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위의 이데올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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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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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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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1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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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DUMMY

“그게 지금 무슨 말인가?!”


앤드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고함을 내질렀다. 그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선거가 한창 절정에 다다른 시기에 찬물을 끼얹는 건 말이 안 된다. 임의의 후보 교체는 불가능해진데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물러날 이유가 없다. 피기는 예상했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각하께서 종전을 선포하실 때 국민에게 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난 조 플라잉 맥트럼처럼 권력에 연연하지 않겠다. 조국이 안정되고 때가 되면 관저를 떠나겠다. 분명 그러셨지 않습니까?”


“그때의 맘은 변치 않았네. 하지만 아메리고는 여전히 어수선하지. 이런 상황에서 사우르 안디오같이 이중적인 자가 대통령이 되면 안 돼.”


불편한 심기가 여과 없이 드러나는 앤드류의 대답에 피기의 미소는 더욱 진해졌다.


“이중적인 건 각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뭐라고?”


“여성 우월주의가 득세할 때는 가만히 단물만 쪽쪽 빨더니 몰락할 기미가 보이자 바로 내다 버리는 모습이 이중적이지 않다면 뭐가 이중적이란 말입니까?”


“오해가 있는 것 같군. 난 단물을 빤 게 아니야. 조 맥트럼과 피 메이라 두 인간에게 시달렸지. 잘 알지 않는가?”


“글쎄요. 오히려 기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본 건 아닙니까?”


“믿어 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고. 그리고 여성 운동에 대한 입장이 달라진 이유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양상이 달라졌기 때문일세.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었을 때의 저항까지 우월주의라고 감히 폄하할 수 있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난 자네를 혐오자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거기에 대해서는 각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불평등에 대한 저항은 타당한 권리이며 정당한 요구입니다. 하지만 전 정부 때는 이미 남성과 여성이 경쟁 구도를 이루고 있었지 않습니까? 어느 쪽이 더 파이를 가져 오는가를 둔 이권 다툼이었다는 겁니다. 따라서 시대니 뭐니 하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물론 앤드류도 이미 알고 있다. 조 플라잉 맥트럼 정권에서 작성한 기밀 자료에는 경쟁으로 인한 성별 간의 갈등이 커질 것이며 아메리고의 미래를 위해 완환책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는 이를 무시했었다. 피 메이라가 요구한 여성 권리부의 출범을 위해서였다.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하던 아메리고의 권한 대행은 윗선에서 판단한 일이라며 책임을 회피하던 국방 장관 시절처럼 똑같이 모른 척하기로 했다.


“그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했어. 듣던 대로 협회장의 식견은 넓군. 하지만 난 여성 우월주의 세력이 이 나라를 좀먹고 있단 걸 인지해서 그자들을 쳐냈지 않은가? 당내 지지 세력을 잃는 걸 감내하고서도!”


“저도 그걸 보고서 변화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이중적인 모습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하나가 더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 피기는 말을 이었다.


“팔리아 전쟁 초기 각하의 캠프는 사우르 후보가 리다이트계니 당선되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 여론전을 펼쳤습니다. 그런데 상대측에서 불참을 공식 선언하자 말을 뒤바꿔 그럼 팔리아의 테러를 받을 거라고 선동 중입니다. 이게 뭡니까, 대체?”


이번에는 변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앤드류 머레이는 군인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고 계급인 대장으로 예편한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국방과 안보 분야에 관한 정책 공약을 스스로 검토했고, 이러한 모습을 언론에 홍보했다. 이제 와서 모르는 일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할 말이 없군. 그런데 스톤스 협회장 이건 알아 두게. 정치란 건 언제나 앞만 보고 걸을 수는 없어.”


“아까도 말했지만 솔직한 건 보기 좋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동의하고요.”


“납득해 주니 다행이군.”


“각하께서 다른 정치인들처럼 콧대를 세우기만 하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렇지만 부족합니다. 앤드류 머레이가 재선을 하기에는.”


아직 새치도 몇 개 나지 않은 사람이 소리를 높이는 게 불쾌한 앤드류지만 재선이 언급되자 절로 고개를 수그렸다.


