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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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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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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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DUMMY

여성 권리부 장관 피 메이라가 아들을 바르타니아로 보내려 한 사실이 알려지자 아메리고 전역이 소란스러워졌다. 문제의 책임을 정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았던 친정부 언론들조차 가만히 있지 않았다. 계속된 패전과 동원령 발동을 앞둔 상황에서 출국의 목적은 누가 봐도 명확했다. 어떻게 이중 국적을 보유한 건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침묵을 지켰다. 대통령은 장관 교체로 마무리지었다. 평소 어떻게든 정부와 여당을 헐뜯던 야당은 가만히 있었다. 여성 권리부의 예산을 통해 지갑을 채웠던 정치인들은 결국 한통속에 불과했다. 언론과 국민의 분노에도 입을 다물고 인터뷰를 거부했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잊혀질 것임을 알고 있기에.


삼선 이후 가장 귀찮은 존재였을 피 메이라가 알아서 몰락한 건 조의 입장에선 긍정적이었다. 메나르두와 연락이 끊긴 건 아쉽지만 이제 여성권의 표는 온전히 그의 것이 되었다. 때문에 조는 아무런 미련 없이 동원령을 발동했다.


젊은 남자들은 각지에 세워진 임시 훈련소에 입소했다. 이는 기업인이나 정치인과 같은 상류층의 자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도피 유학이나 허위 진단을 통해 징집을 피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하지만 조는 다음 대선을 위해서 어떻게든 이기고 싶었다. 철저한 규제를 통해 귀중한 병력이 도망치지 못하게 막았다. 때마침 터진 피 메이라 사건은 훌륭한 명분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단기간의 훈련만 받고 전장에 끌려 나간 이들이 큰 도움이 될 리는 없다. 긴급하게 편성된 함대는 해안선을 봉쇄 중인 이데아의 해군에게서 도망치기 바빴다. 다급해진 조는 국방부 장관에게 이데아 본토를 공격하라고 강요했다.


완강한 대통령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던 국방부는 어쩔 수 없이 특전대를 편성하고 자원을 받았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행위를 마치 국가를 위한 충성과 명예로 포장했다. 덕분에 애국심이 투철하거나 전쟁의 환상에 눈이 먼 이들이 손을 들었다. 그중에는 크리스 리앙, 빌 리앙 회장의 아들도 있었다.




한 달 후, 아메리고의 특전대에 소속된 한 개 소대가 포위망을 빠져나가는데 성공했다. 소대장 스티 브뉴는 환호성을 질렀다.


“소대장님, 적이 들을지도 모릅니다.”


“시끄러워! 어디서 일반 병사 주제 하사인 이 몸께 말을 거나.”


“죄··· 죄송합니다.”


크리스는 수치심에 고개를 떨궜다. 그 유명한 빌 리앙의 아들이 자기한테 꼼짝 못 한다는 사실에 쾌감을 느낀 스티는 더욱더 기고만장해졌다.


“하기스 상병, 속도를 높여!”


“그러면 소음이 너무 커짐다.”


“지금 소대장의 지시를 거역하는 건가?!”


“...... 알슴다.”


“좋게 말할 때 좀 듣지, 새끼가.”


하기스 판츠 상병은 아메리고에서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운동 선수였다. 하지만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먼저 입대를 자원했고 특례를 허용 받았다. 특전대의 창설을 알게 된 후에는 보트의 조종도 배웠다. 하지만 그 대가로 이런 멍청이를 지휘관으로 모실 줄은 몰랐다. 자신을 비롯한 선수들을 희생해 메달을 땄으면서 조국을 위해 그랬다고 인터뷰하던 쓰레기 같은 감독이 떠오른 하기스였다.


최고 속도로 달린 보트는 다행히 발각되지 않고 이데아 본토까지 도착했다. 천운이 따라 준 건지 마침 해안 초소도 불이 꺼진 상태였다. 무사히 상륙을 마치자 스티는 소대원들을 불러모았다.


“부소대장은 크리스랑 하기스를 데리고 발전소 밖에서 시간을 끌고 있어. 나머지는 나랑 같이 진입해서 불꽃놀이를 벌이자고!”


“알겠습니다.”


스티는 낄낄 웃으며 부소대장 라울을 째려보았다. 라울은 한심한 상관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한숨만 쉴 뿐이었다.




잠시 뒤, 소대장이 발전소에 들어간 걸 확인한 라울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자신이 다녔던 명문 학교에선 들을 수 없는 단어에 크리스는 충격을 받았다. 하기스는 주변을 경계하면서 라울을 위로했다.


“고생이 많슴다, 라울 병장님.”


“저런 병신도 부사관이 될 수 있는 이 나라 꼴이 대단하지 않냐?”


“저런 병신조차도 적어서 미달 나는 나라잖슴까?”



“그건 그렇지.”


