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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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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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21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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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1 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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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4.27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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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DUMMY

작전은 이랬다. 적군으로 위장한 기사들이 마구간으로 가 말을 강탈한다. 그리고 북쪽에 마련된 출입구로 탈출해 도로를 따라 줄행랑을 치는 것이다. 만약 마구간과 출입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생각보다 멍청하다면 기사들은 끝까지 흑연기사단 장교 흉내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전에 들킨다면, 그때는 각자의 재량으로 해결할 일이다. 다만 아무리 대처가 빠르다 해도, 늦은 시각이니만큼 추격대가 편성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테니 탈출에는 무리가 없을 터였다.

루도와 위첼은 조금 더 진지에 남아 병사들을 교란시킨 후 탈출할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위험할지도 모르지만, 기사들이 탈주한 뒤에는 추격대의 관심이 모두 그쪽에 쏠려 있을 테니 둘에겐 오히려 득이 될 게 분명했다.

기사들은 그의 작전에 별다른 이견을 달지 않았다. 인솔자 없이 스스로 행동해야 하고, 자신들이 미끼가 되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래도 앉아서 죽을 때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기사 하나가 물었다.


“도로를 따라 그냥 무작정 달리라는 거요? 아무리 그래도 추격대가 따라붙을 텐데...”


“음, 달리다 보면 여울목이 하나 나올 텐데, 거기서 제 동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땐 그 사람들의 명령을 따르세요.”


사실 루도도 이칼롯 쪽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은 그냥 그들이 무언가를 해주리라 막연히 기대하는 수밖에.

기사들은 열을 맞춰 정연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촉박한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침착하게 루도의 명령에 따랐다. 보초를 서던 병사들은 각 잡고 이동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황급히 길을 터주었다. 그들이 백천기사단의 단원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감옥과 마구간이 야영지 외곽에 있고, 때문에 높은 신분의 장교가 얼마 없다는 점은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

루도와 위첼은 기사들의 뒷모습이 간신히 보일 정도로 거리를 잡고는 태연하게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연기는 겉모습뿐이지, 근처 병사들과 눈이 마주칠 때면 그때마다 등골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위첼이 말했다.


“설마 마구간에서부터 걸리진 않겠지?”


“생각보다 명령체계가 해이하길 바랄 수밖에.”


마구간에 도착하자 기사들은 곧장 마구간지기에게 다가갔다. 최악의 경우는 거기서부터 칼부림이 일어나는 거였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기사 중 가장 풍채가 좋은 사람이 맨 앞에 서서 마구간지기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내용은 아마 자신들은 상급기사들이고, 새벽 순찰을 나갈 예정이니 지휘관의 이름으로 말을 대령하라는 식일 게 분명했다. 그건 관등성명도, 작전명령서도 없이 오로지 허세만으로 이루어져야 했기에 말발이 좋고 위압적인 체구를 가진 사람이 전면에 나서는 게 유리했다.

대화는 3분가량 이어졌다. 마구간지기는 어떻게 해서는 명령서를 확인하고픈 속셈이었지만, 기사들이 워낙 강경한지라 애를 먹고 있었다. 여기서 레미나가 미리 알려준 암구호가 빛을 발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마구간지기는 적어도 기사들이 외부침입자는 아닐 거라 판단하고는 말을 가져가는 것을 허락했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든 루도는 기사들이 차례차례 말 위에 오르는 것을 보곤 쾌재를 질렀다. 일단 여기까지 들키지 않았다면 반은 성공한 것이었다. 출입문도 제지 없이 통과한다면 정말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기사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들 중 몇몇은 지나가던 병사들이 경례하자 이에 응대해주는 대담함을 발휘하기까지 했다. 그들이 출입문 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루도와 위첼은 근처 모닥불에 앉아 사주를 경계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그때 멀리서 한 병사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구간도, 출입문도 아닌, 감옥 방향에서였다.


“포, 포로가 없어졌다. 포로들이 도망쳤다!!”


루도는 숨이 덜컥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초병들의 상하번 시간이 생각보다 훨씬 빨랐던 것이다. 뒤이어 북쪽 출입문 쪽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문지기에 의해 제지당하자 기사들이 무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고요했던 진지 안이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막사 안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오고, 병사들이 속속들이 밖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이 둘이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출입문 정도는 간단히 돌파해주길 바라면서, 루도는 목청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포로들이 도망쳤다!! 서문 쪽이다아! 백천기사단 녀석들이 서문으로 도망친다!”


