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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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작품등록일 :
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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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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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DUMMY

빌 회장 만난 지 일주일이 되는 날, 피기 스톤스는 국회 의사당의 프레스 센터에 들어섰다. 이른 시간에도 불구하고 빈자리는 없었다. 피기를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은 수첩과 펜을 껀냈다. 밖에서 몇몇 의원들이 소리를 지르며 회견을 막으려 했지만 빌리앙 홀딩스에서 나온 경호원들에게 제지 당했다.


단상에 오른 피기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서 회견을 시작했다.


“올바른 아메리고 협회의 장을 맡고 있는 피기 스톤스입니다. 저는 오늘 조 플라잉 맥트럼 대통령과 현정부의 행태를 밝히고자 이 자리에 섰습니다. 권력자의 압력에도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서두를 마친 피기는 긴장으로 마른 목을 침으로 달랜 후 본론을 꺼냈다.


“저희 협회에서 모종의 루트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현정부는 곧 동원령을 발동할 예정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긴 한가요?”


이야기가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비아냥거렸다. 기자 회견에서 발표가 끝나기 전에 발언하는 건 무례한 행동이다. 심지어 발언권조차 요청하지 않은 걸 보면 피기를 모욕하려는 게 분명했다.


피기는 화를 억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우먼 퍼스트 타임스의 취재 부장 루나디 제스터가 앉아 있었다.


“질의문답은 발표 후에 진행하니 기다려 주세요.”


회견을 돕기 위해 참석한 안나 플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루나디는 콧방귀를 뀌면서도 기자들의 시선이 신경쓰이는지 입을 닫았다. 덕분에 발표가 재개되었다.


“입수한 문건에는 인적 및 물적 자원의 동원에 대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 사항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기에 이를 알리고자 합니다.”


피기는 동원령 발동 통지서를 쥔 손을 치켜들었다.


“여기에는 중증 장애가 없는 18 세부터 38 세 사이의 모든 남성은 5 주간의 기초 군사 훈련를 받고 전장에 투입된다고 적혀 있었습니다.”


“당연한 내용인데 뭘 그래요?”


루나디는 또다시 비꼬며 끼어들었다. 피기는 무례한 여자를 무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 현상황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물자 생산도 자원하는 사람만 참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이게 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기자 회견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합당한 처사니 문제삼지 말라고 항의하는 기자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정부의 입김이 강한 언론계의 특성상 어쩔 수 없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사와 기자 위주로 출입 권한을 주니 말이다.


하지만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피기의 발언을 빠짐없이 기록했다.




발표가 끝나자 안나는 통지서의 사본을 배부했다. 받자마자 찢는 기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보도에 싣기 위해 내용을 찬찬히 읽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심각한 얼굴이 늘어났다. 이를 확인한 피기는 질의문답을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수많은 손이 하늘을 향했다.


“다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는 발표를 방해하던 기자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아까와 반대로 비아냥을 받은 루나디는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이를 갈며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우먼 퍼스트 타임의 취재 부장 루나디 재스터예요. 그쪽은 이 정보를 어디서 얻었나요? 사실이 아니라면 허위 사실 유포와 업무 방해에 해당하는 중죄예요.”


“루트는 당연히 말할 수 없습니다. 기자면서 취재 대상의 보호를 모르는 겁니까?”


피기가 비꼬듯이 말하자 루나디는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시선이 쏠린 걸 깨닫고 표정을 고쳤다.


“물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확한 정보인지 확인하는 것도 기자의 본분이잖아요?”


“동의합니다. 방금 질문은 통지서 하단의 서명으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제서야 루나디는 안나에게 받은 종이를 살폈다. 피기의 말대로 아래쪽에 대통령의 서명이 있었다. 여성 정책의 공식 문서를 자주 접했던 루나디는 조의 필체가 맞다는 걸 알아챘다.


“알겠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부에 문의할게요.”


“상관없습니다.”


“그 외에도 물을 게 많네요.”


“얼른 하길 바랍니다. 지금도 손을 들고 있으신 기자분들이 많으십니다.”


치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루나디는 어떻게든 물어뜯을 곳을 찾았다. 이내 무언가 떠올랐는지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했다.


“상식적으로 남자는 여성보다 전투에 적합해요.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되네요. 설마 아메리고의 패배를 원하는 건가요?”


질문을 받은 피기는 씨익 웃었다.


“저는 이번 전쟁에서 조국이 이기길 바랍니다. 그런데 재스터 부장님의 질문을 들으니 의아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예전에 부장님이 쓴 기사와 논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능력을 갖췄다는 글이 기억납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급여를 받는 건 심각한 사회 문제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여성 수당을 줘야 한다고 주장한 게 맞습니까?”


“그런데요?”


“아까 남성이 여성보다 전투에 적합하단 발언은 부장님의 스탠스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순간 루나디는 당혹스러운 얼굴을 했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며 피기의 의견에 동의했다. 루나디는 최대한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당연하죠. 내 의견대로 여성의 능력은 부족하지 않아요. 다만 포로가 될 경우 더러운 이데아놈들에게 모욕 당할 위험을 지적한 거죠.”


“재밌는 말입니다. 그건 민간의 여성들도 똑같지 않습니까?”


