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의 계승자 - ep.5 - 만남은 늘 갑작스럽게 찾아온다(1)
뜻밖에도 이칼롯은 루도의 손을 들어주었다. 덕분에 투표는 3:2가 되어, 위첼을 놓아주는 쪽으로 뜻이 모아졌다.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긴 했어도 제리온은 이 결정에 조금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루도는 옷에 스며든 물기를 짜낼 생각도 않은 채 위첼의 앞에 가 섰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악수는 나누지 않았다. 살려주는 건 오늘뿐, 다시 만날 땐 서로를 죽여야 하는 입장이기 때문이었다.
루도는 담담하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이게 우리다. 다음에 만날 땐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날 거다.”
“흥, 약속을 지킨 것만으로도 충분해. 생각보다는 명예를 아는 녀석이었구나.”
짧은 대화가 끝나자 위첼은 주저 없이 등을 돌렸다. 이제 막 동이 터오는 이른 새벽, 그는 길도 나있지 않은 숲 속으로 걸음을 옮기려 하고 있었다. 그가 떠나기 직전 함께 왔던 소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 저기...”
소녀는 전날 당했던 수모와 차디찬 강물에 빠진 피로까지 겹쳐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몸에 두른 담요조차 무거워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면서도 그녀는 비틀비틀 위첼을 향해 걸어갔다. 위첼은 잠시 자리에 멈춰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미소 비슷한 것이 그려졌다.
“고마워요...정말, 정말로 고마워요...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 거예요.”
위첼의 손을 꼬옥 붙든 채로, 소녀는 굵은 눈방울을 뚝뚝 흘렸다. 위첼은 소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격려의 말을 전했다. 그는 안전한 마을까지 확실히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이런 불편한 상황이 일어난 것을 아쉬워했다.
그 둘을 바라보고 있자니 왠지 심경이 복잡해져서 루도는 입맛을 다셨다. 누군가에게는 철천지원수인데, 또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은인인 것이다.
소녀의 절절한 작별인사를 뒤로 한 채 위첼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은 삽시간에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일행은 왠지 모를 답답한 마음에 그가 떠난 자리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상황이 정리되자 그때까지 끼어들 타이밍을 못 잡고 있던 기사들이 앞으로 나왔다. 그들은 소녀처럼 눈물을 뚝뚝 흘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최대의 예의를 갖추어 루도에게 감사를 표했다.
“영웅이 있다면 당신 같은 분들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저는 백천기사단 1직영대대의 로벤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아니라면 귀공의 존함을 알 수 있을까요?”
일행은 대번에 곤란해져 버렸다. 로샤단에 걸린 현상금이 아직도 유효했기 때문에 이름을, 그것도 군인 앞에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도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하하, 이름은 좀...일종의 비밀조직이랄까요?”
“비밀...입니까. 후후, 그럼 더는 묻지 않겠습니다.”
로벤은 루도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다른 일행과도 돌아가며 인사를 건넸다. 일행은 졸지에 19명이나 되는 인원과 악수를 하느라 새벽녘부터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런데 한참 손을 놀리고 있을 때쯤, 젊은 기사 하나가 다가와 루도에게 말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오늘 귀공이 보여준 용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당신 같은 분이 범죄자라니, 당치도 않지요.”
“쿨럭 쿨럭!...네?”
로샤단이 이렇게 유명했을 줄이야. 자신들의 목에 걸린 현상금의 무게가 더욱 실감 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기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백천기사단의 주력은 아직 건재했다. 백천기사단은 마드리고를 방위하고 있었는데, 스벤달의 계략에 빠져 성을 비운 채 출격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기사들은 아스트리카 군과 교전을 벌이는 사이 마드리고의 성벽에 흑연기사단의 깃발이 올라오는 걸 보았고, 그 후로는 기약 없는 후퇴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성을 빼앗기긴 했어도 아직 다수의 병력이 남아 있었고, 제대로 된 방어선만 확보한다면 다시 일전을 벌여보는 것도 가능했다.
그러나 천혜의 요새 마드리고를 빼앗겼다는 점은 역시 리크나이츠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이칼롯이 그 부분에 대해 지적하자 기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스벤달 오빌리크는...생각보다 훨씬 교활한 자입니다. 그자가 지휘하는 흑연기사단은 분명 쉬운 상대가 아니겠지요.”
