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완주를 끝마칠 즈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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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amer
작품등록일 :
2023.02.28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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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7 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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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9.17 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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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야구장 (3)

DUMMY

정오에 다다른 주말의 경기장 부근은 응원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우재와 나는 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면서, 때로는 안전 관리자의 지시를 따라 경기장에 인접했다.


학교에 다닐 적. 삽화집을 통해 세계 각국에 등재된 문화재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흑백의 축소된 이미지들이 전부였기에, 나는 문화재라는 것을 ‘작은 주제에 오래된 것.’으로 정의해 버렸다. 문화가 지닌 힘을 체감하기에 그 서적은 너무 볼품없었다.


그렇게 사소히 여기던 문화재를 직접 마주하게 된 나는 크나큰 충격에 휩싸였다. 세계 최초로 지어진 돔구장은, 그 짧디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대도시의 문화를 선도하는 데 있어 손색이 없었다. 사진으로 담지 못할 만큼 거대했으며, 근방에 가미된 상가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지녔다. 내 얄팍한 몸으로는 경기장의 전부를 파악할 재간이 없었기에, 나는 길목에 꽂혀있는 알림판을, 그곳에 그려져 있는 형상을 참고해 경기장을 분석했다.


까끌까끌한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듯한 천장이 볼록하게 튀어나와 있다. 천장의 중앙에는 회색의 동그라미가 대못처럼 박혀있었고, 삼각형들이 꿰매져 있는 10개의 선분은 이 동그라미부터 시작하여 천장의 외곽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천장의 바로 아래로는 환풍구인지, 전광판인지 모를 것들이 여백 없이 설치되어 있었다. 경기장 외곽은 천장과 비견될 높이의 철장들이 둘러싸고 있었으며, 창문이 여럿 달린 원기둥들이 철창 바깥에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경기장에 입장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록 야구를 즐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도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기장은 웅장했다.


“대단하다.”


“동감이야.”


우리는 상경한 촌사람처럼 뭣 모르고 경기장을 배회했다. 그러다 유난히 인파가 많은 곳을 발견하여, 저기가 개찰구일 거라 지레짐작하고는 그곳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개찰구가 아니었다. 6명의 사람이 의자에 앉은 채 마커를 끄적이고 있다. 그들 앞에는 무수히 많은 행렬이 대기하고 있었고, 하나같이 도화지가 되어줄 무언가를 손에 쥐고 있었다. 사인회였다.


“맙소사.”


그는 가장 긴 행렬의 끝자락에 있었다. 우재가 텔레비전이나 잡지로만 봐왔을, 소년의 우상이 바로 저기에 있다. 우재는 내 등 부위에 옷자락을 잡고는 마구 당기며 호들갑을 떨었다.


“야! 그만 땡겨. 옷 늘어나.”


“여기서 볼 줄은 몰랐어! 경기장에서나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그래! 나도 사인을 받아야지.”


우재는 그의 보물 1호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서준 오빠와 매일 주고받는 고무공이었다. 우재는 공을 소중히 감싸쥔 채로 대열의 끝자락에 합류했다. 감시자 역할을 맡은 나는 의사를 표출할 겨를도 없이 뒤따라 합류했다.


우재의 입꼬리가 씰룩거린다. 영원히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마땅히 그러할 것같은 해맑음이소년의 광대에 얹혀있다. 그런 우재의 모습에 나는 덩달아 신이 났다. 사인을 받는다는 것 자체는 전혀 기쁘지 않았지만, 바로 옆에 누군가의 기쁨이 내게로 전이되어 미소를 짓도록 유발했다.


그러나 우재는 낯짝은 차근차근 미소를 잃어버리더니, 이윽고 무표정하게 변해버렸다. 불그스레진 볼짝을 가리려 뺨에 손을 문대는 우재. 나는 급변한 우재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어 원인을 고민해 보았다.


금방 깨닫게 되었다. 줄지어 선 이들. 그들이 사인을 요청하는 물품은 유니폼을 필두로 한 야구공, 글러브, 배트 등 구단 판촉 상품이었다. 반면 우재가 싸인 받길 원하는 도구는 손때 낀 초라한 고무 공이었다. 우재는 공을 주머니에 넣었다. 아니, 숨겼다. 그리고는 대열에 이탈했다.


“경기가 끝난 다음에 받자.”


“끝난 다음이라니? 끝난 다음에는 사인회를 하지 않을 거야. 부끄러워서 그런 거라면, 종이에다 받으면 되잖아.”


