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완주를 끝마칠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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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amer
작품등록일 :
2023.02.28 23:38
최근연재일 :
2024.09.17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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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28 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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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MMY

어른이란 엉겁결에 자라버린 아이일 뿐이다. 그런 연유로 어른은 아이였던 시절을 놓지 못한다. 이 점을 누누이 새기고 있는 나는 내 앞의 어린 것을 대할 때마다 매 순간 신중을 기했다. 엄마로서, 어른이 되어 뒤돌아볼 딸아이의 오늘이 썩 나쁘지 않게 기억되길 바람으로.


“안 갈래.”


아침부터 일상에 자그마한 균열이 생겼다. 등교 버스를 맞이하러 가야 할 시간이 됐건만. 혜수가 뚱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쳐 매길 거부하고 있다. 나는 쭈그려 앉아 혜수와 눈높이를 맞추고 빤히 쳐다봤다.


“혜수. 왜 가기 싫은 거야? 엄마한테 말해보자.”


“그냥.”


봐주길 기다리며 계속 쳐다봤다. 하지만 혜수는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내가 헤아려주길 바라는 듯이 발만 동동 구르기만 할 뿐이었다.


“엄마. 오늘만 안 가면 안 돼? 제발.”


어르고 달랠 것인가. 아니면 강경하게 나갈까. 어떻게든 보낼 궁리만 하던 중. 혜수의 하안검에 눈물이 고여가는 것을 알아챘다. 속상해서 그런다기보다는 슬퍼서 흘러나온 것처럼 보였다. 희한하다. 이런 식의 투정은 겪어본 적이 없는데.


얘가 왜 이러나 유추해 나가던 중. 기어코 짜내어진 눈물 한 방울이 혜수의 뺨을 적셨다. 이는 나의 나약함을 자극했다. 소중한 딸이 슬퍼하는 걸 원치 않았던 팔불출인 나는 혜수의 눈가를 소매로 닦았다. 그러면서 속으로 되뇌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 그러니 하루 정도는 봐주자며.


“오늘만이야.”


혜수의 얼굴에 미소가 활짝 폈다. 그런 반색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싱숭생숭했다. 버릇을 잘못 들인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깊이 고민하지는 않으련다. 다음번에도 이런다면, 그때 다잡으면 되니까.


나는 쪼그린 무릎을 펴고 거실로 향한 뒤 수화기를 들었다. 이어 들려오는 착신음을 유치원으로 향하게 했고, 곧이어 혜수의 반 담임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녀에게 혜수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형식적인 호들갑을 떨며 알겠다며 대답했다.


통화를 끝마친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시계를 쳐다봤다. 10시 정각이 다 되어간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혜수야. 엄마랑 잠깐 나갔다 올까? 엄마가 오늘 약속이 있거든.”


“어디 가게?”


“우리 집 근처 절벽.”


“거기는 왜?”


“귀중한 손님이 올 거야.”


혜수는 물음표를 띄우면서도 내가 샌들에 발가락을 꽂자 뒤따르려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다 나에 대한 괜한 의심이 일었는지 유치원 가방을 거실 안쪽으로 휙 밀어 넣었다.


나의 눈에는 그 짧은 팔이 필사적으로 휘둘러지는 게 재간으로만 보였다. 그래서 재잘대며 웃고는 엄마의 미소를 바라보는 혜수의 손을 잡았다.


산등성이에 위치한 우리 집 바로 옆에는 재단된 잔디가 빼곡한 절벽이 하나 있다. 이 절벽 끄트머리에는 남편이 설치해둔 울타리가 있는데, 내 옆구리 언저리에 오는 그것을 부여잡고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소탈한 마을 열차 정거장이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혜수의 손을 놓고 양손을 울타리에 살포시 올렸다. 그리고 눈을 감아 생각에 잠겼다. 풀과 바람의 내음이 간혹가다 비강을 간지럽혀 내 집중을 방해했으나, 금세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것들을 생각하고 있다 보면 나는 그런 사소한 것들쯤은 쉽게 떨쳐낼 수 있었다.


스스로 신발 끈을 매지 못해 끙끙대다 결국에는 엄마의 손길을 빌린 아들. 나와 함께하고 있는 있을 수 없이 가느다란 딸. 서로만을 위했었던, 이제는 가장으로써 발휘되는 남편의 헌신. 이 모든 것을 있게 한 나의 어린 시절. 내가 어른이 되게 해주신 나의 기장님. 나는 눈을 개안해 정거장을 내려다봤다.


정거장은 게으름을 뽐내기라도 하려는 듯 이른 아침부터 고이 잠들어 있었다. 인파는 드물었으며 열차는 이에 걸맞게 한 대도 정차해있지 않았다. 너무 빨리 온 걸까. 그래도, 뭐. 조금 있으면 올 것이다.


나는 조급함을 추슬렀다. 그러자 기다림은 이내 따분하게 변질했다. 이게 영 내키지 않았던 나는 이 시간을 보람있게 쓰고자 혜수를 쳐다봤다.


“혜수야. 유치원에 안 가려는 이유가 뭐야?”


“...”


“엄마가 혜수 유치원도 빼줬는데, 말 안 할 거야?”


“거기 애들 때문에.”


“친구들이랑? 왜? 친구들이 무시해? 괴롭혀?”


“아니.”


“그럼?”


“친해지기 힘들어. 걔들은 다 시내에 살아서, 나 빼고 다 아는 사이인걸. 나만 혼자야.”


