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형사, 눈 떠 보니 무림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판타지

래몽래인
그림/삽화
배민기
작품등록일 :
2023.05.10 14:48
최근연재일 :
2023.08.02 23:37
연재수 :
6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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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95,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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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4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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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11> 일월교주 율리납

DUMMY

*


효지림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의 순간에는 일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던가?

하지만 효지림의 머릿속은 그냥 하얘지기만 했다.

일생 동안 단 한 번도 이토록 죽음을 가까이 맞이한 적이 없었기에.


- 텅!


‘...........’

‘...........’


효지림은 아직도 자신의 머리로 생각이란 걸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연히 머리가 두부처럼 으깨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은 것이다.


살며시 눈을 떴다.

눈앞에 그 사람이 있었다. 의문의 그 사내.

가장 위험하며 가장 비밀스런 사내.


내질렀던 로운의 손은 효지림의 머리통을 박살내는 대신 얼굴 옆의 벽을 짚고 있었다.


그의 표정에 살기라고는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철없는 어린 여동생을 바라보는 측은한 눈빛이었다.


“하아~ 정말 뒈져 볼래?”


로운의 말투엔 살기도 악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효지림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장화 신은 고양이의 그 눈을 한 채.


“으휴~”


로운이 기가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손끝으로 효지림의 볼을 톡톡 쳤다.


“나, 오늘 정말 기분 별로거든. 이상한 곳에서 눈을 떴고 괜한 시비가 붙었고 구해준 애들 한테는 이상한 놈 취급당하고.”


그 순간 효지림은 로운이 하는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냥 넋 놓고 로운을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로운은 아까와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

따스하고 포근한 ‘남자’의 느낌.


이 순간에 일월교도 군웅맹도 상관 없었다.

그냥 자신과 이 사내만 존재하는 세상이었다.


“너 마교 쪽인 거 같은데 나 군웅맹 아니거든. 너희들과 적이 될 생각도 없다고. 그러니까 그냥 돌아가라. 그럼 다 없던 일로 쳐줄 테니까. 알았지?”


효지림이 다시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본능적으로, 이뻐 보이고 싶은 본능에 따른, 그런 살랑살랑이었다.


돌아가기 싫었다.

이 남자를 좀 더 알고 싶었다.


이런 감정, 정말정말 처음이었다.


*

효지림의 가장 오래 된 기억은 손에 쥔 칼과 온몸에 튄 아버지의 핏물이었다.

술에 취해 엄마를 때리던 아버지, 결국 숨이 끊어진 엄마.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를 찔러 버린 그 밤의 기억이었다.


두 사람의 시신 옆에서 열흘을 지내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난 곳은 일월교의 깨끗한 방이었다.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건 혈편파파 효선월의 따사로운 미소였다.


효선월이 근처를 지나다 죽어가는 어린 소녀를 구해준 것이었다.


일월교 대장로 중 한 명인 효선월의 제자가 되면서 원래의 성을 버리고 효지림이 되었다.

효선월은 효지림을 손녀처럼 아껴주었다.

자신의 모든 무공을 전수해주었고 평생을 지니고 다녔던 적야혈편까지 선물했다.


효선월이 그토록 효지림을 아낀 건 자신 또한 비슷한 유년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다른 점은 효선월은 무공을 익힌 뒤에야 고향을 찾아가 아버지의 목을 직접 베었다는 것이다.


아버지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에 효선월은 평생 남자를 멀리했다.


비슷한 과거였지만 효지림은 스승과 달랐다.

남자를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가까이 두었다.

곁에 두고 희롱하고 즐긴 뒤 매몰차게 그들의 정기를 뽑아냈다.


아버지에게 당한 고통을 세상 남자들에게 복수했다.


효지림에게 사내란 그런 존재일 뿐이었다.

유희와 처단의 대상.


그런데 지금 다른 사내를, 다른 세상을 만났다.

처단의 대상이 아닌 사내.

자신은 죽이려 했으나 자신을 죽이지 않고 살려 준 첫 ‘사내’를.


*

“뭐야? 안 간다고?”


효지림이 또 한 번 살랑살랑 고개를 흔들었다.


“야!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려? 내가 ‘낙장불입’을 펼치면 넌 진짜 뒈져! 누군지 모르겠지만 삼초 안에 사라져라! 아님 진짜 죽....”

“효지림!”

“?”

“누군지 물었잖아. 나 효지림이야. 알지? 일월교 혈편랑 효지림이 바로 나라구.”

“효지림인지 뭔지 내가 니 이름을 어떻게 아냐?”


효지림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로운이 군웅맹이 아니라했지만 군웅맹의 중요 인물과 함께 백령기에 타격을 입힌 인물이다.