둘은 병사들 틈에 섞여 포로들의 탈출소식을 알렸다. 물론 그들은 서문이 아닌 북문으로 도망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일단의 병사들이 루도의 말을 믿고 서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둘은 혼잡한 와중에도 병력의 이동상황을 면밀히 주시했다.


“기병대는?”


“아직이다. 항시대기조가 있을 텐데.”


보병들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발로 아무리 뛰어본들 말을 탄 기사들을 쫓아갈 수 있을 리 없으니까. 그보다는 경기병대의 동향이 제일 중요했다. 그들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둘의 탈출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제발 위보가 일파만파 퍼지길, 추격대가 서문으로 향하길 빌면서 둘은 끊임없이 거짓 정보를 흘리고 다녔다.

드디어 본영 방향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포로가 탈출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대가 달려온 것이다. 이제 병사들은 굳이 루도와 위첼이 선동하지 않아도 알아서 포로들이 서쪽으로 도망갔다며 신나게 외쳐대고 있었다. 이 정도면 됐다는 판단이 서자 둘은 곧장 마구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마구간지기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몸을 떨고 있었다. 그로서는 군마 19필을 눈뜨고 빼앗긴 꼴이 되기 때문이다. 루도는 최대한 급박한 느낌을 살려 말했다.


“이보세요! 포로들이 이곳으로 왔었다고 하던데, 어떻게 말을 탈 때까지 아무것도 못한 겁니까?”


“그...그게...”


“이 사실이 스벤달 장군께 보고되면 목이 남아나질 않을 겁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놈들이 무기로 당신을 위협했습니까?”


“예...예에...”


그는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이미 마구간지기에게 둘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자신을 해코지하러 왔고, 자신은 달아날 길이 없다는 사실에 눈앞이 하얘질 뿐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은 당근을 쥐어주면 있는 것 없는 것 다 쏟아내게 되는 법이다.


“에잇, 정말 일을 어떻게 하는 겁니까? 지금 당장 포로들을 도로 잡아와야 해요! 군마가 제자리로 돌아오면 장군도 당신의 책임을 묻지 않을 겁니다.”


“앗...그, 그게 정말입니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직무유기의 죄를 불문에 부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한 줄기 희망이 필요했던 마구간지기는 루도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리고 말았다.

위첼이 말했다.


“지금 바로 따라가야 합니다. 아직 남아있는 말이 있습니까?”


마구간지기는 쭈뼛거리며 답했다.


“네, 네에...다섯 필 정도...”


“가장 빠른 녀석으로 둘 부탁합니다. 어서요!”


“예, 예엡!”


마구간지기는 몸매가 늘씬하게 빠진 갈색 말 두 마리를 끌고 왔다. 녀석들은 몸집이나 서 있는 자세나 예전 로샤단이 타고 다니던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척 봐도 뛰어난 수준의 준마였다. 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잽싸게 말 위로 올라탔다. 루도는 혹시 모를 의심을 피하려고 과장되게 말했다.


“좋아, 지금 바로 따라가지! 녀석들이 어디로 갔댔지?”


“에...나리. 아까부터 이상하게 느낀 건데 포로들은 분명 북...”


“서문으로 향했다고 하던데. 어서 가자고.”


루도와 위첼은 만담 콤비라도 된 듯 거짓말이 척척 들어맞았다. 둘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마구간을 나왔다. 위보가 통했는지 병사들은 기병, 보병 할 거 없이 모두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둘은 그들의 뒤꽁무니를 쫓는 척하다가 은근슬쩍 북문으로 향했다.

문은 예상대로 활짝 열려 있었다. ‘진짜’ 포로들을 본 병사들이 추격대가 지나갈 것을 대비해 출입구를 개방해둔 것이었다. 문 근처에는 병사 서넛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는데, 다행히 백천기사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자, 이대로 지나간다. 이제 암구호 따위 될 대로 돼라지.”


“그랬다간 들키고 말 텐데.”


“들키던지 말던지. 기병대가 돌아올 즈음이면 우린 이미 멀리 도망치고 없을 테니까.”


둘은 가볍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탄력을 받은 말들이 점차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병사들과 마주쳤지만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진 않았다. 설마 아직까지 적이 내부에 남아있을 거라고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런데 그때, 불이 밝혀진 막사에서 희끄무레한 물체 하나가 뛰쳐나왔다.


“...어?”


아르유와 동년배쯤 됐을까? 하지만 그녀보다도 훨씬 왜소한 체구의 소녀였다.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겁에 질린 듯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었다.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는지 얼굴이며 몸에 멍든 자국이 가득했다.


“흑...흐윽...제발, 살려...”


