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렙 히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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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ia
작품등록일 :
2022.05.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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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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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11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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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DUMMY

“우우······ 루비아 씨.”

“이잇! 임마, 이제 시작이야. 벌써 앓는 소리 내지 말고 똑바로 해!”


‘흐윽······ 라프리트 씨가 보고 싶어엉.’


그녀였다면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격려라도 해주었을 텐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 또 한 명의 친구는 없다.


집안 사정이라나? 그녀의 아버지인 리벨리타스 후작이 한사코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따라 더욱 반갑게만 느껴지는 루비아에게 대신 위로를 받으려 했건만······ 돌아오는 건 엄한 말뿐이었다.


물론 루비아의 일이다. 주위엔 전혀 들키지 않도록 얼굴은 생글생글 멋진 미소를 유지 중이었고, 입가조차도 부채로 가렸으면서 한 번 더 조심하여 복화술로 말하였다. 들킬 일 따윈 없는 것이다.


이리도 치밀하고 냉철한 그녀에게 다정함을 기대하기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빠르게 포기하기로 한 리아는 울상으로 변해가던 표정을 다잡고 물었다. 마침 근처엔 한 명도 없으니 딱 좋은 기회였다. 에르나 델리안과 같은 사용인들에게 둘러싸여 있기도 하고.



“루비아 씨. 저, 시킨 대로 잘했죠?”


그랬다. 이번 식장에서의 일련의 모든 행동은 사실 루비아의 세세한 지시 사항이 있었다.


질문을 하면 무섭게 노려봐서 왜 그래야 하는지 전혀 듣질 못했지만, 루비아는 식장에서의 흐름을 제법 상세히 말해주었다. 그에 따라 행동해야 할 지침까지도.


그리고······ 매우 놀랍게도 거의 그녀가 말한 대로 흘러갔다.


아니, 그냥 완전 똑같았다고 봐도 됐다. 계시받는 무당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정확한 그녀의 예측은 나온 말의 조사나 어휘만이 아주 조금 틀릴 뿐, 그 외엔 마치 오늘 이날을 다녀온 듯 완벽하게 똑같이 그렸다.


그녀의 지시대로 행동하면서도 이토록 정확한 예측엔 깜짝 놀랐었다.


‘똑똑하다지만 진짜 대단했지? 에르도 굉장하다는 듯이 보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인 리아는 내심 칭찬을 기대하고 루비아를 보았다.



“아앙? 잘해? 저 혼자 돌발행동을 해놓고?? 칭찬받으려면 최소한 시킨 것만은 확실하게 했어야지. 응?? 리아······?”

“헛?!”


리아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아니, 이 상황이라면 누구든지 위기에 봉착했음을 알 거다.


하지만 오늘은 든든하기 그지없는 라프리트가 없다.


혼자서는 저 괴팍한 루비아를 상대할 자신이 없었던 리아의 시선은 방황했고······ 의외의 곳에서 구원이 왔다.



“역시 당신의 지시였습니까, 소베르비아 님.”

“오오!”

“응? 무언가······?”

“아, 아뇨! 자자. 말씀들 나누세요.”

“······.”


루비아의 눈빛이 제법 따갑지만, 이런 자리에서 그녀의 본성이 튀어나오진 않을 거다.


두 손을 맞잡고 레오노반을 올려다본 리아는 자세를 풀고 한 걸음 물러서 둘이 대화할 자리를 마련했다.


여전히 루비아가 째려보지만, 안전을 확인한 리아에겐 안도감밖에 없다. 모른 척 고개를 돌려 엄한 곳을 보며 하지도 못하는 휘파람 소리를 입으로 낼 뿐이다.


이 모습에 레오노반은 조금 어이없는 듯도 싶었지만, 루비아가 시킨 일에 대해 제법 궁금했는지 딴말 없이 눈짓으로 감사를 전했다.



“묻고 싶은 건 많습니다만······ 우선, 괜찮은 겁니까? 저래 보여도―― 아뇨, 보이는 대로 후작은 뒤탈이 많은 사람입니다만?”

“하아······”


루비아의 눈썹이 한숨과 함께 살짝 찡그려졌다. ······더불어 리아의 휘파람 소리도 살짝 강도가 세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럴 걱정 따윈 없었어요. 트라우마가 심어질 강렬한 기억이었을 테니. 극복할만한 인물도 아니니 뒤에서 몰래몰래 소심한 짓만 해댔겠지요. 본인이 직접 나서는 일은 다시는 없었을 거고. 그랬는데······ 그걸――”

“······휘, 휘······”

“······.”


저리 성을 내지만 어찌 사람의 손이 으스러지게―― 최소 절단 근처까지 가도록 내버려 두란 말인가.


즐겁디즐거운 학원 라이프를 방해할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라지만, 아직 뚜렷이 뭔가를 한 것도 아닌데 이는 너무 잔혹하다. 징그러운 눈빛으로 훑어볼 때는 울컥했지만.


그래서 끝까지 모른 척으로 일관하려 했으나, 그럴 필요도 없이 레오노반이 다시 구원해줬다.



“그렇게 된 거군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루비아라도 왕자를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는지 말을 받았다.



“······뭐, 그렇긴 하죠. 검의 무게가 있다면 리아가 잡은 상태에서 조금씩 힘을 빼는 걸로도 충분했지요. 굳이 저렇게 내려놓지 않더라도.”

“애당초 후작의 부상을 노린 거였군요.”