‘그런데 나를 모른다고? 일월교의 외진각 부각주인 나를?’


“삼 초 벌써 지났다. 사라져라, 얼른!”


로운이 인상을 바짝 구기며 다시 말했다.


“아니, 잠시만! 그쪽, 아니 대협 존함이 어찌 되시나?....요?”


로운은 말문이 턱 막혔다.

방금까지 자기를 잡아먹을 듯 덤벼들더니 갑자기 포실포실 웃으며 대협에 존함이라니.

게다가 느닷없이 존댓말로.


효지림의 표정을 보니 삼초가 아니라 사흘이라도 먼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 하는 법.


“됐다. 니가 안가면 내가 가지 뭐.”


기가 찬 로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서서 방을 나가려 했다.


효지림이 날듯이 달려와 로운의 앞을 막아섰다.


“너, 나랑 함께 가자!”

“?”

“군웅맹과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나랑 가면 훨씬 더 큰 걸 약속할 수 있어!”

“가긴 어딜 가?”

“어디긴? 일월교지!”



*

설산의 눈들이 봄이면 녹아 내려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그 차갑고 맑은 물들이 수만 년을 흘러 거대한 호수를 이루었다.


설산을 뒤로, 호수를 앞에 두고 자리한 거대한 하얀 성이 일월교의 본교인 백탑성이었다.

중원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르고 서역의 양식에 가까웠다.


설산과 호수에 어우러진 일월교의 하얀 성은 멀리서 보면 언제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부서지고 무너진 흔적이 지나온 고단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군웅맹과의 최후 일전에서 파괴된 성은 무너진 그대로 수십 년 세월을 죽어 갔다.

교도들은 설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여름엔 나무뿌리를 뜯어 먹고 겨울엔 눈을 녹여 마시며 복수를 다짐했다.

때론 짐승에 찢겨 죽고 때론 굶어 죽고 때론 얼어 죽기도 했지만 그들의 무공은 질긴 잡초마냥 후대로 이어졌다.


치욕과 절망의 긴 시간이 그렇게 흘렀고....

마침내 때가 되었다.


교주 풍도우검 율리납은 흩어진 교도들을 이끌고 무너진 이 성으로 다시 들어왔다.


“이 성은 우리의 모습과 같다. 처참하게 부서져 수십 년 세월 풍우에 깎였으나 무너지거나 사라지지 않았다. 이 성을 고치지 말라. 부서진 성을 보며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준비를 하라!

그리하여 중원 무림에 피 맺힌 은원을 다 갚아내는 날, 그 날이 바로 우리가 쓰라린 과거와 결별할 수 있는 날이 될 터이니! 그때 술잔을 높이 들고 노래할 것이며 그 날로 이 무너진 백탑성을 재건할 것이다.“


일월교도들은 환호했다.

희망도 내일도 없던 교도들에게 율리납의 일갈은 고통스러운 오늘을 견디는 꿈이 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꿈은 현실이 되었다.

중원 무림을 무너뜨리고 나서야 성 곳곳에서 보수와 신축을 위한 공사가 진행되었다.

벽돌을 나르는 수레소리와 인부들의 힘 찬 고함소리가 승전을 축하는 음악처럼 밤낮 없이 울려 퍼졌다.


교주는 가장 아래 교도들의 공간을 맨 먼저 수리하고 자신을 비롯한 장로나 각주급의 침소와 집무실은 가장 마지막에 수리하라 명했다.


백탑옥도 여전히 무너지고 부서진 그대로였다.


그리고 오늘도 율리납은 백탑옥에 올라 있었다.


*

백탑옥은 백탑성 꼭대기였다.

그곳은 오로지 교주만 오를 수 있는, 교주의 휴식처였고 수련장이었다.

맑은 날이면 멀리 호수 너머 중원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율리납은 매일 그곳에 올랐다.

때로는 설산을 바라보며 과거를 기억했고 때로는 호수 저편을 내려다보며 내일을 계획했다.


그리고 매일 수련했다.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취학명의 심장을 뚫었던 그 모든 무공이 이곳에서 완성 되었다.


취학명이 죽었으니 이제 다시는 일월신주를 뽑아 들 상대를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목표가 사라졌으니 수련을 쉬어가도 될 법 했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일월신주를 휘두르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풀리지 않았다.


살아온 이력 때문이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아버지로부터 피에 녹여 전해진 치욕. 그 치욕을 씻기 위해 일초일각도 허투로 보내지 않은 과거.

적은 무너졌고 치욕은 씻었으되 몸에 새겨진 그 이력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율리납은 오늘도 백탑옥에 올랐다.

