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랑전(極狼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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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HaL
작품등록일 :
2023.10.09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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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9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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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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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번데기를 찢고, 나비는 날아오른다. (1)

DUMMY

“이거 안 풀어?!”

“못 풉니다.”

“으이씨이!”

“소문주님. 제가 어찌 대천성패를 거스를 수 있단 말입니까?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제갈민은 답하지 않았다. 벌겋게 열이 오른 이마로 씩씩 콧김을 뿜어댈 뿐이었다.


“소문주님···.”

“이이익!”


아둥바둥 발버둥을 쳤지만, 밧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공력을 써도 끊을 수가 없다. 관절을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진짜 연화 언니가 이러랬다고?”

“예.”

“말도 안 돼!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이거 당장 풀어!”

“못 합니다.”

“아프니까 좀 풀어!”

“힘을 안 쓰시면 전혀 아프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묶어뒀으니까요. 게다가 밧줄에 비단까지 둘러드렸으니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으이얍!”


십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도무지 지칠 줄도 모르는 저 아가씨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과연 무사히 세가에 당도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처럼 쌓여갔다.



* * *



순득은 노심초사하는 표정으로 방을 나섰다. 조금 걷자 안개가 깔린 숭산 위로 천년소림의 웅장한 전각들이 두 눈앞에 펼쳐졌다. 태어나 처음 보는 광경이다. 분명, 죽기 전에 꼭 한 번쯤 보고 싶은 풍경이었다. 정주─ 아니, 하남성에 사는 이 중, 지난 천년동안 강호의 태산북두로 자리했던 소림을 동경하지 않는 이가 있겠는가?


다만, 이름도 없는 야장 나부랭이가 제 맘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닌 탓에 뜻을 접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오게 될 줄이야.


그런 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뭔가 기분이 묘했다. 어째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으니까.


함께 올라올 줄 알았던 제갈민 아가씨가 갑자기 사라진 것부터가 순득을 불안하게 했는데─ 거기에 더해 새로 나타나 주도권을 잡은 연화라는 아가씨는 한 소가주는 물론, 왕초와의 접촉도 꺼리며 계속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닌가?


치매 걸린 그녀의 할아버지를 보호하는 곳은 하오문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도, 순득은 가능하면 염천호의 곁에 붙어 있고 싶었다. 하지만 소림이 하오문에 내어준 ‘입산 허가’는 고작 두 명이 전부였다. 따라서 그녀는 최대 30인까지 입산을 허가받은 제갈세가에 의탁해 이곳 숭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야장인 그녀가 이곳에서 무슨 할 일이 있겠느냐, 싶지만···.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시나요?”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득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 예?!”

“드릴 말씀이 있어 쫓았는데,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셨군요.”

“아, 예. 그, 그러셨습니까요. 아하, 아하하하···.”


민망했던 순득은 괜히 코밑을 슥슥 훔치더니 말했다.


“아,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주십쇼. 아직 왕초께도 인정을 못 받은 수습생 나부랭이인데.”

“수습생이시라고요?”

“아, 예. 왕초께서 때가 되면 대장간을 차려주신다고 하셨는데, 그전까지는 장인 대접은 꿈도 꾸지 말라 하셨으니···. 아직은 수습생인 셈이지요.”

“듣기로는 본래 경영하시던 대장간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닌가요?”

“거기야, 뭐···. 제가 경영하던 곳이라기보단요, 음, 저희 할배가 노망이 나는 바람에 떠맡게 된 곳이니까 말임다. 애초에 찾아오는 손님들도 전부 할배 때문에 오는 사람들이고, 할배 밑에서 일 배우던 다른 야장들도 할배 그렇게 되고 나선 다들 제 일 찾아 나가버려서··· 최근엔 농기구나 고치면서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던 참이었지요.”


순득은 침울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 와중에 사독파파까지 나타난 흉흉한 곳에서 장사를 어떻게 합니까요. 상인들도 진즉 다 도망갔고, 손님들도 몇 년은 얼씬도 안 할 검다. 하오문의 염라왕 밑에서 일한다고 하면, 그나마 밥은 벌어먹고 살 수 있겠지요.”