“예. 헌데 전하께선 어찌하시겠습니까? 목숨을 노린 건 아니지만 벨루디스의 주요 인사를 해하였습니다만.”


‘아. 그러고 보니 이러나저러나 한 나라의 주요 인사를 다치게 할 공모를 꾸민 거네. 그 실행범은 나고······’


새삼 깨달은 사실에 리아는 간만에 비지땀을 흘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휘파람 소리도 멈추고 조심스럽게 레오노반의 눈치를 살폈다.


그렇게 보게 된 레오노반은······ 입가에 산뜻한 미소를 품고 있었다.



“뭐, 괜찮지 않겠습니까? 마침 저도 그에게 쌓인 것들이 있어서 그런지 후련하고 좋았습니다.”


역시 껄렁껄렁했던 첫인상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어제 보았던 건 잘못 보고 느낀 게 아니었다. 확실히 사람이 다르게 보인다.


‘아니면 이게 본래 성격이란 건가? 하지만 반성해야겠네. 첫인상이 나쁜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제멋대로 단정 지어버리다니.’


첫인상만으로 뜻하지 않은 오해를 사고 마는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보아왔건만 참으로 부끄러운 짓을 했다.


루비아도 레오노반 왕자가 지닌 마성의――안 좋은 쪽으로―― 인상으로 인해 제법 착각하며 지내왔나 보다. 그녀 또한 꽤 재미있다는 듯이 그를 쳐다봤다.


‘응? 어째 다시 본 거랑 조금 다른 듯도 한데······ 뭐어~ 상관없겠지. 루비아 씨 저번부터 제1 왕자님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으니 말이야.’



“응. 만사 오케이야.”

“앙?? 만사~ 오케~이?”

“왜, 왜 또 그래요. 다 잘 끝난 거 아니에요?”

“잘 끝나긴 뭐가 잘 끝나. 네년이 멋대로 헛짓거릴 했잖냐.”


조금도 짚이는 게 없었던 리아는 고개를 꼬았다. 하지만 되려 레오노반이 짚이는 게 있는지 그는 진중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치유]쪽입니까?”

“맞아요. ――아, 그리고 말씀은 편하게 하시어요. 너무 딱딱해서 오히려 이상하게 보여요. 듣기에도 좀 거북하고.”

“아, 알겠네. 이러면 되겠는가?”

“예. 그걸로 좋아요.”


레오노반은 묘한 시선으로 루비아를 쳐다봤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굳이 꺼내진 않고 헛기침했다. 그리고 대화를 마저 이어 나갔다.



“역시 이스피리아 공은――”

“――뿌뿌. 리아에요. 공도 됐고요. 16살밖에 안 됐는데 공은 뭔가 나이 들어 보이잖아요.”

“아, 그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만. ······그, 그럼 리아 양으로 괜찮겠는가?”

“네.”


최근 델리안이 리아로 자꾸만 불러주지 않아서 그런지 단박에 말을 들어주는 레오노반이 꽤 마음에 든다. 주가도 쭉쭉 올라간다.


싱글벙글한 리아는 손을 내밀어 계속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런데······ 레오노반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가슴에 손을 얹고는 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믿기지 않는 것처럼도, 놀란 것처럼도 보인달까.


그런 이상한 상태의 레오노반을 뚫어지게 보고 있으니, 그는 시선을 알아차리고 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 실례했네. 잠시 생각에 잠겼었네. 어흠, [치유]쪽 이야기였었지―― 그러면 이야기를 돌려서, 리아 양은 세례를 받지 않은 상태이지 싶네만.”


서둘러 말을 돌리려는 게 뻔히 보인다. 그렇지만 웬일인지 루비아치고는 딴지를 걸지 않고 조용히 넘어갔다.



“말씀대로 리아는 교회 소속이 아니에요.”

“그런가. 짐작이었다만 실수하지 않아서 다행이로군.”

“예. 조금 걸리는 게 있기는 하지만 제 의도와도 상충하긴 했습니다―― 실례. 이후의 이야긴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죠. 손님이 왔어요.”


루비아의 말에 다가오는 기척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집사를 대동한 레온하트가 있었다.


몹시 서두르듯 제법 빠르게 다가온 레온하트는 터주는 길목을 거침없이 들어오고는 대뜸 본인의 형인 레오노반을 노려봤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느냐? 레온하트.”

“응? 왜 그러세요? 레온―― 아, 아니. 레온하트 전하.”


묻는 말에도 불구하고 레온은 한동안 자신의 형인 레오노반을 노려보았다.



“저기······”


재차 더듬거리니 그때서야 레온은 시선을 거두고 리아에게로 옮겼다.



“괜찮은가? 리아 양.”

“어, 네. 레오노반 전하가 도와주셔서 괜찮아요.”

“······.”


레온이 다시 고개를 돌려 레오노반을 쳐다봤다. 뭔가 기분이 나빠 보인다.



“레온?”

“아, 아니네. 괜찮다니 다행이야.”

“네······”


리아는 대답하면서도 루비아를 슬쩍 쳐다봤다. 레온이 대체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인지 어렴풋이라도 그녀의 의견을 엿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얻은 건 없었다.


루비아의 속내를 엿보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레온의 이런 모습이 그녀마저도 상당히 의외였지 놀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이상은 입가를 가리고 있는 루비아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이제 괜찮으려나?’


여전히 딱딱한 표정에 날이 섰다는 느낌이지만 레온은 자주 접하던 평소의 그로 돌아오지 않았나 싶었다.



