 겁니다만······”

“그러게. 다만 그만한 힘이 있다면 조금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겠어. 생각 이상으로 해충들의 전력이 높아. 아, 심판관은 몇 명 있었냐? 만나긴 했어?”

“네. 근데 전원은 아닌 것 같고, 일단 제11 위상이라는 직책까진 있었어요.”

“그래? 꽤나 경계했었네.”


이쪽의 혼잣말을 이어받은 루비아는 그리 중얼거리고는 뭔가 생각할 거리가 있는지 혼자만의 세상으로 들어갔다.


이런 루비아를 방해하면 뒷일이 고달프다. 그렇기에 리아는 라프리트와 화기애애하게 떠들어댔다.


대화의 주제는 일상에 관한 내용이었다.


라프리트가 말해주기로는 작은 괴도단의 멤버들이 제법 오래 자는 자신의 상태를 걱정해주고 있다고 한다. 송구스럽다며 찾아오지는 못하는 듯했지만.


학원 내는 세스 때의 일이 지금은 제법 진정됐다고 한다. 이야기 자체는 자주 나오나 큰 소란은 없었고, 오히려 체험학습이 중지된 데에 환호를 지르는 학생이 도리어 있단다.


‘으음. 이거 다시 한번 악수회를 해야 하나.’


꽤 거만한 생각이라는 건 알지만 반응이 엄청나게 뜨거웠던 만큼 솔직히 이거 이상으로 감사를 전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는다.


그런 고민을 나름 심각하게 하고 있으니 살짝 굳은 라프리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리아 양. 학원 내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 네. 말씀해보세요.”

“그······ 조만간 부를 거 같아요.”

“저를? 어디서요?”

“――어디긴 어디겠냐. 너를 부를 수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지도 않은데.”


정리가 끝났나, 갑자기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그렇지만 뭐가 됐든 모르는 건 모르는 거다. 맹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라프리트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가르쳐주었다.



“왕성이에요, 리아 양.”

“······네?”

“왕성이라고요?! ――라면서 소리치는 건 좀 참아줘. 당연한 거잖아. 조금만 생각해봐라. 그만한 괴물―― 크흠. 엄청난 존재를 제압했는데 포상이나 공훈의 말이 없을 리가 있겠냐. 왕가로서의 위신도 세울 겸 부르겠지. 그래도 걱정하진 않아도 돼. 제법 주제 파악은 하고 있으니 지가 위라는 양 건방 떨진 않을 거야.”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는데······ 루비아 씨가 저리 말하니까 괜찮겠지?’


공국 이후로는 처음인 왕성의 방문에 벌써 떨려왔지만, 덕분에 조금 편해졌다.


감사의 눈으로 루비아를 쳐다보니 그녀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곧 능글맞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겁나 귀찮아질 거다?”

“저요?”

“그래. 온갖 머저리 같은 게 달라붙으려 하겠지. 그중엔 간혹 정신이 나간 놈도 껴있을 테고.”


그게 무슨 소리인지 리아는 너무 궁금했다.


그렇지만 보았다.


의연하게 있으려 하지만 조금씩 안색이 흐려지는 라프리트가.


그래서 더는 이 주제를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막연히 알겠다고, 조심하겠다고만 하였다.


이후로는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차를 마시면서 주위를 살핀 리아는 이 분위기를 띄워보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들겼다.


리아로서는 반갑기 그지없는 희소식이었다. 누가 찾아온 건지, 용건은 뭔지 관심조차 없었다. 오로지 살았다는 기분만으로 냉큼 문을 향해 뛰어갔고, 직접 문을 열어 찾아온 상대를 반겼다.


그렇게 반긴 상대는――



“어라. 누구세요?”


찾아온 사람은 웬 사용인 복장의 여성으로, 예전의 안네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직접 문을 연 것에 똘망똘망한 눈을 크게 뜨고는 굉장히 놀라워하고 있었다.


‘하지만 난 성장했어!’


이전이었다면 왜 이렇게 요란하냐고 생각했겠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는 수준으로 됐다.


그렇기에 리아는 침착하게 눈을 크게 뜬, 연갈색 머리칼의 사용인이 용건을 말하길 기다렸다.



“시, 실례했습니다. 전 제1 왕자님의 사용인입니다.”


당황했으면서도 매우 깔끔한 인사. 아무래도 진짜인 듯하다.



“아~ 혹시 지난번에 있었던 일 때문에 오셨나요?”

“예. 깨셨다는 희소식이 들려와 방문했습니다.”

“어음. 그렇군요.”

“정말 무사히 깨셔서 다행입니다. 저 또한 만수무강하심에 심히 안도했습니다.”

“어, 네, 고마워요.”


부담스럽다. 특히나 저 반짝반짝한 눈빛이 말이다.


저걸 보면 단순 인사치레가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이 여성은 진심으로 저리 생각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실례하옵니다만, 혹 괜찮은 시간이 언제이신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왔다. 오고야 말았다.


심적으로는 그냥 신경 안 쓴다며 이대로 끝내고 싶다. 솔직히 만나기 싫다. 하지만 상대는 왕자. 거절하기엔 꽤 망설여진다.