“그랬군요.”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득의 말대로, 사독파파가 나타난 이후, 정주는 그야말로 전쟁통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황망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상도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사독파파를 피해 도망쳤고, 각각의 사정으로 정주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집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숨소리마저 죽이고서 죄인처럼 감금 생활을 하는 중이다.


심지어 관청의 벼슬아치들과 군부의 병사 중에서도 탈영한 자들이 있을 정도니, 작금의 정주는 무법지대였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조차 기회를 발견하는 탐욕스러운 놈들도 있다.


“정주의 소식은 들었어요. 심지어 성내에서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 비적 무리도 출몰했다고.”


순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초께서야 하오문과 개방 사람들을 보내서 비적을 자칭하는 놈들은 죄다 잡아다 관아에 넘겼다고는 하셨지만, 그놈들이 어디 순순히 잡힐 놈들이랍니까요. 바퀴벌레처럼 때 되면 다시 기어 나올 텐데.”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어요. 터전을 잃은 마당에 당장 의탁할 곳도 없으니··· 당장 공께서 하오문을 의지하는 건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일이었겠군요. 무엇보다도 화검 도종인 대협께서 직접 하오문의 공 향주를 소개해주셨다는 경위는 이미 전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아, 예, 뭐···. 그, 그랬지 말입니다요.”

“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예?”

“저희 제갈세가를 위해 일해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예?”

“제갈세가의 야장이 되실 생각은 없으신가 말예요.”

“예에?!”


순득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화등잔만 해진 순득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연화가 말을 이었다.


“지금 저는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청월공을 시험해보고자 드리는 말씀도 아니에요. 진심으로, 청월공을 본 제갈세가에 영입하고자 청을 드리는 거랍니다.”

“그게, 그게···.”


순득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연화는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지금 당장 결정을 내려주십사 청을 드린 건 아녜요. 속히 처리해야 할 일들이 있는 반면에 신물경속(愼勿輕速)해야 할 일이 있는 법이지요.”

“시, 신, 뭐요?”


연화는 이가 살짝 드러나도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천천히 고려해보신 후에 답을 주셔도 좋다는 뜻이랍니다.”

“아··· 아, 예.”


순득이 멋쩍은 얼굴로 관자놀이를 긁적이자, 연화는 말을 이었다.


“화검 대협께서 눈독을 들이고, 천하의 염라왕께서 ‘그걸’ 맡길 정도이신데, 그런 장인을 두고 가만히 침만 삼키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그, 그게···.”

“하물며, 제갈세가는 천하십이본. 군웅칠세 중에서는 필두를 달리는 곳이랍니다. 그런 곳의 야장···. 상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으허···.”


상상을 벗어나는 이야기에 순득이 눈이 팽팽 돌자, 연화는 쐐기를 박듯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천천히 생각해보세요. 다만, 저는 청월공의 실력을 그리 낮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만은 기억해주시면 좋겠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개회식에 참석해야 해서.”


말을 마친 연화는 순득이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발을 돌려 사라져버렸다. 혼자 남은 순득은 넋 빠진 얼굴로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뿐이었다.



* * *



양주의 수서호(瘦西湖)는 중원에 존재하는 800여 서호(西湖) 중에서 저 항주의 서호(西湖)에 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호수다. 자연과 인간의 손길이 적절히 어우러져 물이라는 소재로 빚어낸 풍경은 인간의 표현력을 아득하게 넘어설 정도다.


자연스레, 양주는 그 아름다운 풍경을 찾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물론 그중에 가난뱅이는 없다. 가난뱅이라면 아예 태어난 성을 벗어날 일도 없으니까. 자연에 계절의 다채로운 색깔이 더해지는 봄과 가을이면 양주는 부자들로 넘쳐나기 마련이다.


그런 양주에서 만곡객잔(萬斛客棧)은 은자 없이도 숙박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객잔이다. 이 저렴한 객잔이 고급 객잔들로 넘쳐나는 양주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다.


