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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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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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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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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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DUMMY

올바른 아메리고 협회를 이끄는 피기 스톤스는 유력 후원자의 호출을 받아 뉴메리아를 방문했다. 경제 수도라는 이명답게 웅장한 시가지는 피기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높이 솟은 빌딩들은 눈을 떼기 힘들었다.


이윽고 약속 장소에 도착하자 검은 턱시도를 입은 노인이 다가왔다.


“피기 스톤스 씨 되십니까?”


“그렇습니다. 리앙 회장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세워진 리무진의 뒷문을 열었다. 차에 오른 피기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가죽 시트는 단단하면서도 푹신했다.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를 보면 이곳이 자동차인지 연회장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대리석 테이블에는 비싸기로 유명한 샴페인과 티 포트가 놓여 있었다.


하지만 피기는 경거망동을 삼가며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껏 후원을 핑계를 협회를 이용하려던 기업가와 정치인을 수없이 만나 봤다. 책을 잡힐 짓을 해선 안된다는 걸 되새기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진정한 인권 운동을 위해서는 이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욕심과 호기심을 버렸다.


고가를 한참이나 달린 리무진은 수많은 빌딩 사이에서 멈췄다. 곧이어 운전석에서 내린 노인은 피기에서 도착을 알렸다. 리무진에서 내린 피기의 앞에는 아메리고에서 가장 높은 건물 임페리얼 빌딩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문을 열어 준 노인에게 고맙다고 말한 피기는 실내로 들어섰다. 로비에는 정장을 입은 사원들이 정신없이 오가고 있었다. 이윽고 노인을 발견한 안내 데스크의 직원들이 공손하게 인사했다. 회장의 손님이라는 노인의 설명에 금발의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저는 안내실의 안나 플로렌스라고 해요. 회장님께 안내해 드릴게요, 스톤스 협회장님.”


“잘 부탁합니다, 플로렌스 양.”


안나는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마침 1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는 막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안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지듯이 내렸다. 피기는 인파를 헤치며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안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귀빈용 엘리베이터는 따로 있어요, 협회장님.”


“아······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괜찮아요. 귀빈용 엘리베이터는 대통령이 와야 움직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손님을 가려 받으니까요.”


말을 마친 안나는 복도 끝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라간 피기는 의자에 앉아 권총을 손질 중인 두 남자를 마주했다.


“신입 주제에 여길 오다니 역시 회장님의 총애를 받는 플로렌스다워.”


“칭찬으로 들을게요, 실장님.”


“그나저나 저 뚱뚱한 남자는 누군가?”


“회장님의 초대를 받은 피기 스톤스 협회장님이세요. 비서실에서 허가가 떨어졌으니 귀빈용 엘리베이터를 가동해 주세요.”


그러자 피기에게 비아냥거린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다급히 일어나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임페리얼 빌딩의 경비실장 조셉 데이비드입니다. 무례하게 행동해 죄송스럽습니다.”


“괜찮습니다.”


“사과할 시간에 전원이나 켜세요.”


안나가 성을 내자 조셉은 옆의 대머리에게 눈짓을 했다. 이윽고 막다른 벽이 열리며 황금으로 도배된 엘리베이터가 자태를 드러냈다.


피기를 먼저 태운 안나는 최상층의 버튼을 눌렀다. 한참을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는 임페리얼 빌딩이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 주었다. 그동안 피기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도로보다 구름이 가까워지는 아찔한 광경이 펼쳐졌다. 거리를 오가는 인파는 점처럼 변하더니 이내 보이지도 않았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려 주는 벨 솔리가 울렸다. 안나는 회장실이라고 적힌 흰 문을 똑똑 두드렸다. 동방의 백옥은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맑은 소리를 냈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안나는 문을 열었다. 그러자 굳세지만 단정한 얼굴이 인상적인 중년의 남자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고명한 스톤스 선생을 직접 뵙게 되어 영광이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소개하는 게 예의지. 난 빌리앙 홀딩스의 회장인 빌 리앙일세.”


