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번째 완주를 끝마칠 즈음에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아동소설·동화

opeamer
작품등록일 :
2023.02.28 23:38
최근연재일 :
2024.09.17 05:52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256
추천수 :
2
글자수 :
162,564

작성
24.02.06 04:43
조회
11
추천
0
글자
18쪽

3. 도미노 (3)

DUMMY

“그런 일이 있었어요 기장님.”


마차로 돌아온 서아 언니는 할 말이 있다며 기장님과 서준 오빠, 우재를 객차 칸으로 불러 모았다. 그런 뒤 언니는 오늘 있었던 일들을 그대로 그들에게 전했다. 머리에 나사가 몇 개 빠진 아이의 고독을.


얘기를 들은 이들의 감상은 각기 달랐다. 기장님은 듣는 내내 안타까워했다. 우재는 왜 바보같이 당하고 사냐며 갈기갈기 뛰었다. 반면 오빠는 귀만 후볐다.


“그 애를 돕고 싶어요. 그러니까 밤 늦게 귀가하는 걸 허락해주실 수 있나요?”


“가슴 아픈 얘기입니다. 좋습니다. 서아 양. 저번에 제가 잘못한 것도 있으니, 예외적으로 허락해 드리죠. 9시? 10시에 주민센터가 문을 닫는다고 했나요?”


“10시요.”


“그러면 네분 다 11시까지는 마차로 돌아오시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내일 이곳을 떠날 거니까요.”


“잠시만요 기장님. 저는 도우러 간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요.”


“형. 쪼잔하게 왜 그래?”


“나도 밖에서 맨날 무시받고 혼자였어. 그게 얼마나 편한지 알아? 물론 처음에는 힘들었지.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걔도 혼자에 적응할 거야.”


“그건 오빠가 이상한 거고.”


“내가 지극히 정상인 거겠지 멍청아. 인생은 결국 혼자야.”


“그런 사람이 신기루 마차는 왜 탔대?”


언니의 정론에 할 말을 잃은 오빠는 우리를 등졌다.


“기장님. 아예 그 아이를 신기루 마차로 데려오면 안 되나요?”


“그건 고민을 해봐야 겠군요. 윤지 양.”


“왜요?”


“아이를 책임진다는 건 그만큼 심사숙고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엾은 아이들을 수두룩하게 봐왔습니다만, 그 아이들 모두를 신기루 마차에 태우지는 않았습니다. 아직 미숙한 아이들의 특성상 사연을 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을 안 듣는 아이에게 부모가 길에다 내다 버린다고 겁을 줬는데, 그 얘기를 들은 아이가 자신이 진짜 버림받았다고 착각하는 경우 등이요. 윤지 양 같은 경우에는 초면임에도 정황이 확실하여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그 늦은 시각에 기차역에서 홀로 울고 있는 아이에게 무슨 사정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지하가 자기 얘기를 과장했을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직접 만나보지 않은 확답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그 아이가 외롭다는 것만은 사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 한들, 그 아이는 보육원에 소속된 아이입니다. 이미 법의 테두리에 보호받고 있다는 뜻이죠. 고작 외롭다는 구실로 보육원으로부터 아이를 빼돌릴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적이 없던 건 아니지만, 그런 경우는 학대가 역력하였기에 데려올 수 있었던 겁니다.”


기장님은 턱을 괴고 쓰다듬었다.


“하긴. 이 정도 방치도 일종의 학대를 볼 수 있긴 하군요. 말도 안 되는 배포로 학예회를 하려는 데 제지하거나 도와주는 이 하나 없으니.”


“그러면?”


“데려올 여지가 충분해 보이기도 하는군요. 정확한 판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저는 마차 밖을 벗어날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러니 저 대신 그 아이의 현황을 판단할, 믿음직한 사절을 보내기로 하죠. 서준 군. 저는 서준 군의 판단은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아이의 생활이 끔찍할 만큼 방치 일색이라면 신기루 마차로 데려와주세요.”


“저는 간다고 안 했다니까요?”


“가주세요. 제 부탁입니다.”


기장님의 명에 오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서아 언니는 이 기회를 틈타 의견을 한데 모았다.


“우재야. 갈 거지?”


“물론. 내가 가서 금방 완성해줄게.”


“윤지는?”


“나야. 당연히 가지.”


“그럼 다들 내일 도미노 하러 가는 거다. 약속.”


언니가 새끼를 내밀었다. 우리는 주저 없이 언니의 손가락에 새끼를 꼬았다. 의기투합한 우리는 오빠를 쳐다봤다.