여느 때처럼 죽어간 선조들을 생각하며 설산을 향해 묵념하고 호수를 내려보며 일월교의 내일을 위해 묵상했다.


율리납이 일월신주를 들어 허공에 쭉 뻗었다.


검은 빛깔 신주에서 신령스런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신주가 천천히 움직였다. 광채가 붉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율리납이 솟구쳐 오르며 신주를 휘둘렀다. 백탑옥 전체가 뜨거운 기운으로 가득 찼다.


취학명의 철검을 박살 낸 일초, 일광개천(日光蓋天)이었다. 신주가 지나는 곳 마다 수백 개의 태양이 일시에 세상을 태워 버릴 듯 이글거렸다.


곧바로 다음 초식으로 이어졌다.

붉은 빛이 옅어지면서 은백광이 쏟아져 나왔다.

취학명의 심장을 찌른 두 번째 초식, 월광세천(月光洗天)이었다.

차가운 달빛이 지나는 곳마다 붉은 잔상을 지워내고 은빛 파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세상에 보인 바 없는 세 번째 초식으로 이어졌다.

일월신주가 본연의 검은 묵광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율리납이 동작을 멈추었다.

자의가 아니었다. 율리납의 의지로 움직이던 일월신주가 갑자기 그를 거부한 것이었다.


단순한 거부가 아니었다.

스스로 몸을 떨기 시작했다. 떨림은 점점 빠르고 강해졌다.

놀란 율리납이 홀로 떠는 신주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다.

온 공력을 다 쏟아 신주를 잡았지만 그 떨림을 버텨낼 수 없었다.


- 떨컹!


결국 신주를 놓치고 말았다.

일월신주를 얻은 뒤로 단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채 미친 듯 떨고 있는 일월신주를 보는 율리납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낙장불입.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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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 단봉이 네비게이션이었다. +2 23.06.14 77 3 9쪽
36 <36> 취소연의 가슴이 내 등에 전하는 말 +3 23.06.13 79 3 10쪽
35 <35> 초보형사 이로운 군웅맹 맹주가 되다 +4 23.06.12 76 4 10쪽
34 <34> 주화입마를 미주신경성 실신이라니. +3 23.06.09 75 3 10쪽
33 <33> 꿈 속에 본 그녀 +5 23.06.08 80 4 10쪽
32 <32> 이 순간, 이 곳의 결정권자는 나! +2 23.06.07 80 4 9쪽
31 <31> 이로운의 한계 돌파 +3 23.06.06 88 4 9쪽
30 <30> 낙장불입 VS 금룡파천 +6 23.06.05 86 4 9쪽
29 <29> 각성인가 폭주인가, 로운의 분노 +5 23.06.02 87 5 9쪽
28 <28> 휘야, 소연은 형이 꼭 지켜줄게. +5 23.06.01 82 5 10쪽
27 <27> 저러다 다 죽겠는데? +3 23.05.31 80 3 9쪽
26 <26> 절대 위기의 임무라는 것. +3 23.05.30 93 4 9쪽
25 <25> 생사의 지옥도 +6 23.05.29 86 5 10쪽
24 <24> 수채의 의리, 장강칠우 +3 23.05.27 90 4 9쪽
23 <23> 추격자 관쌍의 음모 +4 23.05.26 102 4 9쪽
22 <22> 취소연의 마음 속엔 이미 로운이가 +2 23.05.25 98 4 10쪽
21 <21> 단봉이 울다 +4 23.05.24 106 4 9쪽
20 <20> 내 문파는 대한민국 경주 이씨 판윤공파 +9 23.05.23 115 6 10쪽
19 <19> 따뜻한 그 사내의 등 +4 23.05.22 111 5 10쪽
18 <18> 빠르다, 너무 빠르다. +8 23.05.21 106 6 10쪽
17 <17> 할배와 아이가 한 몸에! +6 23.05.20 120 6 10쪽
16 <16> 딱밤이라니! 치욕이다! +3 23.05.19 124 3 10쪽
15 <15> 음양노동 관쌍 +7 23.05.18 134 7 10쪽
14 <14> 일월교 외진각주 설파혼 +4 23.05.17 131 5 10쪽
13 <13> 죽였다가 살렸다가 +6 23.05.16 132 4 9쪽
12 <12> 신의 사자가 말한 균열의 날이.... +10 23.05.15 146 7 11쪽
» <11> 일월교주 율리납 +7 23.05.14 164 6 10쪽
10 <10> 섭혼음양지공 +4 23.05.13 177 6 9쪽
9 <9> 십이편복의 추격 +4 23.05.13 152 6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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