“어디 한번 협회장 편한 대로 이야기해 보게나.”


“그러겠습니다. 사실 후보 사퇴는 각하의 마음가짐이 어떤가 떠본 겁니다. 다행히 권력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중이 커 보이니 협력하겠습니다. 일단 현상황에서 표심을 정하지 못한 이들은 중도층, 그중에서도 젊은 세대가 상당 비율을 차지합니다.”


“캠프에서도 그런 의견이 나왔네.”


“청년층이 원하는 건 별다른 게 아닙니다. 물론 좋은 일자리와 저렴한 물가도 좋죠. 그래도 피부에 가장 와닿는 건 공정과 상식입니다. 예를 들면 쓸데없는 걸로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입니다.”


“매일 여자들과 싸우는 자네가 할 말인지···”


“전 특정 성별의 이권만 챙기는 놈들과 싸우는 거지, 어느 한쪽의 인권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남성 혐오자들이 씌운 부정적인 프레임일 뿐이죠.”


“하긴 피 메이라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진정한 평등을 구현하려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 이상 남자든 여자든 아메리인이든 이민자든 어드밴티지 자체를 배제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공정한 상황에서 기회를 두고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다면 쓸데없는 걸로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나쁘지 않지만 비현실적으로 들리네.”


“정치란 생물 자체가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를 개선의 반복으로 고치는 거잖습니까? 어쨌건 이를 추가 공약으로 내걸고 즉각적인 실천을 보여 줘야 합니다. 저라면 20, 30 대 청년 보좌관을 특별한 제한 없이 공개 선발하겠습니다.”


“지금 와서? 너무 늦은 거 아닌가?”


“그러니 딱 좋은 겁니다. 저야 나이에 구애 받지 않고 능력을 증명했으면 하지만 고위층은 그걸 원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이라면 괜찮습니다. 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선발했다는 것만 선전하면 족합니다.”


말마따나 내부의 반발이 클 사안이다. 하지만 계획대로 된다면 패전 이후 정치에 관심을 접은 청년들로부터 표를 획득할 수 있다. 당선될 수만 있다면 악마라 할지라도 손을 못 잡겠는가.


“알겠네, 스톤스 협회장. 당장 캠프 지도부와 협의하겠네. 긍정적인 답이 나오면 바로 연락하지.”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피기는 앤드류와 악수를 나눴다. 평생을 군에서 보낸 남자의 덥수룩한 손은 묵직하고 단단했다. 반대로 청춘을 보내는 남자의 통통한 손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 악수는 아메리고의 부흥을 이끌어 낼 수 있다. 만약 이 자리에 누군가 있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곧바로 개최된 회의는 순탄하지 않았다.


“헛소리입니다!”


고성이 회의실을 울렸다. 한숨을 내쉰 앤드류는 소리친 남자를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루치아노?”


딴 사람이면 몰라도 하필 경선에서 경쟁 관계였던 루치아노 바렐라기에 무시하기 힘든 앤드류 머레이였다. 루치아노는 전통적으로 양당의 지지율이 엇비슷한 지역에서 주지사를 당선되어 일하던 도중 앤드류를 견제하려는 당내 원로 인사의 호출을 받고 경선에 나섰다. 하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조항을 신설하면서까지 기울어진 판도를 짰음에도 2 등으로 밀려 탈락했다.


그런 실상과 달리 루치아노의 대외적인 이미지는 좋았다. 보수적인 성향에도 합리적인 면모를 지녀 상대 지지자와 중도층에서도 인기 있는 인물로 비춰졌다. 때문에 피기 스톤스의 제안에 찬성하리라 믿은 앤드류는 난감했다. 질문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난 루치아노는 주변을 돌아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피기 스톤스 그 인간이 여성 혐오자인 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물론 그자의 언변이 뛰어난 건 저도 인정합니다. 아메리고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을 나올 정도로 우수한 능력을 갖춘 것도, 젊은 나이에 성공한 벤처 기업을 운영한 것도 맞습니다. 하지만 그 과도한 자신감에 실수를 자초하곤 합니다.”


“그는 나에게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며 반대측에서 씌운 이미지라고 해명했네.”