그 말에 제리온은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보통은 아니지. 여편네들을 잡아다가 마음대로 굴려먹고. 병사들 사기가 아주 하늘을 찌르겠네.”
기사들은 본대를 찾아 떠날 생각이었다. 일행은 전쟁에 끼어들 생각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왕을 만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에 두 무리는 짧은 만남을 끝내고 헤어지게 되었다.
이칼롯은 떠나기에 앞서 기사들에게 말 몇 필을 내어줄 것을 청했다. 기사들은 어차피 아스트리카에게 빼앗은 말이었다며 군마 다섯 필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일행은 루도가 가져온 말을 포함해 도합 여섯 필의 말을 확보하게 되었다.
루도가 구출해온 소녀는 기사들이 맡아주기로 했다. 그녀는 위첼에게 그랬듯 루도에게도 수십 번씩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루도는 쑥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면서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소녀의 눈동자를 보며 안도했다. 그녀를 구해내서 다행이라고, 그 찰나의 순간 유혹을 이겨내길 정말 잘했다고.
손을 흔드는 소녀를 뒤로 한 채 일행은 기수를 돌렸다. 기사들이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이동한다면, 일행의 목적지는 서쪽이었다. 말도 구했겠다 이제는 수도를 향해 최단거리로 이동하는 것만 남았다.
말을 몰며 일행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이칼롯과 제리온은 아침부터 묵묵부답이었고, 레미나는 루도의 뒤에 딱 붙어 얼굴을 묻고 있었다. 레미나는 눈가가 퉁퉁 부은 채로 제리온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루도는 둘 사이에 형성된 어색한 공기 때문에 제대로 숨 한 번 내쉬지 못하고 쩔쩔맸다.
한편 맨 뒤에 있던 디리터 부부는 이 광경을 모두 목격하고 있었다. 에레이시아는 디리터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앞쪽의 상황을 예의주시했다. 그러나 레미나만 풀이 죽어 있다 뿐 다른 사람들은 이전과 다름없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에레이시아는 이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 3자였던 자신도 이렇게 거북한데 막상 당사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것이다. 눈물범벅이 된 레미나만 안쓰러운 꼴이 된 상황이었다.
그녀는 디리터의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저기 있잖아, 제리온 아까 좀 너무한 거 같지 않아?”
“응? 뭐가?”
디리터는 잘못 들은 게 아닌, 정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뉘앙스로 되물었다. 에레이시아는 일순 어이가 없어져 입을 딱 벌렸다.
“뭐냐니, 아까 공주님 윽박지른 거 말이야. 어쩜 말을 그렇게 할 수가 있어?”
“흐음...조금 거칠긴 했지.”
“내 말이! 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해도 되는 말이 따로 있는 거지. 참 그렇게 안 봤는데 애가 너무 감정적이야. 툭하면 화가 나서 내키는 대로 다 내뱉고.”
그러나 디리터는 이번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제리온 쪽을 슬쩍 흘겨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에리, 그건 네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야. 제리온은 우리보다 훨씬 냉철하고 이성적인 녀석이라고.”
“뭐어? 자기 친구라고 너무 옹호하는 거 아니야? 남 배려도 하지 않고 심한 말을 막 내뱉는데?”
“으음...저 녀석 독설에 관한 건 좀 더 생각해볼 문제긴 한데...”
“??”
디리터는 살짝 기수를 돌려 숲길 가장자리로 말을 몰았다. 그늘로 들어서자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한결 시원하게 뺨에 와 닿았다. 그곳에서 둘은 제리온의 옆얼굴을 훔쳐볼 수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향한 채, 다듬지 않은 곱슬머리는 마구 헝클어져 있다. 이마에는 아직도 살짝 주름이 져 있어, 아무래도 그가 먼저 레미나에게 사과를 건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 언짢은 표정에 디리터는 오히려 안도했다.
“나는 마법이란 게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이거 하나는 알아. 마음이 흐트러지면 주문이 외워지지 않는다는 거지.”
뜬금없는 말에 에레이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까 일을 잘 생각해보라고, 요 깜찍한 참견쟁이 아줌마야.”
아리송해하는 아내의 볼을 살짝 꼬집고서, 디리터는 조금 속력을 내 앞쪽에 따라붙기 시작했다. 에레이시아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구불구불 이어진 숲길을 따라 빽빽이 늘어선 활엽수 사이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올 때면 솨아- 하는 나뭇잎 소리가 귓전을 때렸는데, 그게 마치 군대의 함성과도 같아 계속 일행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숲은 아직도 한창이라, 마을에 도착하기까진 좀 더 시간을 보내야 할 모양이었다.
