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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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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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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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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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DUMMY

작은 소동을 거쳐 앤드류 머레이 캠프에 합류한 피기 스톤스는 성평등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대중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그에게 씌워진 성차별주의자란 프레임은 중도층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여성 우월주의가 사회에 생각보다 뿌리깊이 안착한 것도 유효했다. 상당수의 여성이 우월주의자가 아니라고 한들 정작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사상에 반대할 이유는 없으니까.


때문에 피기가 합류한 후 지지율은 오히려 하락했다. 당연히 당내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안 그래도 그의 합류에 부정적이었던 루치아노는 대놓고 비난했다. 앤드류도 성과를 보여야 한다고 독촉했지만 피기 스톤스는 서두르지 않고 계획한 대로 청년 보좌관 선발을 공고했다.


생각보다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사람들은 정치인들이 늘 그랬듯이 말로만 공정을 외친다고 보았다. 결국 데드라인까지도 지원자의 수가 기대치에 못 미치자 피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평균적인 스펙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부족하다.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고, 당내의 불만을 가라앉힐 획기적인 무언가가 필요하다. 확실한 키워드를 찾기 위해 피기는 지원서를 뒤지며 밤을 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1 단계 서류 평가의 결과 발표일 저녁, 아메리고 도심의 한 주점에서 양복을 입은 샐러리맨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봐, 샘. 그거 들었어?”


“뭘?”


“니콜라스 주지사 아들 놈이 앤드류 머레이 캠프에서 일하려다 떨어졌대.”


“말이 돼? 정치인들이 지 자식한테 자리를 마련해 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잖아.”


“그러니까 나도 놀랐어. 근데 디키가 말해 준 거니 구라는 아닐 거야.”


“디키라면 국회 출입 기자라던 네 대학 친구?”


그렇다고 말한 남자가 남은 술을 비우자 잔인 빈 걸 확인한 백발의 바텐더가 다가왔다.


“마스터, 전에 킵 해 둔 거 있지?”


“펭이 1300 말씀이라면 반 병 정도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술이 잘 받으니 그걸 마셔야겠어. 그런데 마스터 기분이 좋아 보이네.”


“티 납니까? 저도 나이를 먹긴 했나 봅니다.”


바텐더는 머리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실은 그게 말입니다. 제 아들 녀석이 원하던 일자리가 갑자기 났는데 오늘 1 차 결과가 나왔답니다. 근데 예상과 달리 통과했다지 뭡니까?”


“진짜? 이야, 축하할 일이구만.”


“에게, 아직 끝난 것도 아닌데? 기뻐하기는 일러.”


“에휴! 그러니까 샘, 네가 부하 직원들한테 꼰대 소리를 듣는 거야.”


“난 그 어린 친구가 불합격했을 때 상처 받을까 봐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괜찮습니다. 1 차라도 붙은 게 어딥니까? 저희같이 천하고 가난한 이민자가 정치판의 문턱이라도 넘어 볼 시도를 했다는 게.”


“정치라고? 혹시 아들이 지원한 게 앤드류 후보 쪽이 뽑고 있다는 청년 보좌관인가?”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대답을 들은 샐러리맨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메리고가 표방하는 국호는 자유와 개방이다. 실제로도 이민의 허들이 다른 국가에 비해 낮은 편이고, 이를 바탕으로 부족한 인구와 출산율을 보완했다. 풍족한 노동력으로 드넓은 황무지를 개간하고 수많은 공장을 가동해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에 반해 상류층으로 가는 길은 어디보다도 좁고 험난했다. 말 그대로 그들만의 세상인 것이다. 특히 권력의 중심인 정치권에 입문하려면 학력이나 직업은 물론, 출신과 혈통을 비롯해 자잘한 것까지 고루 갖추어야 했다.