“우와, 외관이 난장판이라서 개판일 줄 알았더니만, 오리고기가 겁나 맛나네.”


쩝쩝, 접시까지 씹어 삼킬 기세로 입안에 고기를 욱여넣던 득구가 한마디 했다. 옆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던 성채도 동의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 만한 사람한테는 소문난 명소지. 이 맛은 아무나 못 내거든.”

“알 만한 놈만 아는데 너는 어떻게 알어?”

“글쎄, 어찌 설명하면 좋을까. 그냥 여기 숙수가 아는 형님이라고 할까? 그런 관계라.”

“아, 여기도 그 왕초 할배 거야?”

“득구야, 제발 입조심 좀 해줘라, 쫌!”

“왕초 할배를 왕초 할배라고 그러지, 뭐라 그래? 에이, 알았어.”


발가락은 얼른 눈동자를 굴렸다. 다행히 숙수 엄준은 방금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부유해 보이는 소년과 늘씬한 미녀 두 사람을 접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깨나 자주 찾는 단골인지 점소이 대신 숙수 본인이 직접 나서서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주문을 받는 게 아닌가? 발가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큰 상단의 숙수 일을 하던 엄준은 상단에서 파는 ‘상품’인 여자에게 손을 댔다가 쫓겨난 사람이다. 상단에서 쫓겨난 이후 어디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된 엄준을 거둬 이 만곡객잔을 맡긴 사람이 바로 염천호였다.


다시 말해 엄준 앞에서 염천호를 이 할배, 저 할배, 하는 꼬맹이가 있다면 엄준의 주먹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 결과가 어찌 될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제발 분란을 일으킬 만한 행동은 좀 참아줬으면 한다. 제발.”

“뭘 일으켜, 내가?”

“몇 번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왕초를 그렇게 막 부르는 놈은 천하에 너밖에 없다, 인마.”


득구는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콧대를 세웠다.


“들었죠? 제가 그런 사람입니다, 아가씨.”


고개를 꾸역꾸역 씹어 삼키던 성채가 방긋 웃자, 발가락은 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꾸 받아주니까 계속 그러잖아요.”

“뭐, 어쩌라구. 남들이 다 떠받든다고 나까지 떠받들어줘야 한다는 법 있어?”

“···그 패기는 좋다만, 부디 왕초 밑에서 일하는 당사자들 앞에선 자제해주지 않으련?”

“알았다니께.”


건성으로 대답한 득구는 싹 비운 접시 위를 끼적대다가 아쉬운 얼굴로 젓가락을 뚝, 부러뜨려 츱츱, 이를 쑤시면서 말했다.


“그래도 그 할배가 인망이 좀 있나 보네.”

“뭐? 왜?”

“아니, 보통 윗대가리는 씹기 바쁜데 왕초, 왕초, 하면서 못 떠받들어서 안달이니까.”

“그건 말이지···!”


반색하며 염천호의 위대함을 설파하려는 발가락에게 득구는 손을 내밀어 보였다.


“아, 됐고! 그 할배 얘긴 이제 그만해. 지겨우니까. 뱃전에서부터 똑같은 얘길 몇 번이나 반복하는 거야, 짜증나게?”


그러는 너는 왜 자꾸 도련님 얘기를 해대냐? 발가락은 따지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이 자식이랑 설전을 벌이는 것 자체가 손해다.


“그나저나 화검 양반은 언제 온대?”

“내일쯤?”

“아니, 연통을 넣은 지도 좀 됐다면서? 근데 왜 이렇게 늦는 거야?”

“글쎄.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전달받긴 했는데.”

“개인적인 일이라···.”


득구는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그 놈팡이랑 관련이 있는 일인가? 도종인의 성격상 어지간한 일이 아니라면 본인 입으로 내뱉은 약조를, ‘개인적인 일’이라는 이유로 어길 리가 없었다.


종리··· 뭐더라? 그놈이랑 관계된 일이라면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움직일 수도 있으리라. 종리 어쩌구하고는 아주 복잡한 관계였던 것 같으니까.


