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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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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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14 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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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DUMMY

아메리고 대통령 관저는 내일 있을 회담의 준비로 분주했다. 싱 와튼은 참석자들에게 나눠 줄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융화된 나라의 특성상 글자 하나, 단어 하나로 인해 오해를 살 수 있다. 각자의 문화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눈을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아메리고의 대통령이었다.


어느 정도 검토를 마무리되자 싱은 기지개를 켜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차를 마시려고 문을 열자 소란이 들려왔다. 사색이 된 오바 장관 너머로 몇몇 사람들이 항의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아, 각하······”



싱을 보자 안도하는 오바였다. 동방인들도 입을 멈추고 공손히 허리를 굽혔다. 인사가 끝나자 가장 앞에 선 백발의 노인이 애처로운 목소리로 한탄했다.


“대통령님, 우리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합니까?”



“이런 대우라니요?”


“동방인이 아메리인에게 사주를 받아 흑인을 내쫓으려 한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들려옵디다. 거기다 몇몇 마을은 습격까지 당했습디다!”


“심각한 일인 듯하니 일단 들어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습니까?”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대통령의 제안에 따라 집무실에 들어가는 동방인들이었다. 그만큼 싱 와튼은 인종과 민족을 넘은 존경의 대상이었다. 이민자들에게 불리한 정책을 내걸어 지지율을 높이던 전임자와는 달랐다. 지금과 같은 상황도 몇 년 전이었다면 바로 내쫓겼을 게 분명했다.


비서실에 연락해 차를 부탁한 싱 와튼은 자세한 사정을 알려 달라고 했다. 그러자 한 남자가 자신을 습격 받은 마을의 촌장이라 소개하고서 겪은 일을 털어놓았다.


“마을 밖이 소란스러워 나가보니 흑인들이 입구에 모여 있었습니다. 저를 발견한 놈들은 갑자기 화를 내면서 아메리인의 개라며 소리쳤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거짓 하나 없는 사실입니다. 오해가 있는 것 같아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변명하지 말라며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십여 명이 사망했고, 그중에는 오늘이 생일이었던 아이도 있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군요······ 다른 분들도 비슷한 일을 겪으신 겝니까?”


“이쪽은 습격 받지는 않았소. 하지만 기자라는 양반이 와서 소문이 사실이냐고 물으며 곳곳을 들쑤시고 다녔소.”


“우리 마을은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습디다. 허나 값비싼 보석들을 모조리 빼앗아 갑디다. 죽은 처의 결혼 패물까지도······”


저들의 이야기가 거짓이 아님을 느낀 싱 와튼의 마음은 착잡해졌다. 당장 내일 흑인 대표자들을 만나 갈등을 해소하며 상황을 정리할 예정이었다. 그런 와중에 갑자기 생긴 변수에 싱은 난처했다. 머릿속을 정리하며 방법을 찾는데 부하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오바 장관은 왜 여기에 있나?”


“사실 신문사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어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각하. 하지만 이미 습격이 벌어진 걸 보아선 제가 늦은 모양입니다.”


“얼굴을 들게. 자네의 잘못이 아니야. 그나저나 소문이 다 돌았다면 다른 마을들도 비슷한 상황이겠구려.”


대통령과 장관의 대화를 듣던 동방인들은 처량하게 울기 시작했다. 동방과 아메리고는 한참이나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이 땅을 찾아왔다. 누군가는 백성을 착취하는 나라를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조국의 내전을 피하기 위해,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타지에 온 이민자가 겪을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를 버티며 타지에서의 새로운 삶에 적응해 갔다. 그러나 이번 일로 그들이 쌓은 많은 것을 잃었다. 그 서러움을 누가 이루 다 말할 수 있을까?


국민의 눈물을 지켜보던 싱은 결심을 굳히고 오바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연락을 돌려 모든 인종과 민족의 대표들을 내일 회담에 참석시키게.”


“하지만 각하, 이제 와서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나도 알아. 허나 이번에야말로 저주나 다름없는 갈등을 끊어야만 해!”




다음 날, 대통령 관저의 정원은 평소와 달리 소란스러웠다. 싱 와튼의 지시에 따라 모인 대표자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그들의 대통령을 기다렸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으로 골이 깊어진 상황이다. 당연히 분위기가 좋을 리가 없었다. 모두가 보는 자리라 화를 삭히고는 있다지만 험악한 얼굴이 풀리지는 않았다.


잠시 후 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싱 와튼이 등장했다. 그러자 모두가 일어나 각자의 방식대로 인사를 올렸다. 단상에 선 싱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들 바쁠 텐데도 참석해 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이런 귀한 자리에서 슬픈 화제를 꺼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저는 아메리고의 대통령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듣기 싫은 이야기겠지만 그래도 경청해 주길 바랍니다.”


숨을 고른 싱은 연설을 이어 갔다.


“얼마 전, 한 백인이 어린 흑인을 죽여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소문이 퍼져 시위대가 동방인의 마을을 습격해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아니, 거긴 왜 습격한 거야?”


“동방인이 아메리인과 손잡고 우리를 몰아내려고 했다던데요.”


“지금 대통령님이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하시잖아.”


“진짜인지 확인도 안 하고 그런 짓을 벌인 거야? 그럼 우리가 아메리인들과 다를 게 뭐야?”


“계속 아메리인 아메리인하지 마세요. 그 살인범이 우리 모두를 대표하지 않아요. 이상한 사람 하나가 벌인 일로 모든 아메리인을 욕하는 건 차별이 아닌가요?”