“미안하네. 아직 축하도 전하지 않았건만.”

“아뇨, 아뇨. 완전 괜찮아요. 애초부터 별로 달갑지 않은 훈장이었거든요. 그리고 레온――하트 전하께서도 방어전에 계셨잖아요. 그런 분께 축하를 받기엔 더더욱 내키지 않아요.”

“모두가 영웅이며, 용자이기 때문인가?”

“네.”


미소 짓는 리아를 보며 레온도 이제야 살짝 얼굴이 풀렸다.



“죄송했습니다, 형님. 인사도 없이 무례하게.”

“아, 아니. 괜찮다. 신경 쓰지 마라.”


어색하다······


‘어색하다고!!’


분명 서로를 향해 서 있건만.


하물며 대화한 당사자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치 두 왕자는 눈조차 마주하지도 않는다. 대신 어물쩍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뿐이면 모를까, 레온의 사과는 말뿐으로 진심은 전혀 담겨 있지도 않았다.


이러한 분위기에 리아는 되려 본인이 더 어색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알고 있다. 왜 둘 사이에 이런 기류가 흐르는지는.


이 둘은 왕위를 두고 서로 다투는, 이른바 정적 관계이다. 친해지기란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리아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왕위에 그만한 가치가 있나 싶기만 했다. 형제의 우애고 뭐고 다 버릴 만큼의 가치가······


‘왕이면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하잖아. 그런 사서 고생하는 직책 나 같으면 냉큼 넘겨줘―― 응?’


갑자기 든 생각에 리아는 깜짝 놀라 레오노반을 올려다봤다.



“설마······”

“왜, 왜 그런가, 리아 양?”

“아, 아뇨.”


레오노반은 남이 쳐다보는 시선에 예민한 건지 바로 알아차린다.


그래서 에둘러 넘어가려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지긋이――


리아는 레오노반이 부담스러워하거나 말거나 당황하는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보았다.



“저기······ 뭐 이상한 게 있나?”

“이 정도라면······ 외모값을 하는 건가. 딱 틀에 박힌 금발벽안이고.”

“응?”

“아뇨. 꽤 잘 생기셨다고요.”

“어어? 고, 고맙네?”

“왜 의문형이에요?”


다양하게 변해가는 레오노반의 얼굴을 본 리아는 살짝 웃음을 터뜨렸다.


왕자의 얼굴을 보고 웃다니. 예의가 없다는 걸 넘어 잘못하면 호되게 질책당할 행동이다. 감히 생김새의 품평도 했고. 그나마 주변에 사람들에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아서 다행이랄까.


하지만 그 본인이 이를 추궁한다면 말짱 꽝이다.


분명 일이 커질 수도 있는 상황.


그렇지만 얼이 빠진 듯 있던 레오노반이 이후 보인 행동은 같이 미소 짓는 것으로, 굳이 걸고 넘어지거나 하지 않았다.


‘응. 정말 크게 오해했었어. 동생을 무지 아끼는 이런 착한 형을.’



“리아 양! 잠시 실례하네.”


다급하다는 듯이 레온이 마주 보고 있던 레오노반과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던 리아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런데 묵묵부답이다.


레온은 어째서인지 급하게 뛰어든 것치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심란한 눈으로 내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레――”

“――잠시, 리아. 개인적인 대화는 다음 기회에. 자리가 마땅찮아요. ······전하께서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잊지 않으셨겠지요. 거기다 다른 손님이 오고 있어요.”

“아, 네.”

“······알겠네.”


지금에 이르러서는 무척이나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루비아의 정중한 어투. 얼떨결에 대답은 했지만, 그녀가 왜 이런지를 모르겠다.


‘주변엔 레온이랑 레오노반 씨뿐인데.’


루비아가 이런 식으로 대할 때는 주변에 누군가가 있을 때―― 그리 말을 나눠보지 않은 학생들이나 주변 눈이 많은 상황밖에 없다.


거기에 이 둘은 해당하지 않는다.


레오노반도 정식으로 인사를 나눴다고 할 수 있는 어제. 처음은 딱딱하게 굴었으나 이내 그의 마성의 첫인상을 깨닫게 되었는지, 필므들이 있을 때처럼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레온이라고 다르지 않게 진작에 편히······


‘응? 어째 루비아 씨 레온이랑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걸 본 적이······ 없지? 체험학습도 참가하지 않았고.’


단순히 레온이 없을 때 루비아가 그를 편히 불렀을 뿐이었는데 조금 착각한 모양이다. 실제로 둘이 대화를 나눈 상황 자체가 없었건만.


‘뭐 레온이니까 루비아 씨도 금세 편히 본성을 드러내겠지.’


벌써 내숭을 벗어던진 루비아와 그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레온이 그려진다.


앞서 얼이 빠져 루비아를 쳐다보던 레오노반의 반응으로 상당히 기대됐던 리아는 미소 지었다.


그렇게 기분도 좋게 다가오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했다.


식장의 이목을 끌며 이쪽으로 오는 사람은 두 명의 남성으로, 얼굴만큼은 꽤 익숙한 이들이었다.



“어흠······ 혹 저희가 여러분들의 즐거운 환담을 깬 건 아닌지?”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쳐다보자 두 사람 중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인 남자가 당혹스러워했다. 짧게 자른 아이보리의 머리카락이 어울리는 사내다운 인상인데 의외로 섬세한 부분도 있는 모양이다.