정치인 중에서도 손꼽히는 주지사의 아들마저 불합격한 채용 공고에 이민자 출신인 바텐더의 아들이 합격했다는 건 믿기 힘든 일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저 바텐더에게 든든한 뒷배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두 남자는 이 어이없는 이야기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고, 마침 일간지 기자로 일하는 친구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사실이든 아니든 자극적인 소재가 필요하던 터라 사실 확인도 하지 않고 즉시 보도했다. 대서특필된 기사는 아메리고 전역을 흔들었다. 되물림의 대표적인 사례이던 정치판의 지각 변동을 알린 것이다.


뒤이은 대형 언론사의 취재에서 불합격한 유명 인사들의 관계자가 추가로 밝혀졌다. 그중에는 페데리코 바렐라, 즉 루치아노 바렐라의 장남도 있었다. 경선에서는 아래를 위한 사다리를 외치던 남자의 이중적인 면모다. 하지만 정작 기사의 명단에는 페데리코 바렐라가 없었다. 그의 이름을 알아낸 기자는 에데나 바다의 바닥에 가라앉은 상태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앤드류 머레이가 공정한 후보라는 인식이 퍼졌다. 덕분에 지난 조사 때보다 지지율이 5 퍼센트 가까이 상승해 사우르와의 격차를 벌릴 수 있었다. 앤드류는 피기의 공적을 치하하는 한편, 당내 인사들의 불만을 무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괜히 자신의 약점을 아는 사람이 상대 캠프로 넘어가면 골치 아프니 말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사우르 안디오가 던진 화분은 벽에 부딪히며 그대로 박살났다. 마침 그 앞에 앉아 있던 피 메이라는 덜덜 떨리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동료에게 괜찮냐고 물을 법도 하지만 옆에 앉은 여성 의원들은 본 척도 않는다.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피 메이라는 해외로 도주하려 했다. 자신과 손을 잡은 조 플라잉 맥트럼이 피살되었다. 더군다나 자신이 구박하던 앤드류 머레이가 쿠데타의 주동자였다. 저들에게 붙잡힐 바에는 여성 인권을 위해 힘쓰다가 탄압 받았다는 명분으로 망명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바르타니아 왕국은 피 메이라의 입국을 거부했다. 이데아는 아메리고와 종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임시 정부를 정식 외교 대상으로 인정했다. 다른 나라들도 앤드류 머레이를 정부 수반으로 대우했다.


결국 피가 선택한 차선책은 당내의 모든 권한을 앤드류에게 양도함으로써 목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사실 앤드류도 피를 처치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종전 협상이 우선인데다가 조를 죽인 상황에서 판을 벌리지 못했다.


가까스로 살아난 피 메이라는 잠시 숨을 죽이며 자신의 지지 세력을 키웠다. 다행히 이데아가 뿌려 놓은 이데올로기의 씨앗은 시체를 좀먹고 울창하게 자랐다. 머지 않아 당내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회복한 그녀는 슬슬 재기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터였다.


문제는 그 전에 앤드류 머레이가 여성 우월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고, 강제적으로 당에서 떠나야 했다. 정부에서 받는 지원금을 잃자 그녀의 곁을 떠나는 운동가들이 급속도로 늘어만 갔다. 사료가 없는 공원에 길고양이가 남을 이유가 없듯이.


방황하던 피 메이라에게 찾아온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재선을 망친 싱 와튼이었다. 싱은 사우르 안디오를 대통령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성별, 인종, 사상을 떠나 진정한 평등을 실현할 수 있다면서.


그녀에게 평등은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대선에서 공을 세운다면 정치 인생을 연장할 수 있다. 나아가 데리고 있는 여성 세력을 이용해 정당을 장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판단한 피 메이라는 어제의 적과 손을 잡았다.


하지만 싱 와튼의 손은 생각보다 훨씬 거칠었다.


“이봐, 피 메이라 여성 위원장!”


“네, 후보님.”


“당신이 캠프에 들어올 때 뭐라고 했지? 여성 인권을 외치면 무조건 대선에서 압승할 거라고?”


“그랬습니다.”