싱 와튼의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대표자들 간에 설전이 벌어졌다.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끝까지 다른 무리를 탓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를 지켜보던 싱은 단상을 세 번 두드렸다. 이내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의 손으로 향했다.


“아메리고는 백인만으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닙니다. 이 자리에 모인,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국민이 아메리인입니다. 애석하게도 많은 이들은 어떤 일이 벌어지면 다른 인종과 민족 전체를 비난하고 적으로 몰아갑니다. 이러면 갈등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건 대통령님의 말씀이 맞죠. 하지만 차별이 있는 거도 사실이잖아요.”


“맞습니다. 전 오늘 여기 올 때도 검둥이라고 모욕을 받았습니다!”


“하, 또 지들만 힘들다 하네. 그러고 보니 너 아까 나보고 눈이 찢어졌냐고 조롱했잖아? 그건 모욕이 아닌가 봐?”


“아메리인이면 차별을 안 받아? 이민자들은 뭐만 하면 우리 보고 부자다, 기득권층이다 욕하지. 우리도 가족을 먹이고 지키기 위해 땀을 흘려. 똑같이 힘들다고!”


잠시를 못 참고 또다시 말싸움을 벌이는 대표자들이었다. 서로가 자신만 차별을 받았다고 하는 광경은 다른 의미로는 전쟁보다도 잔인했다. 처음에는 이를 말리는 사람들도 지쳐 입을 다물었다. 한참이 지나자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


그 순간이었다. 평온한 음성이 정원에 은은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싸움을 멈추고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봤다. 수많은 시선의 끝에는 헌법 법전을 든 싱 와튼이 있었다.


“자유를 찾아 이 땅에 온 모든 이들은 평등하다. 그것이 아메리고에 빛나는 별의 깃발이 세워진 이유다. 이 나라의 헌법 1 조 1항 입니다.”


싱은 주변을 둘러보며 대표자 한 사람 한 사람과 시선을 나눴다.


“아메리고는 모두에게 자유를, 평등을, 공정을 약속했습니다. 서로를 물어뜯자는 게 아니라 다 함께 공존하자는 의미이지 않습니까? 물론 이 나라에 차별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싸울 시간에 문제의 해결을 위해 대화를 나누는 게 옳지 않겠습니까?”


대통령의 이야기가 끝나자 모든 사람들은 고개를 떨궜다.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이런 분위기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앞에서도 끝까지 평등을 외치고, 당선된 이후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고 한 싱 와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침착하고 엄숙한 분위기에서 회담이 진행되었다. 가끔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지만 이내 사과를 하고 서로의 의견을 경청했다. 그렇게 대표자 모두의 타협 속에서 평등 선언문이 완성되었다.


다음 날 아침, 돌아오는 월요일의 모든 신문에 선언문이 실릴 것이며 싱 와튼 대통령이 직접 낭독하겠다는 기사가 발표되었다. 그러자 아메리고 전역의 시위대는 행동을 멈췄다. 싸우던 사람들은 무기를 내려놓았다.


드디어 아메리고에 평화가 찾아온 것이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싱 와튼을 화합을 이끈 아버지라고 칭송했다. 이 소식은 외국에까지 전해졌다. 그중에는 당연히 이데아도 있었다.




움브라 사무실에는 침울한 공기가 흘렀다. 대내팀은 콘트라가 이번 실패로 좌절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탄투메는 실장이 신참을 혼내면 지금껏 준비해 왔던 계획을 건의하려고 기회를 엿보았다. 자상한 상사이자 유능한 부하로 인정받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심장은 모터처럼 요동쳤다.


그런 분위기에서 쪽잠을 자고 나온 콘트라가 나타났다.


“콘트라······”


“왜 그래, 포에나?”


어두운 얼굴의 동료를 보며 콘트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포에나 대신 트라디토르가 입을 열었다.


“아메리고의 대통령이 평등 선언문을 완성하고 시위를 정리했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신참이니 당연히 실패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트라디토르였다. 하지만 윗선의 영감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성공과 업적만이 전부니까. 더군다나 아메리고는 이데아를 위협할 만한 잠재력을 가진 국가다. 트라디토르는 콘트라에게 내려질 징계가 무겁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하지만 부서원들의 걱정과는 달리 콘트라의 얼굴은 평온했다. 오히려 평소보다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이는 실장 파이니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실장님, 정보국에 다녀와도 괜찮습니까?”


“나도 같이 가지. 이제부터가 진짜니까.”


전혀 심각하지 않은 두 사람의 반응에 다들 의아해했다. 이는 부하의 실패를 학수고대하던 탄투메도 마찬가지였다.




정보국에 도착한 콘트라를 보자 여직원은 아무 말 없이 쪽지 하나를 건넸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콘트라로선 당황스러웠다. 이를 본 파이니트는 조용히 귀띔했다.


“정보국이 신뢰하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정보를 준다. 아무래도 라쿠스 녀석의 마음에 들었나 보네, 콘트라.”


“좋은 일입니까?”


“글쎄.”


평소처럼 무표정한 파이니트의 얼굴은 어딘가 불쾌해 보였다. 콘트라가 받은 쪽지에는 206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206 호실 앞에 도착하자 파이니트가 직접 문을 열었다. 서서히 열리는 문 틈 사이로 정보국장 칼비티움의 얼굴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옆에는 이데아의 수상 앙겔루스 디아볼리가 앉아 있었다.


“이제 본 작전으로 진입해도 되겠나, 제군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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