잡혀온 민간인 여자. 루도의 동공이 크게 커졌다. 설마 저런 어린 소녀까지 잡아왔을 줄이야. 아니, 그럼 그녀는 아침부터 지금까지, 근 하루 동안 병사들에게 시달림을 당했다는 게 아닌가. 그녀는 이미 기진맥진하여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이년이 쪽팔리게. 가만히 있지 못해?!”


뒤이어 건장한 대머리 남자 하나가 막사를 헤치고 나왔다. 루도는 그 남자를 본 순간 왜 진즉에 저항을 포기했을 소녀가 이토록 안간힘을 쓰며 막사를 빠져나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손에는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더러운 도구가 쥐어져 있었다.

저런 거에 시달렸다간 목숨이 남아나질 않는다. 그러나 남자의 역겨운 취향을 욕하는 사람은 있을지라도, 그 자리에서 소녀를 구해주려 움직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 잡혀와 지금까지 강간당한 여자의 수가 몇인가. 그녀도 그중 하나일 뿐이었다.


“으...”


루도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분노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반쯤 칼을 뽑았다. 그러나 여기서 일을 벌였다간 지금까지의 고생이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이런 이목이 많은 곳에서 검을 휘둘렀다간 삽시간에 포위되고 말 것이다. 민간인 구조는 처음부터 계획에 없었다. 또한 그가 소녀를 구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하지만, 정말 이대로 좋은 것일까? 희망 한 점 없이, 사방에 자신을 범하려는 남자들로 가득한 곳에서, 끝끝내 기력이 쇠해 죽어야 할 정도로 그녀가 중한 죄를 저질렀는가? 그녀에게 구원의 빛이 내려올까? 그렇다면 구원자는 누구?

위첼이 말했다. 그도 흥분했는지 목소리가 고조되어 있었다.


“...한 명 정도는 데려갈 수 있잖냐. 대머리의 목을 치고 재빨리 말에 태우면 병사들도 따라오지 못할 거야.”


“나는....”


고삐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아, 으, 컥...”


땅바닥을 기어가던 소녀는 얼마 못 가 대머리에게 목을 붙잡혔다. 대머리는 화가 단단히 났는지 있는 힘껏 소녀의 목을 졸랐다.


“이 씨발년이, 이대로 목을 부러뜨려주마. 어디서 감히 도망을 쳐?”


“컥...커헉...”


흘러내리는 눈물. 그렁그렁한 그 눈동자에 비친 것은 공포와 체념이었다.

그녀의 겁에 질린 눈동자가, 그 옛날의 자신과 겹쳐 보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당시의 그에겐 람카디스가 구원자였다. 그렇다면 지금 소녀에게는?


“위첼! 저 자식을...”


그 순간이었다.



-그냥 지나쳐.-



“헉...!”


온몸을 휘젓는 강렬한 위화감과 함께, 갑자기 현기증이 밀려와 정신이 아득해졌다. 눈앞이 깜깜해지는가 싶더니 새벽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의 몸이 기울어지고 있다고 깨달은 순간, 루도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있는 힘을 다해 허리에 힘을 주었다.


“으어어...”


“뭐하고 있어 이 멍청아! 빨리 받아!”


정신을 차렸을 땐 위첼이 소녀를 끌어안은 채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그는 루도가 말을 꺼낸 순간 말이 달리던 관성을 이용해 그대로 도약했고, 대머리가 미처 알아챌 틈도 없이 목을 날려버렸다. 루도는 어안이 벙벙한 채로 엉겁결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소녀가 문제였다. 그녀는 눈앞에서 시체를 본 탓인지, 아니면 기력이 바닥난 탓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말에 오르기는 고사하고 두 발로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며 둘은 애가 탔다.


“아...으아...”


“젠장! 넌 일단 말에 타! 먼저 가서 출입문이 닫히지 않게 막아.”


“아, 알았어.”


위첼은 재빠르게 멈춘 말 위로 올라탔다. 그사이 루도는 주저앉은 소녀를 계속 재촉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루도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시체를 본 병사들이 곳곳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 난 너를 구출하러 온 거야. 하지만 네가 지금 이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죽도 밥도 안 돼. 어서 일어나서 손을 뻗어. 여기서 죽던지, 아니면 나와 함께 가든지!!”


루도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초점을 잃은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씩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버벅거리면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릎은 여전히 달달 떨리고 있었다.

루도가 말했다.


“나를, 믿어!”