“종이는 보관하기 까다롭잖아. 아무리 애지중지 해도 언젠가는 구겨지거나 찢어질 거야. 그리고 부끄럽다니? 내가 왜 부끄러워? 나는 그저 사인 받는 줄이 너무 길어서, 기다리다가 네가 지쳐버릴까봐 그런 거야.”


우재는 이번에도 진솔하지 못했다. 솔직한 자괴감 대신 가당찮은 변명으로 나를 현혹시키려 들었다. 나는 그런 우재를 눈감아 주기로 하고, 함께 사인회장을 떠났다.


개찰구는 사인회가 열린 곳과 가까이 있었기에, 우리는 금방 그곳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는 직원에게 표를 내밀었다. 표를 받아든 직원은 내게 물었다.


“보호자는 없니?”


“제가 얘 보호잔데요.”


“좋은 누나구나. 그런데 내가 물어본 건, 부모님이랑 같이 안 왔냐는 뜻이야.”


“아. 먼저 들어가 계세요.”


거짓말이 익숙해져버린 나는 근심 가득한 직원을 안심시키고 경기장 안으로 입장했다. 그 과정에서 정립된 입장을 우재는 못마땅해했다.


“네가 왜 내 누나야?”


“돌아가서 실은 보호자가 없다고 말하고 올까?”


“누나.”


우리는 티켓에 적힌 좌석 번호를 찾아 헤맸다. 청록색 좌석 구획을 빠져나온 후에야 자리를 찾았다. 포수 바로 뒤편으로 벤치와 무척 가까운 자리였다. 아무래도 기장님이 돈을 꽤 쓴 모양이다.


다리가 저렸던 나는 좌석에 곧바로 착석했다. 반면 우재는 좌석에 무릎 한 짝만 올리고 있으면서, 입을 헤 벌린 채 침을 줄줄 흘리기만 했다. 나는 우재가 과하게 들뜬 나머지 정신이 나갔나 싶어 걱정스레 불러보았다.


“우재야?”


우재는 전광판을 지목했다. 전광판에는 금일 라인업이 띄워져 있었고, 투수란에는 방금 전에 목격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











***











우재가 선발 투수의 그날 성적을 판단하는 데 있어 이닝을 기준으로 삼았다. 9이닝을 책임지면 완벽한 것. 8이닝을 책임지면 정말 잘한 것. 7이닝을 책임지면 잘한 것. 5, 6이닝을 책임지면 점수에 따라 평가할 것. 그 이하면 못한 것. 우재의 우상은 정확히 4이닝째에 위기에 봉착했다.


“안 돼. 안 돼...”


행운만이 가득했던 우재의 오늘에 드디어 불운이 당도했다. 우재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너져가고 있는 그를 위해 기도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애석하게도 이런 행위는 경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타자가 타격한 공이 좌중간을 가르며 필드에 착륙한다. 상대편 관중으로부터 환호가, 우리 편으로부터는 욕설과 야유가 빗발친다. 수비수들은 이들의 아우성을 잠식시키고자 공을 향해 달렸다. 그런 후에 황급히 2루로 송구했으나, 이미 주루는 끝나 있었다. 타자 주자는 2루. 점수는 8 대 1. 다리에 힘이 풀린 우재는 좌석에 어깨를 기대고는 스르륵 미끄러졌다.


“이러다 콜드게임이 되겠어.”


“콜드게임이 뭐야?”


“심판 판단에 의해 경기가 중단되는 걸 말하는 거야. 양팀간 점수차가 큰 경우도 여기에 해당 되지. 이 나라 리그 같은 경우에는 5이닝에 15점, 7이닝에 10점 차이가 나면 경기를 끝내버려.”


이번 실점은 감독이 결단 내릴 빌미를 제공했다. 투수 코치가 마운드에 올라갔고, 변명할 여지가 없었던 우재의 우상은 터덜터덜 마운드를 내려갔다. 우재가 그리 보고파 했던 장면은 이렇게 끝이 났다.


“으. 감독도 포기했네.”


“그걸 어떻게 알아? 아직 경기는 안 끝났잖아.”


“저거 봐.”


우재는 덕아웃 옆 분리된 장소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투수 한 명과 공을 받아주는 포수 한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불펜이라고 부르는 장소야. 교체돼서 들어가는 투수가 몸을 풀기 위한 장소지.


투수 등번호 보여? 47번. 저 선수는 패전 처리조야. 이길 가능성이 없는 경기에 투입되는 선수지. 다른 나라 출신인데 작년에 이 팀으로 이적해왔어. 왕년에 꽤 날렸다고 하던데, 그러면 뭐하냐고. 지금 못 던지는데. 나이도 많아서 발전 가능성도 없어. 저런 선수들은 빨리 퇴출시켜 버려야 돼.”


