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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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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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16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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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DUMMY

종전 이후에도 움브라는 여전히 바빴다.


“휴가를 주지는 못할 망정 또 일이라니······ 이거 너무 한 거 아니냐고.”


트라디토르는 대놓고 불만을 토로했다. 물론 그의 손은 순종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퇴근도 제대로 시켜 주지 않는 인간들한테 바라는 게 많네. 거기다 어차피 너희 대내팀은 잔업이 남았고.”


“그건 그렇지만 기분이 좋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잖아, 탄트.”


탄투메는 끝까지 불평하는 친구를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그 정도면 자비로운 편이다. 다른 동료들은 트라디토르의 투정에 아랑곳 하지도 않으니 말이다.




실장의 책상에는 수상의 명의로 발송된 두 개의 지령서가 놓여져 있다. 하나는 승전의 선전에 관한 지시였다. 협정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정부의 업적을 홍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예상치 못한 업무였다. 남방으로의 진출에 대한 건 논의된 적도 없으니 말이다. 아메리고와의 전쟁이 끝난 직후 바로 찾아온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스러운 노비시메였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을 가장 불편하게 만드는 건 따로 있었다. 회식 자리에서 펍의 주인은 노비시메의 정체를 아는 투로 말했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들르는 단골 가게긴 하지만 늘 평범한 회사원으로 행세했다. 그날은 부하들도 정체를 철저히 숨겼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노비시메는 다음 날 바로 정보국의 지인을 찾아갔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가진 정보로는 평범한 노인일 뿐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한 느비시메였다. 정보국은 보안에 있어서 이데아 그 어디보다 예민한 기관이다. 그런 곳의 간부가 일반인이 기밀 사항을 알고 있는데도 괜찮다고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로 인해 더욱 커진 불길한 마음은 노비시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부하들에게 일을 맡기고 노인에 대해 조사에 들어갔다.




탄투메는 갑자기 찾아온 기회에 환호했다. 신입의 활약으로 자신의 입지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지금 그에게 팀장은 그저 직함에 불과하다. 지난 임무 이후 사람들은 콘트라만 찾았다. 노비시메 실장은 물론 친구인 트라디토르와 부하인 포에나까지도.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면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다. 상사와 동료의 신뢰는 물론이고 승진과 성공의 발판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판단한 뒤 팀원에게는 정보 수집과 사태 파악과 같이 사소한 업무만 맡긴 탄투메였다. 콘트라를 믿어도 되지 않냐는 실장의 지적도 귓등으로 넘겼다. 모든 성과를 가로채려면 전체적인 그림을 직접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대한 목표를 위해 탄투메는 계획서의 작성에 열중했다. 그의 옆에는 탕비실에서 꺼내 온 커피가 한가득 놓여 있다. 불평불만을 계속 늘어놓던 친구의 입마저 닫게 만들 정도로 많이.




슬픔을 나눌 대상이 사라진 트라디토르는 어쩔 수 없이 팀원을 찾았다. 역시 직장에서 가장 만만한 건 부하 직원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밝게 웃는 포에나다. 그런 그녀가 언제부턴가 멍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잦아졌다. 아마도 회식 다음 날부터였지 않는가 생각하는 트라디토르였다.


“무슨 일 있어, 포에나?”


“...... 네?”


“피곤하면 자고 와. 오늘치 업무는 서로 겹치지 않으니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말한 포에나는 펜을 들었다. 하지만 트라디토르는 눈치챘다. 지금 그녀의 웃음은 인위적이라는 것과 억지로 웃기 전에 뒤편을 슬쩍 쳐다봤다는 것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콘트라는 남진에 관한 문서를 보며 추억에 잠겨 있었다. 과거 외교관이던 시절, 그는 남방에서 가장 강성한 국가인 알코즈에서 주재했었다. 알코즈는 풍부한 자원으로 경제력만큼은 열강에 못지 않았다.


하지만 보수적인 사회 체제와 종교 이념으로 발전이 더딘 편이었다. 잠재력이 큰 것은 분명했다. 알코즈의 지식인들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학을 다녀온 왕자들이 개혁안을 제시해도 국왕과 왕세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유는 변화를 가져온다. 변화는 불안을 불러온다. 결국 자신들의 굳건한 권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종교적인 교리가 갈려 종파 간의 다툼이 잦았다. 그로 인해 발생한 폭동에 대사관이 휘말리기도 했다. 국제 문제로 번질 수 있는 만큼 외교관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불문율마저 무시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었던 과거의 콘트라였다.


그래도 알코즈면 나은 편이다. 그 주변은 나라라고 보기도 어려운 곳들도 많다. 독재 정치면 양반일 정도다. 민족과 종교,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매일같이 싸움을 벌인다. 심지어 형제끼리도 총구를 들이민다. 엄청난 자원과 인구를 가졌음에도 성장하지 못한 이유였다.


수상실은 남방이 보유한 석탄을 비롯한 자원을 원하는 게 분명하다. 더군다나 값싼 노동력도 구할 수 있으니 늘어난 공장을 끊임없이 가동시킬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되는 콘트라였다.


남방을 거론할 때마다 꼭 제기되는 게 안정화에 대한 이야기다. 사실 이데아 이전의 열강들 중에서도 남방을 노린 국가가 많았다. 실제로 식민지를 만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국력 쇠퇴나 개발 난항도 있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제어성이었다.