그녀가 손을 뻗었다. 루도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자마자 그대로 뒤로 잡아당겼다. 소녀는 놀랄 정도로 가벼워서, 그의 이끌림에 따라 휙 허공으로 떠올랐다. 루도는 소녀를 자신의 앞에 앉히는 한편, 세게 발을 굴려 말의 방향을 틀었다.

그때 막사에서 나오던 한 남자가 그와 눈을 마주쳤다. 익숙한, 그러나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던 얼굴.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마주한 상황이 우스운 것인지, 제랄드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하! 이건 대체 무슨 꼴이지? 어째서 네가 여기에 있는 거냐, 루도 클로람!”


그 순간 위첼은 문을 닫으려는 병사들을 필사적으로 제지하고 있었다. 그 광경은 당연히 제랄드의 눈에도 들어갔다.


“위체에에엘!”


제랄드는 이제 웃기 시작했다. 흑연기사단의 진지 내에서, 로샤단과 안개송곳니의 멤버가 동시에 난동을 부리고 있다니. 교활한 그조차 상황을 파악하기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다만 하나 확실한 점은, 둘을 도망치게 둬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 침입자들이 있다! 기병대를 모두 복귀시켜라! 여기 리크나이츠의 침입자가 나타났다!”


“저, 저 새끼가!”


루도는 다급하게 말의 옆구리를 찼다. 탄력을 받은 녀석은 힘차게 앞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막 제랄드의 옆을 지나치려 할 때, 루도는 이마를 걷어찰 생각으로 오른발을 휘둘렀다.

터억! 발목이 부러지는 듯한 충격이 몰려왔다. 제랄드는 채이기 직전 칼집을 들어 몸을 막았고, 루도의 발은 검의 손잡이 부분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그러나 말의 달리는 속도가 가미됐던 만큼 제랄드도 충격으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쓰러졌다.

루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제랄드의 외침을 들은 병사들이 시시각각 그를 포위해오고 있었다. 출입구 쪽에서 위첼이 원형으로 말을 몰고 있는 게 보였다. 말을 멈추면 끝장이었기 때문에, 그는 계속 제자리를 빙빙 돌며 글레이브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달려오는 루도를 보곤 손을 흔들었다.


“빌어먹을, 빨리 좀 와라! 이제 정말 시간이...으헉?!”


말을 하는 와중에 투창 하나가 쏜살같이 날아가 위첼이 타고 있던 말의 옆구리를 찔렀다. 루도는 반사적으로 창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제랄드가 투척자세 그대로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큭, 아케니온?!”


말이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 쳤지만, 위첼은 특유의 반사 신경을 발휘해 별다른 상처 없이 땅에 착지했다. 그러나 타고 갈 말이 죽어버렸다는 게 너무나도 치명적이었다. 이제 와서 마구간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근처의 병사들은 물론이고, 멀리서 희미하게 말발굽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기병대가 돌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흰머리! 내 손을 잡아!!”


루도는 오른팔 상박은 소녀의 어깨를 감싼 채 손으로 고삐를 쥐고, 몸을 좌측으로 크게 기울여 왼팔을 뻗었다. 이제 말을 멈출 시간 따위 없었다. 한 번에 낚아채지 못하면 모두 끝장이었다.

말을 달리면서, 그것도 한 손으로 위첼을 태울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둘 다 단련된 무인이니만큼, 타이밍만 잘 잡는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위첼의 모습이 순식간에 시야를 뒤덮을 정도로 커졌다.

눈앞이 다시 새하얗게 변한 건 그때였다.


-그냥 지나쳐.-


"...!!“


조금 전에도 느꼈던 위화감이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메아리가 귓가에 맴돌고 있는 기분이었다. 순간 위첼을 바라보는 루도의 눈동자가 달라졌다.

세 명이나 태우고 말을 달릴 수는 없다. 행여 가능하다 해도 속력이 느려 곧 추격대에게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냥 가라고. 어차피 적이잖아?-

다시금 시야가 흐릿해졌다. 루도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고, 그 탓에 뻗은 왼팔은 헛되이 허공만 휘젓고 말았다. 말은 그대로 위첼을 지나쳤다.


"아..."


순간 세상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품에 안긴 소녀의 가느다란 떨림, 땅을 박차는 말의 진동, 포위망을 좁혀오는 병사들과 그들이 내지르는 함성소리, 웃고 있는 제랄드.

그리고 공허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위첼. 무표정하지만, 살짝 뭉그러진 그의 눈썹. 그럴 줄 알았다고, 배신은 예상한 수순이었다고 체념하는 듯이 조금 늘어진 어깨.