“여러분. 갑자기 실례했습니다.”


뒤이어 말한 건 상대적으로 체구가 작은 남자로――필므보다야 훨씬 크다――, 제국의 지도계층에서 유행하는 건지, 앞선 남자와 마찬가지로 흑발에 가까운 갈색 머리칼을 귓가 근처에서 자른 깔끔한 헤어스타일이었다.


그 외에는 상당히 달랐는데, 이 남자는 마초와는 거리가 먼 병약한 왕자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여리여리한 생김새와 차분하고 얌전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외모와 더불어 굉장히 지적으로 보인다.


이 둘은 익숙하다고 했듯 베르다드의 동급생으로, 리아도 얼굴만큼은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고 할까? 루비아나 라프리트만치 유명한 이 둘을 현재 학원에 재직 중인 사람이 모른다는 건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런 둘에게 대표라 해야 할지, 인사를 받게 된 레오노반이 솔선하여 말을 걸었다.



“귀공들도 참석하였군.”

“어찌 보면 저희의 은인이기도 하니 말이죠. 축하하기 위해 참석하는 거야 당연합니다.”

“그리고 미처 인사드리지 못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아니라네. 나에게 미안할 게 어디 있겠나. 거기다 지금 이렇게 인사를 하고 있잖나. 신경 쓰지 말게.”

“황송합니다, 레오노반 제1 왕자 전하.”

“하하. 이제 그만 편하게들 대해주게. 제법 얼굴을 본 사이가 아닌가. 도리어 제국의 3대 가문의 차기 가주인 자네들에게 극진히 대해져서야 창피할 따름이라네.”

“과분한 말씀 감사합니다, 레오노반 전하.”

“전하께서도 부디 저흴 편히 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알겠네. 앞으로 긴 인연이 될 터. 잘 부탁하네.”


‘굉장히 사이가 좋구나.’


두 남성―― 레스 린 프라바이드와 헤라드 벨렌 샤라즈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냈던 사이였는지 호흡이 척척 맞는다.


그런 둘은 오래간만에 인사드린다며 레온과 루비아에게도 예를 표하며 말을 걸었다.


학업은 어떠냐는 둥 간단한 안부를 묻는 그들은 과연 상류층의 사람들이라는 건가, 아주 익숙한 듯한 화목하게 대화를 이어 나간다.


‘꼭 옛 영화에서나 보던 사교계의 현장 같네. 모처럼의 공주님 모드인 루비아 씨도 매우 잘 어울리시고. ······완전 빈말들뿐이지만.’


물론 루비아만 그렇다. 제국의 두 사람은 한눈에 보기에도――


‘응?’


아니다. 여리여리하고 지적으로 보이는 남자, 헤라드 벨렌 샤라즈는 왠지 모르게 그 또한 빈말뿐이지 않나 싶다.


――어쩌면 루비아보다도 더.


루비아는 그나마 성가셔하는 감정이라도 있지만, 그는 그것조차도 없어 보인다.


방실방실 웃으며 풍부한 표정과 감정이 가득 실린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착각일 가능성이 더 클 거다. 하지만 뭔가 께름칙함이랄까,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기분이 든다. 진짜 왜인지는 몰라도.



“네. 리아 양과는 이후로도 잘 지내고 있지요. 부끄러웠으나 먼저 용기를 내길 잘했죠. 그렇지 않나요? 리아 양.”

“······아, 네! 저도 루비아 씨랑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기뻐요.”


얼떨결에 대답하긴 했으나 남의 일인 양 딴생각하고 있던 걸 루비아가 모를 리가 없다. 싱글싱글 웃고 있기는 하나 매우 싸늘한 눈빛으로 본다.


탐스러운 볼의 위험을 직감한 리아는 황급히―― 솔직한 심정으로는 당장 도망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고 뛰어들었다. 무지하게 부담밖에 안 되는 고위층들의 담화 현장으로.



“제대로 인사를 나누긴 처음입니다, 두 분. 이스피리아라고 합니다.”


리아는 양치마의 끝자락을 잡고 살짝 머리를 숙이는――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을 전형적인 벨루디스식의 인사를 했다.


여담이지만 어느 쪽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자신으로서는 너무 벨루디스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 게 좋다며 루비아가 핀잔을 주기도 했었다. 인사 같은 예법조차도. 그렇지만 이제 와서 바꾸기는 뭐하다. 거기다 라프리트에게 배운 것이지 않은가. 웬만하면 이대로 하고 싶었다.


그러한 생각을 하는 동안 레스와 헤라드도 가슴에 손을 얹은 제국식 예법으로 정중히 답했다. 과연 그 자세는 고위 귀족이랄까, 곁눈질로 본 어느 사람보다도 기품이 넘쳤다.



“나도 이제야 인사를 나눌 수 있어 기쁘다네, 이스피리아 공. 레스 린 프라바이드라네. 편히 레스라 불러줬으면 하는군.”

“전 헤라드 벨렌 샤라즈입니다. 부디 저도 헤라드라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네, 레스 씨와 헤라드 씨. 만나서 반가워요.”


조금은 관계를 맺고 싶었는지 둘은 친근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이쪽은 편히 불러달라 할 수가 없다. 이는 루비아의 지시로, 만약 그렇게 한다면 괜한 잡음이 발생한다나 뭐라나.


게다가 개인적으로도 아직 잘 모르는 사람에게 애칭을 허락하고 싶진 않다. 그냥 이대로 나갈 수밖에.