“뭐, 때 되면 오겠지. 약왕전인지 뭔지, 거기 들어가서 오라고 그러면 되잖아?”

“···음. 역시, 너 우리 왕초 설명 안 들었구나?”

“뭐? 뭘 안 들어?”


그렇지만 득구는 되레 성질을 냈다.


“무슨 얘길 했다 그래?!”


발가락은 머리칼을 헝클어뜨렸다.


“그, 왜··· 왕초가 우리 보낼 때 분명히 설명하셨잖냐? 그 약왕전은 여기 양주에 있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아무것도 모른다구?”

“그렇다니까?”


당장 득구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그럼 뭔 수로 찾아? 양주에 있다는 것만 알고, 단서가 하나도 없는 곳을 어케 찾으려고?”

“그러니까···. 어휴.”


그러니까 한 번 얘기할 때 좀 듣지. 발가락은 혀끝까지 튀어나온 말을 간신히 씹어 삼키고 말했다.


“그래서 약왕전주라는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그랬잖아. 그때.”

“그렇게 말해봐야 난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어쩌라고?”


이 정도로 뻔뻔하게 나오면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하는데, 성채가 나서서 발가락의 고민을 해결해주었다.


“으갹!”


성채는 득구의 뺨을 사정없이 쥐어뜯으면서, 수화로 말했다.


-미안해. 지금 득구도 미안한데, 미안하단 말을 잘 못 해서 이러는 거야.


발가락은 찡, 가슴을 울리는 감동을 느끼며 요 며칠 사이에 수화를 배워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착한 아가씨가 다 있나.


“괜찮습니다요.”

“으이씨, 딴 데 정신 팔려있음, 못 들을 수도 있는 거지.”

“그래, 그래. 이제라도 알면 됐지 뭐. 어쨌거나 너희 도련님 ‘그 문제’를 한시라도 빨리 해결하려면 그런 중요한 정보는 놓치지 않고 듣는 편이 좋지 않겠냐?”

“···으으음.”


발가락의 어른스러운 대응에 득구는 침음을 내며 골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애라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을 뿐이지, 모르는 건 아니다. 어느새 득구의 얼굴에 자연스레 떠오른 반성의 표정을 읽은 발가락은 씩, 웃으며 말했다.


“알았으면 됐다. 우선은 그 전주란 양반을 얼른 찾자고.”


-그런데, 어째서 위치를 모르는 거야? ‘존재하는 건 분명하다’고 했으니, ‘약왕전’이란 장소는 실존하는 거잖아? 간판이 따로 없어도 건물 생김새라든가··· 심지어 어디 멀리 떨어진 야산도 아니고, 도성 안에 있는 곳인데도 위치를 모른다는 건 좀 이상하지 않아?


성채의 말에 발가락은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요. 저도 왜 그런지는 잘 모름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왕초가 그리 친절하게 뭘 설명하시는 양반이 아니거든요.”


발가락은 어깨를 으쓱, 들었다.


“게다가 그 약왕전주란 양반을 찾으면 자연스레 해결될 문제 아니겠습니까?”


성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득구는 양 주먹을 쾅, 가슴께에 부딪히더니 말했다.


“좋아. 어쨌거나 그치를 찾아야 한다, 이거지? 그럼 얼른 찾자구.”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온 득구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빼액, 화통 터지는 소리를 냈다.


“약왕전주란 새끼가 어떤 새끼냐아앗!”

“···어?”


잠시 멍하니 득구의 행동을 지켜보던 발가락은 득구가 두 번째로 소리 지를 즈음에서야 간신히 날아갔던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약왕전주 나와라! 새끼야아!”

“어어···. 으악, 으아악?”


발가락의 입이 크게 벌어지고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뭐, 뭐 저런 놈이···!


“어어? 나오라니까? 새끼야, 내가 우습냐?!”

“으악! 이, 이 자식아앗!”