“반갑습니다, 리앙 회장님. 올바른 아메리고 협회의 협회장인 피기 스톤스입니다.”


인사를 마친 빌은 안나에게 차를 부탁하고서 소파에 앉았다. 회장이 가리킨 자리에 피기가 앉자마자 대화가 시작되었다.


“얼마 전, 대통령실에서 어떤 정보가 들어왔었지. 평소라면 전보로 보냈겠지만 이번 건은 심히 걸려서 선생과의 상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네.”


“얼마나 중요하길래 그러십니까?”


피기의 물음에 빌은 안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았다. 이를 집어든 피기는 바로 내용물을 확인했다. 흰 봉투에는 두 번 접힌 서류 한 장만이 들어 있었다. 언뜻 보이는 서류의 제목에 피기는 바로 한숨을 내쉬었다.


“동원령 발동 통지서······?”


“나도 겨우 구한 정보니 외부에는 절대 발설하지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피기는 침을 꿀꺽 삼키고서 조심스럽게 통지서를 펼쳤다.


내용 자체는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이데아와의 전쟁을 위해 병력과 물자를 동원한다는 게 골자였다. 하지만 징집에 대한 세부 조항에서 피기의 눈이 멈췄다.


“이 내용은 확정된 겁니까?”


“대통령실에서 발표한 건 아니라 확답하기 어렵군. 변경 사항이 있을 수도 있네.”


“전체적인 틀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것 역시 확신할 수가 없어.”


그늘진 빌의 얼굴은 창밖의 푸른 하늘과 대비되었다. 확실치 않다는 말에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었다. 피기는 괜한 불안감을 다독이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하단의 서명이 눈에 들어왔다. 휘갈겨 쓴 듯한 글씨는 조 플라잉 맥트럼이라 적혀 있었다. 이는 공식 문서나 다름없다는 걸 의미했다.


순간 피기의 머리는 두통이 찾아왔다. 얼굴은 분노로 뒤덮였다. 빌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남자는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면서 여자의 일상은 지켜준다는 겁니까?”


“나도 믿기 힘드네. 전방에 보낼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물자의 생산은 맡길 것이라 생각했네. 하지만 이 나라의 정치인들은 상상을 초월해. 그들에겐 전쟁의 승리보다는 선거의 승리가 훨씬 중요한 모양이야.”


피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빌의 말에 수긍했다.


싱 와튼의 탄핵이 실패로 돌아간 뒤로부터 아메리고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인권을 빙자해 이권을 탐하는 여성 우월주의자, 표를 의식해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정치인, 영웅의 몰락으로 다시 차별을 받게 된 이민자까지. 모든 문제가 맞물려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했다.


대선에서 승리한 조는 사회의 안정보다는 권력의 유지에 중점을 두었다. 문제가 있더라도 자신의 사람만 감투를 씌웠다. 비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지지자만 신경을 썼다.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를 싱 와튼과 다른 진정한 인권 대통령이라며 선전했다. 성별 갈등과 경제 침체로 결혼과 출산이 급격히 하락했지만 외면했다. 그나마 하는 거라곤 선심 쓰듯이 내놓은 지원금이었다. 이마저도 부부와 아이가 아닌 미혼 여성을 위해서 대부분을 소비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열강의 반열로 부상하던 아메리고였다. 갑자기 변질된 조국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던 피기는 잘 나가던 사업을 정리하고 인권 운동에 투신했다. 올바른 아메리고 협회를 만들고 모두에게 공평한 정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절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성과도 얻지 못했다. 피기의 정책은 하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치계는 지지율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외면했다. 이에 피기는 여성 운동가들을 만나 토론을 벌였다.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남성이 받고 있는 차별과 문제를 알렸다. 그럴 때마다 상대는 여자에 대한 차별이 없다는 것이냐며 억지로 화제를 돌리고, 피기를 여성 혐오자로 몰고 갔다.