다행이라면 둘 다 그리 마음엔 두지 않는지 미소가 무너지지 않는다.


단순히 본심을 드러내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나 일단 안심한 리아는 가벼운 마음으로 둘과의 대화에 어울렸다.



“먼저 훈장 축하한다네. 그리고 그 자리에 있었던 한 명으로서 감사하네.”

“이스피리아 님이 아니셨다면 큰일 날뻔했습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아뇨, 아뇨! 저에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어요. 혼자 한 일이 아닌걸요.”

“아아. 물론 들었다네. 참으로 감명 깊은 이야기였지. 그렇지만 귀공이 한 일이 없다는 건 또 아니지 않나. 감사를 전하기엔 차고 넘치지 않겠나.”

“다른 분들께도 이미 격려차 들러 예를 표했습니다. 귀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아 참. 나 명목상으로는 자고 있었지.’


꽤 부지런하고 기특하다. 높은 신분임에도 어딘가 거들먹거리는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생각 자체가 좀 유해 보인다. 아마 이쪽이 자고 있지만 않았다면 굳이 감사를 전하러 찾아오지 않았을까도 싶다.


――레스라는 사람은.


번뜩 든 느낌이지만 헤라드의 경우 단짝으로 보이는 레스가 오지 않는다면 절대 움직이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래도 이러나저러나 둘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 평소부터도 신분을 가리지 않고 친절한 모습을 보여왔기도 했고.


의외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리아는 미소로 감사를 전한 둘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던 때였다.


문득 주변에서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분들이 한곳에 모여 있다라······”

“다시는 보기 힘든 역사적인 자리지. 보는 내가 다 과분해지는 기분이야.”


목소리는 작았기에 대화하고 있는 제국의 두 명이나 루비아들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들을 수 있었던 리아는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마음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다들 진짜 굉장한 사람들이구나.’


리카드 덕분에 최고 국빈이라는 뭔가 거창한 대우를 받고 있기는 하지만 본래 자신은 단순 시골 촌놈. 그저 즐거운 학원 생활을 하러 왔을 뿐인데다가 이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예정이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나라의 다음 주역들인 사람과 함께 연관되다니······ 창피하다 못해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하지만 이쪽의 미소가 딱딱하게 경직되었다는 걸 알 리가 없는 레스와 헤라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그러면 이만 실례해야겠군. 주빈을 혼자 독점할 순 없으니 말이야. 무척이나 즐거웠네, 이스피리아 공.”

“오늘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동급생으로서 대했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제대로 예를 갖추겠습니다.”

“아, 네! 저도 즐거웠어요. 그렇지만 헤라드 씨, 굳이 그러시지 않으셔도 돼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레스 씨도.”

“알겠네. 기왕이면 이쪽도 그리 부탁한다네.”


그걸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금 정중히 가슴에 손을 얹어 예를 보이고는 떠나갔다.


긴장이 풀린 리아는 조용히 숨을 토해냈다.


‘드, 드디어 끝났다.’



“――끝나긴.”


작디작은 목소리로 태클이 들어왔다.


리아는 아직 입가를 가린 루비아를 돌아봤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작게 물었다.



“아, 안 끝났어요?”

“당연한 소리 좀 하지 마.”

“하, 하지만 루비아 씨가 말해준 내용은 여기까지였잖아요?”


그렇다. 아직 몇 가지 자잘한 충고 등이 남아있기는 했으나 그녀가 말한 흐름은 제국의 두 사람이 오는 것으로 끝이었다.



“생각을 좀 해라. 이대로 끝날 리가 있겠어?”

“에······? 지, 진짜요?”


벌써 돌아갈 생각 만만이었던 리아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루비아는 개의치 않고 쐐기를 박았다.



“한참 멀었어. 이제 시작이라고 봐도 돼.”

“시, 시작······ 조금 전에도 시작이라고 했는데······”

“그로부터 몇 분밖에 안 지났어.”

“······.”

“아오. 귀찮게스리. 중요한 건 다 지났어. 이제 별거 없으니까 그냥 대충대충 해도 돼. 예전 우리나라에서 했던 것처럼 말이야. 적당히 말만 맞춰주면 되걸랑? 그러니 얼굴 좀 펴라, 앙? 보는 눈이 많아. 너무 내 쪽도 보지 말고.”


그렇게 심한 얼굴이었나. 웬일로 루비아치고 위로 비슷한 말을 한다.


물론 그렇다고 기분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당장이라도 발 뻗고 드러눕고 싶은 기분만 강해진다.


리아는 잠시 시무룩했지만, 너무 보지 말라는 충고에 따라 슬쩍 몸을 돌려 에르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제아무리 에르라도 사용인 역할 중에는 특별한 도움을 줄 순 없었는지 미안한 얼굴로 급사에게 받아온 음료를 줬다.


마지막 남은 아군인 델리안은 도대체 뭐가 즐거운 것인지 싱글싱글 웃고 있었는데······ 눈이 마주치자 슬쩍 엄지를 치켜세웠다.



『힘내거라.』

『······즐거워 보이시네요, 델리안.』

『그야 희귀한 광경―― 아, 아무것도 아니란다.』

『얼버무렸어!』

『흠흠. 진정하거라, 이스피리아야. 지금은 날 신경 쓸데가 아니지 않느냐. 자자. 말하기 무섭게 또 다음 손님이 온단다.』


서두르는 게 추궁을 넘어가기 위함이 아닌가도 싶지만, 그녀의 말대로 정말 이쪽으로 오는 사람이 있었다.


