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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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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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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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2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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깽판 (12)

DUMMY

249화


극도로 분노하는 바람에 눈알이 반쯤 뒤집혀 있던, 중증 지랄병 환자, 하지운에게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시간이 찾아오게 되었다.

너무도 뜬금없는 깨우침이었지만, 경망스러운 하지운을 화들짝 놀라게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찰나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두뇌 회전이 빠른 하지운은 지난 일 년 반 동안에 자신이 걸어온 역정을 쭉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 결과 하지운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이쪽 세상으로 넘어온 이후로, 육체적인 역량이 나와 동등하거나 우월한 존재와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근접 전투를 치러 본 적이 없구나...’


왜 싸움을 시작하자마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상대에게 개같이 밟힐 뻔한 건지 대번에 알아채고 만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키랑 리치도 저놈이 더 우세한데, 그런 놈 앞에서 쓸데없이 동작이 큰 하단 차기 같은 걸 했다니...’


원래 싸움은 좆밥 싸움이 가장 재밌고 그다음으로는, 잔인한 얘기이기는 하지만, 센 놈이 약한 쪽을 일방적으로 쥐어패는 게 많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법이다.

진짜 센 놈끼리 붙여 놓으면 의외로 볼 거 없는 싱거운 결과가 나오고는 하는데, 생각해 보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서로 조심하면서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이는데, 자연히 화려하고 큰 동작은 피할 수밖에 없고, 당연히 눈에 띄는 장면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즉 하지운 자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그동안 약한 놈들을 상대로 마음껏 날려 댔던, 크고 아름다운 동작들을 일절 배제한 채로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난데없이 깝죽대던 면상 긴 짐승 놈 때문에 지나치게 격분한 나머지, 소시오패스답지 않게, 안 하던 짓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갖가지 마법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기습을 했을 야비한 하지운이다.

그런 놈이 오늘따라 정신이 나가서는, 무기도 안 들고, 미련하게 맨손으로 정면 대결을 하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다가 듣도 보도 못한 오지에서 말 뒷다리에 받혀 죽는 참사를 겪을 뻔했고 말이다.


하지만 달궈진 용광로처럼 끓어오르고 있는 하지운의 머릿속에선 그딴 일 따윈 이미, 대충 벗어 던져 둔 양말 쪼가리처럼, 한쪽 구석에 내팽개쳐진 지 오래였다.


‘저승에서 허구한 날 업데이트한다고 난리 친 이유가 이런 거 때문이었나? 베타테스터니 뭐니 하는 걸 하라고 한 이유도... 설마... 하긴 원래 본인보다 옆에서 훈수 두는 놈들이 더 잘 보는 법이긴 하지. 나한테 부족한 게 뭔지를 다 알고 있었구나... 어떻게든 나랑 수준이 비슷한 놈들을 미리 준비해 놓고, 이렇게 치고받는 상황이 나오길 원했던 건가?’


“잡생각이 많은 모양이다, 존나 약한 놈아. 좆밥 새끼가 싸우다 말고 대체 뭐 하고 있는 게냐? 안 덤빌 거면 어서 무릎 꿇고 빌기라도 해라. 언제까지 고민만 하고 있을 거냐? 지금이라도 빌면 거세 정도로 봐주도록 하마. 네가 내 소중한 양물을 모독했으니, 그 정도는 흔쾌히 받아들여야지. 암, 그렇고말고.”


말머리 괴물의 근엄한 일갈에 움찔한 하지운이, 마력을 일으키며, 다급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괴물 놈의 꾸짖음 속에서 하등의 논리적인 오류도 찾아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간만에 크게 놀라는 바람에, 진정이 안 돼서 그럽니다. 그쪽 말대로 제가 사실 좆밥 중에서도 완전 상좆밥이거든요. 거 고추도 커다라신 분이 마음도 좀 크게 잡숫고 차분하게 기다려 주세요. 자꾸 보채시면 네 피붙이들을 모조리 다 살점 덩어리로 만들어 드릴 수가 있어요.”


말머리 괴물이 고개를 들어 성층권 근처에서 맴돌고 있는 와이번 세 마리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하게는 그 위에 앉아서 가시를 세우고 있는 복제 인간 일, 이, 삼 호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신기한 구석이 많은 놈이구나. 저런 능력도 가지고 있으면서, 왜 맞짱을 뜨겠다고? 싸움도 존나 못하는 놈이.”

“아, 그게... 너 때문에 제가 진짜 개빡쳤거든요. 무슨 일이 있어도, 넌 반드시 주먹으로 때려죽여야지만 분이 풀릴 거 같아서 말이에요.”


말본새는 언제나처럼 불량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하지운의 눈빛만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분해져 있는 상태였다.