“음. 그랬구나. 그러면 우리 혜수가 먼저 다가가서 말을 걸면 어떨까?”


“나는 엄마가 아니야. 모르는 사람이랑 말하기 힘들어. 나는 아가잖아.”


이제 아이지. 그리고 혜수야. 어른들이라고 낯설은 사람이랑 얘기하는 건 쉬운 게 아니야. 오히려 말이야. 어른들보다 아이들이 더 친해지기 쉬워. 그 나이대 애들의 교우관계는 순수하지. 우리 나이대는 계산적이고 음흉하거든. 그러고 보니 네 오빠는 유치원 첫날부터 애들이랑 잘 어울려 놀았었는데. 같은 남매인데도 너랑 오빠랑은 이렇게나 다르구나.


독백하며 내뱉을 말을 정돈하는 사이. 일반적인 열차와 사뭇 다른 경적이 울려 퍼졌다. 인위적인 칙칙폭폭 대신 재기발랄하면서도 명랑한 소리로 구성된 음계의 연속이 흐른다. 불분명한 박자를 타고 들어오는 실로폰 소리는 수채화처럼 그려진 풍경과 조화를 이루어, 귀를 타고 심장으로 스며들어 내 동심을 일깨웠다. 탁한 나의 눈동자는 앳되었을 때의 반짝임을 되찾아 진입로를 응시했다.


보인다. 왔구나. 4년 만이구나. 그토록 그리워했는데 고작 이틀만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구나. 나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정거장에 진입해오는 잔상을 응시했다.


잔상은 너무나도 옅었다. 비를 머금지 못해 흩어지는 구름보다도. 그러한 어름거림이 표현하는 게 무엇인지 맨눈으로 식별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이것이 일생 통틀어 가장 쉬운 일이었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어린 시절의 마차를.


당장이라도 언덕을 내려가고 싶다. 정거장 바로 앞. 마차의 맞은편에 서서, 지나간 어린 시절과 그것을 추억하는 내가 묵혀둔 화포를 풀었으면 한다.


안타깝게도 그럴 수는 없다. 내가 접근할수록 안 그래도 희미한 마차는 더욱 희미해질 것이고, 기어코 더 가까워진다면 떠오르기만 해도 아려오는 그 날처럼 자취를 감출 게 분명하다. 신기루 마차라 불리는 그것은 어른들의 눈과 손짓을 거부하는 마차니까.


지난날에 젖어있던 도중. 마차가 정거장에 멈춰 섰다. 마차의 문은 바퀴의 멎음과 동시에 스르륵 열리며 내부가 보이지 않는 허공을 창출해내었다. 그렇게 생겨난 여백은 당연히 아무런 의미가 없어야 했지만, 마차의 승객들은 상식 밖의 존재들이었다.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그곳을 통해 불쑥 튀어나와 정거장 벽돌을 밟았다. 아이 둘이었다. 장소가 낯설었던 아이들은 서성였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중 키가 큰 아이의 어깨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아이의 어깨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집배원 가방이 매어져 있었다.


“엄마. 저게 뭐야?”


혜수가 잔상을 가리켰다.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혜수에게는 저 마차가 뚜렷이 보일 것이다. 어린 혜수는 저 마차에 탑승할 자격이 있으니까.


“아이들을 위한 마차야. 어른들은 탈 수 없는 마차지.”


“나 마차 처음 봐. 엄마 근데 있잖아. 정거장은 열차만 있는 거 아니야?”


“아주아주 옛날에는 마차가 철로를 달렸대. 저 마차는 그때부터 철로를 달리고 있는 마차야. 몇백 년 동안이나. 신기하지?”


“이쁘다. 나도 타보고 싶어.”


“윤지야. 아쉽지만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저 마차에 탈 수 없어.”


“왜?”


“저 열차는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만 탈 수 있는 열차거든. 우리 혜수는 아빠랑 엄마 사랑을 듬뿍 받잖아.”


“엄마. 그럼 엄마는 저기 타봤어?”


타인이 그런 말을 했다면 울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혜수이기에 그런 마음이 일절 생기지 않았다. 이제 막 사리 분별을 배워가는 아이가 그게 무례인지 알 턱이 있겠는가.


혜수에게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없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살아있겠지만 남과 다름이 없다. 그분은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


“타봤지.”


“재밌었어?”


“응. 너무 재밌게 놀았어.”


“부럽다. 저기서 뭐 하고 놀았는데?”


간단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답해주기는 무진장 어려웠다. 너무 많은 걸 했다. 날이 새도록 숨바꼭질도 해봤고, 싫증 내는 남자애들을 다독여 역할극을 강행했다. 다 같이 모여 각자의 개성을 살린 공예품도 만들었으며, 악보를 무시한 채 가사에만 의지하여 제멋대로인 노래를 불렀다. 이런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된 첫 번째 완주 이후부터는 나보다 어린아이들의 좋은 놀잇감이 돼주었다.


어린 시절이란 당시의 부끄러운 추태나 미화된 행복, 분주한 일상이 교묘하게 맞물려 회상할 때마다 다르게 결합된다. 새로이 생겨난 경험들은 삶에 덧씌워져 안 그래도 애매한 옛일을 더욱 흐리게 만들고, 기어코 그날의 기억을 소거시켜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은 평생을 간직하게 돼있다. 그런 소중한 기억들 중에서, 나는 차마 하나를 고를 수 없었다. 그래서 그저 침묵했다. 그저 슬그머니 눈가만 비볐다. 가버린 날들을 회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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