걸어오고 있는 진행 방향이라든가 보면 확실할 터. 게다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두고 봐요, 델리안.』


뒤끝 넘치는 말을 남기고 리아는 건네받은 포도주――알콜이 있는――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잔을 에르에게 돌려주고 차분히 몸가짐을 확인하며 손님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도 곁눈질로 사용인들에게 흐트러짐이 있나를 점검받았고, 잠시 후 손님들이 당도했다.



“잠시 실례하겠네.”


상대가 말을 건넨 순간 레온과 레오노반은 즉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동시에 말하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그렇다. 이번에 찾아온 손님이란 바로 아크티알 네우라 디안 벨루디스. 무지무지하게 긴 이름인 이 나라 벨루디스의 왕이었다. 게다가 아크티알은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아마 저분이 벨페르 페네리 파라디우스 공작님이겠지? 이 나라의 재상이라는. 그리고 저분은――’



“리아.”


눈치를 주는 루비아를 따라 정신을 차린 리아는 조신하게 머리를 숙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레온들과 똑같이 무릎을 꿇고 싶었으나 절대 그러지 말라고 했다.


이유는 공국 때와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건방진 태도를 보임으로써 주변에서 멋대로 착각하게끔 유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훈장을 받을 때도 감사 이외에는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던 거다.


하지만 아무리 이유가 있다고 한들 부담스러운 건 매한가지였으니. 본의와는 전혀 다른 행동들에 리아는 속이 쓰라린 느낌을 받았다.



“일어들 나거라.”


명에 일어나는 레온과 레오노반―― 본인의 아들들을 한 차례 본 아크티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앞에 선 아크티알은 뭔가 감회가 깊었는지 우수에 찬 눈으로 이쪽을 봤다.



“이렇게 보니 정말 작군······”


이쪽에 들려줄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그저 혼잣말이었을 거다.


하지만 리아의 엄청난 지각능력은 이를 놓치지 않았고,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단어에 저도 모르게 욱해버리고 말았다.



“작은 게 아니에요. 조금 덜 컸을 뿐입니다. 앞으로 쭉쭉 클 거라고요. 아마······”


설마 자신이 반발할 줄은 몰랐나, 아크티알을 비롯한 모두가 놀란다. 하물며 루비아마저도 크게 눈을 뜨고는 이쪽을 본다.


그렇지만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이내 루비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고, 곧이어 아크티알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미안하네. 모욕하려는 셈은 아니었다만 무례를 범했군. 용서해주게.”


말뿐이다. 아크티알의 머리나 몸은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정말 미안한지나 의심되는 태도이다.


하지만 사과하는 인물이 누구인가가 중요한 거다.


무려 왕이 사과하다니. 그것도 루비아 같은 타국의 인사가 끼어있는 이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자국의 위신과도 관련이 있다. 이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하물며 무수히 많이 본 드라마에서조차도 이러한 장면 따윈 있지도 않았다.


최대한 실제처럼 만들려고 하지만 오락이라는 요소가 반드시 포함될 드라마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없는 거다. 그만큼 왕이 타국 사람들 앞에서―― 더욱이 시골 촌녀에게 사과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상황일 것이다.


아무리 맘이 상했다지만 이건 리아라도 정신이 번쩍 들 수밖에 없었다.


‘나, 난 도대체 무슨 짓을?!’


사색이 된 리아는 서둘러 넙죽 고개를 숙였다. 본심은 무릎을 꿇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참아냈다.



“용서라니 당치도 않습니다요. 소생이야말로 무례한 짓거릴―― 아뇨,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한 번만, 딱 한 번만 봐주신다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요.”

“······.”


조용하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이 모두가 조용하다.


왜 그런 건지 살펴보고 싶기는 하지만······ 용서를 받기 전까지 차마 머리를 들 용기가 생겨나질 않았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조금 조바심이 들 때였다. 마침내 아크티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는 이쪽이 아닌 다른 사람과 귓속말을 나누는 게 아니겠는가.



“벨페르······ 혹시나 짐을 놀리는―― 아니, 유쾌하게 하려는 배려인가?”

“설마 그러겠습니까. 단순히 폐하께서 섬세하시지 못했던 탓입니다.”

“짐이?”

“예. 민감한 시기잖습니까. 순간 욱했다가 본인이 무슨 소릴 한 건지 깨달은 것이겠지요.”

“······아하. 그렇군.”

“뭐, 좀 과한 면이 없진 않습니다만······.”


과연 재상이랄까 정확히 이쪽의 상태를 꿰뚫었다.


그렇지만 과하다는 의견엔 동의하진 못하겠다.


‘이토록 진지하게 성심성의를 다해 용서를 구하건만 어딜 봐서 과하다는 건지.’



“――혹시 진지나 성심성의 같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리아는 흠칫 몸을 떨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안다. 그야 친구의 목소리를 까먹을 리는 없지 않은가. 방금까지 대화하기도 했고.


그런데도 흠칫한 건 그 목소리에 담긴 기운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싸늘했다. 어지간한 한파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루비아, 그녀의 목소리는 냉기를 넘어선 무언가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굳어진 리아는 허리를 숙인 상태로 조심히 뒤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히잇!!”

“――닥쳐.”

“넵.”

“닥치라고 했을 텐데?”

“······.”