“지지율이 반등하긴 했어. 아주 잠깐이지만.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그렇게 혐오자라고 비웃고 비난하던 피기 스톤스가 청년 보좌관인가 뭔가 하는 걸 홍보하니까 전세가 뒤바꼈어. 어떻게 생각하지?”


“착오가 있을 겁니다.”


“착오? 착오라고? 그 많은 신문사가 이제 막 정계에 입문한 신출한테 휘둘린 거라고?!”


이번에 날아온 서류철은 피의 이마에 명중했다. 극심한 고통에 신음조차 흘리지 못한 채 머리를 부여잡고 쓰러진 피 메이라를 동료들은 이번에도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과 함께 입당한 여성 운동가들조차.


“일단 청년 보좌관에 집중된 여론을 분산시켜야 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알겠습니다, 후보님.”


“정치 쪽이든 연예 쪽이든, 사실이든 아니든, 뭐든 좋아. 최대한 자극적인 걸 터트려. 당이랑 연결된 언론사에 찌라시도 뿌리고. 만약 머레이가 당선될 거 같다고 등돌린 데가 있으면 약점을 쥐어서라도 난리치란 말이야!”


“그렇게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말귀를 알아들을 똑똑한 친구들이야, 사우르.”


“싱 선생께는 죄송합니다. 못난 모습 보여서.”


“아닐세.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피기 스톤스라는 그 친구에 대해 자세히 알았다면 이런 사단은 없었을 것을.”


한숨을 내쉰 싱이 일어나자 사우르도 뒤따랐다. 둘이 회의실을 떠나자 눈치를 살피던 캠프의 주요 인사들은 하나둘씩 자리를 비웠다. 결국 방안에 남겨진 건 피 메이라뿐이다.




며칠 뒤, 유명 락 밴드의 보컬 롤링 초콜릿 보이스가 별장에서 대마초를 재배하고 유통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엄청난 뉴스가 전해졌다. 롤링은 경찰에게 끌려가면서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저런 걸 키운 적이 없고, 애초에 최근 몇 달간 순회 공연을 도느라 별장을 들리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대중은, 특히 젊은 남성층은 그를 비난하기 바빴다. 평소 실언을 자주하고 여자 관계가 좋지 않아 부정적인 이미지가 컸기 때문이다. 나아가 일부는 대중 가수의 변명보다 정부 기관의 발표를 신뢰하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자신 있게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마약 소식 덕분에 청년 보좌관에 대한 관심도가 꽤 줄었네.”


“역시 개돼지들답습니다. 본인들의 생활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치보다는 가십거리에 흥미를 가지기 바쁩니다. 혹여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고쳐야 한다고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똑똑한 척한다고 욕하기 바쁘지 않습니까?”


“뭐, 실제로 일상보다 사상에 미친 자들도 많지 않나. 뭐만 하면 음모론을 펼치는 사람도 수두룩하고, 가족의 밥상보다 정치인의 도시락을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나야 편의를 많이 봤지만 말이야.”


“결국 세상은 이용하는 사람과 이용당하는 사람으로 나뉘기 마련이니 어쩔 수 없는 법입니다. 저희가 잘못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글쎄······ 잘못된 건 아니더라도 안타까움 정도는 느껴야 하지 않나 싶네만.”


비서실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본 사우르와 싱은 당사 가장 높은 곳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둘의 반응은 대조적이다. 아직 대통령에 오르지도 않았음에도 모든 것을 안다는 듯이 냉소적으로 말하는 사우르 안디오. 이데아의 함정에 빠져 힘겨운 임기를 마치고 괴로움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과거의 영광을 잃은 싱 와튼.


하지만 두 남자의 목적은 같다. 대선에서 승리해 사우르 안디오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순항하던 소중한 존재를 좌초 시킨 암초를 제거하는 것.


이를 위해서 유명인 하나가 이용당했을 뿐이다. 대통령이 된다면 특별히 무죄를 선고받을 수 있도록 선처해 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우르 안디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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