사실 지금 이 순간, 습관성 프로 해탈러, 하지운은 근래에 보기 힘들었던 진지한 정신 상태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잠깐... 이놈은 말이잖아! 애초에 말 자체가 뒷발차기를 주특기로 하는 짐승인데... 미친! 발차기를 잘하는 게 당연한 거였네! 내가 요즘 대체 얼마나 긴장을 풀고 있었던 거지? 이런 정신 상태로 그렇게 처까불고 다녔던 거야?”


말머리 괴물을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만들어 놓고는, 당사자가 빤히 듣고 있는 앞에서, 본격적인 자아비판에 돌입 중인 하지운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가 작년 이맘때쯤부터 환골탈태에 요령이 생겨 가지고 말이야. 대가리 키우는 데만 너무 공을 들였더라고. 내가 전생에 그나마 열심히 한 게 무협 소설 쓰는 거였는데. 아니, 그런 내가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무시했네. 글에다가는 다른 무엇보다도 조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그렇게 도배를 처해 놓고는 말이야.”


앞에서도 말했듯이, 감히 자신을 비웃었던 건방진 짐승 놈을 반드시 두 주먹으로 쳐 죽이겠다고, 설쳐 대다가 느닷없이 뒈질 뻔한 하지운이다.

안 그래도 쪽팔림이 골수에 사무치려 하는 마당에, 쪽팔릴 재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하지운은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한창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던 중이었다.

스스로의 븅신 짓 덕에, 자신의 격투 실력이 얼마나 허접한지를, 뒤늦게라도 깨달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자, 고추 큰 괴물 새끼 님. 이제부터 제가 너를 트레이너로 모시고, 뒈지는 그 순간까지 스파링을 계속할 거예요. 네가 뒈지든 제가 뒈지든,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뒈져야 해요. 전 이번에 네놈을 통해서 반드시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이룰 거거든요. 물론 네가 뒈지면 너도 음양의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만들어 줄 거예요. 존나 감사한 마음을 꼭 전해 주고 싶거든요. 네 고추를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지만, 넌 양기가 너무 세요. 제가 널 수컷도 아니고 암컷도 아닌, 음양의 조화가 완벽하게 이뤄진, 중성으로 만들어 줄 거예요. 기대하세요.”


눈빛이 말도 못하게 초롱초롱해진 하지운이 진심이 가득 담긴 공약을 발표하고는, 침착하게 가드를 올리는 것이었다.

공약 이행률이 엄청나게 높은 하지운이 전한 메시지이기에, 그 메시지의 무게감은 감히 측정조차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하지운이 어떤 놈인지 전혀 모르는 말머리 괴물은 오히려 껄껄 웃어넘기고 말아 버렸다.

또한 메시지의 무게감에 짓눌리는 일 따위도 없었고 말이다.


현재 변신을 푼 하지운과 말머리 괴물 사이에는, 머리 하나 정도 크기의, 신장 차이가 있다.

거기에다 업데이트를 통해, 적어도 육체적인 역량엔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조정이 이루어진 상황이기도 했다.


‘심지어 놈은 발차기의 달인이기도 하고.’


최대한 거리를 좁힌 상태에서 싸우기로 마음먹은 하지운이 말머리 괴물 놈에게 빠르게 접근해 갔다.

어중간하게 거리를 줄 경우, 발차기에 능한 괴물 놈에게 또다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움찔한 하지운이, 잽싸게 백 스텝을 밟으며, 부리나케 뒤로 멀어지는 것이었다.


“아이씨! 또 왜?”


퍼스널 트레이너 유니콘 새끼 님의 인내력에도 슬슬 한계가 찾아오고 만 것이다.


“야, 너 가까이 붙은 상황에서 마법 쓰면 가만 안 둔다. 네 뿔에서 번개 나간다면서? 내 주특기야말로 마법이야. 씨발! 비겁하게 근거리에서...”


말머리 괴물의 이마빡에 달려 있던, 사 미터 길이의, 뿔이 순식간에 쪼그라들더니 삼십 센티 길이로 줄어들어 버렸다.


“됐냐? 좆밥 같은 게 말 더럽게 많네!”

“아니... 마빡에 달려 있던 것도... 설마... 고추?”

“... 씨발... 넌 오늘 곱게 죽는 건 바라지도 마라. 나야말로 널 암컷으로 만들어서, 한 백 년 정도만 타고 다닐 생각이니까.”

“난 그런 취향 아닌데... 하물며 첫 상대로 넌 너무 버거워. 무서우니까 그런 얘긴 꺼내지도 마.”

“내가 네 취향까지 고려해 줘야 하나? 넌 왜 네 생각밖에 안 해? 그리고 처음에만 힘든 거지, 며칠 뒤에는 괜찮아져. 너무 걱정 마, 내가 다 알아서 잘해 줄 거니까.”


암수 가리지 않는 유니콘 족장의 진솔한 고백에, 하지운의 낯빛이 점점 핼쑥하게 변해 버리고 말았다.

오랜만에 진지한 마음가짐으로 전투에 임하던 하지운의 두 눈동자에 이제는 비장함마저 감돌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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