“못하면 팀에서 퇴출시켜야 돼? 못하든 잘하던 간에 사이좋게 같이 하면 되잖아.”


“바보야! 야구는 성적이 생명이야! 저렇게 못하는 선수들로만 팀을 꾸린다면 맨날 지기만 할 거 아니야. 팬들도 선수가 못하면 싫어한다고.”


나는 잔인한 사회의 통념이 어린 우재에게 주입된 것을 체감하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는 우재에게 무시당한 투수가 잘 던졌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부디 그가 우재의 코를 납작하게 해줄 만큼 호투하기를.


경기가 재개됐다. 새로이 등판한 투수는 호흡을 가다듬고 초구를 던졌다. 그런데 그의 투구폼은 다른 이들과 사뭇 달랐다. 다른 선수들이 위에서 아래로 일관되게 던지는 것과 달리, 그 투수는 허리를 바짝 숙인 채로 아래에서 위로 팔을 휘둘러 공을 던졌다.


“특이하다. 저 선수는 공을 아래에서 위로 던지네?”


“언더핸드라는 투구 폼이야. 아주 비겁한 자세지.”


“왜 비겁해? 공을 어떻게 던질 건지는 자기 마음이잖아.”


“투수라면 말이야. 자고로 빠른 공으로 타자를 제압해야 하는 거야. 그래야 삼진을 수월하게 잡을 수 있으니까.”


“삼진을 잘 잡는 게 중요해?”


“삼진을 잡았다는 건 타구 자체가 나오지 않았다는 뜻이야. 타자가 출루할 길을 원천 봉쇄했다 이거지. 배트에 공을 맞을 일 자체가 없었다는 거니까.


저런 놈들은 그럴 자신이 없어서 꼼수를 부리는 거야. 이상하게 움직이는 공을 뿌려서 잘못 맞길 바라는 거고.”


타자는 배트를 시원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멋쩍게도, 그의 배트가 맞받아친 공은 맥없이 데굴데굴 굴러가 타자 주자를 아웃시켰다.


“저렇게.”


“저것도 아웃이잖아. 어찌 됐거나 아웃만 잡으면 되는 거 아니야?”


“빗맞았기에 망정이지. 정타였으면 꼼짝없이 9 대 1이었어. 저건 완전 운에 맡기는 방식이야. 쓸모 없긴.”


우재는 폄하는 보통 마구잡이가 아니어서 듣는 이를 무안하게 했다. 다행히도 이것은 잠시였다. 일방적인 경기 내용에 흥미를 잃은 우재는 늘어진 채 나머지 경기를 관람했다. 참고로 경기는 7회에 종료되었다.











***











널브러진 쓰레기가 쓸쓸한 악취를 풍긴다. 방금까지 만원이었던 좌석은 사람의 살결을 잃어 재빠르게 식어버렸다. 맥없이 끝난 경기를 뒤로한 채, 관중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관련 없는 이들을 한마음 한뜻으로 모이게 한 결속력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조금이라도 먼저 나가기 위한 이기심만이 서로 간에 어깨를 들이밀도록 강요한다.


경로가 달랐던 우리는 이러한 풍파에 휩쓸리지 아니했다. 그 대신에 끈기를 시험받고 있었다.


“나올 때가 됐는데...”


“이리로 오는 거 맞긴 해?”


“홈 경기가 있는 날에는 자가 차량으로 출퇴근한다고 들었어. 내가 들은 바가 맞다면, 분명 여기로 올 거야.”


나와 우재는 지하 주차장에서 한 시간 가량을 대기하고 있었다. 못다 받은 사인을 획득하기 위해서였다.


“어휴. 이럴 바에는 아까 받지.”


경기장의 열기에 지쳤던 나는, 빨리 마차로 돌아가 쉬고픈 맘에 우재를 비난했다. 그러나 애태우는 우재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사인 해달라는 거 외에 그 선수랑 더 나눌 말이 있어?”


“오늘 경기 결과가 안 좋았잖아. 분명 기분이 상했을 거야. 내가 위로 해줘야지.”


“너 말고 다른 사람이 위로해주겠지. 가족이라던가. 친구라던가.”


“주위 사람이 해주는 위로랑 팬이 해주는 위로는 달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알 수 있어. 나는 그 사람과 운명적으로 엮여있으니까.”


우상을 향한 우재의 숭배는 대책 없이 맹목적이었다. 이때까지 끌려다니기만 하여 열불이 올랐던 나는 그런 우재의 신앙심에 흠집을 내주고 싶었다. 그래서 말투에 날을 세웠다.