라울은 쓴웃음을 지으며 총을 고쳐 잡았다. 그런 부소대장에게 몰래 숨겨둔 담배를 건네는 하기스였다. 하지만 라울은 손을 저었다.


“끊었어.”


“뭔 일 있슴까?”


“여기 오기 전에 여자 친구한테 프러포즈했거든.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담배를 끊으며 받아 준대.”


“축하함다. 바빠서 못 갈지도 모르지만 축의금이라도 두둑하게 드리겠슴다.”


“이야, 영광이네. 메달리스트의 축의금이라니. 엘레나가 들으면 날 보는 눈이 달라질 거야.”


둘은 대화를 나누다가 뒤에서 눈치를 살피는 크리스를 발견했다.


뛰어난 수완과 훌륭한 인품으로 유명한 빌 리앙 회장의 아들이 징집되었다는 소식은 대중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최상류층조차 동원령을 피하지 못할 정도로 대통령의 권한이 엄청나다는 사실도 다시금 알려 주었다.


그런 와중에 크리스 리앙은 가장 위험한 특전대에 자원했다. 멍청이라고 비웃는 사람들도 많았다. 하지만 크리스가 훈련에 임하는 모습을 보며 라울과 하기스는 그를 인정하게 되었다. 귀한 집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성실했고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크리스, 너도 라울 병장님께 축의금 드릴 거지?”


“야야, 쟤가 오면 축의금함 터져.”


“생각해 보니 그렇슴다.”


서툰 말투지만 크리스는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이 편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우려 한다는 걸. 그렇기 때문에 손에 쥔 무전기를 누를지 말지 고민하는 크리스였다. 하지만 이걸 건네 받을 때 본 부친의 얼굴이 떠오르자 답이 정해졌다. 엄지 손가락으로 버튼을 누른 크리스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최선의 성의를 보이겠습니다.”


“정말이···”


라울의 밝은 목소리는 끝마치지 못하고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머리에 단검이 꽂힌 채 땅바닥에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하던 하기스는 서둘러 총을 들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가진 세계적인 선수조차도 정보국 요원을 상대하지 못했다. 목을 정확히 타격 당한 하기스는 정신을 잃고 적의 품에 안겼다.


“크리스 리앙?”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요원은 피식 웃었다.


“인상 펴. 넌 VIP다. 공손하게 대할 테니까 겁내지 않아도 돼. 그건 이 유명하신 선수님도 마찬가지고.”


“하기스 상병님한테는 무슨 짓을 할 건가요?”


“별짓은 안 해. 그냥 우리가 할 말을 대신 해 줬으면 한다, 요 정도?”


전쟁과 외교에서 메신저가 누구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같은 발언이라도 무게와 영향력이 달라진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은 크리스는 이데아의 속셈을 간파했다.


하지만 자신과 부친은 조국의 배신자다. 이데아가 입을 열면 끝이다. 괜히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따라가기로 했다. 검은 군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걷는데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건 폭발음이 아니었다.


“살··· 살려 줘!”


“제발 용서해 주세요!”


“다··· 다시는 안···”


스티를 비롯한 소대원들의 비굴하고 처절한 외침을 들으며 크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메리고의 패배는 확실하다고, 아버지의 판단은 정확했다고 말이다.




요인과 메신저를 확보했다는 소식은 엄브렐라에 보고되었다. 이를 확인한 콘트라는 다음 단계로 돌입하기로 했다.


“로렌조 대령님, 해안가를 포위 중인 군함에 발포를 요청해 주실 수 있습니까?”


“물론이네. 어디를 공격하면 되나?”


“타겟은 아메리고의 모든 조선소입니다.”


로렌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의 젊은 장교에게 눈짓했다. 콘트라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아메리고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군함을 건조 중입니다. 기존의 상선을 개조해서 시간을 단축시키고 있죠.”


“그걸 폭파시켜 전투 능력을 상실시키고, 동시에 전의를 없앤다는 거군.”


“맞습니다. 그들이 정신 나가지 않았다면 여기서 멈출 겁니다. 하지만 제 예상이 맞다면 상대는 끝까지 싸우려 하겠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아메리고의 대통령은 다음 대선에 눈이 멀었습니다. 국민이 얼마나 죽던지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전쟁을 장기화해 계엄령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


같은 생각이라며 동조한 콘트라는 문서 하나를 책상에 올려놓았다.


“드디어 최종 단계입니다. 만약 이 종이가 아메리고에 퍼진다면 우리 군은 야유가 아닌 환호 속에서 아메리고에 입성하게 될 겁니다.”


콘트라의 확신에 로렌즈는 의아했지만 의심하지는 않았다. 지금껏 저 남자의 성과를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이윽고 서류의 내용을 확인한 로렌조는 씨익 웃었다.


“자네는 악마인지 천사인지 모르겠어.”


그러자 콘트라는 빙긋 웃으며 답했다.


“둘 다지 않겠습니까? 적국에게 악마는 조국에게 천사인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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