“인생은 혼자야.”


그러면서도 오빠는 마지못해 우리에게 새끼손가락을 접했다.








****








9시가 되자마자 우리는 기장님의 배웅을 받고 마차를 나왔다. 도착한 주민센터는 개방되어 있었으며, 지하 또한 진작 와서 블록을 층층이 쌓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안녕! 잘 잤어?”


언니가 지하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하는 고개를 스윽 돌려 우리를 한번 보고는 다시금 블록애 집중했다.


“지하야. 인사를 했으면 적어도 받아는 줘. 사람 무안하게.”


“우리가 싫은 모양이야.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게 어떨까?”


“빈정대지 마 오빠. 지하가 우릴 싫어할 이유가 뭐가 있어?”


언니는 어제 하다만 구역으로 이동해 도미노를 이어나갔다. 나는 내 할당량은 뒷전으로 미루고 오빠와 우재를 단상으로 데려갔다. 도안지를 토대로, 블록을 어떻게 쌓아야 되는지 지도해주기 위함이었다.


우재는 바닥에 뿌려져있던 도안지를 주워 양손에 들고는 번갈아 쳐다봤다.


“이 네모칸이 블록?”


“맞아.”


“블록간 간격은?”


“블록 두께 절반만큼. 세로 기준으로.”


“좋아. 이해했어. 이대로 블록을 놓으면 된다는 거잖아? 근데 이거 종이 한 장당 블록 몇 개가 들어가? 엄청 많아보이는데.”


“글쎄? 그건 나도 모르겠어. 무턱대고 쌓기만 해서.”


원하는 정보를 얻지 못한 우재가 지하를 향해 소리쳤다.


“야! 한 그림에 블록이 총 몇 개나 들어가?”


“설계용지에 세로, 가로 개수를 각각 센 다음에 둘을 곱해. 그게 총 블록 개수야.”


“그래서 그게 몇 갠데?”


“곱셈할 줄 몰라?”


우재는 곱셈을 할 줄 알긴 하나, 큰 수는 잘하지 못한다. 어쩌다가 역린이 건들어진 우재의 얼굴은 금세 씨뻘개졌다.


“누굴 바보로 알아! 당연히 할 줄 알지! 계산하기 번거로워서 물어본 거야! 근데 도와주러 온 사람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 나한테 죽고 싶어?”


“진정해. 할 줄 모르냐고 물어본 거잖아 물어본 거. 물어볼 수는 있는 거잖아. 그치? 왜 화를 내고 그래.”


우재를 조련하는데 능했던 오빠는 지하의 표현을 애둘러 왜곡하여 우재를 달랬다. 이 덕에 우재의 분노는 한결 누그러졌다. 그 사이 오빠는 쭈그려 앉아 도안을 한 장씩 훑었다.


“착수하려면 도안을 챙겨가야겠네? 보면서 해야될 거 아냐.”


“그렇지 뭐. 외울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보자. 쉬워 보이는 게... 일단 이거랑 이거. 그 다음은... 이거. 이건 배경이 대부분이네. 쉽겠... 아니다. 힘들겠다. 너희들이 해라. 그리고...... 잠깐만. 왠지 나만 고르는 거 같은데? 우재야. 너도 골라.”


“보여줘야겠어.”


우재의 뜬금없는 언변에 나와 오빠는 눈을 꿈뻑였다.


“뭘?”


“쟤가 날 무시했어. 그러니까 내가 쟤보다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김윤지. 이중에서 가장 어려운 게 뭐야?”


“어려운 거? 글쎄...”


도미노를 잘하는 것과 곱셈이 미숙한 것. 이 두 가지가 당최 무슨 연관이 있어서 보여주겠다는 건지, 나는 굳이 우재에게 따져묻지 않았다. 그저 우재의 승부욕이 불타 올랐고, 이럴 때는 그저 우재의 바램대로 하는 게 정석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지하가 구상한 도미노의 형태는 직사각형이 기본 틀이었다. 안팍의 색만 다르게 해 그림이나 문구가 그려지는 게 전부였다. 때문에 다양한 색을 지닐수록 번거로웠다. 나는 색이 다양할 수록 어렵다고 우재에게 말하려다가, 문득 번거로운 것과 어려운 것은 다른 개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금 생각을 정돈했다. 지금, 여기서 블록을 배치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놓는 것과 쌓는 것. 나는 지하를 지목했다.


“지금 지하가 하는 게 가장 어려울 거야. 매의 눈 부분인데, 유일하게 저 부분만 탑을 쌓아야 하거든.”


