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벽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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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okkoma
작품등록일 :
2023.11.21 15:32
최근연재일 :
2024.01.31 19:00
연재수 :
2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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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6,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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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18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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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챕터8-132. 전생- 전생의 기억 (1)

DUMMY


시큼한 석탄 냄새를 맡으며 강식은 맑은 햇살이 눈부실 만큼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있는 곳은 똬리를 틀고 있는 커다란 짐승의 목구멍 속과 같은 깊은 어둠 속이라는 사실에 강식은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번들거리는 이마를 흐르는 땀은 석탄가루를 머금고 이미 검은색 기름방울처럼 변해 그의 얼굴에 진득하니 달라붙어 있었다.


- 오늘은 다치는 사람이 없어야 할텐데...


강식은 오늘 갱도 작업에서 다치는 사람이 나오지 않기를 바랬다.


땅 속 깊숙이 박힌 바위 속에서 매캐한 냄새를 뿜어내는 석탄을 캐낼 때마다 그는 진귀한 보석이라도 캔 것 같은 설렘으로 두 눈이 영롱하게 빛났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오랜 시간동안 형성된 석탄 암석에는 차마 건드리면 벌이라도 받을 법한 신성함이 가득했다.


곡괭이질을 한참이나 해대던 강식은 이내 초롱초롱한 눈빛이 되어 자신의 손으로 인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탄맥(炭脈)을 잠시 바라보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소택지와 늪지의 무성한 열대 삼림이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이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압력과 고열을 받아 만들어진 것은 다름 아닌 석탄(石炭)이었다.


강식은 이 까만 돌덩어리가 우주의 탄생에서부터 지구의 기원이 되는 신성한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석탄을 캘 때, 그의 마음이 마냥 밝지만은 않았다.


강식의 얼굴에는 어느새 그늘이 가득 내려앉아 있었다.


검은 석탄가루를 뒤집어 쓴 그에게선 피곤함보다 앞으로의 생활에 대한 막막함만이 가득 풍겨져 나왔다.


멀리서부터 메아리치는 ‘중식(中食)’이라는 말에 여기저기 흩어져있던 광부들이 강식에게 천천히 모여들기 시작했다.


강식은 광부들 사이에서 정신적인 지주(支柱)이자 그들에게 있어 대장이었다.


모두 강식의 말을 믿고 따랐으며, 그를 중심으로 모든 작업이 이루어졌기에 어느새 점심 시간이 되자 모두 강식 주변으로 모여든 것이다.


매캐한 석탄가루가 그나마 덜한 중앙로는 외벽을 따라 커다란 삼나무로 덧대어 막아두었다.


손톱까지 찌든 검은 때가 가득한 광부들은 이내 오밀조밀 모여앉아 저마다 집에서 싸 온 도시락을 꺼내 먹기 시작했다.


광부의 아내들은 도시락을 두세개는 예사로 싸냈고, 차마 도시락을 싸 낼 형편이 아닌 집의 인부들은 그저 물만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그렇다고 해서 도시락을 두세개씩 싸오는 사람들의 형편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보통 그들이 싸오는 도시락이라고 해봐야 삶은 감자 두어 알이나 혹은 초라한 반찬의 조밥이나 보리밥이 전부였다.


강식 역시 반찬이라곤 소금에 절인 무짠지와 검게 변한 막된장을 담은 작은 종지와 엉성하게 뭉친 조를 섞은 주먹밥 두 개가 전부였다.


그나마 그의 볼품없는 강식의 도시락마저 다른 이들에 비하면 호화스러운 것이었다.


강식은 어느새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일구에게 주먹밥 하나를 건넸다.


일구는 강식이 가장 아끼는 이웃집 동생이었는데, 그에게 있어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동네 후배였으나 강식에게는 친동생과 진배없었다.


일구는 애가 셋 딸린 가장으로 그의 형편은 녹록치 않았다.


경상남도 합천 초계리에서 시집온 그의 아내는 초계댁이라고 불렸는데, 아무리 초계댁이 야물딱진 손으로 손품을 팔아 살림에 보탠다 해도 식구 다섯의 입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았다.


오늘도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것 같은 일구에게 망설임 없이 그의 주먹밥을 건네는 강식이었다.


일구는 살짝 떨리는 손으로 강식이 건네는 주먹밥을 공손히 받았다.


강식은 그런 미안해하는 일구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기에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한번 치고는 하나 남은 주먹밥을 소중하다는 듯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 속에 넣기 시작했다.


미세한 석탄가루와 먼지들로 뒤섞여 도시락 속 조밥은 까맣게 되기 십상이었다.


광부들은 오랜 생활의 경험으로 탄광 안에서 밥을 먹을 때는 반드시 물에 말아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그들에겐 사치였다.


강식은 자신을 에워싸고 앉아 서로 도시락을 나눠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광부들의 말을 엿듣다가 문득 오늘이 산신당(山神堂)에 제(祭)를 올리는 날임을 알아차렸다.


산신당은 일본 놈들조차 마음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곳이었다.