발가락이 얼른 달려가 득구의 입을 막았지만, 득구는 간단하게 발가락을 떨쳐내고 꽥꽥,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쫄았냐! 나와 봐라! 한판 붙자!”


붙긴 뭘 붙냐, 너 혹시 바보냐! 온갖 쌍욕과 함께 악다구니를 쓸 뻔했던 발가락은 간신히 이성의 끄트머리를 붙들고 소리쳤다.


“너 혹시 바보냐?! 약왕전주가 지나가던 개도 아니고!”

“대체로 이렇게 시비 걸면 나와.”


뻔뻔하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한 득구의 태도에 발가락은 뒷목을 잡았다.


“그, 그건 공의현 같이 작은 고을에 있는 양아치들이나 그러지! 여긴 양주라고?! 공의현하고는 비교도 안 되게 커다란 성읍이란 말이다!”


악을 쓰는데 뒤에서 깔깔대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조금 전에 들어온 손님인 소년과 미녀가 배를 잡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성채 역시 숨 쉬는 것도 힘들어하면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발가락은 갑자기 죽고 싶어졌다. 치욕감으로 시뻘건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면서 말했다.


“네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는 충분히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하자. 제발, 엉?”

“뭘 그만해. 찾자며? 찾아야지?”

“그렇게 한다고 찾아질 리가···.”


발가락이 뒷목을 잡고 쓰러지기 직전, 누군가 발가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크헉, 허···. 아이고, 배야. 진짜 오랜만에 웃었다. 푸히, 푸히히히힛! 으아! 배 아파! 큭큭···.”


돌아보니, 창가에 자리를 잡았던 소년이었다. 발가락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식사 중에 죄송하게 됐슴다, 나으리. 일행이 조금 머저리라···.”

“뭐야? 머저리?!”

“이 친구 별명이 미친개거든요.”

“야! 너 진짜 뒤질···!”


소년은 다시 폭소를 터뜨렸다.


“푸핫! 미친개? 큭큭큭, 딱 맞는 별명일세! 푸히히히힛!”

“송구합니다만 나으리, 불쌍한 거지에게 한 푼 적선해주십사 이렇게 작은 희극이나마···.”


응? 이게 아닌데. 습관적으로 구걸할 때 쓰는 대사를 내뱉은 발가락은 어차피 둘러댈 거, 이쪽이 자연스럽겠다며 천연덕스런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한참 끅끅대며 웃음을 멈추질 못하더니, 이내 숨을 크게 몰아쉬며 말했다.


“흐어, 큼. 줘야지. 어흠, 이 정도 웃겨줬으면 돈 한 푼이라도 주는 게 예의지. 어디 보자···.”


소년이 진짜로 품을 뒤지기 시작하자, 발가락은 기대감에 찬 눈을 반짝였다.


“어디 보자. 응? 그런데 무슨 거지가 돈을 이리 많이 들고 다니나?”


소년의 말에 발가락은 번쩍 고개를 들어 소년의 손을 쳐다보았다. 소년의 손에 들린 돈주머니는 분명 왕초가 발가락에게 준 것이었다.


“어··· 언제?”

“아, 미안하네. 돈을 달라 그러니까, 그만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발가락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지고, 득구의 표정도 조금 전까지와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그 표정에 소년이 씩, 미소를 지었다.


“좋은 살기로구먼그래. 짜릿해.”

“너, 누구야?”


득구의 질문에 소년의 입꼬리가 더 깊게 패였다.


“나? 서동천(徐冬天).”

“뭐 하는 새끼냐고?”


서동천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지금 고래고래 소릴 질러대며 날 찾지 않았나? 그래서 나와줬는데?”


작가의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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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35화. 개와 늑대의 시간 (1) +1 23.12.24 419 8 15쪽
122 34화. 이유 (3) +1 23.12.23 400 9 14쪽
121 34화. 이유 (2) +1 23.12.22 422 9 19쪽
120 34화. 이유 (1) +1 23.12.22 419 9 15쪽
119 33화. 번데기를 찢고, 나비는 날아오른다. (2) +1 23.12.21 419 9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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