“웃기고 있네. 그 사람은 너란 애가 있는지조차 모를 걸.”


“어제까지는 그랬지. 오늘부터 알게 될 거야. 자기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나란 사람이 있다는 걸... 왔다!”


비아냥대려던 문장들을 쉴 새 없이 내뱉으려던 와중. 기다림이 끝났다. 그가 나타났다. 우재의 힘든 시기를 버티게 해준 장본인이자, 오늘 경기를 시원하게 망쳐버린 주범이.


우재는 그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그러나 찰싹 달라붙지는 못했다. 아마도 곧바로 그래 버리면 심장이 멎을지도 몰라서 그랬을 것이다.


우재는 비굴한 자세로 천천히 접근하여 그의 바로 옆에 서서 보폭을 맞춰 걸었다. 그렇게 가까이 있었음에도, 우상은 우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마치 투명인간을 대하는 듯했다. 이대로는 떠나보내는 게 기정사실이었기에, 우재는 용기를 내었다.


“저기요.”


그제야 선수는 우재를 흘깃 쳐다봤다. 하지만 발걸음은 여전히 떠나려는 자의 그것이었다.


“오늘 경기가 너무 안 풀렸어요. 그죠? 본 실력이 발휘 됐다면 훨씬 좋은 결과가 있었을 거에요. 하지만 이런 날도 있는 거죠. 항상 잘할 수만은 없잖아요. 그죠? 제 말 맞죠?”


“그래. 고맙다.”


우상이 서투른 위로를 접수해주자, 우재의 얼굴에는 황홀함이 가득 들어찼다. 우재는 조심스레 주머니 속 공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가 먼저 깨닫고 말을 걸어주길 바라면서.


“나한테 무슨 용건이라도?”


우재는 고무 공을 내밀었다.


“이런 말 하기 적절치 않은 거 아는데, 실례지만 사인 좀 해주시면 안될까요...?”


“펜이 없단다. 다음에.”


“저한테 펜이 있어요. 부탁드릴게요. 진짜 잠깐이면 돼요.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꼬마야. 미안하다. 다음에 와라.”


선수가 뜻하는 다음이란 경기가 열리는 어느 날짜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재에게는 이것이 4년 후의 기약이었다.


“제가 언제 선수님을 뵐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서 그래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이번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선수는 대답 없이 저리 가라는 식의 손짓만 했다. 쫓아내려는 뉘앙스만 내보이는 선수의 태도에, 우재는 서운함을 토로했다.


“오래 안 걸리는데... 조금만 시간 내주시지...”


“씨발 말귀 존나 못알아 쳐먹네.”


오랜 기간 당했던 학대. 괴롭게만 기억되었을 그 시기에 유일한 행복이 되어준 우상. 그를 향한 끝없는 애정은 기필코 만나리라는 일념을 만들어 내었고, 소년은 마침내 염원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그의 한마디에, 일생을 바친 소년의 애정은 전부 허사가 되었다. 나는 귀를 의심했다.


“경기 끝나고 난 다음에는 좀 냅둬! 한창 사인회 할때는 어디 있다가 경기 개판친 다음에 달라붙고 지랄이야. 이래서 애새끼들이란.”


그것은 존경받는 이가, 자신을 존경하는 이에게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갈이었다. 아울러 이는 그가 소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분명히 나타내었다. 그에게 있어 소년은 성가신 벼룩같은 존재였다.


우재의 본래 성격을 아는 나는 우재를 말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내 예상과 달리 우재는 그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서 선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윽고 우상은 차에 탑승했고, 시동을 걸어 주차장을 떠났다. 이제 그가 여기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거라고는 바닥에 그어진 타이어 자국 뿐이다. 나는 우재의 상태를 살피고자 소년에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미동 없던 우재의 팔이 눈 깜짝할 새에 휘둘러졌고, 손에 쥐고 있던 공은 정처 없이 날아가 바닥을 몇 번 튀긴 후에 굴러다녔다. 분노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소년은 힘을 잃은 공에게 다가가 공을 내리 깔보며 노려보더니, 이내 공을 사정없이 밟았다. 우재의 노여움을 받아내지 못한 고무공은 결국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나는 분노를 머금은 우재를 달랠 방안을 떠올렸다. 하지만 곧이어 떨궈진 눈물 한 방울에, 내 머릿속은 새하얘지며 제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우재는 구슬피 울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나약한 모습으로.


당시의 나는 우재가 왜 오열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옛일을 회상하는 이제는 알 수 있다. 그날. 우재가 선망하던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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