산신당의 기(氣)를 끊는다고 철심을 박던 관리인 나카무라는 다음 날 길거리에서 갑자기 쓰러져 심장마비로 죽었는데, 다들 그가 산신당을 건드렸다가 저주를 받아 급살(急煞)을 맞아 죽었다고 수군거렸다.


그 뿐만 아니라 산신당을 향해 비웃으며 오줌보를 갈기던 어느 일본 관리인의 어린 아들은 일주일이 못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태가 이러하니 산신당을 없애려던 일본인들은 그 계획을 접고, 한 달에 한번 제를 올려야만 한다는 조선인들의 말을 들어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 후부터 산신당은 조선인들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가 되었다.


산신당은 어느새 탄광의 안전뿐만 아니라 조선인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석탄가루를 마실 수밖에 없는 캄캄한 탄광 속에서 광부들은 목숨을 걸고 일했다.


폐에 석탄가루가 끼면서 폐가 굳어 호흡을 못하게 되는 진폐증은 예사였고, 불의의 폭발사고로 팔다리가 잘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더욱이 갱도가 무너지기라도 했다가는 언제라도 죽을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는 슬픔보다는 당장 내일 먹을 보리쌀이 떨어졌다는 것이 더 애달프고 애통한 그들이었다.


강식을 비롯한 광부들은 한참 식사시간이 지난 늦은 점심을 먹고 그 후로부터 8시간이나 지나서야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




출갱(出坑)을 간절히 바라던 초췌한 모습의 광부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향해 놓인 의자에 서둘러 올라탔다.


새까만 몰골의 광부들은 갱도 내에서 사람들을 태우는 작은 인차에 앉아 있었는데 저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은 제각각 달랐다.


어떤 이는 가족을 생각하고 있었고, 또 어떤 이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해야만 하는가 고민에 빠져 있었다.


드디어 바깥세상이 환한 반달처럼 밝은 모습을 드러내자 끝 간 데 없이 이어질 것만 같던 오늘 작업에 대한 고단함이 흔적 없이 지워졌다.


그들이 밖에 나오자 어느새 어둠이 짙게 내렸고, 날카로운 광산을 비추는 조명 빛줄기들이 그들의 눈을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했다.


이내 머지않아 정면으로 보이는 경석장에는 서둘러 집으로 귀가하라는 요란스러운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광업소를 운영하기 위해 폐석(廢石)들을 쌓아놓는 산 형태의 돌무덤을 잠시 쳐다본 강식은 혀를 끌끌 차며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강식이 고개를 돌려 바라 본 탄광은 철창으로 막혀있는 동굴에 불과했지만, 강식의 눈에는 그저 거대한 괴물의 아가리 같아보였다.


- 계순이 녀석이 또 밥을 해 놓았으려나. 어머님이나 잘 챙길 것이지...


나날이 여인다워지고, 일찍이 철이 들어 똑 부러진 자신의 하나 뿐인 딸 계순을 보기 위해 강식은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강식은 이집 저집 멀리서부터 고샅에서 느껴지는 연탄 냄새에 취할 지경이었다.


이 지겹디 지겨운 연탄 냄새. 살면서 잠을 자다 변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연탄을 꺼뜨려 추위에 벌벌 떨며 밤을 지새우기도 했으며, 연탄의 화력이 강하지 않은 날 아침엔 일본 놈들이 가진 석유곤로가 어찌도 그리 부러웠던가.


하지만 강식은 절망하지 않았다.


강식은 겨울이 오면 조금이라도 잘 마른 연탄을 창고 가득 잴 때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만석꾼 같은 마음을 갖고 살았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광산 마을에서 연탄은 분에 넘치게 흔하고 풍족했다.


일본에서 요구하는 모양과 규격을 맞추지 못한 폐품들은 조선인들이 암묵적으로 몰래 집으로 가져다가 사용했기에 연탄이란 것이 다른 지역에서는 귀중한 물건이었지만 강식의 마을에서는 발에 채일만큼 흔한 돌덩어리 같았다.


시대는 급변하고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가 안중근(安重根)에게 암살당하자 소네 아라스케(曾荒助)가 2대 통감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그는 병약하여 1910년 5월 30일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제 3대 통감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데라우치는 조선인의 배일사상을 진압하기 위해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했다. 그들이 헌병경찰을 설립하여 경찰국가를 만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무장해제 당한 조선군과 한심한 정국에 울분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합세하여 의병대를 조직, 방방곡곡에서 들고 일어나는 상황을 진압하기 위해서 였다.


데라우치 통감은 1910년 7월에 한일병합처리안(韓日倂合處理案)을 만들어 본국에 보냈다. 합병이 발표되자 덕수궁 궐문 앞에 수만 명의 일파가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엎드려 땅을 치며 통곡했고, 자결하는 순국인사들도 속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독립을 원했지만 강식은 지금 독립에 대한 염원보다는 당장 가족들을 먹여 살릴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바쁜 자신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독립운동은 요원(遙遠)한 꿈에 불과했다.