이윽고 디리터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닫자, 에레이시아는 순간 기가 막혀 남편의 등을 철썩 때렸다.
“뭐야, 그럼 화도 안 났으면서 그런 말을 지껄였단 말이야? 뭐 저런 게 다 있어?!”
울긋불긋하게 물든 숲길을 지나자 탁 트인 개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도에서 마드리고까지를 잇는 직선의 도로이다. 이 루트를 따라 수많은 물류가 오고 가고, 이 과정에서 성장한 도시들은 리크나이츠를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런 편리한 교통에서 나오는 혜택이 무색하게도 개활지는 지나다니는 상인 하나 없이 썰렁했다. 이따금 들개나 고라니가 뛰어다니는 것을 빼면 움직이는 생물을 찾기도 힘들 정도였다. 아마 전쟁으로 인해 전부 피난한 것이리라. 드넓은 평야에 오직 자신들만 존재한다는 사실에 루도는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멸망한 세상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인간도, 악마도 없는 그저 공허한 대지였다.
일행은 그 길을 따라 꼬박 이틀을 달렸다. 중간중간 촌락을 거치긴 했지만 주민들이 모두 피난을 간 직후였다. 급히 떠난 모양인지 가재도구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고 보리밭에는 불을 지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아마 아스트리카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한 것일 테지만, 논에 횃불을 던지는 농부의 심정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썰렁한 마을을 몇 개 지나치자 비로소 사람 사는 도시가 나타났다. ‘일쿡’이라는 이름의 그 도시는 상인들이 모여 살던 여관이 발전한 것으로, 중부 도시로는 드물게 토지가 비옥하여 포도농사로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도시지 그 규모는 실로 조악하여 레인스터는 물론이고 델키아에도 훨씬 못 미치는 면적이었다. 성벽도 낮은 높이의 토성에 적당히 불을 질러 비에 씻겨 내려가지 않도록 해놓은 게 전부였다. 딱 도적떼나 산짐승을 상대하기 좋은 정도랄까, 군대에 맞서기엔 터무니없이 허약한 성채였다.
일행은 조잡한 방위 태세에 혀를 차며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 앞은 경비병 하나 없이 썰렁했다. 아마도 아스트리카 군대를 피해 서쪽으로 피신한 것일 텐데, 웬일인지 안으로 들어가니 제법 사람 사는 소리가 시끌벅적했다.
“이칼롯, 건너편은 꽤 부산한데.”
“음. 그럼 예정대로 하자.”
일행은 상가로 들어서기 앞서 으슥한 곳을 찾아 옷을 갈아입었다. 예전 데루루피아가 알려줬던 변장술이었다. 디리터와 에레이시아는 중년 부부로, 제리온은 저택 집사로 겉모습을 바꾸었다. 루도와 마리네는 전처럼 여장을 할 계획이었지만 아무래도 루도 쪽은 남자 티가 심하게 났다. 옷은 그렇다 치고 화장으로 얼굴을 속여야 하는데, 아무리 애를 써도 데루루피아가 해주던 만큼의 효과가 나오지 않았다. 결국 여장은 마리네만 하기로 하고 루도는 이칼롯과 함께 투구를 깊게 눌러썼다. 귀족영애 로젤리나 역할은 레미나가 맡기로 했다.
“아스트리카 기사들을 속일 때처럼 하면 된다 그거죠? 그건 상관없지만...킥킥, 근데 마리네 너무 귀엽다아.”
분홍치마를 걸치고 소녀용 단화를 다소곳이 신은 마리네는 남자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는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갔다.
변장을 한다는, 그러니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자는 이칼롯의 예상은 적중했다. 도시에 남아있는 사람은 대부분이 무기를 찬 젊은 남자들이었다. 여자나 아이는 이미 멀리 떠난 건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마리네는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남자 몇몇이 일행을 보며 속닥거리는 게 보였다.
“용병인 거 같은데. 무장이 다들 제각각이야.”
“아스트리카 군대와 싸우려는 건....아니겠지? 대열도 없이 멋대로 퍼져 있는데.”
그때 남자 하나가 일행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지 발을 한 발짝 내디딘 것뿐이었지만 루도는 그게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주위에 들리도록 소리 높여 말했다.