내 의견을 접수한 우재는 즉시 단상에서 내려갔다. 지하가 책임지고 있는 매의 눈 좌측. 우재는 그 반대편인 우측 눈 부분으로 이동한 뒤 지하를 향해 소리쳤다.


“야! 먼저 쌓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이겨?”


“그래! 너는 왼쪽 눈을 쌓아. 나는 오른쪽 눈을 쌓을테니까. 진 사람이 그날 하루 이긴 사람 말은 다 들어주기다!”


“나랑 시합하자는 거야?”


“그런 셈이지.”


“알았어.”


수긍한 지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이 공들여 쌓던 탑을 발로 차서 무너트렸다. 그 일련의 행위는 서준 오빠, 서아 언니, 나를 경악시켰다. 물론 우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뭐야?! 너 미쳤어? 그걸 왜 부숴?”


“먼저 쌓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면서? 그럼 둘 다 백지상태에서 시작해야지. 그게 공평하잖아.”


“아니... 야. 우리가 여기 온 이유는 네가 기한까지 도미노를 완성시키는 걸 돕기 위해서야. 이래 버리면 시간만 더 늘어나잖아. 너 바보 아니야?”


“그럼 내가 이길 게 뻔한데? 넌 잘 못하잖아.”


그 말이 터져 나오자마자 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반면 오빠는 감탄했다. 우재는 이빨을 아득바득 갈며 분노에 휩싸였다.


“두고 보자.”


나는 우재가 지하에게 달려들까 우려했으나,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우재는 잽싸게 엎드려 여느 때보다 진중한 태도로 블록을 쌓아나갔다.


“저거 어린놈이 제정신이 아니네. 나도 작업하러 간다. 수고해.”


오빠는 도안들을 챙겨들고 단상을 내려갔다. 나는 단상에 잠시 머물러, 조물주에 빙의하여 전지적인 시점으로 단상 아래를 내려봤다.


블록을 신중하게 놓고 있는 이들. 그들이 일궈낸, 반짝이는 매질 위에 깔린 무수한 블록들. 나는 도안을 기반으로 완성된 도미노를 상상했다. 그것은 틀림없이 장대할 것이다. 하지만 쓰러지는 모습 또한 장관일 거라고는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블록들이 맥없이 쓰러지는 것을 수차례 경험했다. 그것은 추레하며, 비참했었다. 이런 참상이 연이어 발생하여, 기껏 정렬한 도미노들이 죄다 쓰러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릴 일이다. 이런 장면에 환호할만한 사람은, 뭐든지 파괴하길 좋아하는 악랄한 인간이 고작일 것이다.


그런 잡생각을 마친 나는 단상을 내려와 마저 하던 도미노에 붙었다.








****








우재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아무도 우재를 쳐다보지 않았다. 저러길 11번째, 혹은 12번째이기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주민센터의 폐관이 멀지 않은 이른 밤. 그때까지도 우재는 오른쪽 눈을 끝맺지 못했다. 진작에 왼쪽 눈을 마무리한 지하와는 극히 상반된 결과였다. 지하의 압도적인 승리였건만, 우재는 승복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집착을 못버린 채 애꿎은 블록 탓만 해가며 탑이 쓰러질 때마다 괴성만 질러댈 뿐이었다.


“등신같은 우재야. 내가 할까?”


“됐어! 이건 내가 꼭 끝내고 말테니까 형꺼나 신경 써.”


“내 건 이미 다 끝내서 말이야.”


“그럼 새거 하면 되겠네. 나한테 신경 꺼!”


서아 언니와 나의 도미노 실력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작업 속도는 평이했으며, 간간이 블록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서준 오빠는 달랐다. 몇날며칠 도미노만 했던 지하조차도 상대가 안될 정도로 빠르게 도미노를 갈무리했다. 단적인 예로, 우리가 도안을 1장을 쳐낼 때 오빠는 무려 3장을 쳐냈다. 그러는 동안 단 한번의 블록도 쓰러트리지 않은 건 덤이다.


오빠는 새로운 도안을 얻고자 단상으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서아 언니와 지하가 무릎을 꿇은 채로 다음에 참고할 도안을 선별하고 있었다. 오빠는 이 사이에 끼어들어 도안을 뒤적였다. 그러자 언니가 음흉하게 실실거렸다. 이를 알아챈 오빠는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투덜거리던 사람 맞아? 즐기는 것 같은데?”


“그, 이 도미노라는 거, 나름 재밌네. 왠지 모르게 사람을 차분하게 만드는 게 있어.”