남방은 호전적이고 보수적인 종교가 국교인 신정 국가가 대다수다. 목숨을 버려서라도 교리를 지키는 이들이 율법에 명시되지 않은 이방인 지배자를 두려워할 리가 없다. 본국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무시하는 건 물론, 총독부와 같은 중요 기관에 폭파를 시도했다. 이익이 나긴 해도 손해도 만만치 않자 철수하는 열강이 늘어만 갔고, 결국 남방에 식민지를 유지한 국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독립을 해도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열강은 자국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른 열강들도 가만히 있는데 굳이 나설 필요도 없고, 사과를 하면 막대한 배상까지 해야 한다. 역사 또한 강자의 편에서 기록되는 법. 정작 식민지의 반응도 시원찮다. 대중은 분노하며 명확한 항의를 요구하지만, 권력자들은 권력을 잡는데 이용하기 급급하다. 경쟁 상대를 공격하기에 아주 유용하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식민 지배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감수해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를 수상실이 모를 리 없다. 어떠한 계산을 통해 남진을 결정한 건지 콘트라는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이내 의심을 거뒀다. 그는 수상의 열렬한 지지자다. 앙겔루스 디아볼리라면 분명 크고 은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자신은 움브라의 요원으로서 작전을 성공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한 콘트라는 펜을 들었다.




일주일 후, 수상실에서 초안을 확인하겠다는 연락을 보내왔다. 하루 종일 청소를 마치자 서류와 잉크 냄새에 찌들어 있던 사무실이 사람 사는 공간답게 변했다. 간만에 몸도, 옷도 단정히 했다. 콘트라가 머리를 정리하고 나오자 몹시 아름다운 여자가 그를 반겼다.


“수상실에서 나오신 숙녀분이신가 봅니다. 저는 움브라의 대외팀원 콘트라 도크트리나입니다.”


“재미있으신 신사분이시네요. 전 움브라의 대내팀원 포에나 쿠아이스티오라고 해요.”


“...... 포에나였어요?”


콘트라는 당황하며 말을 버벅거렸다. 생각해 보면 움브라의 여직원들이 화장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단아하게 머리를 말아 올리고, 화장품으로 피부의 티끌을 가린 포에나는 오페라의 배우 같이 보였다. 설마 실장도 비슷한가 싶어서 주변을 살피던 콘트라는 이내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은 뭐지? 죽고 싶나, 콘트라?”


“아직 손님이 오지 않은 게 아쉬워서 그렇습니다.”


“부디 그런 이유길 바란다.”


노비시메는 휴지로 입가의 화장을 정리하면서 쏘아붙였다. 아내를 주름으로 놀렸을 때와 비슷한 반응이었기에 콘트라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이내 포에나에게로 돌아갔다.


“평소에도 이렇게 다녀요.”


“보여 줄 사람도 없는데 굳이 뭘 그래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쑥스러운지 몸을 베베 꼬는 포에나였다. 그걸 본 트라디토르는 껄껄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늙은이들 배알 꼴리니까 적당히들 해.”


“저 유부남입니다, 유니우스 팀장님.”


“트라디라고 불러라니까. 뭐, 농담이고 이제 곧 수상실의 사람이 올 테니 준비들 하자고.”


“유니우스가 맞는 말을 하는 건 오랜만이군.”


“탄트보단 자주 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농담이야, 농담. 알지, 탄트?”


트라디토르는 호쾌하게 웃으며 친구의 어깨를 두드렸다. 탄투메는 우리끼리 뭘 그러냐며 걱정하지 말라고 답했다. 하지만 그의 속은 전혀 달랐다. 언젠가 자신이 실장에 오른다면 이 수모를 서너 배로 갚아 주겠다고 다짐하는 탄투메였다.




움브라의 직원들이 준비를 하는 동안 수상 집무실에는 세 명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이데아의 수상 앙겔루스 디아볼리, 정보국장 칼비티움 라쿠스, 그리고 수상 보좌관 아디우토르 데키무스였다. 그들 중 앙겔루스의 입이 열렸다.


“칼비티움, 지금 자네는 사냥을 마쳤으니 사냥개를 잡아먹자는 건가?”


“잡아먹자는 말은 아닙니다, 각하.”


“그렇다면?”


앙겔루스가 되묻자 칼비티움은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저희가 사냥해 온 낙타인 척하자는 의미입니다.”


“그게 그 말이지.”


“하지만 굳이 남진을 택하신 건 각하십니다.”


정곡을 찔렸는지 수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보좌관이 대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라쿠스 국장님, 저희는 아데나 군도도 확보했습니다. 석탄 광산을 얻는 게 그보다야 어렵겠습니까?”


“데키무스 보좌관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아메리고와의 싸움보다 남방으로의 진출이 훨씬 어려울 수 있습니다.”


“국장님의 의견은 이해합니다. 알코즈의 첩보망은 명성이 자자하니 말입니다. 우리의 작전이 그리 쉽게 먹혀 들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도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칼비티움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자 아디우토르는 사과를 하면서도 말을 계속했다.


“거기다 사냥개를 낙타라고 속인다고 하셨습니다만, 지금껏 속이는 역할을 해 온 건 사냥개지 않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보좌관의 반박에 수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국장은 할 말이 없는지 침묵을 지켰다.


“내가 남진을 택한 건 오로지 조국의 미래 때문이야.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제가 오해를 해서 죄송스럽습니다, 각하.”


“아닐세. 자네가 나와 이데아를 위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지 않는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대화를 끝낸 칼비티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앙겔루스는 아디우토르에게 움브라의 상황을 확인할 것을 지시하고는 눈을 감았다.




집무실에서 나온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공기가 감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아디우토르였다.


“어쩔 거지, 칼?”


“어쩌긴 어째. 아무도 날 막을 수는 없어, 아디.”


“여전히 정신 나간 놈이군.”


“그런 놈과 친구 먹은 네 녀석이 할 소린가?”


칼비티움의 조롱 섞인 지적에 아디우토르는 소리 죽여 웃었다.


“조금만 더 참아. 그러면 사냥개가 아니라 사냥꾼을 대령해 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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