처음에는 피기와 협회를 지원했던 의원들도 남성의 표가 생각보다 적자 등을 돌렸다. 여성 운동에 수많은 예산을 책정하며 비리가 잡혀도 어영부영 넘겼다. 남성 운동은 이권을 내려놓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기득권층이라 낙인을 찍었다. 그렇게 해 봐야 여성의 표가 자신들에게 오지 않는다는 걸 모른 채.


그 과정에서 피기는 숱한 오해를 사고 비난을 받아야 했다. 그럼에도 꿋꿋이 버텼다. 조국을 되돌리고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살았다. 다행히 빌 회장을 만나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빌은 언론사와 방송국과의 인터뷰를 잡아 피기의 신념을 알렸다. 그나마 소신 있는 관료와 정치인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아메리고 재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빌 리앙 덕분에 남성 운동은 간신히 숨통을 텄다.


희망을 찾은 피기는 쉬지 않고 넓디넓은 아메리고 전역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돌아온 건 남자를 국가의 종으로 보는 통지서뿐이다. 그 사실에 피기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분노에 몸을 떨고 있는 동지를 바라보던 빌은 혀를 찼다.


“천식이나 간질이 있더라도 전장에 투입한다더군.”


“절대 있어선 안될 일입니다.”


“내가 가장 걱정하는 건 전후의 일이네.”


무슨 말이냐는 피기의 질문에 돌아온 건 빌의 한숨이었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라며 전장 끌고 갔으면서 정작 죽거나 다치면 남의 집 아들인 양 외면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


“예전이라면 과한 생각이라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현정부의 행태를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두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는 어두웠다. 아메리고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에, 가장 웅장한 빌딩에,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이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대학생인 내 아들도 징집 대상일 걸세. 아비로서는 영광스러운 일이야. 하지만 당사자는 어떤 기분일까?”


“최악일 겁니다.”


“그리고 전쟁 속에서 수많은 남자가 죽으면 여성의 표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질 테지. 어쩌면 정치인들이 바라는 걸지도 몰라.”


“일리 있습니다. 회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숨밖에 안 나옵니다.”


차갑게 굳은 피기의 얼굴을 확인한 빌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사실을 공표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로 위험합니다. 분명히 사회에는 엄청난 혼란이 올 겁니다. 정부에서는 어떻게든 압박할 겁니다.”


“역시 포기하는 게 맞겠군······ 거리도 먼데 여기까지 와 줘서 고맙네, 스톤스 선생.”


통지서를 집어 든 빌은 다시 안주머니에 넣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그 전에 피기의 손이 빌의 팔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회장님이 움직이시면 회사와 직원들도 피해를 볼 겁니다. 그렇다면 잃을 게 없는 사람이 대신하는 게 맞을 겁니다.”


“자네 진심인가?”


피기는 진지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국의 미래를 감옥에서 보더라도 해야 할 일을 하겠습니다. 회장님께서는 지원만 해 주시면 됩니다.”




피기가 떠난 후, 안나 플로렌스가 식은 차를 들고 나타났다. 그러자 빌은 테이블을 강하게 내려쳤다.


“네년이 시킨 대로 했다. 그러니 약속을 지켜라.”


빌의 처절한 목소리가 사무실을 울렸다. 하지만 안나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걱정 말래도. 이데아 정보국은 약속을 어기지 않으니까. 어디의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말이야.”


말을 마친 안나는 빌에게 소형 무전기를 던지듯이 건넸다.


“아들에게 전해. 전장에 도착하면 이걸 써서 우리와 접촉하라고. 그러면 후방에서 안전하고 극진히 보살펴 줄 거야.”


안나의 설명에 빌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대화를 마친 안나는 끝까지 빌을 비웃으며 회장실에 나갔다.


한참의 소란이 지나가자 방 안은 조용해졌다. 빌의 몸이 부들부들 떨면서 낸 소리만 들렸다. 이 나라를 올바르게 만들겠다는 결심은 부성애 앞에서 무너졌다. 피기 스톤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며 합리화하는 빌이었다.


“빌어먹을!”


작가의말

건강 문제로 업로드가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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