“근데 오빠 진짜 빠르다. 나랑 윤지는 비교도 안되겠는 걸. 우재는 말할 것도 없고.”


“전과 7범 소매치기라면 이 정도 기량은 보여야지.”


“어? 오빠 감옥도 갔었어? 나는 그런 거 전혀 못 들었는데?”


“사실, 경찰서에 붙잡혀 간 게 7번인데 이걸 과장해서 말한거야. 전과는 없어. 내 나이에 무슨 전과냐.”


“이상한데.”


서아 언니와 서준 오빠의 대화에 지하가 난입했다.


“뭐가?”


“경찰서에 갔다는 뜻은 도둑질 하다가 경찰 아저씨한테 붙잡혔다는 거잖아? 그러면 소매치기를 못하는 거 아닌가? 잘했으면 잡히질 않았겠지.”


“...너 재수없다.”


지하의 일침에 폭소한 언니는 대견스럽다는 듯 지하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지하는 언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아리송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서준 오빠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나는, 애써 웃음을 참으며 그러한 군상을 즐겼다.


언니의 폭소가 멎은 후의 강당은 한없이 고요했다. 집중하는 이들에게서는 일말의 소음도 유발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정적을 즐기며(떄로는 고통받아가며) 도미노에 열중했다. 그러던 중. 건물이 얕은 진폭에 의해 흔들렸다. 마치 무언가가 건물을 두들기는 느낌이었다.


호우였다. 지긋지긋한 장마가 또다시 비를 퍼붓고 있다. 이런 일을 대비해 우산을 챙겨왔지만, 체감상 이번 비는 지난날보다 폭우다. 며칠내내 폭우와 마주한 나는, 그간 겪은 바가 있었기에 온통 젖게된 나를 상상하며 질색했다. 서준 오빠의 취조는 이런 나의 근심이 역력해졌을 즈음에 개시되었다.


“바보 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어?”


여태까지 그러했었지만, 나는 귀를 한층 더 쫑긋 세웠다. 의미심장한 질문이었다.


“무슨 소리야?”


“서아한테 들었어. 얘가 하도 입이 싸서 말이야. 듣기로는, 어딜 가나 사람들이 너를 바보 취급한다면서.”


“맞아.”


“왜 그런 거 같아?”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래 보이는 행동을 했으니까.”


“예를 들면? 어떤 거 때문에 무시당했었는데?”


“이런 일이 있었어. 국어 수업 중이었지. 지문을 읽고 문제에 알맞은 답을 적어내 발표하는 시간이었는데, 문제는 이랬어. 주인공이 착각하거나, 자신도 주인공과 비슷하게 착각한 경험이 있다면 적어보시오. 나는 그런 경험이 있었어. 그래서 내 착각을 적어냈지. 그런데 막상 발표 시간에 접어드니까, 다들 주인공이 착각한 점만 적었더라고. 내 차례가 오자, 나는 ‘내 뇌는 내가 조종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발표 했어. 그걸 들은 선생님은 ‘너는 대체 애가 왜 그러냐.’라고 하셨지. 아이들은 박장대소했고.”


“주인공의 경험이 아니라 네 경험을 바탕으로 발표한 거라고 말하지 그랬어.”


“말할 수 없었어.”


“어째서?”


“무서워서 몸이 따라주지 않았어. 내가 그렇게 비웃음을 살때마다 애들이 날 괴롭히거든.”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는 도미노를 중단하고 오빠와 지하의 대화에 온 관심을 기울였다.


“어떤 식으로 괴롭히는데?”


“머리를 때리고 도망치기도, 등 뒤에 이상한 메모를 붙여놓기도 해. 그 외에도 다양한데, 가장 심했던 건 내 침상에 오물을 들이부은 짓이야. 그때는 정말 많이 울었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어. 그 애들은 왜 나를 못살게 구는 걸까? 무시하면 그만인데.


그러다가 펭귄에 관한 두꺼운 책을 읽게 됐는데, 그제야 게네가 나를 괴롭히는 게 이해가 되더라고. 귀여운 이미지랑 다르게 펭귄은 영악한 동물이야.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 못된 짓을 일부 행하기도 하는데, 그중에는 동족을 왕따시키는 것도 있어. 똥을 싸서 얼굴에 맞추는 식으로 괴롭힌다고 하더라고. 왜 펭귄이 같은 펭귄한테 그러는지 알아? 본능에 내재한 계급 본능 때문이래. 왕따 당하는 펭귄을 계급의 맨 아래에 둬야만 자기네들이 위에 설 수 있으니까. 아울러 거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자기네들이 계급의 맨 아래가 될지도 모르니까.