차갑다. 루비아의 눈은 여태 본 적조차 없을 정도로 차갑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할 말이 많긴 한데 우선 이거 하나만 말해둘게. ――그 손 당장 멈춰.”


‘손?’


의아한 그녀의 말에 리아는 시선을 자신의 손으로 옮겼다. 그리고 어떤 소리가 들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제야 그 소리를 인식할 수 있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스스스스스슥.


‘어, 어느새?!’


손에 정말 자유의사라도 생긴 것인가.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양손은 서로를 맞잡은 채 맹렬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라프리트도 매번 엄하게 그만두라고 하지만 왕의 앞에서까지 이러다니······


새삼스럽지만, 진심으로 조심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암만 그래도 그렇지. 너무 무의식적으로 나오지 않는가.


이쪽도 그렇지만 여러모로 서로에게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서둘러 손을 멈추니 루비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집중이나 해. 나머진 돌아가서 할 테니까.”


돌아가서 뭘 한다는 것인가.


두려움이 불길하게 뭉실뭉실 피어올랐지만, 그녀의 말을 거역하는 건 더 무섭다.


물론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지금부터라도 똑바로 잘 해내면 대견하다며 넘어가 줄지.


――라고, 루비아가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차마 리아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여 자기암시를 하듯 굳게 믿었다. 마냥 자포자기하기엔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이 된 느낌인지라 버틸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다고 속으로 되뇐 리아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 죄송하게 됐습니다. 혹여나 폐하께서 마음에 두실까, 송구스러움에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습니다만······ 조금 실패해 버렸습니다.”

“과, 과연 그랬었군. 너, 너무 낙심하지 말게. 짐은 덕분에 좋은 기분전환이 되었다네. 그렇지 않은가, 벨페르.”

“예. 학생들 사이에서도 영웅이라 칭송이 자자합니다만 배려심 또한 그에 뒤처지지 않음에 저 또한 감복했습니다.”


너무 거창하지 않은가. 뻔히 이쪽이 왜 그랬는지 알면서.


그렇지만 조금 낯간지러울 뿐, 불만은 없다. 넘어가 줄 요량인 듯한데 거기에 불만을 품을 수나 있겠는가. 오히려 한 나라의 왕을 시정잡배의 두목처럼 보이게 만들었음에도 무사히 넘길 수 있다는 걸 확인한 리아는 희희낙락 기분이 들뜨기만 하였다.


그래서 이어지는 벨페르의 자기소개에도 미소로 대응했다.


――하지만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벨페르 이외에 아크티알과 함께 왔던 또 다른 한 사람―― 친구의 생김새가 드문드문 보이는 꽃중년, 라임 계통의 연한 연둣빛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의 얼굴이 굳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그 모습에 들떴던 리아의 미소는 바로 굳었다.


‘내심 기대하던 순간이었는데······’


하지만 심정이 어떻든 간에 이 시간을 피할 순 없다. 리아는 자기소개하는 그에게 같이 예를 표했다.



“엘리아드 아포이 디안 리벨리타스라네.”

“이스피리아입니다······.”


암만 기가 죽었다지만 생각 이상으로 시무룩한 목소리가 나왔다. 원래는 반갑게 인사하려 했건만······


리아는 당황스러움으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수습하려 재차 말을 하려 했는데······ 보고야 말았다. 첫 친구인 라프리트, 그녀의 아버지인 리벨리타스 후작의 얼굴이 오묘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어딘가 초조한 듯도 싶은 후작은 리아가 입을 열기 전에 먼저 황급히 말했다.



“흠흠. 귀공은 우리 딸아이와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네만.”

“앗, 네. 귀, 귀하의 따님인 라프리트 씨께 무척이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후후······ 너무 격식을 차리지 않아도 괜찮다네. 오늘은 귀공의 업적을 축하하는 자리이지 않은가. 딱딱한 행사도 아니니 긴장할 필요는 없네.”

“어······ 알겠습니다.”


어쩐지 분위기가 가벼워진 느낌이다. 착각인 것도 아닌지 후작의 굳은 얼굴엔 작게나마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분도 그냥 첫인상이 나쁠 뿐이었나?’


하긴 생각해보면 리벨리타스 후작은 천사나 다름없는 라프리트의 아버지다. 콩 심은 데에서 팥이 나올 리는 없달까? 리벨리타스 후작 또한 라프리트 못지않게 굉장히 좋은 성품의 사람일 게 틀림없다.


급격히 신이 난 리아는 얼굴을 폈고, 한시름 덜었다는 듯 살짝 어깨를 늘어뜨리는 후작과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주된 내용은 공통 관심사라 할 수 있는 라프리트에 대해서였다.


후작도 딸이 학원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었던 모양인지 적응은 잘하는지부터 교우관계, 하물며 식후 트림은 하는지까지 집요하게 물어왔다.


리아는 그런 물음에―― 은밀한 비밀이라 할 수 있는 부분까지도 귓속말로 이야기해주는 등, 친구의 아버지인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정작 당사자인 라프리트가 들었으면 통곡했을 이야기들이 오가고······


한동안 이어진 대화를 끝마친 후작은 매우 흡족하다는 듯이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고맙네, 이스피리아 공. 덕분에 우리 귀염둥이―― 크흠. 딸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 안심했네.”

“아뇨, 아뇨. 저야말로 라프리트 씨 덕택에 적응도 잘할 수 있었고 매일 즐겁게 생활하고 있어요.”

“그런가······”


후작은 잠시 리아는 내려다보았다.