찰나의 시간이지만 리아의 머릿속은 바삐 굴러갔다.


잠시 무수히 많은 고찰이 오갔다. 그러던 끝에 마음을 정한 리아는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이후 예정이 있으신지요? 혹시 예정이 없으시다면 바로 만나 뵐 수 있을까요.”


그렇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꺼려지는 일은 한방에 정리하고 끝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 뜻을 안 여성의 얼굴은 밝아졌다.



“예! 전하께 말씀을 드리고 찾아뵙도록――”

“――아뇨, 아뇨. 제 쪽에서 찾아가도록 할게요.”

“하, 하지만.”


곤란해하는 여성에게 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사과란 명목이라도 왕자님께서 직접 찾아오시는 건 여러모로 시선이라든가 좋지 않아요. 제가 가는 편이 서로에게 별다른 말이 나오지 않을 거예요.”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여성은 일리가 있는 데다가, 당사자인 자신이 제안하는 것이니 차마 거절하진 못하고 머리 숙여 알겠노라고 했다.



“전하께서는 오늘 줄곧 시간이 비십니다.”

“흐음. 그럼 잠시 숨돌릴 여유가 필요하실 테니 2시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주인께 확실히 전달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으음.”


몇 번째인지 소리를 내며 레오노반은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였다.


이토록 전전긍긍 기다리긴 도대체 얼마 만인지.


주체가 되질 않는다. 그렇지만 주인이란 자가 이리 정신이 없는 건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사용인들의 시선을 느낀 레오노반은 멈춰 섰다.



“신경 쓰지 마라. 그저 기다려지기에 정신이 사나워졌을 뿐이다. 할 일들을 하고 있거라.”


안심시키는 말에 사용인들이 미소와 함께 예를 취한다.


레오노반은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나쁘지 않았다. 어제오늘 조금 어깨에 힘을 덜었을 뿐인데. 그로 인해 주변에 좀 더 시선을 줄 수 있었을 뿐이건만 생각 이상으로 만족스럽다.


스스로도 놀랍다.


――하지만 정말로 마음에 든다.


‘의외지만.’


그리 생각한 레오노반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을 감은 채 소파에 앉아 이 감정의 여운을 느꼈다.


주변의 방해도 없고 한동안 명상에도 가까운 집중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깨지고야 말았다.


그러나 불쾌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기다리던 순간이었으니.


눈을 뜬 주인의 의중을 알아차린 사용인이 재빨리 문을 열어 확인한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과 함께 문이 닫혔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기다리던 소식이 온 것이다.


참지 못한 레오노반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음에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파세! 어떻게 됐느냐!”


그 자리에서 말해도 되건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랬으나 정작 파세는 그런 무례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기어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예를 취한 뒤에야 말하였다.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레오노반은 귀를 쫑긋 세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집중했다.



“허락하셨습니다.”

“오!”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파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예민하게 그것을 알아차린 레오노반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눈짓으로 말해보라 재촉했다.



“허락은 하셨습니다만, 본인께서 직접 오신다고 합니다.”

“흐음. 그렇군. 과연 심려가 깊군그래. 모처럼의 배려다. 확실하게 대접해야겠지. 언제라 하시던가?”

“오늘 2시경에 찾아뵙겠다 약조하셨습니다.”


현재 시각은 12시 30분이 다 되어가는 즈음이다.


갑작스럽게 잡힌 약속이고 상당히 촉박하다. 개인적으로는 완벽한 채비를 위해 내일이라든가 약속을 미루고 싶다.


보통 귀족들이 만남을 약속할 때도 그러했다.


서로 최대한 좋은 모습만을 보이기 위해, 혹은 꼬투리 잡힐만한 것들을 감추려 넉넉히 시간적 여유를 두고 약속을 잡아둔다. 이렇게 당일 급하게 잡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는 잠에서 이제 막 깬 사람이다. 그냥 잤다면 모를까. 구국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일을 치른 다음 휴식을 가진 거다.


그러한 사람이 눈을 뜨자마자 이쪽의 초대에 곧장 온다고 한 것이다. 그것도 다분히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여 저쪽이 양보한 모양새로 말이다.


애당초 찾아가기로 한 건 자신. 시간을 정할 권리 같은 건 갖고 있지 않다.


그리고――


레오노반은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용인들을 한 번씩 쳐다봤다.


그렇다. 자신의 사용인 중엔 어설픈 녀석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전원이 최고이며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손님에게 부끄럽지 않게, 왕가로서 창피하지 않게 준비해라!”

“옛!”


시간이 없다는 건 안다. 무리한 주문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들은 해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줄곧 보아온 자신의 ‘전속’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열의를 불태우는 그들을 향해 레오노반이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부탁한다.”


작가의말

후후. 공국 이전 왕가의 이름은 쿠 엘 델리안이었습니다! 공왕비 님의 이름은 레이니 델리안 루 몬테르이고요!


눈치채신 분도 계셨겠지만 84-2에서 스쳐가듯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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