-좋아. 버릴 놈은 버려. 우리의 생존이 최우선이라고.-

루도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그는 말을 급정지시키고는 주저 없이 180도로 기수를 돌렸다.


“웃기지 말란 말이다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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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6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2) +2 15.05.04 875 23 21쪽
215 람의 계승자 - ep.5 - 사냥감의 반전(1) +1 15.05.04 783 25 20쪽
214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5) +2 15.05.04 722 25 15쪽
213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4) +2 15.05.04 727 26 23쪽
212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3) +3 15.05.03 850 30 18쪽
211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2) +3 15.05.03 772 23 23쪽
210 람의 계승자 - ep.5 - 부조리(1) +2 15.05.03 865 24 20쪽
209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7) +5 15.05.03 801 29 25쪽
208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6) +2 15.05.03 905 25 22쪽
207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5) +4 15.05.02 946 30 21쪽
206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4) +1 15.05.02 893 28 20쪽
205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3) +2 15.05.02 696 25 21쪽
204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2) +2 15.05.02 777 25 24쪽
203 람의 계승자 - ep.5 - 이별이 그러하듯이(1) +2 15.05.02 594 25 22쪽
202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6) +3 15.05.02 705 29 18쪽
201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5) +5 15.04.29 869 25 19쪽
200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4) +1 15.04.29 947 25 26쪽
199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3) +1 15.04.29 799 25 24쪽
198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2) +3 15.04.29 822 27 18쪽
197 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1 15.04.29 762 25 17쪽
196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8) +4 15.04.28 911 29 16쪽
195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7) +3 15.04.28 846 26 20쪽
»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6) +3 15.04.27 719 27 19쪽
193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5) +3 15.04.27 764 23 17쪽
192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4) +2 15.04.27 737 23 18쪽
191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3) +1 15.04.27 741 31 18쪽
190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2) +2 15.04.27 767 28 19쪽
189 람의 계승자 - ep.5 - 전장에 떨어지다(1) +2 15.04.27 799 32 18쪽
188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完) +1 15.04.27 611 34 18쪽
187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5) +4 15.04.26 740 25 17쪽
186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4) +1 15.04.26 939 29 16쪽
185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3) +2 15.04.26 743 27 20쪽
184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2) +6 15.04.23 786 29 15쪽
183 람의 계승자 - ep.4 - 바람은 가지 말라 하지만(1) +3 15.04.23 845 27 19쪽
18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2) +2 15.04.23 762 26 17쪽
18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1) +3 15.04.23 776 27 15쪽
180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0) +1 15.04.23 689 26 22쪽
179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9) +3 15.04.22 821 30 16쪽
178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8) +3 15.04.22 856 28 15쪽
177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7) +1 15.04.22 786 30 18쪽
176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6) +1 15.04.22 802 24 18쪽
175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5) +2 15.04.22 769 30 15쪽
174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4) +3 15.04.22 919 26 18쪽
173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3) +5 15.04.21 777 28 16쪽
172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2) +2 15.04.21 927 25 14쪽
171 람의 계승자 - ep.4 - 거울이 보여준 것(1) +3 15.04.21 814 26 17쪽
170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8) +3 15.04.21 736 25 21쪽
169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7) +2 15.04.21 711 20 15쪽
168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6) +4 15.04.20 759 25 18쪽
167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5) +2 15.04.20 663 21 18쪽
166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4) +1 15.04.20 777 24 17쪽
165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3) +2 15.04.20 746 25 16쪽
164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2) +3 15.04.20 816 21 16쪽
163 람의 계승자 - ep.4 - 격노(1) +1 15.04.20 827 23 21쪽
162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6) +1 15.04.20 838 30 14쪽
161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5) +2 15.04.20 717 26 18쪽
160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4) +3 15.04.19 875 29 18쪽
159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3) +3 15.04.19 957 29 18쪽
158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2) +3 15.04.19 907 27 22쪽
157 람의 계승자 - ep.4 - 케리아돌의 둥지로(1) +5 15.04.19 1,222 47 22쪽
156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10) +6 15.04.18 906 27 21쪽
155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9) +3 15.04.18 779 27 18쪽
154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8) +1 15.04.18 662 25 19쪽
153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7) +2 15.04.18 692 27 18쪽
152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6) +1 15.04.18 756 28 17쪽
151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5) +4 15.04.18 720 23 16쪽
150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4) +1 15.04.18 676 25 17쪽
149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3) +2 15.04.18 760 23 17쪽
148 람의 계승자 - ep.4 - 불쾌한 소년, 유쾌한 소녀(2) +3 15.04.16 858 30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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