“입장상 공공연히 귀공을 초대할 순 없지만, 딸을 만나러 오는 거라면 괜찮겠지. 혹 내킨다면 라프리트와 함께 놀러 오게. 환영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놀러 갈게요.”


대답을 들은 후작은 상쾌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폐하, 실례했습니다.”

“무얼. 그럴 수도 있는 거겠지. 소중한 딸이 아닌가.”

“······.”


작게 웃은 아크티알은 대답이 없는 후작을 놔두고 리아에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면 이만 가보도록 하지. 부디 파티를 즐겨주길 바라네.”

“예. 말씀 감사합니다, 폐하. 배려대로 즐기겠습니다.”


그렇게 인사를 마친 아크티알은 함께 온 인원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아마 다른 귀족들이랑도 대화를 나누려나 보다.


다만 벨페르, 그만이 뭔가 아쉬운 듯이 이쪽을―― 특히 뒤에 대기하고 있던 에르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분은······ 아마 리카드 씨에게 에르의 정체를 들었겠지?’


재상이란 직책이니 아크티알과 함께 들었을 가능성은 컸다.


그렇지만 왜?


용왕인 걸 알았다 한들 저렇게 쳐다보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으음. 모르겠네. 그렇지만 다 끝났으니 됐나. 천천히 생각해보지 뭐. 응. 이러나저러나 나름 보람찬 하루였어.”

“뭘 자꾸 멋대로 끝내는 거야?”


또다시 등 뒤에서 루비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크티알들과 대화할 때 잠시 빠져있었건만 끝나자마자 어느새 와있다.


리아는 충고도 있었고 하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돌아봤다.


그렇게 긴장 어린 시선으로 올려다본 루비아는······ 기분이 풀려있었다. 눈가가 느슨하게 풀려있는 걸 보니 확실했다.



“그래도 살살하진 않을 거니까 안심해.”

“나, 남의 속을 읽지 마세요! 응? 아, 아니 왜요. 저 열심히 했잖아요!”

“열심히 한 건 열심히 한 거고. 그 비비는 것만큼은 도저히 안 되겠어. 왜 라프리트가 그리도 뜯어고치려고 한 건지 이제 이해가 가.”

“에에······”

“얼굴 펴.”


엄한 말에 리아는 반사적으로 입가를 끌어올렸다.



“하아. 바보스러운 짓은 좀 참아줬으면 하는데······ 네겐 무리겠지. 아니다. 어쩌면 저런 바보스러움과 맞물려서 묘한 재능이 탄생한 건가?”

“재능이요?”

“됐어. 그보다 적당히 돌아다니기나 하자. 되도록 덜 시달리려면 말이야.”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면 저기 의자가 있으니 그리로 가죠?”

“좋은 먹잇감이라도 될 셈이야?”

“네?”

“간단하게 말해서 서 있는 거랑 앉아 있는 거. 어느 쪽이 말을 걸기 편해 보여?”


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잠시 생각을 해보았고, 이내 루비아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게 되었다.


더불어 왜 아직 안 끝났다고 했는지도.


창백해진 리아를 본 루비아는 풋―― 조용히 비웃듯이 웃었다.


‘너무해······’


오늘따라 더욱 라프리트가 보고 싶어지는 날이다.


리아는 울상이 되었지만 번득이는 루비아의 시선 때문에 곧장 새침하게 귀족다운 행색을 연기했고, 식장 내의 다과를 먹으러 가는 등 의자에는 한사코 앉지 않으며 이동했다.


――자신을 소개하러 다가오는 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순서라는 게 있었던 모양인지 아크티알이 다녀간 뒤로 많은 사람이 다가왔다.


루비아의 말대로 서서 뭔가를 하고 있으니 제법 눈치를 보아 이야기 자체는 짧았지만, 자식들까지 대동한 귀족들의 전체 수는 많다. 귀족이란 원래 이리 많은 건가 싶을 만큼.


결과적으로 쉼 없이 인사를 나누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다가온 귀족들은 본인을 어필하거나, 은근슬쩍 본인의 아이와 주선을 꾀하는 등의 부담스러운 말들을 꺼냈고, 그것들을 어떻게 하면 원만히 거절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점점 정신적으로 지쳐갔다.


특히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와 어떻게든 주선하려고 했던 귀족에게는 남들의 배 이상으로 진땀을 뺐다.


‘귀, 귀족은 무섭구나.’


꽤 살갑게 대하던 공국에서는 금세 적응하여 상당히 편하게 있을 수 있었지만, 어딘가 절실한 벨루디스에서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다. 앞으로도 쭉.


그런 뼈와 살이 되는 깨달음을 얻은 리아는 중간중간 도움을 바라며 애처롭게 루비아를 봤으나 어림없다. 그녀는 되려 아이리스에게도 피해가 갈 수가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며 엄하게 다그쳤다.


하지만 아예 도움이 없던 건 아니었다.


루비아 대신 걱정된다며 같이 따라와 준 레온과 레오노반. 이 둘이서 쉽사리 대답을 못 하거나 얼버무릴 때는 곁에서 차분히 대응해주는 등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짧으면서도 너무 길게만 여겨졌던 첫 사교계 데뷔는 위로는커녕 다 경험이라고 방치한 루비아에겐 야속함을, 그리고 제 일인 양 도와주는 둘에게는 무한한 감사를 느끼며 막을 내렸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리아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잘 끝났다고 믿을 수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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