“그러니 승리해야죠. 그러기 위해 남자들을 뽑는 게 맞고요.”


“전쟁에서 이기려면 많은 군인이 필요합니다. 이는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그렇다면 여성도 징집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이미 말했잖아요. 남자가 여성보다 전투에 적합하다고요.”


“여성을 전쟁에 투입하면 질 가능성이 높다는 걸로 들립니다. 이는 여성의 신체 능력이 남성에 비해 부족하다는 게 아닙니까?”


“정말 차별적인 말이네요!”


회견장은 루나디의 고성으로 가득 찼다. 피기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진짜 차별은 지금의 상황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자만 강제 징집하는 것도 그렇고, 모병에서도 여군의 평가 기준이 남군보다 현저히 낮으니 말입니다.”


“그건 남자 위주의 체육 교육 때문이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 모르나요?”


“혹시 제가 협회를 창립하기 전에 어떤 일을 했는지 아십니까?”


“그걸 알아야 하나요?”


루나디가 앙칼진 목소리로 따지자 피기는 껄껄 웃었다.


“교육 관련 업체를 운영했습니다. 덕분에 체육 교육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 어쩌라고요?”


“학교를 방문하면 체육 교사들은 항상 말했습니다. 남녀에게 동일한 수업을 진행하라면서 여학생의 채점 기준은 낮추라는 교육청의 매뉴얼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게 맞잖아요.”


“남성과 여성의 신체 능력이 동등하다면 왜 그래야 합니까? 그건 남성에 대한 차별 아닙니까?”


말문이 막혔는지 루나디는 씩씩거렸다. 그럼에도 물러서기 싫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이야기랑 동원령이 관계가 있나요?”


“아까 부장님이 말했지 않습니까? 신체 능력은 똑같아도 기울어진 운동장 때문에 여군 체력검정의 허들이 낮은 거라고. 그래서 말한 겁니다.”


“그게 뭔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기득권층인 남자들의 잘못이죠.”


“부장님의 말이 맞다면 이건 현정부의 잘못입니다.”


“왜 현정부의 문제인가요?!”



“싱 와튼 전임 대통령께서는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를 고려한 교육을 수립하셨습니다. 차별이 아닌 차이를 말입니다. 하지만 현정부는 그 시스템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래 놓고 지금 남자만 징집하겠다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합당하죠. 남자가 여자보다 전투에 적합니까요!”


“처음으로 돌아온 것 같습니다. 전투에 적합하다는 건 전투 능력, 곧 신체 능력이 뛰어나다는 말이지 않습니까?”


“그건 아니죠. 계속 말했잖아요. 능력 때문이 아니라 차별적인 사회와 제도 때문이라고요. 그리고 추악한 남자들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여성 징집은 안된다는 거예요.”


“저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에서 성별은 중요치 않습니다. 총알은 성별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차별이니 뭐니 하면서 정작 진짜 차별인 남성만 징집하는 게 맞다고 하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당신처럼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남자들 때문에 여권이 신장되지 않는 거예요. 이 나라에서 여성은 얼마나 괴로운지 아나요? 우리는 남자와 똑같이 일해도 적은 임금을 받아요. 그러니까 이런 때라도 책임을 지라고요!”


“똑같이 일을 한다고 하셨습니까?”


“그래요.”


피기는 미소를 지우고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정부에서는 여성의 야근과 당직을 금지했습니다. 이를 대신한 남성이 추가 수당을 받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광부처럼 몸을 쓰고 위험한 직종은 많은 급여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에는 성별 비율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어쩌라고요!”


“그런 일을 하는 여성분들이 영웅으로 보일 정도로 수가 적습니다. 이런데도 똑같이 일을 한다는 겁니까? 그러면서 동일한 임금을 요구하는 겁니까?”


“여성도 똑같이 힘들어요. 아니, 오히려 더 힘들죠! 아이를 낳아 키우고, 동시에 일도 하니까요.”


피기는 어이가 없었다. 아메리고의 출산율은 1 %도 되지 않아 이민자를 받아들여 인구를 늘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언급하는 상대가 이해가지 않는 피기였다. 논리가 통하지 않는 상대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결국 피기는 준비했던 비장의 수를 꺼냈다.


“부장님은 이번 전쟁에 파견된 종군 기자의 현황을 알고 있습니까?”


“물론이죠. 1601 명이에요.”


“맞습니다. 그리고 그중 남성 기자는 1557 명입니다. 이래도 동일한 일을 한다고 우길겁니까?”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 말문이 막히자 루나디의 얼굴은 새빨갛게 변했다. 곧이어 울상을 지었다. 남성 기자들과 일부의 여성 기자들은 그녀에게 조소를 보냈다. 그러자 루나디는 다급하게 외쳤다.


“어떡해?! 빨리 나를 도와. 니네가 여권을 생각하는 기자라면 그게 당연하잖아!”


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괜히 개입해 봐야 손해인 상황에서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손익 앞에서 의리 따윈 없는 저들을 보며 피기는 충고를 날렸다.


“올바른 기자라면 올바른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부디 이번 사안에 대해 국민들께 진실을 알리길 바랍니다.”


루나디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자 피기는 다른 기자의 질문을 받으려 했다. 하지만 손을 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 일을 마친 피기는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서 회견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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