걔들도 마찬가지야. 나를 괴롭히는 데 동참하지 않으면, 나처럼 외로워질까 봐 그런 거겠지.”


지하의 서술은 난해했다. 그렇기에 나는 지하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다. 추측이지만,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하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며 되묻거나 토를 달지 않았다. 어린 시절을 외로이 보내고 있는 이의 말에는 묘한 깊이가 있어, 사람들을 숙연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하에게 해줄 위로가 필요하다고 여겼으나, 그것을 어떤 식으로 표출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나 대신 지하를 위로해주길 바랐다. 나는 그 누군가로 유력한 후보가 서아 언니일 것이라 여겼다. 한데 정작 나선 것은 서준 오빠였다.


“나한테는 어려운 이야기네. 어쨌든 간에, 이걸 완성해서 걔네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자고.”


“잠깐만 오빠. 그건 좀... 폐관 시간이 멀지 않았어. 윤지랑 나는 오빠나 지하랑 다르게 도안 한 장 쳐내는 데도 한참 걸린단 말이야. 우재는 아직도 탑만 쌓고 있는걸. 다 하기는 무리야.”


“폐관 시간이 되기 직전에 어디 숨어있자. 그러면 우리가 나갔다고 착각한 경비가 주민센터 문을 닫을 거야. 그런 뒤에 도미노를 하면 되지.”


“밤을 새워서라도 완수하자 이거야?”


“그래.”


“기장님이랑 약속한 건?”


“이 동네 밤거리가 워낙 흉흉한 탓에 돌아다니기 좀 그랬다고 하지 뭐. 게다가 밖에 봐봐. 비가 장대처럼 쏟아지는 거 안보여? 이따위 날씨에 나다니다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서 몸살을 앓게 될 거야.”


“그런 시덥잖은 변명이 먹혀들겠어? 분명 대노하실 거야.”


“까짓꺼 타박 받으면 돼. 그리고 못 갈 이유가 하나 더 있어.”


“뭔데?”


오빠는 지하에게 어깨동무를 했다.


“얘는 바보가 아니야. 그치?”


나는 이러한 광경에 꽤나 놀랐다. 같이 지낸지 몇 달이나 되었지만, 오빠에게 이런 면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아 언니와 우재가 오빠를 평소에 하대하면서도 신뢰하는 것이 도통 납득하기 힘들었는데,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나도 쟤 의견에 동의해. 못할 거야. 다 하기에는 너무 많이 남았어. 오기 부리지 말고 그냥 가.”


“너. 나랑 약속하자.”


서준 오빠는 지하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지하는 멀뚱거렸고, 뒤늦게 뭘 해야하는 지 깨달아 오빠에게 새끼손가락을 걸쳤다. 하지만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엄지를 맞대는 것은 오빠의 몫이었다.


“우리가 꼭 완성시켜 줄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세번째 완주를 끝마칠 즈음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3 5. 라디오 (7) 24.09.17 6 0 16쪽
22 5. 라디오 (6) 24.09.17 7 0 12쪽
21 5. 라디오 (5) 24.09.17 7 0 11쪽
20 5. 라디오 (4) 24.09.17 8 0 15쪽
19 5. 라디오 (3) 24.09.17 6 0 16쪽
18 5. 라디오 (2) 24.09.17 5 0 16쪽
17 5. 라디오 (1) 24.09.17 6 0 17쪽
16 4. 야구장 (4) 24.09.17 6 0 16쪽
15 4. 야구장 (3) 24.09.17 6 0 16쪽
14 4. 야구장 (2) 24.09.17 8 0 14쪽
13 4. 야구장 (1) 24.09.17 7 0 11쪽
12 3. 도미노 (4) 24.02.06 13 0 16쪽
» 3. 도미노 (3) 24.02.06 12 0 18쪽
10 3. 도미노 (2) 24.02.06 11 0 16쪽
9 3. 도미노 (1) 24.02.06 10 0 16쪽
8 2. 잡지 (3) 24.01.28 10 0 12쪽
7 2. 잡지 (2) 24.01.28 11 0 18쪽
6 2. 잡지 (1) 24.01.28 11 0 11쪽
5 1. 탑승 (4) 24.01.23 9 0 27쪽
4 1. 탑승 (3) 24.01.23 11 0 23쪽
3 1. 탑승 (2) 23.02.28 19 0 18쪽
2 1. 탑승 (1) 23.02.28 27 1 14쪽
1 0. 프롤로그 23.02.28 41 1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