“이곳은 영 치안이 좋지 않아 보이는군요, 로젤리나 아가씨.”
다가오던 남자는 흠칫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도 루도의 의중을 알아채곤 즉각 추임새를 넣기 시작했다.
“전쟁이 터졌으니 무리도 아니지. 우리야 제 3국 소속이니 상관없지만, 여기 사는 사람들에겐 날벼락이 따로 없을 거야.”
“아무튼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는 게 급선무입니다. 휴드랜드 남작님도 걱정하고 계실 테니까요.”
일행은 은연중에 자신들이 텔아단의 귀족임을 내비쳤다. 다가오려던 남자는 레미나의 신분에 압박을 받았는지 그대로 꼬리를 내리고 돌아섰다. 다른 이들도 콧방귀를 뀌고는 각자의 일로 돌아갔다. 일행이 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접촉을 피하며 변두리의 여관으로 들어가자니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외출복차림으로 나왔다.
“응? 당신들은 또 뭐요? 군인은 아닌 거 같고.”
남자에게서 손님을 반기는 기색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일행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연방 카운터에 쌓인 짐을 뒤적거렸다. 이칼롯이 말했다.
“하룻밤 묵고 갈까 합니다만, 빈방 있습니까?”
“빈방이 있었나? 위층 올라가서 대충 좋아 보이는 방으로 골라잡으시오.”
“...네. 숙박비는 얼마죠?”
“돈은 됐소. 난 막 이 도시를 떠나려던 참이니까. 당신들도 여기 오래 머물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언제 아스트리카 군대가 들이닥칠지 모르거든.”
여관주인은 피난보따리에 귀중품을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애쓰는 모습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묻자 그는 마드리고가 함락되었으며, 이에 공포를 느낀 주민들이 앞다투어 피난길에 올랐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아까 보니 밖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꽤 있던데요? 대부분 무기를 든 남자였지만.”
“아아, 그거 다 현상금 사냥꾼들이오. 간만에 큰 건수가 생겼다던가? 나라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돈 냄새 맡고 달려드는 거 보면 그 인간들도 참 어지간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에 소름이 쫙 돋았다. 도시를 메운 현상금 사냥꾼들. 그들은 누구를 잡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일까? 큰 건수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공교롭게도, 큰 건수라 할 만한 현상금이 일행에게 붙어있는 상황이다.
“제랄드 새끼...벌써 다 퍼트렸군. 이제 사흘밖에 안 된 거 같은데.”
눈을 번뜩이던 남자들의 시선이 그제야 수긍이 갔다. 일찍 변장을 해서 망정이지 그대로 도시로 들어갔다면 당장 칼부림을 벌였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간만에 들린 도시는 순식간에 가시밭으로 바뀌었다. 일행은 적당히 방을 잡고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창틈으로 슬쩍 보고 있자니 칼을 찬 남자들이 곳곳에서 목격되었다. 마리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게 다 현상금 사냥꾼이야? 돌아버리겠네.”
그때 디리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말을 묶으러 마구간에 다녀온 참이었다.
“여어.”
노크도 없이 벌컥 문이 열리자 에레이시아는 화들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문 좀 확확 열지 마! 심장 떨어지겠네 정말.”
디리터는 어깨를 으쓱해보이고는 자리에 앉았다.
“어, 미안. 오다가 근처 잔챙이 하나 잡고 물어봤는데, 아무래도 우리를 잡으러 온 게 맞는 것 같아. 로샤단이 요 근처에 출몰했다는 정보가 퍼지자 사냥꾼이란 사냥꾼은 다 모여들었나봐. 개중에는 몇 달 전부터 우릴 쫓던 녀석도 있다더라. 텔아단에서 왔다고 했나?”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선 더 논할 여지가 없었다. 루도는 슬그머니 벗어놓았던 투구를 도로 꾸겨 넣었다. 마리네는 거울을 앞에 놓고 분칠이며 눈썹 화장 상태를 ‘필사적으로’ 점검했다. 모두가 자신의 변장을 확인하는 가운데 오직 레미나만이 오도카니 침대 맡에 앉아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루도며 제리온을 구경하다가, 문득 떠오른 듯 배낭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낭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뒤집어서 털자 빵 부스러기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제리온이 그걸 보곤 짜증을 터뜨렸다.
“아, 뭐하는 거야? 정신 사납게.”
“웅? 아니, 먹을 게 다 떨어진 거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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