“아부지, 오셨어요! 오늘도 힘드셨죠?”


곱게 자란 긴 머리카락을 땋아 내려뜨린 자신의 딸 계순이 강식이 건네는 옷가지와 작업모를 받아들며 환하게 웃었다.


강식이 쳐다본 계순의 얼굴은 하얗고, 동그랬다.


- 어느새 처녀가 다 되었구만! 저걸 얼른 원돈이에게 시집 보내야하는데...


강식은 물끄러미 자신의 딸 계순을 쳐다보며 원돈이와의 혼사(婚事)를 속으로 생각했다.


“할머니 식사는 하셨고? 경호는 자냐?”


강식의 목소리는 무뚝뚝하고 투박하며 거칠었지만 가족의 안위를 묻는 그의 눈빛은 따스했다.


계순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오늘 산신제 있어서 가서 일 좀 거들고 얻어온 음식들 차려드렸어요. 아부지도 시장 하실텐데 한술 뜨셔요!”


계순의 말대로 초라한 점심 도시락 하나만 먹고 늦음 밤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그였기에 당장이라도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을 정도로 허기가 졌다.


하지만 강식은 이내 집 안 울타리 근처에 자리 잡은 작은 우물가로 뚜벅뚜벅 걸어가서 거칠게 바가지에 물을 떠 마시며 계순을 향해 말했다.


“됐다! 아까 일하면서 작업간식으로 나온 거 먹었더니 별 생각이 없구나! 뒀다가 내일 식구들이랑 먹어!”


그의 말에 계순은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털래털래 주방으로 걸어 들어가 말없이 작은 밥상을 대청마루에 올려놓고 쪼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식의 눈에는 작은 알감자 세 알과 쑥버무래기가 올려져 있었다.




작가의말

이 작품에서 언급되거나 묘사된 인물, 지명, 상호, 단체명 그 밖에 일체의 명칭이나 사건 혹은 에피소드, 그리고 대사들은 모두 창작된 것이며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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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챕터8-133. 전생- 전생의 기억 (2) 23.12.18 20 1 11쪽
» 챕터8-132. 전생- 전생의 기억 (1) 23.12.18 25 1 11쪽
131 챕터7-131(완). 무명도사- 청출어람(靑出於藍) (4) 23.12.17 22 1 11쪽
130 챕터7-130. 무명도사- 청출어람(靑出於藍) (3) 23.12.17 20 1 11쪽
129 챕터7-129. 무명도사- 청출어람(靑出於藍) (2) 23.12.16 20 1 11쪽
128 챕터7-128. 무명도사- 청출어람(靑出於藍) (1) 23.12.16 20 1 12쪽
127 챕터7-127. 무명도사- 군다리명왕(軍茶利明王) (3) 23.12.15 20 1 11쪽
126 챕터7-126. 무명도사- 군다리명왕(軍茶利明王) (2) 23.12.15 21 1 11쪽
125 챕터7-125. 무명도사- 군다리명왕(軍茶利明王) (1) 23.12.14 23 1 11쪽
124 챕터7-124. 무명도사- 밀교(密敎)의 비전 결계 (3) 23.12.14 25 1 11쪽
123 챕터7-123. 무명도사- 밀교(密敎)의 비전 결계 (2) 23.12.13 24 1 11쪽
122 챕터7-122. 무명도사- 밀교(密敎)의 비전 결계 (1) 23.12.13 27 1 11쪽
121 챕터7-121. 무명도사- 구미 국가산업단지 (3) 23.12.12 30 1 11쪽
120 챕터7-120. 무명도사- 구미 국가산업단지 (2) 23.12.12 27 1 11쪽
119 챕터7-119. 무명도사- 구미 국가산업단지 (1) 23.12.11 23 1 11쪽
118 챕터7-118. 무명도사- 폭풍전야 (3) 23.12.11 24 1 11쪽
117 챕터7-117. 무명도사- 폭풍전야 (2) 23.12.10 24 1 11쪽
116 챕터7-116. 무명도사- 폭풍전야 (1) 23.12.10 27 1 11쪽
115 챕터7-115.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9) 23.12.09 27 1 13쪽
114 챕터7-114.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8) 23.12.09 28 1 11쪽
113 챕터7-113.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7) 23.12.08 24 1 11쪽
112 챕터7-112.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6) 23.12.08 26 1 11쪽
111 챕터7-111.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5) 23.12.07 31 1 11쪽
110 챕터7-110.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4) 23.12.07 29 1 11쪽
109 챕터7-109.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3) 23.12.07 29 1 11쪽
108 챕터7-108.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2) 23.12.06 26 1 11쪽
107 챕터7-107. 무명도사- 엘림 복지원 (1) 23.12.06 29 1 11쪽
106 챕터7-106. 무명도사- 만월과 수연 (2) 23.12.06 26 1 11쪽
105 챕터7-105. 무명도사- 만월과 수연 (1) 23.12.06 26 1 11쪽
104 챕터6-104(완). 사이비(似而非)- 폐아파트 (9) 23.12.06 28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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