“물론 그런 측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만 스톤스는 루나디 재스터와 언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다.”


“아, 어떻게든 권력에 빌붙으려 하는 어용 기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때 스톤스는 여자가 신체적으로 뒤떨어진다는 스탠스로 발언했다고 합니다.”


“맞는 말이구만, 뭘.”


“입조심하게, 호긴스!”


“루치아노 댁이 입조심하라고 할 처지인가?”


쿠데타에 가담한 장성 출신이며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정치에 뛰어든 랄프 호긴스는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나왔다. 화이트칼라 출신과 여성 정치인은 피기의 말이 지나치다고 성을 냈다. 반대로 전쟁에서 큰 피해를 본 군인 출신들은 맞는 말까지 사과해야 하냐며 따졌다.


“나 루치아노 바렐라는 이전 정부를 옹호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직무에 상관도 없는 성비 채용 시스템 따위를 만든 건 비난 받아야지. 하지만 여군 중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어. 선천적인 능력을 후천적인 노력을 채우는 참된 군인을 단순히 성별로 따지고 들면 되나?!”


“그런 여군이 얼마나 된다고 그래? 그리고 노력만으로 평가해? 어쨌건 결과가 더 나은 사람이 승진하는 거지.”


“당신 같은 사람이 있으니까 참 군인도 무시받는 거야!”


“군대도 안 갔다왔으면서 참 군인 거리고 있네. 애초에 루치아노 댁 정말 팔이 아프긴 한 거야? 아까 그 팔로 책상 내려치지 않았어?”


“지금 뭐라고 했어?!”


당황한 루치아노와 분노한 랄프는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고함을 질렀다. 결국 앤드류가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을 불러들이고 나서야 소란이 멈췄다.


“우리는 같은 배를 탄 동지잖은가. 더 좋은 의견을 위한 토론은 좋지만 감정이 상하는 일은 없길 바라네.”


“죄송합니다, 각하.”


“어찌 되었건 스톤스 협회장에 대한 루치아노의 말은 일리가 있어.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각하와 같은 생각입니다.”


“역시 루치아노 주지사입니다.”


“바렐라 선생, 다음에 우리 모임에 나오게.”


최고 권력자가 기를 세워 주자 방금까지만 해도 다투던 이들은 웃으며 루치아노를 칭찬했다. 하지만 루치아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다.


“그래서 후보께선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피기 스톤스와 손을 잡으실 겁니까?”


“음······ 일단 채택하지.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 말이야. 그건 루치아노 자네도 인정하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앤드류는 피식 웃으며 앞에 놓인 잔을 들었다. 진갈색 액체는 얼음이 녹아들어 조금씩 호박 빛으로 옅어지고 있었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만 그 새끼를 이용하자고. 그 후에는 내가 책임지고 처리할 테니까.”




회의를 끝낸 루치아노 바렐라가 사무실에 들어오니 깜깜한 방 안에는 누군가 앉아 있다. 그 사실을 알아챈 루치아노는 불을 켜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오늘 점심은 뭐였어?”


“족발이었네.”


“그런 걸 누가 먹어.”


“그쪽은 뭘 먹었나?”


“미트볼 스파게티.”


“언제는 그딴 걸 왜 먹냐며.”


아까와는 확연히 달라진 목소리로 루치아노가 성질을 내자 의자가 돌아갔다. 거기에 앉아 책상에 발을 올린 남자는 이데아 출신의 사업가 메나르두 카포, 정확히는 그 역할을 맡았던 이데아 정보국의 공작원이다.


“조직의 두목들을 설득했어. 이제 네가 지목하는 타겟은 찢기게 될 거야.”


“대단하군. 그 난폭한 녀석들을 어떻게 구워 삶은 거지?”


루치아노의 물음에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미트볼 스파게티. 그걸 형수의 장례식에서 먹이니 해결되더라고.”


진상은 모르겠지만 끔찍한 협박을 했으리라 판단한 루치아노는 그대로 사무실을 떠났다. 하지만 저 남자와의 계약을 파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올라간 입가를 가리며 곧 풍파가 몰아칠 당사를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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